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욱 그리하자(히10:19-25) 2024. 3. 24 종려주일
기독교는 행동하는 종교다. 명상에 그치는 종교가 아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물론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도해야 하지만 기독교 신앙은 골방에 갇혀서 명상만 하며 지내는 신앙이 결코 아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열두 명의 제자를 부르시고 날마다 행하신 그 선행을 보라. 예수의 일과는 이른 새벽 시간의 기도로 시작되었다. 각색 병자를 치유하고 수 없는 귀신 들린 자들을 깨끗하게 하는 사역에 매진하셨다. 배가 고픈 자들을 만나면 배 불리 먹게 해 주셨다. 바람과 파도 앞에서 바람을 잠잠하게 하시고 파도가 고요해지게 다스리셨다. 예수는 심지어 죽은 자도 살리셨다. 예수는 수가성 우물가에서 한 여인을 만났다. 그 여인은 다섯 남자와 헤어지고 지금 여섯 번째 남자와 동거하고 있었다. 예수는 그 여인에게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 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 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3-14)라고 말씀하였다. 그녀는 물동이를 버려 두고 마을로 뛰어 들어 갔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예수는 날마다의 일과를 소화하시기 위해서 먹을 시간과 충분한 잠을 잘 시간이 늘 부족하였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신 동안에 이루신 크고도 놀라운 업적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죄 사함의 은혜이다. 죽음 즉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 예수의 부활은 생명으로 죽음을 이기고 빛으로 어둠을 이기고 진리로 거짓을 이기신 사건이다. 정의와 공평으로 불의를 이기신 일이다. 히브리서 10장 18절 이전의 모든 말씀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이룩하신 죄 사함의 은혜가 그 사실를 믿는 자에게 선물로 주어진 것을 증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님이...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히10:5)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을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도다”(히10:10)
“오직 예수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사”(히10:12)
그러므로 오늘 본문인 히브리서 10장 19절의 말씀처럼 성도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은 자들이다. 여기서 말씀하는 ‘성소’(聖所)란 성막이나 성전의 성소를 일컫는 말이 아니다. ‘하늘 성소’ 즉 하나님의 나라를 뜻한다. 성막이나 성전의 성소는 일 년에 단 한 번 대제사장만이 제사를 목적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히브리서 9장 7절에 보면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에 한 번 들어가되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라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의 몸을 단번 희생 제물로 드려 죄 사함을 이루셨으므로 주를 믿는 성도들에게 하늘 성소인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담력을 얻게 해 주신 것이다. 그 길은 믿음을 가진 성도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길이며 살길이다. 여기서 말하는 휘장이란 성막과 성전의 성소와 지성소를 가리고 나누던 그 휘장을 말하는 것이다. 이 휘장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를 상징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27장 50절 이하에 보면 십자가상의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셨다. 그 시간에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마27:51) 오늘 본문으로 읽은 히브리서 10장 20절 말씀이 그 내용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영원한 큰 제사장이 되신 것이다. 21절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집’이란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신구약 시대의 모든 성도를 지칭하는 말이다. ‘큰 제사장’이란 지난 주일에 묵상한 대로 히브리서 4장 14절에서 언급한 ‘큰 대제사장’(great high priest)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일컫는 표현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 희생 제사의 피 뿌림으로 인하여 죄 사함을 입은 성도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교훈해 주고 있다.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성도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마음에 뿌려짐으로 말미암아 악한 양심으로 벗어나게 된 자들이다. 그 증거로 몸을 맑은 물로 씻음 받은 자들이기도 하다. 이는 물세례를 말한다. 성도가 예수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내적 성결’을 이루었다면 성령님을 그 마음에 모시고 지난날의 악에서 떠나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가야 만 할 것이다. 이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악한 양심에서 벗어나고’라고 교훈해 주었다. 그 뿐만 아니라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고 선언하고 있다. ‘참 마음’이란 ‘진실하고 충성된 마음’을 말한다. 그렇지 않나. 하나님은 진실한 영이시며 성령님은 충성된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성령의 임재 가운데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나 다 ‘진실하고 충성된 마음’으로 매 순간을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의 일곱 번째가‘충성’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계신 동안에 아버지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분부를 충성되게 감당하신 진실한 아들이셨다.
예수의 마지막 기도가 담긴 요한복음 17장 4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라고 기도하였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인 성도들은 하나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본 받아 ‘진실하고 충성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성도들은 ‘온전한 믿음으로’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것이다. 여기서 말씀하는 ‘온전한 믿음’이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는 넘치는 믿음을 말한다. 에베소서 4장 13절에 보면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라고 하였다. 에베소서 4장 15절에 보면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라고 하였다. 그 중간에 보면 14절에,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였다.
무슨 말씀인가. 우리 각 사람의 믿음의 푯대는 분명하다. 우리는 각 사람이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2)라고 권면하는 히브리서 기자의 권면에 귀를 기울여야만 할 것이다.
예수께서도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사도 바울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라고 권면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10:32-33)라고 분명하게 교훈했다.
믿는 도리(道理)의 소망(所望)을 굳게 잡자.
만약에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약속하신 구원의 진리가 거짓이라면 하나님 자신이 거짓된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 23절의 ‘약속하신 이’란 하나님을 일컫는 말이다. 믿는 자에게 영원한 안식과 영생을 선물로 주시기로 약속한 분은 하나님 아버지시다. 히브리서 8장 6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라고 하였다.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요한복음 3장 16절에 보면 하나님은 그의 아들이신 독생자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선물로 얻게 하신다고 약속해 주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인 히브리서 10장 23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미쁘신 약속의 주님이시다.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야 하는” 이유와 근거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488장 <이 몸의 소망 무언가>라는 찬송가를 부르지 않나.
1.“이 몸의 소망 무언가 우리 주 예수 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주 나의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3. “세상에 믿던 모든 것 끊어질 그 날 되어도
구주의 언약 믿사와 내 소망 더욱 크리라
주 나의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믿음으로 살아가는 증거는 어디에 소원을 두고 살아가느냐는 것이다. 무엇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느냐는 것이다. 히브리서 3장 1절에 보면,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 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히라”라고 하였다.
우리나라가 운전자 안전벨트 착용을 의무화 하기 이전과 그 이후를 기억하는가. 원래 안전 벨트의 사용은 1911년에 비행기 조종사 용으로 사용한 것이 그 시작이다. 조종사 Benjamin Foulois(밴자민 폴로이스)가 개발하였다. 그 후로 자동차 용 안전벨트도 개발되었다. 물론 자동차 생산 초기에는 안전벨트가 없었다. 오늘 날은 운전자 뿐만 아니라 앞뒤 모든 좌석 승객들이 안전 벨트를 매도록 의무화 하고 있다. 자동차 2점식 안전벨트는 1956년, 미국 포드 자동차 회사 사장 로버트 맥나마리가 고안했다. 그는 베트남 전쟁 시기의 미 국방장관을 지낸 인물이다. 그러나 사고가 나면 오히려 안전 벨트의 충격적인 압력으로 장기와 척추 손상이 심각했다. 그 3년 후인 1959년, 스웨덴의 볼보사의 엔지니어 닐스 보린(Nils Bohlin)이 어깨로부터 당겨서 허리에 매는 3점식 안전 벨트((Three-point safety belt)를 발명하여 사용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원리라서 발명 특허 출원이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다른 자동차 회사들도 입소문을 타고 서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2017년, 한 해 동안에 안전벨트 덕분에 교통 사고 현장에서 목숨을 건진 이들이 15,000명이 넘는다고 발표한 바 있다. 에어백이 장착된 자동차의 유익도 크지만 반드시 안전벨트를 매야 한다. 안전 벨트가 생명 벨트이다. 안전 벨트는 만약의 사고 현장에서 생명을 구할 뿐만 아니라 더욱 심각한 부상으로부터 보호 받을 수 있다. 3 점식 안전 벨트의 발명은 역사상 수십만명의 목숨을 사고 현장에서 건졌고 수백만명을 더욱 심각한 교통 사고로부터 보호 받게 해 주었다. 자동차의 발명이 위대하지만 3점식 안전 벨트의 발명 또한 역사적인 공헌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고” 굳건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믿음 중의 믿음이 아닐 수 없다. 운전 중에 안전벨트 착용이 소중하듯이 믿음으로 사는 성도는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잡아야 한다. 우리가 전도해 보면 “관심 없다.” 혹은 “사람이 아무 신이나 믿으면 되지 왜 꼭 예수만 믿어야 한다고 하느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언약이 때가 되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과 소망을 갖고 살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나. 만약에 성도에게 이런 믿음이 불 분명하고 이런 소망이 분명하지 못하다면 그것이 무슨 믿음이며 그것이 무슨 소망인가. 주를 향한 성도의 소망이 분명하지 않고 흔들리고 의심에 휩싸여 살아간다면 얼마나 어리석고 불행한 일인가. 성도의 소망은 믿음을 온전하게 해 주는 푯대와 같은 것이다. 소망이 불분명한 맹목적인 믿음은 불행한 것이다. 그러나 성도의 참된 믿음은 소망을 굳게 붙잡는 것이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의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니라”(딤전4:10)라고 교훈해 주었다.
우리의 믿는 믿음의 도리의 소망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 우리는 요즘 흥행한다는 영화 <파묘> 같은 무속, 우상 숭배, 미신과 어리석은 종교적 미혹이 극심한 이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믿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도리의 소망을 굳게 잡고 흔들리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 견고한 반석 같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크나큰 축복인가. 요즘 새벽마다 묵상해 온 시편 말씀에 보면 다윗은 하나님을 향한 분명한 믿음과 분명한 소망을 갖고 살았다. 그는 끊임이 없는 환난과 생사의 기로를 넘나드는 위기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분명한 믿음이 있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의지하는 분명한 믿음이 있었다. 하나님이 그를 붙드시고 사용하시리라는 분명한 소망이 있었다. 어제 새벽이 묵상한 시편 60편 5절에 보면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주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구원하시리라”는 분명한 믿음이 있었다. 22,000명의 아람 군대가 목숨을 잃고, 18,000명의 에돔 군대가 죽어가는 현장에서도 그는 하나님이 그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지키신다는 분명한 믿음과 소망이 있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과 소망은 막연한 기대와 낙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의 도리란 하나님을 향한 겸허한 신앙의 고백에 근거하는 것이다. 오늘 분량의 묵상인 시편 61편 2절에 보면 다윗은“내 마음이 약해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라고 부르짖어 기도하고 있다. 믿음으로 기도하면 주께서 들으신다.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잡으면 성령이 역사하기 시작하신다.
서로 돌아보아 격려(激勵)하자.
24절의, 서로 ‘돌아 보아’라는 것은 히브리서 3장 1절에서 언급한 ‘깊이 생각하라’는 강조와 같은 단어이다. 건성으로 돌아 보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과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돌아 보라는 말씀이다.
예수의 비유 중에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 가는 길에 강도 만난 사람이 있었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상태로 버리고 갔다. 그 곁을 지나가던 제사장이나 레위 사람은 강도 만나 돌아 보지 않았다. 그냥 피하고 지나쳐 갔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정성을 다하여 돌아 보았다. 불쌍히 여겼다. 그에게 다가 가서 기름과 포도주로 상처에 응급처치를 했다. 환부를 싸매었다. 아마도 자기의 속옷이라도 찢어서 싸매었을 것이다. 자기 짐승에 태워서 주막에 데리고 가서 밤새도록 돌보아 주었다. 그 이튿날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을 주면서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하였다.”이 비유는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예수를 찾아왔던 어떤 율법사의 질문에 비유로 대답해 주신 내용이다. 예수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라고 교훈해 주셨다.
오늘 본문인 24절의 교훈이 그것이다. “서로 돌아 보아 사랑과 선행으로 격려하라”고 하였다. ‘선행’이란 ‘남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사랑의 행위’를 말한다. 그러므로 ‘사랑과 선행’이란 결국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하라는 가르침이다.
오늘은 예수께서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종려 주일’이다. 예수를 향하여 무리들은 ‘호산나’라고 외쳤다.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함성이다. 예수를 주목한 무리들은 무슨 구원을 원했던 것인가. 우리가 가난한 이웃을 1보면 돕고 싶다. 병든 이웃을 보면 돕고 싶다. 불쌍한 이웃을 보면 돕고 싶다. 어려운 일, 슬픈 일을 겪는 이웃을 보면 위로가 되어 주고 싶다. 그러한 사랑의 마음과 관심을 생각에서 멈추지 말고 사랑을 실천하라는 가르침이다.
“배 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 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고 나그네를 영접하고 헐 벗은 자를 입히고 병든 자를 돌아 보고 옥에 갇히 자를 찾아가서 돌아 보라”는 것이다. 이것이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께서 비유로 교훈하신 양과 염소의 비유가 아닌가. 주님은 영광 중에 재림 하실 때에 모든 민족을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이 구분해서 상급을 주고 심판하실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예수께 한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우리 교회가 할 수만 있으면 선교와 구제와 선한 사업에 힘쓰려고 하는 것은 이것이 주님의 뜻이고 분부하심이기 때문이다. ‘격려하자’라는 말씀은 ‘고무시키자’라는 뜻이다. 물론 사랑을 겸손하게 행해야 한다. 오른 손이 행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한다. 그러나 때로는 선한 행실을 드러내고 인정하고 칭찬하고 드러 내야 한다. 서로에게 선한 영향이 미치고 도전이 되고 귀감이 되도록 해야 한다.
사무엘하 17장 27절 이하에 보면, “다윗이 마하나임에 이르렀을 때에 암몬 족속에게 속한 랍바 사람 나하스의 아들 소비와 로데발 사람 암미엘의 아들 마길과 로글림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과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녹두와 꿀과 뻐더와 양과 치스를 가져다가 다윗과 그 함께한 백성으로 먹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 생각에 백성이 들에서 시장하고 곤하고 목마르겠다 함이더라.”라는 내용이 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피신 다닐 때의 일화이다.
세월이 흐르고 회복되지 못할 것 같던 다윗이 왕위를 회복하게 되었다. 사무엘하 19장에 보면 압살롬에게 불행한 마지막 순간이 닥치고 압살롬을 추종하던 세력들을 제압한 다윗의 군대와 함께 다윗이 요단 강을 건너 가려 하던 때의 장면이 나온다. 다윗이 왕권 회복을 위해서 예루살렘을 향하던 때의 장면이다. 거기 바르실래의 이름이 다시 등장한다. 그는 큰 부자였고 연세가 팔십세였다. 예루살렘에 함께 오를 것을 제안하는 다윗 왕의 제안을 그는 정중하게 사양하였다. 그리고 아들 김함이 왕의 곁에서 충성되게 쓰임 받기를 소원하는 말을 하였다.
열왕기상을 읽다가 보면 2장 7절에 바르실래의 아들 김함에 대한 일화가 소개된다. 다윗은 주님 앞으로 돌아갈 날이 며칠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하였다. 그 유언 중에 일부가 그것이다. “마땅히 길르앗 바실래의 아들들에게 은총을 베풀어 저희로 네 상에서 먹는 자 중에 참예하게 하라 내가 네 형 압살롬의 낯을 피하여 도망할 때에 저희가 내게 나아왔었느니라.”라는 내용 말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하여 일하신다. 사람을 통하여 역사하신다. 사람을 통하여 기적을 이루신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그 자리 그 시간에 성령이 함께 하시고 주님이 함께 하신다. 부지 부식 간에 천사를 대접하고 주님을 영접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한낮의 뙤약볕에 지나가는 나그네 세 사람을 송아지를 잡아서 융숭하게 대접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보낸 천사였다. 저들 하나님의 천사는 “내년 이 맘 때에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아들 이삭이 태어날 것이라”라고 예언하였다. 그리고 그 축복의 예언은 이루어졌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으로 격려하는 자로 살아가길 원하신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자들을 주목하시고 축복하시길 원하신다.
25절에 보면,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라고 권면하고 있다. 시작될 고난 주간과 맞이할 부활 주일과 더불어 올 한해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으로 격려하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동행이 계속되길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