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는 그리고 이제는(엡2:1-10) 2024. 3. 10
기독교 이천년 역사 가운데 성인(聖人) 칭호를 받는 이들이 있다. 그들 중에 한 사람이 성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us, 354-430)이다. 어거스틴은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나기 이전과 이후의 삶이 완전히 달랐다.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았다. 구원의 진리와 복음을 가슴으로 깨닫고 영접한 이후의 그의 삶은 기독교 역사의 큰 귀감이 되었다. 그는 그 당시 이단 중의 이단이었던 마니교에 심취한 적도 있다. 그는 부모 곁을 떠나 살면서 이미 10대 시절에 동거를 시작했다. 아들도 태어났다. 결혼 관계가 아닌 13년의 동거가 계속되었다. 북아프리카에서 카르타고로 유학한 그는 이미 16살에 법률학의 권위자가 되었다. 21살 때인 주후 375년에 철학에 관심을 갖게 된 후로 기독교의 유산을 버렸다. 로마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했다. 수사학을 가르치는 학교를 세웠다. 그 곳에서 플라톤 철학과 성 암브로스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오랜 기간 동안의 심적 갈등을 겪은 후 기독교 신앙을 다시 회복했다. 그러고 나서 아프리카로 돌아가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여, 34년 동안 그 안에서 생활했다.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 암브로스의 설교는 타락한 청년기를 보내던 어거스틴의 마음을 흔들었다. 우리아의 아내를 범한 죄를 회개하기 위해서 씨름하던 다윗에 관한 설교를 듣고 있던 어거스틴의 마음에 회개의 영이 임했다. 그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변화 되었다. 성령이 어거스틴의 마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부도덕한 자신의 삶을 고민하고 괴로워하던 그가 어느 날 정원의 무화과 나무 아래를 걷고 있있다. 저 만치에서 어린아이들이 노래하며 놀고 있었다.
“톨레 레게(Tolle lege)! 톨레 레게(Tolle lege)!
집어 읽어라! 집어 읽어라”
어거스틴은 이 노래의 가사 속에서 주님이 그를 부르시는 음성을 듣게 되었다. 로마서를 펼쳐 든 그는 말씀이 그의 마음을 칼로 째며 방망이로 두드리는 충격에 휩싸이게 했다. 어거스틴은 점점 주님에게 붙들린 말씀의 사람, 은혜의 사람으로 변화 되어 갔다. 로마서 13장 11-14절이 그 말씀이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1-14)
아우렐리우스 어거스틴은 44년간 그리스도를 섬기면서 많은 열매를 거두었다. 그 기간 동안 70권의 기독교 서적을 썼다. 그중 하나가 성 어거스틴의 <참회록(懺悔錄)>(The Confessions of St. Augustine)이다. 그는 고백하였다.
“주님께서는 주님 자신을 위해 우리를 만드셨으며,
우리의 마음은 주님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 안정을 찾지 못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 인간은 누구나 죄 가운데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누구나 아기를 보면 귀엽고 예쁘다. 그렇다고 죄와 상관이 없는 탄생이 아니다. 사람이 자라나면서 죄를 습득해서 범죄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원래 죄성을 갖고 태어나는 것이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예수를 한 밤중에 찾아 왔던 유대의 관원 니고데모와 예수의 대화 내용이 나온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 설명해 주셨다. 여기서 말씀하는 ‘거듭남’이란 선택사항이 아니다. 누구나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거듭남’을 체험해야 한다. 어머니의 태에서 탄생하는 그 순간이 있었기에 지금 내가 이 세상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처럼 영적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개인 구원의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인간의 거듭나기 이전의 상태란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인간을 영생하게 하신 것이다.” 이것이 에베소서 2장 1절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나고 새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이전의 상태와 그 이후의 상태를 점진적으로 설명한 말씀이 오늘 본문의 내용이다. 차근 차근 이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지금의 자신의 신앙생활의 현주소를 확인하고 점검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구원 받기 이전의 나의 옛 모습.
2절과 3절이 시작되는 표현에 ‘그 때에, 전에는’이라는 표현을 보라. 여기서 말씀하는 ‘그 때에’나 ‘전에는’이란 시간은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깨닫지 못한채로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고집스럽게 살아가던 그 때를 말하는 것이다.
그 때에는 죄와 허물 가운데서 행하였다.
그 때에는 이 세상 풍조를 따랐다.
그 때에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다.
그 때에는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 즉 사탄의 영의 지배 가운데 있었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거듭나기 전에는,
우리도 다 사탄의 지배 아래 있었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냈다.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며 살아갔다.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
거듭나기 이전의 인간의 상태란 누구나 다 마찬가지이다. 이는 빈부귀천의 경계가 없다. 어제, 토요일 새벽 묵상 본문이었던 시편 49편 2절에 보면, “귀천 빈부를 막론하고 다 들을지어다”라고 하였다. 맞다.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귀하든 천하든 가난하든 부하든 상관이 없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다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기 이전의 상태란 거기서 거기이다. 교양이나 문화나 도덕이나 윤리 그리고 예의범절을 지켜 가려는 가면으로 자신을 가리고 살아갈 뿐이다. 인간은 누구나 다 그 가면의 뒤에 가려진 실제 자신의 모습이란 공중 권세를 잡은 사탄의 지배 아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나를 막론하고 다 들어야 하면 반드시 들어야 하며 반드시 순종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나기 이전의 인간의 모습이란 허물과 죄 가운데서 영원히 죽음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이란 자연인의 상태에서는 어른이나 아이나 노인이나 어린 아기나 상관없이 누구나 다 원죄의 지배 아래서 계속하여 반복적으로 범죄하며 살아 갈 수 밖에 없다.
사도 바울이 언급하는 2절의 ‘세상’이란 그냥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악된 불신앙의 인간이 살아가는 처소인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2장 2절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라고 분명히 구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타락한 가치 체계를 말한다. 하나님을 거슬러서 살아가는 타락한 인간의 모습이 문화라는 가면에 가려져서 공작새의 깃털처럼 현란한 모습으로 인간을 유혹하는 것이다.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라는 말씀은 이 세상의 모든 악행의 배후에는 마귀가 강력하게 조종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면 성령 안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것처럼 반대로 악령인 사탄은 사람으로 하여금 허물과 죄를 반복하는 악에 사로잡히게 한다.
3절의,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라는 상태는 악인들의 삶의 형태를 말한다. 그 반대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의인의 삶이다. 성경은 “육체를 따라서 살아가는 자는 반드시 죽고 성령을 따라서 살아가는 자는 반드시 살 것이라”라고 교훈하고 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8:13)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이전의 상태란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 5장에서 강조하는 인간의 원죄의 문제를 다루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5:12)
이처럼 인간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혜를 받기 이전에는 누구나 다 사탄의 지배 아래서 살아가는 것이다.
구원을 받은 나의 모습.
허물과 죄로 죽었던 인간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게 하시고 자녀 삼아주신 것이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 덕분이다.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시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사랑하신다.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아니라면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구원할 길이란 없다. 그래서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깨달은 이들마다“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라고 찬송하지 않는가.
성 어거스틴은 “허물이란 고의성이 없는 것이고 죄란 고의성이 있는 것이라”라고 설명해 주었다. 초대 교회의 교부였던 제롬은 “허물은 생각으로 짓는 범죄이고 죄란 행동으로 짓는 범죄다”라고 설명해 주었다. 이처럼 생각과 말과 행실이 죄악된 인간을 구원하는 힘은 인간에게서 임하는 것이 아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 은혜란 하나님의 영역이고 믿음이란 인간의 영역이다. 은혜란 인간에게 베풀어 주시는 한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겸손하게 받아 들이는 인간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인간의 믿음 또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다. 오늘 본문을 말씀한다.“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라고 하였다.
그렇지 않나. 생각하여 보라. 지금 내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인가. 지금 내가 주의 은혜를 깨달아 예배자로 살고 성도들과의 교제를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어하는 이 모든 것이 주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인가.
영의 세계에는 성령과 사탄이 존재한다. 천국과 지옥도 존재한다. 성경의 진리를 깨달으면 인생은 달라진다. 구원의 은혜를 깨닫고 나면 삶을 달라진다. 복음의 가치를 알고 나면 새 사람이 된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라고 말하였다.
러시아의 대 문호 레오 톨스토이(Leo Tolstoy, 1828-1910)는 <나의 회심>이란 글에서 자신의 회심 체험을 고백하였다. “5년 전 나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나의 전생애가 변했다. 이전에 욕망하던 것을 욕망하지 않게 되고 오히려 이전에 구하지 않았던 것들을 갈망하게 되었다. 이전에 좋게 보이던 것들이 좋지 않게 보이고, 대수롭지 않게 보이던 것들이 이제는 중요한 것으로 보이게 되었다. 나는 소위 행운의 무지개를 찾아다니며 살았는데 그 허무함을 알게 되었다. 거짓으로 나를 꾸미는 것이나, 여인들과의 부도덕한 성생활이나, 술에 취해 기분 좋아하는 것들을 더 이상 행복으로 여기지 않게 되었다”그는 82년을 살았는데 자신에게 남은 날들이 얼마 되지 않은 것을 느끼며 이런 기도문을 마지막으로 남겼다.
“아버지여, 생명의 근원이시여, 우주의 영이여, 생명의 원천이여, 날 도와주소서. 내 인생의 마지막 며칠, 마지막 몇 시간이라도 당신에게 봉사하며 당신만 바라보며 살 수 있도록 날 도와 주소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이란 305장 찬송가의 가사를 쓴 이는 존 뉴턴(John Newton, 1725-1807)이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라는 고백의 글을 남겼다. 여기에 곡이 붙여져서 우리가 아는 찬송가가 탄생한 것이다. 그는 영국의 믿음의 가정에서 자라났지만 나중에 흑인 노예 무역선에서 일했다. 나중에는 노예 무역선 선장도 되었다. 23살 때인 1748년 어느 날 폭풍우 가운데 선원 한 명이 갑판에서 거센 파도에 휩싸여 사라지는 광경을 목격하였다. 충격에 휩싸인 그는 겨우 목숨을 건졌다. 하나님의 은혜로 여겼다. 노예 무역하는 사업에서 금방 손을 떼지는 못했지만 노예의 인권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런 체험이 그에게 이런 찬송가의 가사를 쓰게 한 것이다. 나중에 그는 뱃 사람의 생활을 청산하고 신학을 공부했다. 성공회 목사가 되었다. 그의 생애는 후대에 영국의 노예 제도 폐지와 노예 해방 운동의 선봉장이었던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1759-1833)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원의 복음이 임하면 누구라도 인생은 달라지게 마련이다.
구원을 받은 성도의 사명.
우리는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선을 행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는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해야 한다. 죄를 멀리하고 주님을 가까이해야 한다. 10절 말씀에 보면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라고 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선한 일을 행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리스도를 본 받고 하나님을 본 받는 자의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 “너희는 하나님을 본 받는 자가 되라”(엡5:1)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 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을 행하라”(엡4:28)
거짓을 버리라. 참된 것을 말하라.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아라. 오히려 덕을 세우는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악독과 노하는 것과 분 내는 것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라.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히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32)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5:16-21)
거듭난 예배자로 살라
서로를 주 안에서 귀하게 여기라
범사에 감사하라
복음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진리로 허리 띠를 띠라
의의 호심경을 준비하라
평안의 복음의 신을 신으라
믿음의 방패를 가지라
구원의 투구를 써라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
깨어 기도하기를 항상 힘쓰라
여러 성도를 위하여 서로 간구하라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전하도록 기도하라
남은 사순절 기도와 말씀과 전도의 열의 가운데 살아가며 부활의 날을 맞기를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