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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의 기적(왕하5:3-14) 2016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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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6-08-07 08:44 조회 19,312 댓글 0
 
 순종의 기적(왕하5:3-14)            2016. 8. 7



나병에 걸린 아람 나라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왕 산헤립이 제공한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의 선물을 수레에 싣고 이스라엘로 향하였다. 사로 잡혀 간채로 나아만 장군의 집에서 지내던 이스라엘 어린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나병에 걸린 주인이 엘리사 선지자를 통해 고침 받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말하였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런 사실을 전해들은 아람의 왕은 친서와 선물을 들려 보내며 나아만 장군으로 하여금 엘리사가 아닌 이스라엘의 왕을 만나게 하였다. 나아만 장군의 방문을 받은 이스라엘 왕은 당황해 하며 왕의 의복을 찢으며 말했다.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 그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로 보내어 그의 나병을 고치라 하느냐” 그렇다. 사람이 죽고 사는 일은 하나님의 손 안에 달린 문제이다. 뿐만 아니라 나병을 비롯해서 인간이 질병에서 건짐 받고 고침 받는 것도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물론 요즘처럼 의학이 발전한 시대에 살아가는 것은 큰 축복이다. 그러나 의학과 의술의 혜택으로 만도 다 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 인간이 병을 이기고 고침 받는 일과 살고 죽는 일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손 안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왕은 신하들에게 전달하였다. “너희는 깊이 생각하여 보라 저 왕이 틈을 타서 나와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줄 알라.”(왕하5:7) 이스라엘의 왕은 아람 왕의 친서와 군대 장관 나아만의 방문을 전쟁을 다시 일으키려는 징후로 착각하였다. 

그 때에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이스라엘 왕의 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엘리사는 이스라엘 왕이 나아만 장군의 방문을 받고 당황하여 왕복을 찢기까지 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엘리사는 사환을 왕에게 보내어 여쭈었다.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나아만 장군은 안내를 받고 왕궁에서 물러나서 말과 병거를 거느리고 선지자 엘리사의 집을 찾아 나섰다. 그런데 막상 엘리사 선지자의 집에 도착해 보니 엘리사 선지자는 문 밖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단지 사환을 보내서 이렇게 전달하였다.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왕하5:10) 상황이 이쯤 되자 나아만 장군은 화를 내었다. “이렇게 먼 나라에서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 왔으면 내다보기라도 할 것이지. 환부에 손을 얹고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안수기도를 해 줄 것이지. 이렇게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며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었다. 나아만 장군은 요단강에 몸을 담그느니 차라리 자기 나라 아람에 있는 아바나 강이나 바르발 강물에 몸을 담그는 편이 더 났겠다고 말하며 화를 내었다. 결국 나아만 장군은 화가 잔뜩 난 상태에서 엘리사의 집을 떠나 자기 나라로 되돌아가려 하였다. 그 때 나아만 장군을 수행했던 종들이 나서서 나아만 장군을 말렸다.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라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종들의 말을 들은 나아만 장군은 생각을 바꾸었다. 그리고 요단강을 찾아 가서 하나님의 사람 선지자 엘리사의 말대로 순종하였다.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담갔을 때에 기적이 일어났다.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다.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곧 순종하는 생활을 의미한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의 타락은 곧 불순종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여 보라.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날마다 순간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았다면 그 아름답고 완전한 창조의 동산에서 내어 쫓길 이유가 있었겠는가.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신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다는 말이다. 이는 노아도 마찬가지이고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이다.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노아시대의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였다. 하나님의 홍수 심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노아 시대 인간들의 타락상은 심각하였다.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였다. 마음으로 생각하고 계획하는 모든 일들이 항상 악했다. 하나님은 그 당시에 인간을 이 세상에 지으신 것을 한탄하시고 근심하실 정도였다. 그런 타락한 세상 중에서도 노아는 달랐다. “노아는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준행(遵行)하였다.”(창6:22, 7:5) 준행했다는 말이 무엇인가. 노아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다 순종하며 살았다.

아브라함도 그런 면에서는 마찬가지이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順從)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11:8)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기 시작한 것은 ‘순종하는 믿음’의 표상이 되었다. ‘순종’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묵상하자. 


순종하지 않는 죄.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가 무엇인가. 아담에게 숨겨 놓은 다른 여자가 있었는가. 아니면 하와가 아담이 아닌 그 어느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았는가. 아니면 아담이 마약을 했는가. 알코올 중독에 빠졌는가. 도박에 빠져 재산을 탕진했는가. 남의 물건을 도둑질 한 적이 있는가. 

여호수아 시대의 아간은 가나안 점령 시에 여리고 성의 금과 은과 시날 산 외투를 훔쳐서 자기 집에 감추듯이 도둑질을 했다. 전쟁 명령에 불순종한 것이다. 사도행전 5장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성령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였다. 베드로는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고 아나니야를 책망하였다. 베드로 사도는 아나니아가 성령을 속이며 거짓말하는 그 심령 가운데 사탄이 가득하다고 지적하였다. 우리는 죄란 이런 것으로 여긴다. 

아람 나라의 군대 장관 나아만의 병은 나병(癩病)이다. 그는 병을 고쳐 보겠다고 이웃 나라 이스라엘에까지 찾아 갔다. 왕을 만났고 왕에게 보낸 엘리사의 종을 통하여 엘리사의 집 앞에 까지 갔다. 나아만 장군에게 전달된 처방은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담그라는 것이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엘리사 선지자는 집 앞에 까지 도착해 있던 나아만 장군을 직접 만나 주지 않았다. 나아만 장군은 단단히 화가 났다. 몹시 화를 내면서 분노가 가득한 모습으로 엘리사의 집을 떠나려 했다. 사람이 죽을 지도 모르는 나병에 걸려 있어도 자기 분노의 감정은 언제든지 갖고 있다. 화 날 때에 화를 벌컥 내는 그런 모습은 쉽게 다스려지지 않는다. 나아만 장군은 노하여 엘리사 선지자의 집 앞에서 돌아가며 말했다. 

“내 생각에는....” (왕하5:11)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며 살아가지 못하는 인간의 불순종의 모습이 이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통하여 나아만 장군이 나병에서 고침 받을 수 있는 처방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아만 장군의 반응은 달랐다. 엘리사 선지자의 처방을 듣고 반응하는 나아만 장군의 말을 보라.  “내 생각에는.....”

내 생각에는 엘리사 선지자가 집 밖에 나와서 나를 영접하였어야 옳다.
내 생각에는 내가 이래 보여도 아람 나라의 군대 장관인데 엘리사 선지자가 나를 이렇게 함부로 대할 수 있단 말인가. 
내 생각에는 그가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손을 내 환부 위에서 흔들어 가면서 고쳐 주었어야 옳다. 여기서 환부 위에 손을 흔드는 치료 행위는 고대 근동 지방에서 치료 행위를 하는 주술사들이 손을 흔들어가며 요란한 행동을 보이며 환자를 대하던 그런 장면을 상상하며 한 말일 수 있다. 

내 생각에는 아람 나라의 아바나 강이나 바르발 강물이 요단강이나 이스라엘의 그 모든 강물보다는 차라리 훨씬 더 깨끗할 것 같다. 아람 나라의 강물 중에서 특히 아바나 강은 대단히 맑고 깨끗할 뿐만 아니라 물의 온도가 낮아서 매우 찬 물이 흐른다. 그래서 로마인들에게는 ‘황금의 강’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비해 요단강은 깊고 서서히 흐를 뿐만 아니라 진흙 색을 띠는 혼탁한 강이다. 그런 면에서 나아만 장군이 한 말에는 일리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나아만의 생각과 다르셨다.

엘리사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처방을 들은 나아만 장군의 반응은 의외였다. 요단 강물이 아닌 그 어떤 다른 강물이라도 찾아 가야 맞다. 일곱 번이 아닌 일흔 번이라고 몸을 담가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나아만 장군을 치료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라면 순종했어야 옳다. 그런데 나아만 장군은 “내 생각에는...”이라고 화를 벌컥 내면서 제 나라로 돌아가 버리려고 하였다. 

사탄은 각 사람의 생각에 불순종의 죄의 씨를 뿌려 놓으려고 한다. 창세기 3장에 보면 뱀이 등장하다. 그 뱀은 그냥 뱀이 아니라 사탄을 상징하는 것이다. 어느 날 뱀이 하와에게 말을 걸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3:1) 뱀의 질문 앞에 대답하는 하와의 대답을 주목해 보라.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창3:2-3)고 대답하였다. 이 대답 중에 무엇이 문제인가. 창세기 2장 16절과 17절과 비교해 보라.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셨다. 그런데 하와는 뱀에게 무어라고 말했나.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고 화와가 자기의 개인적인 생각을 넣어서 잘 못 말했다.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지 만지지도 말라고 하신 적은 없으셨다. 그런데 하와가 남편 아담에게서 전해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 생각을 넣어서 잘못 전한 것이다. 불순종이 무엇인가. 순종하지 않는 죄가 무엇인가. 창세기를 꼼꼼하게 읽어 보면 알 수 있다. 하와에게서도 발견되고, 아담에게서도 발견된다. 이 불순종의 죄는 심각한 죄이다. 반복하지만 아담이나 하와가 살인, 간음, 도둑질, 탐심과 같은 계명을 지키지 못하여 범죄한 것이 아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저들 부부에게 말씀하신 말씀에 불순종하였다. 순종하지 않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나 숨길 수 없는 죄이다.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태어난 가인과 아벨은 어떤가. 저들 형제가 나란히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다.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고 아벨은 양을 치는 자였다. 세월이 지난 후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드렸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하나님께 드렸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받으셨다. 그러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셨다. 그 때에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 하나님이 그런 상황을 모르실 리가 없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물으셨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창4:6)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은 ‘선과 죄’에 관한 말씀을 심각하게 해 주셨다. 여기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죄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죄라는 단어인 ‘하타트’는 화살이 과녁에서 빗나가듯이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서 벗어나 곁길로 빗나가는 것을 말한다. 

양을 드렸느냐 곡물을 드렸느냐고 하는 제물의 내용이 문제가 된 것이 아니다. 제사 드리는 그 사람의 마음가짐이 문제인 것이다. 여기서 가인의 불행의 원인은 무엇인가. 가인은 자신의 제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면 다음 제사를 정성스럽게 준비했어야 옳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동생 아벨을 향하여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 결국 가인은 동생 아벨을 쳐 죽였다. 제사란 오늘 날로 하면 예배이다. 그런데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린 후에 형제의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냥 옛날이야기로 대하고 말면 안 된다. 오늘 날 우리는 어떤가. 매 주일 마다 이렇게 예배를 잘 드리고 나서 가정이나 직장이나 세상이나 교회 생활 중에서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 가인과 같은 죄를 범하고 있지는 않는가. 

히브리서 11장은 가인과 아벨의 제사 사건을 이렇게 다룬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히11:4) 그렇다. 믿음의 문제이다. 곧 신앙은 믿음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순종의 문제이다. 

히브리서 11장 6절은 이렇게 교훈한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여기에 믿음이란 단어 대신에 순종이란 단어를 넣어 다시 읽어 보자. “순종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고 순종해야 할지니라.” 그렇다. 믿음이란 순종하는 신앙생활의 한 표현이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 앞에 순종하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자기 입증이다. 

하나님은 천천의 양을 잡고 만만의 송아지를 잡아 제사할 지라도 제사 드리는 그 사람의 마음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면 그 제사를 받지 않으신다. 다시 생각해 보자. 사도행전 5장의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소유를 팔아서 절반을 베드로의 발 앞에 가지고 나갔다. 문제 될 것이 없어 보지 않나. 돈 몇 푼 드린 것이 아니지 않나. 자기의 소유 즉 부동산을 팔아서 얼마를 감추고 얼마를 갖다가 바쳤다. 문제가 무엇인가. 그 바로 앞에 사도행전 4장에 바나바가 밭을 팔아 바친 내용이 나온다. 초대 교회에 흔하게 있던 헌신의 장면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누가 강요한 적도 없다. 저들 부부가 자원하여 소유를 팔아 다가 그 값을 바친 것이다. 문제는 속였다는 점이다. 전부가 아닌데 전부인양 속이고 얼마를 감추고 얼마를 드리며 다 드린 것처럼 속인 것이 문제가 되었다. 우리는 성경을 제대로 관찰 하지 않으면 절반을 감추고 절반을 갖다 바치려 한 것으로 오해한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그렇지 않다. 몇 대 몇이란 설명은 없다. 단지 정직하지 못했을 뿐이다. 하나님을 속이고 성령을 속인 것이 죄의 시작이었다.  아나니야와 그의 부인 삽비라는 세 시간 간격으로 베드로 사도 앞에서 시체가 되어 실려 나갔다. 사도행전 5장 11절에는 그 사건으로 인한 파장을 기록해 놓고 있다.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불순종은 죄다. 순종하지 않는 것은 죄다. 


순종하는 믿음.
그렇게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분노하며 제 나라로 돌아가겠다고 화를 내던 나아만 장군이 생각을 바꾸었다. 그를 수행하던 종들이 나아만 장군을 설득하려고 하였다. 이보다 더 큰 일을 행하라고 말하였다면 하지 않았겠느냐고 설득했다. 선지자 엘리사의 말씀대로 순종하고 요단 강물에 몸을 일곱 번 담그면 낳는다면 못 할 것이 무엇인가 하고 설득하였고 나아만 장군은 생각을 바꾸고 순종하였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내가 알아서 하지 너희들이 뭔데 수행하는 주제에 나더러 이러라 저러라 하느냐고 씩씩거리며 제 나라도 되 돌아 가 버렸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순종은 생각을 바꾸는 순간을 거쳐야 한다. 예수님의 비유에도 있지 않나. 포도 수확기에 아버지가 두 아들들에게도 함께 가서 일하기를 원했다. 큰 아들은 하겠다고 대답만 하고 포도원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런데 작은 아들은 싫다고 말하고는 생각을 바꾸어서 포도원에 가서 일했다. 누가 순종한 아들인가. 순종은 입의 말의 차원이 아니다.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 행동하는 믿음이어야 진정한 순종이다. 예수님은 (마7:21)고 교훈해 주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여기서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란 순종하는 믿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되어서는 안 된단 말씀이다. 

사울 왕은 아말렉과의 전쟁 때에 사무엘 선지자를 속이고 하나님을 속였다. 하나님의 전쟁 명령대로 순종하지 못했다. 부분적으로 순종하고 더러는 자기 생각대로 했다. 하나님은 그걸 문제 삼으셨다. 하나님은 사울 왕을 왕 세우신 것을 후회하셨다. 결국 사울 왕은 불행하게 생을 마치고 말았다. 순종하는 믿음은 귀한 믿음이며 영원히 자자 손손 빛나는 믿음이다. 
누가 복음 17장에 보면 사도들이 예수님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하고 요청하는 장면이 있다. 그 앞부분에 보면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눅17:1-4) 이런 교훈의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는 반응을 보인 것이다. 그 때 예수님은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이렇게 교훈해 주셨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여기 보면 믿음과 순종을 연결하여 설명해 주셨다. 마가복음 11장에서는 믿고 구하면 산을 바다에 던져지게 한다고 말씀하셨고 누가복음 17장에서는 뽕나무의 뿌리가 뽑혀서 바다에 심겨 진다고 하셨다. 그 모든 것의 시작은 순종하는 믿음인 것을 강조하셨다. “믿고 순종하라.” (Trust and obey/ believe and obey)이것은 예수님께서 그를 믿는 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영원한 신앙 공식이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날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만나셨다. 제자들이 물었다. “이 사람이 맹인 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자기 죄입니까 부모 죄입니까” 예수님이 대답하셨다. “그 사람의 죄도 아니고 부모의 죄도 아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다.” 그리고 땅에 침을 뱉으셔서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발라 주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요9:7) 그 맹인은 순종하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었고 밝은 눈으로 예수님께 돌아 왔다.  그의 주변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물어 보았다. 그는 늘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걸인 행세를 하던 이였다. 누가 고쳐 주었느냐고 물었다. 그는 대답하기를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기에 순종하였더니 보게 되었다.”고 간증하였다. 주님은 오늘 날도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을 찾으신다. 

순종하는 자의 축복.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 선지자의 말에 순종하지 않고 화를 내며 제 나라로 그냥 돌아가 버렸다면 그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겠는가. 예수님은 자기 부하를 고쳐 달라고 예수님께 찾아 왔던 백부장의 믿음을 크게 칭찬해 주셨다.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나 자신을 낳아 키워 주신 어머니 마리아나 마리아와 예수님이 잉태 기간과 애굽 피난과 나사렛 성장기에 수고와 애를 많이 쓴 육신의 아버지 요셉의 믿음을 크게 언급한 적이 없으셨다. 그에게 찾아 와서 병든 하인의 병을 고쳐 달라고 간청했던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해 주셨다. 예수님의 마음에 감동을 준 백부장의 말이 무엇인가.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라는 고백이다. “예수님 우리 집에 까지 가실 필요 없으십니다. 그냥 말씀만 해 주시면 내 하인이 나을 것입니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입니다. 내 부하들도 가라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옵니다. 내 종들도 내가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말을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그 곁에 따르는 자들에게 말씀하셨다. “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8:10) 백부장의 믿음, 순종하는 믿음은 권위에 복종하는 믿음이다. 자신에게도 상관이 있듯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앞에 복종하고 순종하는 믿음을 보인 것이다. 

아브라함의 순종하는 믿음의 기적을 보라. 
어느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 번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하셨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순종하였다. 삼일 길을 가면서 자신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지켰다. 아들 이삭이 곁에서 “왜 제물이 없느냐”고 물을 때에도 묵묵히 삼일 길을 갔다. 아브라함은 순종하는 믿음으로 나이 백세에 아들 이삭을 낳았다. 아브라함은 순종하는 믿음으로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려 했다. 순종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감동하신 하나님은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에게 천사를 보내서 축복하셨다.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遵行)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창22:16-18) 여기 보면 준행하였다는 말씀이 나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믿음 곧 준행하는 믿음의 합격자였다.

믿고 순종하면 기적이 일어난다. 믿고 순종하면 축복이 넘쳐 나게 된다. 아브라함은 순종하는 믿음의 조상이요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끝 없는 고난 가운데서도 엄청난 축복의 간증자들로 살아가고 있다.

순종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자.
예수님은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만복을 이 땅에 선물해 주신 구세주이시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17:4-5) 그렇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라고 맡기신 사명을 십자가를 지기까지 순종함으로 다 이루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신 구세주이시다. 예수님 안에 있는 영화는 창세 전에 아버지 안에 있던 영화이며 그 영화는 칼과 창으로 이길 수 없는 영원한 영화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영화이다. 주를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그런 영화가 죄 사함과 영생과 함께 영원히 상급으로 주어질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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