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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도움이신 주님(시63:1-7) 2025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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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5-03-23 14:13 조회 20 댓글 0
 

                   나의 도움이신 주님(시63:1-7)              2025. 3. 23

 

 

사무엘하 15장에 보면 아들 압살롬으로 인하여 반역을 당한 아버지 다윗 왕이 아들의 모반 세력을 대적하여 싸우지 않고 피신하는 장면이 나온다. 다윗 왕은 신발도 신지 못한 맨발로 머리카락은 흐트러져서 얼굴을 가린 채 울면서 기드론 시냇가를 건너서 감람산 자락을 향하여 피신길에 올랐다. 그렇게 예루살렘 성을 비워 주고 왕궁을 내어 준 다윗 왕은 광야로 나선 피난자 신세가 되고 말았다. 제사장 사독이 앞장서서 레위 사람들과 함께 언약궤를 메고 그의 곁을 따랐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다윗은 “보라 하나님의 궤를 성읍으로 도로 메어 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입으면 돌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데를 보이시리라”(삼하15:25)라고 말하였다. 다윗은 연이어“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라고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하리라”(삼하15:26)라고 담담한 심경을 피력한 바 있다. 시편 150편의 분량 중에는 다윗의 비탄시 10편이 포함되어 있다. 오늘 읽은 시편 63편이 다윗의 비탄시 중의 한 편이다. 제목처럼 다윗의 생애는 비탄스러운 날들이 많았다. 주의 도우심이 아니고는 하루도 평안할 날이 없을 정도였다. 주의 손길이 도움인 것을 깨닫는 것이 은혜이다. 그러므로 주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며 살아간다. 

 

그렇게 시작된 피신의 날은 언제 어떻게 마무리 될지 예측할 수 없는 초조하고 불안하고 답답한 날들로 이어졌다. 오늘 본문인 시편 63편에 보면 시작하는 상단에 <다윗의 시, 유다 광야에 있을 때에>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렇다. 지금 다윗은 광야에 있다. 그를 따르는 세력들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다윗은 지금 왕궁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왕궁을 비워 준지 여러 날이 되었다. 착잡한 마음으로 광야에서 하루 하루 지내는 중이다. 

 

사람은 평소에는 그의 믿음이 별로 돋보이지 않는다. 위기를 겪을 때에 그 자신의 믿음의 진가가 드러나는 법이다. 다윗은 광야의 피난지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그렇다. 다윗은 하나님은 그의 인생의 주님으로 모시고 여기 까지 살아 왔다. 다윗은 왕이 되기 이전에도 그랬고 왕위에 오른 후에도 늘 그랬다. “주님이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는 신앙 고백 속에서 살아가려고 씨름했던 믿음의 사람이 다윗이었다. 물론 우리는 다윗의 부족, 다윗의 허물, 다윗의 죄악상을 잘 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죄와 악을 자리에 주저앉아 있지 않았다. 다윗은 처절하게 누우치고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왔다. 하나님은 그런 다윗을 맘에 들어 하셨다. 그 많은 분량의 다윗의 시편에 보면 평소에 다윗이 어떤 심정으로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 섬기고 경배하며 살아갔는가를 구구절절이 만나게 된다. 7절에 보면 다윗은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을 “나의 도움이신 주님”이라고 정한 것이다. 다윗이 피신길에 올라 유다 광야에서 지내면서 고백하였던 그의 믿음의 면모를 함께 묵상하는 중에 은혜가 되는 시간이 되길 소망한다.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앙모하나이다.

지금 다윗은 광야에서 지내고 있다. 광야란 2절의 표현처럼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이다. 물 한 모금 찾기가 쉽지 않은 황량한 땅 광야에서 다윗은 물을 찾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찾고 있다.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양모하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메마른 땅이 단비를 갈망하듯이 다윗은 하나님을 찾고 있다.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다. 주님을 앙모하고 있다. 광야란 낮에는 생활하기 힘들 정도로 무덥고 밤에는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추워 지는 곳이다. 그런 삭막한 광야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갈망하며 하나님을 앙모하고 있다. 어떻게 그럴수 있을까. 다윗은 인생의 별의 별 우여곡절을 다 겪어 온 백전 노장이다. 다윗은 어려서도 그랬고 청소년기에도 그랬다. 다윗은 십대 중반부터 20대를 다 보낸 나이 삽심이 되기 까지 평안할 날이 거의 없었다. 잠시 잠깐동안 사울왕의 총애를 받고 그의 곁에 머문 기간 말고는 내내 피하고 도망하고 숨어 지내야 했다. 왕에 된 후에도 그랬다. 블레셋을 비롯한 주변 국가와의 긴장 관계를 잠재우는 일이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나라가 안정되고 백성들의 마음에 평안이 찾아 오고 살만한 세상이 되는가 싶었는데 아들 압살롬이 반역하고 말았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대로 세상살이란 것이 누구에게나 그렇고 그런 것이다. 세상사는 마치도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것과 같아서 파도와 바람이 잠잠할 때가 별로 없다. 언제 거세 파도가 치고 언제 무서운 바람이 휘몰아칠지 예측할 수가 없다. 다윗의 일생이 그러하였다. 더군다나 지금 다윗은 아들 압살롬이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과 함께 아버지 다윗을 예루살렘 왕궁에서 몰아낸 상태였다. 

 

그런데 다윗은 광야 피신 길에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내가 주님을 간절히 찾고 갈망하며 주님을 앙모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담담하고 침착한 다윗의 면모를 만나 보게 된다. 이즈음에서 다윗의 심정은 “하나님이 다시 왕궁으로 돌아가게 하시면 돌아갈 것이고 그런 길을 막으신다고 해도 하나님의 선한 손길에 자신의 앞날을 맡겨 드리겠다”는 잠잠한 고백 가운데서 지내고 있다. 

 

 

주를 바라보며 찬양하고 송축하나이다.

다윗은 지금 광야에 있다. 그런데 다윗은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 보았나이다”(시63:2)라고 고백하고 있다. 지금 다윗은 황량한 광야에 머물고 있다. 그런데 다윗은 “성소에서 주를 바라 보았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다윗은 지금 초라한 행색을 한 채 왕의 의관을 품위있게 차려 입을 수 없는 피신길의 신세이다. 그러나 다윗의 마음 중심에는 여호와의 성소를 향한 예배자의 마음에 흐트러짐이 없다. 다윗은 “주의 권능과 영광”을 사모하고 있다. 평소에 성소에서 하나님께 번제와 화목제의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에 가지고 있던 주의 권능과 주의 영광을 향한 그의 마음가짐에 흐트러짐이 없다. 

 

다윗은 비록 지금 광야에 머물고 있지만 그의 마음 중심에는 주의 성소를 향한 간절함이 가득하였다. 다윗은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낫습니다”라고 고백하였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다윗은 신분이 왕일 뿐 그의 장래의 운명을 스스로 예측할 수 없는 불안정한 나날을 광야에서 지내야 했다. 그의 목숨이 반역자인 아들 압살롬의 공격을 받아서 어떻게 끝날지도 모르는 운명이 되었다. 그러나 다윗의 고백은 분명하였다. “주의 인자, 즉 주의 사랑하심이 나에게 남아 있는 생명보다 더 낫습니다.”라는 고백은 “나의 생명이 주님의 인자하신 사랑의 손길 안에 있습니다”라는 고백인 것이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평소에는 모르지만 중병이 찾아 와서 내 몸과 마음이 심히 병약해 지거나 절대 절명의 위가 상황에 갇히고 나면 내가 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이 있나. 날 구원하시고 날 보호하시고 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아니라면 내가 스스로 나를 지킬 힘이 내게 과연 있느냐는 말이다. 그래서 다윗은 이런 고백과 찬송을 드리고 있는 것이다. 

내 입술이 주를 찬송합니다.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주께 듭니다.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합니다.

 

주님을 향한 다윗의 고백은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주님으로 인하여 만족할 것입니다.”라고 이어지고 있다.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아라. 이런 지경이 되었을 때에 “내가 감히 오직 주님으로 만족한 순간 순간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라고 말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다윗은 찬송의 사람이었다. 찬송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향한 예배자의 마음이 없다면 아무리 고운 목소리로 부르는 찬송이라도 그것은 찬송이 아니다. 

 

한 때 잘 나가던 전국적인 명성을 갖고 있던 트롯트 가수 중에 추락하는 이들이 있다. 수명명이 동시에 예배하는 교회에 초청 받아서 은혜롭게 찬송하기도 했다. 그러나 질문해 보자. 좋은 목소리로 직업처럼 노래하고 직업처럼 찬송하는 것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이 아니다. 그런 것은 찬양이 아니다. 찬송이 아니다. 지금 다윗은 광야에서 생명보다 더 귀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절절히 깨달으며 감사와 소망의 마음을 담아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라고 고백하고 있는것이다. 다윗은 이런 고백도 하고 있다. 나의 남은 여생이 얼마가 될지 모르나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너의 손을 들리이다”(시63:4)라고 말이다. <내 손을 주께 높이 듭니다>라는 찬양을 함께 부르자. 

 

내 손을 주께 높이 듭니다

내 찬양 받으실 주님

내 맘을 주께 활짝 엽니다 

내 찬양 받으실 주님

슬픔 대신 희락을 재 대신 화관을

근심 대신 찬송을 찬송의 옷을 주셨네

이런 찬양의 은총이 우리 각 사람의 삶을 이끌어 가는 주님의 손길이 되길 소원한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과 그를 추종하는 반역 세력과 싸우려 하지 않았다. 여호와의 법궤를 모신 예루살렘 성 안에서 피비린내 나는 내란이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윗은 맨발로 울면서 나약한 패배자의 모습처럼 예루살렘 왕궁을 다 비워 주고 피신길에 오른 것이다. 

 

그리고 하루, 이틀, 한 주, 두 주, 한 달, 두 달...유다 광야에서 피신하는 날수를 더하면서도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경배의 마음에 흐트러짐이 없기를 소원한 것이다. 5절에 보니까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라고 하였다. 어떤가. 이게 쉽게 가능할 일인가. 자신에게 적용해 보아라. 지금 이지경이 되었는데 어떻게 기쁜 입술의 찬송이 가능하단 말인가.

 

그래서 다윗이 아니겠는가. 5절에 다시 보면 다윗은 그의 영혼에 만족하고 기쁜 찬송이 있었다. <이제 내가 살아도 주 위해 살고>라는 찬양의 가사와 같다. 

 

“이제 내가 살아도 주 위해 살고

이제 내가 죽어도 주 위해 죽네

하늘 영광 보여주며 날 오라하네

할렐루야 찬송하며 주께 갑니다

 

이제 내가 떠나도 저 천국가고

이제 내가 있어도 주 위해 있네

우리 예수 찬송하며 나는 가겠네

천군천사 나팔불며 마중 나오네

 

그러므로 나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요

사나 죽으나 사나 죽으나

날 위해 피 흘리신 내 주님의 것이요”

 

지금 다윗은 광야에서 지내며 자신의 운명과 앞날을 주님의 손에 맡긴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야 어떻게 이런 마음가짐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며 송축할 수 있겠는가.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장군은 “생즉필사 사즉필생”(生卽必死 死卽必生)이란 휘호를 남겼다.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눅9:24)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 앞절에 보면,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9:23)라고 하셨다. 그렇다. 지금 광야길로 피신한 다윗의 심경이 그러하였을 것이다. 자신을 왕위에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지금 왕궁을 비우고 광야 길에서 주님을 향하여 두 손을 들고 주님께 송축하고 찬송하는 다윗을 주님께서 외면하지 아니하실 것이다. 

 

8절에 보니까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리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라고 하였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다윗은 자신이 그 어떤 경우, 그 어떤 상황, 지금보다 더 극심한 그 어떤 비운의 운명에 처한다고 할지라도 주님을 가까이 따르겠다는 신앙이 있었다. 다윗의 그러한 믿음은 결정적인 순간에 주께서 주의 오른 손으로 자신을 붙들어 주시리라는 분명한 믿음이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리 쫓기도 저리 피해야 하는 피신길에서 어떻게 감히 이런 평화로운 찬송을 할 수 있었겠는가.

 

 

주를 기억하며 주의 말씀을 읊조리나이다.

6절에 보면,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합니다.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립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지금 다윗이 말하는 침상은 예루살렘 성 안에 있는 왕궁의 백향목 궁에 놓은 왕의 침소가 아니다. 지금 다윗은 광야에서 눕고 광야에서 일어나는 신세로 지내고 있다. 이러한 피신 길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예측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다윗의 고백은 분명하다. “하나님. 내가 나의 피난 길의 불편한 침상에 누워 있는 동안에도 주님을 기억합니다. 내가 피난길에서 맞이하는 새벽마다 주님의 말씀을 읊조립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사무엘하 17장 27-29절에 보면, “다윗이 마하나임에 이르렀을 때에 암몬 족속에게 속한 랍바 사람 나하스의 아들 소비와 로데발 사람 암미엘의 아들 마길과 로글림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과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녹두와 꿀과 뻐더와 양과 치스를 가져다가 다윗과 그 함께한 백성으로 먹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 생각에 백성이 들에서 시장하고 곤하고 목마르겠다 함이더라”

 

하나님은 광야의 피신길에 처한 다윗을 돌보셨다. 다윗을 지키셨다. 다윗을 도우셨다. 7절에 보면 다윗은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으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다윗은 비록 광야에 피신하는 신세가 되었지만 그에게는 분명한 믿음이 있었다. 주의 날개가 그를 감싸고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광야에서 총총히 쏟아져 내리는 밤 별을 바라다 보아야 했던 노숙생활이 이어지고 있지만 다윗에게는 분명한 고백이 있었다. “오늘 밤도 주의 날개 그늘에서 하룻 밤을 지낼 것입니다”라는 믿음의 고백 말이다. 

 

시간이 흘러 갔다. 다윗을 배반하고 아들 압살롬을 추종하던 세력들에게 불행한 순간이 찾아 왔다. 압살롬은 죽었고 아버지 다윗에게는 큰 슬픔이 남았다. 압살롬의 모반 세력은 실패로 끝났다. 아버지 다윗은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라고 통곡하였다. 9절의 고백처럼 하나님은 다윗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던 자들을 땅 깊은 곳에 들어가게 하셨다. 하나님은 10절의 내용처럼 다윗을 대적하던 자들을 칼의 세력에 넘겨져 승냥이의 먹이가 되게 하셨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시다. 개인과 가정과 나라와 민족의 운명이 주의 손 안에 있는 것이다. 불의하고 거짓된 세력들은 추수 날의 쭉정이같이 불에 태워지고 말 것이다. 그리고 알곡을 모아서 창고에 쌓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다윗의 고백을 통하여 11절 끝에서 선포하게 하셨다. “거짓말하는 자의 입은 막히리로다” 그렇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주의 도움을 의지하는 자들의 손을 높이 들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도움을 의지하는 자들의 찬양과 경배와 찬송이 끊임이 없게 하실 것이다. 

 

계속되는 사순절 새벽 기도회 순례와 함께 은혜로운 나날이 되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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