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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자는 복이 있도다(시32:1-11) 2025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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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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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5-03-30 17:31 조회 30 댓글 0
 

                 이런 자는 복이 있도다(시32:1-11)            2025. 3. 30

 

 

시편 32편 1, 2절에는 “복이 있도다”라는 표현이 반복된다. 우리말 성경에는 ‘복이 있도다’라는 표현이 1, 2절의 맨 뒤에 나오지만 원래 다윗의 고백은 그 시작에 있다.

 

“복이 있도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여”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여”

 

라고 되어 있다. 이는 마치도 시편 1편 1절이 “복 있는 자는...”이라고 시작하는 것과 같다. 이는 “똑 바른 길로 나아가는 자”라는 뜻이다. 예수께서 산상수훈의 팔복에서 말씀하신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도 같은 뜻이다. 가령, “복이 있도다 심령이 가난한 자여”이런 식의 말씀을 하신 것이다. 

 

다윗은 이스라엘 군대가 암몬 사람들과 전쟁할 때에 부하 장군인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했다. 남편 우리아 장군은 전쟁의 최 일선에 배치해서 전사하게 하였다. 밧세바는 남편 우리아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소리내어 울었다. 장례 후에 다윗은 밧세바를 왕궁으로 불러 들여서 아내로 삼았다. 저들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다. 사무엘하 11장 27절에 보면, “다윗이 행한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라고 하였다. 우리는 선지자 나단을 통해서 다윗을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한다. 태어난 아기가 병들었다. 몹시 앓았다. 다윗은 금식하며 밤을 새워가며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일주일동안 심하게 앓던 아기가 죽었다. 이 기간에 다윗은 회개하며 주께 엎드려서 금식하며 지냈다. 어린 아들의 죽음의 소식을 들은 다윗은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 오지 아니하리로다”라고 말하였다. 

 

다윗은 자신의 범죄로 인해서 하나님 앞에서 몹시 괴롭고 실망스럽고 처절한 회개의 날들을 지내야 했다. 훗날에 고백한 참회의 고백 중의 하나가 오늘의 본문이다. 

 

시편 6편이나 51편의 내용이 처절한 회개의 심정과 그 과정을 담고 있다면 시편 32편은 죄로부터 용서받은 자의 감격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1—2절은 죄에서 용서받은 자의 심정을 기록하고 있다. 3-6절은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았을 때의 밤낮으로 견딜 수 없는 그 고통스러운 심경을 전하고 있다. 오직 주께 자복하고 회개할 때에라야만 누리게 되는 죄 사함의 은총에 대하여 고백하고 있다. 7절은 자신의 부끄러운 죄의 경험을 바탕으로 오직 하나님만이 은신처가 되시며 보호자가 되시고 구원자가 되시는 것을 시인하고 있다. 8 – 11절에서는 죽을죄를 지었던 자신을 예로 들면서 온 나라의 백성들에게 죄를 떠나서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자고 초청하고 있다.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시32:10)라고 하였다.

 

다윗은 지금부터 삼천 년 전의 인물이다. 그 당시의 왕이란 절대 권력자이다. 거의 신적 존재이다. 사람 하나 죽이고 살리는 것에 있어서 별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그 당시 고대 국가의 주변 나라 왕들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달랐다. 자신이 지은 죄로 인해서 날마다 괴로워하였다. 시편 51편 3절에 보면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라고 하였다. 시편 51편 9절에는 “내 모든 죄악을 지워주소서”라고 괴로워하며 안타깝게 탄원하고 있다. 다윗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경건한 사람이었다. 그랬던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이렇게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고 나서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긴긴 날들을 회개의 날들로 이어가던 다윗에게 그 지은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의 용서의 신비가 임하였다. 그 후에 쓴 시편이 시편 32편이다. 

 

허물의 사(謝)함을 받고 죄(罪)가 가려진 자.

다윗은 고백하였다. “복이 있도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여”라고 말이다. 다윗은 1-2절에서 세 번 연속하여 죄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허물이란 무엇인가. “허물이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모든 행위”를 말한다. 반역하는 죄이며 완악한 죄이다. 그리고 ‘죄가 가려진 자’를 말씀하는 ‘죄(罪)’란 ‘표적에서 빗나가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삶을 살지 못하는 상태의 죄의 본질을 말한다. 2절의 ‘정죄(定罪)’란 구부러지고 왜곡된 상태를 말한다. 이 세 가지의 모든 표현은 한결 같이 하나님의 기대와 뜻에서 벗어난 상태를 말한다. 그것이 죄란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허물을 사하시고 죄를 가려 주셨으며 정죄를 당하지 않게 해 주셨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힘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긍휼의 은혜다. 그렇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죄를 깨끗하게 할 수 있는 힘이 없다. 

 

이번 경상도권의 산불로 서울 면적의 3/4 넓이가 쑥대밭이 되었다. 산도 타고 집도 타고 모든 살림살이가 잿더미가 되었다. 조상 대대로 살아 오던 삶의 흔적이 다 재가 되었다. 아까운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재민들이 다시 삶의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마음의 상처를 싸매며 재기하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별의 별 사연을 다 극복해야 할 것이다. 집집마다 개인마다 얼마나 기구한 사연을 쓸어 안고 살아야 할까 말이다. 소, 돼지, 닭, 개 등등 짐승들이 입은 피해와 그 충격도 설명하기가 안타까울 지경이다. 마음의 충격, 경제적인 손해와 피해 등등 전쟁과도 비교할 수 없는 참담한 형편이다. 그런데 그 시작이 조상의 묘를 정리하며 라이터 불을 켠 것이 원인이라니 너무나도 허망하다. 물론 그는 방화범은 아니다. 실수로 그런 것이다. 산 속에서 불을 사용한 것 그 자체가 절대 해서는 안될 실수의 불을 붙인 것이다.그러나 그 결과는 설명할 수 없는 재앙을 초래하고 말았다. 죄란 것이 그런 것이다. 죄의 확산, 죄의 전염, 죄의 침투성이 그런 것이다. 

 

인간의 나약함이 여기에 있다. 그 자신은 얼마나 괴롭겠는가. 경제적인 손실과 이재민에게 입힌 상처로 하면 천년만년을 살면서 갚으면 그 마음의 상심의 빚과 경제적인 손실의 빚을 다 갚을 수 있겠는가. 

 

성 어거스틴(Augustine, A.D. 354-430)이 가장 좋아하고 사랑하던 시편 말씀 중의 하나가 바로 시편 32편이라고 전해진다. 우리가 아는대로 어거스틴은 지금의 아프리카 알제리에서 태어났다. 철학과 문학에 뛰어난 소양을 보였다. 성자 칭호를 받기 이전에 그는 타락한 존재였다. 십대 때부터 그랬다.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십대 때 하라는 공부는 않하고 사귀는 여성과 애를 낳았다. 성적 방종과 쾌락에 깊이 빠져 지냈다. 마니교라는 이단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눈물로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랬던 아들 어거스틴은 32살 때에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듣고 크게 감동되었고 회심하였다. 그 후로 철저히 회개하며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시작하였다. ‘집어 들고 읽어라’(take up and read)라는 어린이들의 노래소리를 듣고 집안에 들어가서 성경책을 펼쳐 읽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3-14)

 

하나님의 말씀은 어거스틴의 삶을 붙들었다. 그리고 이날 이후로 우리가 역사에서 아는 성 어거스틴의 나중 생이 전개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한 인간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다. 어거스틴의 <고백록>은 그렇게 탄생된 것이다. 

 

다윗 자신이 그랬다. 간악한 범죄에 휩싸인 다윗은 처절한 회개의 날들을 지내야 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을 덧입고 새사람이 되었다. 하나님의 용서가 아니면 도저히 다시는 고개를 들고 이 세상을 살아 갈 수 없었을 그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한량없는 사랑으로 그를 용서하셨고 은혜를 부어 주셨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 인간은 누구나 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다. 여기서 말씀하는 죄란 인간의 죄성 즉 원죄를 말하는 것이다. 다윗은 깨달아 알았다. 어머니가 죄 중에 잉태하고 죄악 중에 출생하였다는 죄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사람이 문화와 체면의 옷으로 위장하고 그럴듯하게 교양인 행세를 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실상은 하나님 앞에서 누구나 다 죄인이다. 생각하는 것이 죄요 보는 것이 죄요 듣는 것이 죄요 말하는 것이 죄요 살아가는 일상이 죄투성이다. 범죄하고 타락한 인간의 마음 속에 정한 마음과 정직한 영이 없다. 아닌 척 하면서 <지킬박사와 하이드>같은 날들을 살아가는 것이다. 전적 타락의 상태이다. 그런 인생을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셔서 각 사람의 허물을 사해 주시고 각 사람의 죄를 가려 주시는 그 크신 은혜와 사랑을 덧입고 살아가는 것 이것이 성도의 삶이요 하나님의 자녀의 삶인 것이다. 그래서 다윗이 고백한 것이다.“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이다. 

 

 

간사(奸詐)한 마음이 없고 정죄(定罪)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

2절을 <현대인의 성경>으로 읽으면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라는 말은 “마음에 거짓이 없고”라는 말씀이다.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란 “하나님이 그 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란 뜻이다. 죄가 있으나 하나님이 죄가 없다고 하신단 말이다. 무죄를 선언하신다는 말이다. 우리 말에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없다”라는 속담이 있다. 그렇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죄가 없습니다’라고 주장할 의인이란 이 땅에 단 한 사람도 없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3:10)라고 하였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4)라는 선언과 축복 가운데서 성도는 그리스도 예수의 대속의 은혜를 선물로 받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다윗이 지금 그런 은혜를 깨달은 것이다. 그런 복을 받은 것이다. 예수께서는 “형제를 대하여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2)라고 경고하셨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5:28)라는 지적도 하셨다. 

 

우리가 아는 다윗의 범죄가 우리 속에 다 숨겨져 있다는 말이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제자 빌립이 나다니엘을 예수께 소개하는 장면이 나온다. 예수께서는 나다니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1:47)라고 칭찬하셨다. ‘간사하다’는 것은 ‘어리석고 거짓되다’는 뜻이다. 인간이 참으로 어리석다. 그 어리석음을 에덴의 뱀이 유혹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하며 살아가지 못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이다. 하나님 없이도 세상을 잘 살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이다. 하나님 없이도 세상을 잘 살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거짓된 것이다. 그러므로 간사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떠난 상태이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으려면 그 마음에 주의 정직한 영이 임해야 한다. 그래야 11절 말씀처럼 여호와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라는 선언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마음의 간사를 버리고 정직한 영을 덧입기를 원하신다. 다윗은 시편 51편 10절에서 고백하고 소원하였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그렇다. 복이 있는 자란 허물을 용서하시고 죄를 덮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고 마음의 간사를 버리고 진실하게 주를 섬기는 자이다. 3, 4절에 보라. 죄란 인간으로 하여금 입을 열지 못하게 한다. 종일 신음하며 뼈가 쇠하는 고통을 겪게 한다. 나의 죄를 심판하시는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른다. 내 진액이 다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른 땅과 같이 되게 하신다. 주의 심판을 피할 죄인이란 이 땅에 그 어디에도 없다. 그러므로 5절의 고백처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해야만 한다. 주님께 내 죄를 아뢰야만 한다. 내 죄악을 숨기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용서 받은 자의 기쁨을 누리게 된다. 그래야 11절의 다윗의 고백처럼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의인의 삶을 누리게 된다. 그래야 마음에 정직한 영이 임해서 즐겁게 외치며 찬송하며 살게 된다. 

 

10절에 보니까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라고 하였다. 주께 용서를 구하지 못하고 간사한 자는 9절의 말씀처럼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같이 되고 만다.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祈禱)하는 자.

그러므로 죄 사람을 받은 경건한 자라면 주를 만날 기회를 소중하게 여기며 기도할 줄 알아야 한다. 기도하면 주님께서 각 사람에게 은신처가 되어 주실 것이다. 환난에서 그를 보호하실 것이다. 구원의 노래로 가득찬 삶을 누리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렇게 극악한 범죄를 저지렀던 다윗인데 감히 어떻게 이런 시편을 고백할 수 있었을까.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긍휼이요 하나님의 자비가 아닌가. 

 

종일 신음하며 밤낮으로 죄에 갇혀서 여름 가뭄에 땅이 마르듯이 몸과 마음의 진액이 다 빠져나가는 고통과 심판을 받던 다윗인데 죄 사함을 받고 감히 주께 기도하는 예배자의 회복의 길을 가게 된 것이다. 11절에서 말씀하는 ‘의인들아’라는 표현은 죄가 없는 자란 뜻이 아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의인이란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를 말한다. 6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서 기도하는 자를 말한다. 6절의 경건한 자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고저 씨름하는 믿음의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경배하며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 하는 자라야만 주께 기도하게 되는 것이다. 

 

여호수아 23장에 보면 여호수아는 그를 따르던 장로, 수령, 재판장, 관리들을 곁으로 불렀다. 그리고“나는 나이가 많아 늙었다”라고 말하며 유언하였다. 

 

하나님이 여기까지 인도하신 것을 기억하여라.

광야에서 요단강 건너서 을 차지하게 하시고 기업을 주신 것을 기억하여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좌우로 치우치지 말아라

우상 숭배하지 말아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가까이 하라(수23:8)

스스로 조심하여 너희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수23:11)

하나님의 말씀을 범하고 떠나면 하나님이 너희에게 진노하실 것이다.

 

생각하여 보아라. 왜 기도하며 살아가야 하는가. 다윗을 깨달았다. 죄를 범하고 악에 빠졌을 때에 밤낮이 없이 뼈를 깎고 진액이 빠져 나가는 듯한 신음의 순간들을 다윗은 경험하였다. 슬픔과 고통이 어떻게 일순간에 엄습하는 가를 처절히 체험하였다. 그래서 다윗은 기도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주 앞에 나와서 경건한 자의 삶을 이어 가려는 것이다. 죄를 반복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악을 반복하는 것은 미련한 것이다. 10절 말씀처럼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밀려 온다. 그러나 여호와를 신뢰하며 살아가면 주의 사랑이 그의 삶을 울타리처럼 둘러 감싸 주신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사람에게 복이 임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은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 하게 되는 것이다. 

 

다윗의 참회의 시편인 시편 6편 6절에 보면 “탄식하며 피곤해 하며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띄우며 요를 적시던” 다윗인데 이제는 여호와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찬양의 삶을 다시 살아가고 있다. 시편 6편 8-9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내 울음 소리를 들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라고 선포 하고 있다. 그렇다. 기도하면 주께서 들으신다. 하나님은 죄악 중에 슬퍼하며 근심하며 몸과 마음이 수척하고 영혼이 떨리는 상태로 기도하던 다윗을 버리지 않으셨다. 외면하지 않으셨다. 

 

다윗은 기도하였다.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도 떨리고 나의 영혼도 떨리니 나를 고치소서

여호와여 나의 영혼을 건지소서

여호와여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기도하는 자가 복이 있는 자이다. 복이 있는 자의 기도와 찬양이 계속되길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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