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요일1:1-10) 2024. 4. 14
요한 일이삼서는 요한 사도가 인생 말년에 에베소교회에서 목회하면서 쓴 편지들이다.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을 쓴 그 중간의 때에 기록된 편지들이다. 주후 85-90년경일 것이다. 오늘 요한일서 1장 전체를 읽었다. 그 내용이 무엇인가. 왜 요한 사도는 요한 복음을 기록한 이후에 이와 같은 편지들을 세 차례나 더 쓰게 된 동기가 무엇일까.
사도 요한은 열두 제자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젊었던 제자였다. 다른 제자들은 모두 순교한 반면에 그만 이 땅에서 오래도록 살면서 복음을 전했다. 주후 100년경에 94세를 일기로 주님 품에 안겼을 것이라고 전해진다.
요한 사도의 세 편지들 중의 첫 편지인 요한일서 1장 1절에 보면 그는 인사말조차 없이 편지의 본론을 시작하고 있다. “태초로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쓴다고 했다. 요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면서 예수 혹은 그리스도라고 하지 않고 “태초로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라고 하였다. 요한 사도의 표현 그대로를 오늘 설교 제목으로 정하였다.
요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을 만진바라”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 그 당시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하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곳 저곳에서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에 대하여 거짓말을 퍼뜨렸다. 예수의 탄생과 생애와 고난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로 믿으려 하지 않고 영으로서의 예수로 전하고 주장하려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영지주의(靈智主義, gnosticism)라고 말하는 이단이다. 답답하고 속상한 마음을 가진 요한 사도가 이런 말로 편지를 쓰게 된것이다. 예수가 누구신지 체험적으로 변증하기 위해서 쓴 편지이다.
여러분은 어떤가. 여러분에게 있어서 예수는 어떤 분인가. 예수의 죽음, 부활, 승천, 성령의 강림, 죄 사함, 구원, 하나님의 자녀됨, 영생, 천국,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어디까지 아는가. 어디까지 믿는가. 어느 것은 믿어지고 어느 것은 믿어지지 않는가. 예수의 제자요 예수의 이종사촌으로서 예수를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던 사도 요한의 증언은 무엇인가. 요한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2절에서 표현하는 “영원한 생명”이란 곧 예수를 표현하는 말이다.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요한 사도는 예수를 예수라고 말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맞다. 예수는 영원한 생명이시다. 예수는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이시다.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본체이시다.
우주 삼라만상은 창조된 것이다. 지구상의 모든 것도 창조된 것이다. 하늘의 새, 땅 위를 뛰고 달리는 동물과 짐승 그리고 땅에 기어 다는 것들과 아주 작은 곤충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체는 창조된 것이다. 물 속의 그 다양한 어종의 물고기들도 창조된 것이다. 이 땅 위의 그 많은 종류의 나무와 풀과 꽃들도 모두 각기 창조된 것이다.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도 창조된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우주 삼라만상이 창조되기 이전에 하나님 안에 계시던 영원한 생명이시다. 원어의 표현은 “그 생명 그 영원한 것”이라고 썼다. 관사가 두 번 반복되었다. 예수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란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두 번 반복하는 어법을 사용하였다. 맞다. 예수의 생명은 어둠이나 죽음으로 이길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이다. 세상의 어두운 세력들은 예수의 영원한 생명을 십자가 처형으로 죽이려고 하였다. 예수의 시신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새 무덤에 장사지내게 되었다. 무덤의 입구를 장정 10명 이상의 힘을 모아야 여닫을 수 있는 돌문으로 막았다. 무장한 로마의 장정들로 하여금 지키게 했다. 그런데 예수께서 부활하셨다.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께서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것이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 있나. 없다. 이 세상의 그 모든 것들은 유한하다. 영원하지 않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하다. 예수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부여받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하는 자들이다. 여기에 복음의 신비가 있다.
우리 가운데 나타나신 예수.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심으로 사람들은 우리 가운데 나타나신 예수를 만나보게 되었다. 2절에서 이것을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다.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신 것이다. 예수는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서 잉태되고 탄생되었다. 탄생하신 아기 예수는 베들레헴 말구유에 누이셨다.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나타나신 예수를 마리아가 보았고 마리아의 남편 될 요셉이 보았다. 크고 이상한 별의 이동을 보고 그 별을 따라 예수의 탄생 현장을 목격한 동방 박사들이 인간으로 태어나신 예수를 보았다.
예수는 이 땅에 33년 동안 계셨다. 예수의 고향 마을인 나사렛 마을 사람들은 예수를 30년 동안 지켜 보았다. 안식일마다 나세렛 마을의 회당에서 함께 하나님께 예배하였다. 요단 강에서 세례 요한을 만나서 그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세례 요한도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나타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보았다.
예수께서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나타나신 것은 그를 주로 믿고 따르는 자들과 함께 사귀고 삶을 누리기 위해서였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귐’이란 표현이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사용되었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라고 하였다. 진정한 사귐의 결과는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라는 사도 요한이 누리는 기쁨이 곧 나의 기쁨이 되는 삶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어야 한다.
요즘 젊은 세대가 사용하는 말 중에 “썸 탄다”라는 말이 있다. 무슨 뜻인지는 대강 알긴 하지만 정작 그런 표현을 사용해 본 적이 없어서 관련 자료를 찾아 보았다. <트렌드지식사전>이란 인터넷 지식 사전에 찾아 보니까,
“썸 탄다는 말은 서로 호감은 갖고 있지만 정식으로 교제를 하고 있지는 않은 남녀 간의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영어 Something에서 파생된 말로, 서로 좋아하고, 자주 연락하고, 데이트는 하지만 사귀지는 않는 애매모호한 관계를 지칭하는 말이다. 일종의‘간 보기'라 할 수 있겠다. 관심 가는 이성과 진전이 있을 때‘썸을 타다'라는 표현으로 사용하며, 사귈 것 같은 남성과 여성은 '썸남', '썸녀'라고 부른다. 사회심리학자들은“‘썸타기'에는 젊은 세대의 자기방어 심리가 깔려 있다”라고 해석한다. "정식교제를 미루고‘썸'을 즐기는 데는 사랑을 하고 싶지만 이별이나 상처로 피해 보지 않으려는 자기방어 심리가 자리 잡고 있다”라고 했다. "불확실한 연애에 대한 두려움을‘연애가 깨졌다'라는 말을 듣기보다는 얕은 단계인‘썸타다 엎어졌다' 라는 정도의 가벼운 표현으로 해소하려 한다”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젊은 세대의 썸타기 열풍의 배후에는 취업을 위해 스펙을 쌓느라 연애도 마음 놓고 하지 못하는 신세가 된 슬픈 청춘의 현실이 자리 잡고 있다”라는 해석도 있다. "썸을 탄다는 것은 이성의 상대방을 시간과 돈을 들여 만날 만한 가치가 있는지 탐색하는 연애의 전초전이다”라고도 설명하였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예수와 사귐을 갖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리는 삶을 살아가려면 언제까지 예수에 대하여 썸타는 단계에 머물러만 있어서는 절대 안될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예수 안에서 살아가면 예수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은 예수와 일정한 거리두기를 하며 썸타는 식의 어정쩡한 관계 속에 살아서는 안된단 말이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우리 가운데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와 진실하게 사귀고 진리이신 주 안에서 범사를 누리는 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교훈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 여러분은 어떤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혹시 서먹한 관계는 아닌가. 어색한 관계는 아닌가. 자주 만나면 불편하고 가까이에서 대하면 더욱 곤란한 관계는 아닌가.
예수 그리스도와 사귀며 삶을 누린다는 것은 빛이신 하나님 안에서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말한다. 5절을 보라.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라고 하였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예수와 사귐이 있다”라고 말한다면 어둠에 행하면 안 된다. 어둠에 행하면서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 그것은 진리이신 하나님 안에서 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빛이신 하나님 안에 계신다. 그와 같이 성도인 우리도 빛 가운데서 행하며 살아간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친밀한 사귐의 관계가 지속되어야만 한다.
6-7절을 <현대인의 성경>으로 읽으면 이렇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한다고 하면서 죄를 짓는 어두운 생활을 그대로 한다면 우리는 진리대로 살지 않는 거짓말장이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빛 가운데 계시는 것과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서 살면 우리는 서로 교제하게 되며 그분의 아들인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합니다.”(현대인의 성경, 요한일서1:6-7)
그렇다.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라면 죄를 짓는 어두운 생활을 계속할 수는 없는 법이다.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며 살아간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빛이시다. 그러므로 성도는 어둠의 일을 벗어 버려야 한다. 빛의 자녀의 일을 행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고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사귀는 것이다. 이는 성도 간에도 마찬가지이다. 성도와 성도 간에 어두운 관계가 벗겨지고 빛의 자녀의 관계를 지속해야 한다. 그래야 빛이신 하나님의 아들딸의 관계 속에서 사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과의 교제이며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이며 성도간의 교제인 것이다. 성도는 서로 간에 상대방을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존귀한 이웃으로 대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내가 주님과 사귀고 주님과 교제한다고 말은 하면서 그렇지 못한 엉터리 생활을 한다면 주님도 나에 대하여 실망하시고 내 주변의 성도들도 점점 나에게서 멀어지고 말것이다. 교제와 사귐이 건강하고 건전하게 지속되려면 언제 어디서나 항상 빛되신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주님과 더불어 사귐이 있는 범사로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어둠이 무지와 죄악과 불신앙과 거짓”이라면 “빛은 진리요 순결이요 성결이요 진실이요 정의”인 것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4)라고 권면하였다.
우리가 요즘처럼 계절이 바뀌면 겨울옷을 벗고 봄옷을 갈아 입는다. 이처럼 성도는 어둠 속에 살 때의 죄악의 옷을 벗어 버리고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업어야만 한다.
교도소에 가보면 수형자들이 입는 옷이 있다. 가슴에 수형자 번호를 크게 붙인다. 저들이 수형 생활을 마치고 세상에 나오면 더 이상 수형자의 옷을 입지 않는다. 수형자가 세상에 나오기 위해서는 수형자의 옷을 벗을 날만 채우지 말고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이 되어서 세상에 나와야 한다. 그래야 새 사람답게 살 수 있다.
이것을 요한 사도는 6절에서 “진리”를 행하느냐 그렇지 못하냐의 상태로 구분하였다. 진리를 행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지는 것이다.
몇 달 전에 교회 관련 무슨 업무를 직접 보아야 할 일이 있어서 구청에 간적이 있다. 관련 서류를 준비하는데 대면으로 하지 않고 현관에 이는 기계에서 출력하게 하였다. 앞에 서 너명이 서 있었다. 내 바로 앞의 젊은 부부는 갓 결혼하고 결혼 신고를 하려고 온 부부였다. 그런데 내 앞에서 무슨 서류를 떼기 위해 준비하면서 티격태격하는 대화의 내용이 바로 뒤에 줄을 선 내게 다 들렸다.
맞다. 부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티격태격이 있다. 20-30년 다른 환경에서 성장한 남녀가 결혼하면 다른 것이 어찌 한두 가지이겠는가. 그러다 보니 의견이 다르고 관점이 다르고 판단이 다르고 입장이 다르고 보는 눈이 다를 수 밖에 없다. 결혼신고를 하는 일 하나도 순조롭지 않은 대화를 가까이에서 지켜 보았다.
우리가 성도로 살아가는 것은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사귀며 살고 교제하며 살고 삶을 더불어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하기 위해서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거리두기를 하면 안 된다. 24시간 365일 낮이든 밤이든 언제 어디서나 예수와 붙어살아야 한다. 예수와 붙어 지내야 한다. 그래야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사귀는 것이고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따금씩 만나고 어쩌다 가까이에서 만나면 서먹하고 어색하고 겸연쩍다면 진리이신 예수와 더불어 삶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자주 안 만날수록 더욱 편하다면 문제는 심각한 것이다.
당신은 어떤가. 요즘 예수 그리스도와 사귀고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며 살아가는 것이 맞는가. 그렇다면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까이에서 대하는 일이 어색하면 안된다. 지극히 자연스러워야 한다. 참으로 좋고 참으로 행복하고 참으로 만족하고 참으로 기뻐야 한다. 물론 살아가다 보면 인생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있다. 슬픔도 있고 충격적인 사건도 있고 사고도 있고 질병도 있고 실패도 있고 상처도 있고 아픔도 있고 낙담할 때도 없지 않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은 내 삶의 모든 것을 주님 안에서 주님과 더불어 대화하고 의논하며 살고 주님 안에서 매사를 대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사귀는 것이고 그것이 누리는 것이다. 주님과 사귀는 것은 어둠에서 떠나서 빛이신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것이다. 빛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귀며 교제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의 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예수.
예수 그리스도와 허심탄회하게 사귀며 교제하려면 나의 죄를 자백해야만 한다. 우리 각 사람은 나의 모든 죄를 자백하면 주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셔서 우리 각 사람의 죄를 사해 주신다.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다.
예수와 사귀며 살면서도 “나는 죄가 없다, 나는 죄인이 아니다.”라고 고집한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스스로의 죄를 속인다면 진리가 내 안에 없는 증거이다. 진리가 내 안에 들어오면 우리는 내 속에 있는 죄를 토설해야 마땅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서1:9)
우리가 성찬식 시간에 이 말씀을 자주 듣는다. 왜인가. 이 말씀이 소중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죄를 용서 받는 길을 자백하는 것이다. ‘자백’(自白)이란 ‘호몰로게오’(ὁμολογεω )라는 단어는“계속하여 사실 그대로를 말한다”는 뜻이다. 주님은 자신의 죄를 없다고 속이거나 거짓말 하지 않고 자백하면 그 어떤 죄, 그 누구의 죄라도 용서하신다. 깨끗하게 하신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이것이 구원의 길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첩경이다.
이제 138장 찬송가를 부르자. <햇빛을 받는 사람들>이란 찬송가이다. 이런 찬송가를 감격 가운데 부를 수 있는 성도라면 참으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나의 죄를 사하시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귀고 더불어 교제하며 더불어 날마다의 매 순간을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증거가 될 것이다. 주님이 보시기에 기쁨이 되고 만족이 되는 은혜의 주인공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