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벧전3:18-22) 2024. 2. 18
베드로의 편지가 쓰여지던 그 당시에는 처처에 흩어져서 살면서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점점 심한 핍박을 받아야 했던 때이다. 그 뿐만 아니라 장차 임할 로마의 대대적인 핍박을 예견하며 성도가 어떻게 핍박과 환난을 견디고 이겨 내야 할까를 교훈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다”(벧전3:14)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벧전3:17)
라는 교훈의 말씀과 더불어 오늘 읽은 본문에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라면 어떤 믿음을 갖고 세상을 살아가야 할까에 대하여 교훈해 주고 있다.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심을 받는 믿음.
레위기의 희생 제사는 절기 때마다 계속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히브리서의 가르침대로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 죄가 없으신 예수, 의로우신 예수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셨다.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 죽으셨다.”,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하심이라”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죄로 말미암아 단절되어 있었던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담을 허시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이다.
마태복음 27장 50-51절에 보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운명하셨다. 그 순간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 여기서 말하는 휘장이란 모세의 성막과 솔로몬의 성전으로 이어지는 성소와 지성소의 사이를 가리는 휘장으로 말한다. 이 휘장은 일 년에 단 한 번 대제사장이 속죄 제사를 드리는 대속죄일에 열렸다. 12. 5미터 길이와 1.8미터 폭의 이 휘장은 72주름으로 만들었다. 성인의 손바닥 두께의 아주 두껍게 만들었다. 출애굽기 26장 31절에 보면,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짜서” 만들었다. 그리고 그 위에 천사의 상징인 그룹들을 정교하게 수 놓았다.
출애굽기 26장 33절에 보면, “그 휴장이 너희를 위하여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리라”라고 말씀하였다.
제사장의 역할은 백성의 죄를 대신하여 속죄하는 대속(代贖)을 위한 제사를 집전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주님을 믿는 성도들의 죄의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신 것이다. 인간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는 하나님 앞에 스스로 나아갈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죄의 문제를 해결 받아야 한다. 죄의 문제를 해결 받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길 밖에는 없다.
우리는 에덴 동산의 아담과 하와를 안다. 저들 부부가 범죄하였다. 선악과의 열매를 먹은 후에 저들이 눈이 밝아졌다. 자기들이 벌거벗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서 치마를 만들어 입었다. 부끄러움을 가리고 동산 나무의 숲 사이에 들어가 숨었다. 하나님이 동산 앞에 다가오셔서 아담을 찾으셨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아담은 대답했다. “내가 두려워 하여 숨었나이다.”이처럼 불순종으로 인한 죄는 하나님과 인간을 단절시켰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후에 에덴에서 쫓아내셨다. 창세기 3장 23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라는 말씀이 있다. 그 다음 절인 창세기 3장 24절에 보면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라고 했다. 이것이 “에덴으로부터의 추방”이다.
에덴에서 쫓겨난 인간은 땅을 가는 운명으로 전락했다. 우리가 밤낮으로 직장과 생업의 현장에서 밤낮이 없이 고단하게 일하며 살아가는 것이 문명의 발전의 단면이긴 하지만 이것이 에덴에서 쫓겨난 타락한 인간의 실상인 것이다.
이 땅의 모든 인생은 누구나 다 고단하고 피곤한 세상 중에서 살아간다. 이는 왕이나 평민이나 다 마찬가지이다. 주어진 자신의 일과를 감당하기 위해서 애쓰고 수고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에게는 다른 은혜가 주어진다. 매 순간마다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죽으심으로 나의 죄를 사하신 것을 감사하면서 살아간다.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인도하심을 받는 자녀의 축복과 권세를 누리며 살아가는 자가 성도이다.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은 잃어버렸던 자녀의 신분을 회복하는 것을 말한다. 아들과 딸의 지위를 회복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의 비유 중에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둘째 아들의 비유가 무엇인가. 아버지의 유산을 받은 젊은 아들은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살았다. 아버지께서 나눠 주신 유산을 다 써 버렸다. 주색잡기를 즐기며 살다 보니 빈털털이가 되었다. 거지 신세로 남의 나라에서 돼지우리에서 돼지를 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런 한심한 둘째 아들이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 못된 아들을 아버지는 외면하지 아니하고 반갑게 맞이하였다. 마을 입구에까지 달려 나와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종들에게 시켜서 목욕물을 데웠다. 목욕하고 새 옷을 입게 했다. 새 신을 신게 했다. 가락지도 끼워 주었다.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준비하였다.
이것이 아버지의 사랑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나 주를 멀리 떠났다 이제 옵니다 나 죄의 길에 시달려 주여 옵니다
(나 이제 왔으니 내 집을 찾아 주여 나를 받으사 맞아 주소서)
그 귀한 세월 보내고 이제 옵니다 나 뉘우치는 눈물로 주여 옵니다
이 병든 맘을 고치려 이제 옵니다 큰 힘과 소망 바라고 이제 옵니다
나 바랄 것이 무언가 우리 주 예수 날 위해 죽임 당하심 믿고 옵니다”
<나 주를 멀리 떠났다>라는 273장 찬송가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아버지께로 가까이 가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가까이 오는 것이다. 사랑의 아버지, 은혜의 아버지, 너그러우신 아버지, 그 넓으신 품에 안아 주시고 감싸 주시는 아버지의 넉넉하신 품 안으로 돌아와서 안기는 것이다. 돌아온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품에 안기듯이 그렇게 아버지 앞으로 나아 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우리 각 사람이 아버지 하나님께로 가까이 인도하심을 받기를 원하는 주님이시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아버지의 그 모든 것을 누리며 살아가는 자녀의 권세를 회복하는 사순절기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구원을 받는 믿음.
베드로 사도는 그의 첫 편지에서 노아의 홍수 심판 때에 노아와 그의 여덟명의 가족이 구원 받은 것을 예로 들고 있다. 20절과 21절의 구원의 무엇인가. 우리는 가난으로 부터의 구원, 질병으로부터의 구원, 압제로 부터의 구원을 원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구원은 그런 정도의 차원에서 머무는 구원이 아니다. 물론 당장 먹을 떡과 마실 물이 없는 상태에서는 한 덩이의 떡과 한 그릇의 물이 소중하다. 예수께서도 수가성 우물가에서 목이 마르시니 낯 설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한 바가지만 마시게 해 달라고 요청하셨다. 심지어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 날 밤 예루살렘의 어느 한 곳에 문을 닫아걸고 숨어 있던 열한 제자에게 찾아가신 그 곳에서 먹을 것을 좀 달라 하셨다. 구운 생선 식은 것 한 토막을 받아 잡수셨다.
예수는 “오늘 날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하셨다. 이처럼 먹고 마시고 입고 살아가는 하루 하루의 삶에 누군가를 통한 구원의 손길이 반드시 필요하다. 출애굽한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후 겪은 현실은 무엇인가. 애굽에서 날마다 해결 받던 먹고 마시고 살아가는 일상이 남감해 졌다. 그 출애굽 이후의 광야 생활을 누가 책임져 주셨나. 누가 반석에서 물을 공급하셨나. 누가 만나와 메추라기로 저들을 배부르게 하셨나. 누가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저들을 보호하고 인도하셨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란 구체적인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란 분명한 것이다. 창세기 6장부터 10장까지 담겨 있는 내용이 노아와 홍수 시대의 이야기이다. 창세기 6장 5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은 그 당시의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한 것과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항상 악한 것을 보셨다. 땅 위에 사람 지으신 것을 한탄하시고 근심하셨다. 그러나 그런 타락한 세상에서도 노아는 달랐다.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였다. 노아는 늘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그 당시에 노아에게는 아내와 세 아들이 있었다. 결혼한 셈과 함과 야벳이다. 노아의 가족은 아내와 세 아들과 세 며느리까지 여덟 명이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고페르 나무로 방주를 지으라고 명령하셨다. 길이가 135미터다. 폭이 22.5미터다. 높이가 13. 5미터다. 상중하 삼층 구조의 실내 설계이다. 방주를 건설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노아는 순종하였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다.”(창6:22)라고 했다.
본문인 베드로전서 3장 20절에 보면 사도 베드로는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과 복종하여 구원을 받은 노아의 여덞 명의 가족 이야기를 예를 들어 설명해 주고 있다. 구원이란 그런 것이란 말이다. 이는 노아의 때나 오늘날이나 다 마찬가지다.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생활하면서 천국의 상급과 지옥의 심판을 말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학교나 직장이나 사업의 현장에서 만나는 내 주변의 그 누군가에게 천국과 지옥을 설명하면 대개의 사람들은“너나 잘 믿고 천국가라”라고 시큰둥하게 반응하고 말 것이다.
이것이 노아 시대의 현상이었다.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은혜를아는 자로 방주를 건설하는 긴긴 세월 동안 사람들은 시집가고 장가가며 세상 낙을 즐겼다. 홍수 심판을 말하는 노아를 이상한 사람 취급하였다. 정작 완공된 방주 안에 들어간 이들은 노아 부부와 세 아들 부부를 포함한 여덞명 뿐이었다. 한자 중에 배 ‘선’(船)자는 배 ‘주’(舟) 자에 탄 여덟 명을 뜻하는 재미있는 합성어로 되어 있다.
베드로는 세례를 설명하면서 노아 시대의 방주에 들어간 여덟 명의 가족의 구원을 예로 들고 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벧전3:22)라고 하였다.
19절을 잠깐 보자. 예수께서는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라는 말씀 말이다. 이 말씀은 카톨릭 교회가 예수의 “지옥강하설”(地獄降下說)이라는 주장의 근거로 삼는 성경 구절이다. 예수께서 무덤에 장사 지낸 바 된 삼일 간 예수는 죽은 자의 처소인 음부에 내려가서 그 곳의 죽어 있는 영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을 곡해한 대표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 말씀은 “하나님 안에 거하시던 그리스도께서 노아 시대에 영으로 구원을 선포하셨다”라는 하나의 해석과 또 하나는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 자체가 지옥에 있는 영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 즉 메시야 이심을 선포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는 해석이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노아의 때에 방주 문이 닫히기 전까지 주어진 구원의 기회를 거역한 자들이 20절의 표현처럼 “복종하지 아니함”으로 구원 받지 못한 것처럼 이는 오늘 날도 마찬가지이다. 마태복음 24장에 보면 세상 끝 날과 구원을 향한 심판에 대하여 예수께서도 노아의 때 이야기를 인용하셨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마24:36-42)
구원을 받기에 합당한 자의 믿음을 지켜 가는 복음의 사람들이 다 되기를 축원한다.
주의 권세를 주목하는 믿음.
22절 말씀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 오르셨고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 맞다. 그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게 하신다.”고린도전서 15장 28절에 보면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라고 하였다. 에베소서 1장 22절에 보면,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라고 하였다. 요한계시록 5장 13절에 보면, 하늘과 땅과 바다의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라고 찬송하였다. 그 때에 네 생물이 아멘하고 장로들이 엎드려 경배하였다. 이것이 예배이다.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 예배를 드린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는 하나님 아버지의 권세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요한 계시록 7장 12절에 보면,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이라고 하였다. 신앙 생활이란 무엇인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신 동안에 그가 만났던 여러 믿음의 아들딸들에게 축복하신 말씀이 이것이다.
마태복음 8장의 백부장의 믿음으로 보라. 그는 병든 하인을 고쳐 달라고 예수를 찾아 왔다. 예수께서 가서 고쳐 주시겠다고 했다. 백부장은 말씀만 하셔도 내 하인이 나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예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8:10)라고 칭찬하셨다. “가라 네 믿은대로 될지어다”(마8:13)라고 말씀하시지 그 즉시 하인이 나았다.
마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에 선교 여행중이셨다. 가나안 여인이 흉악한 귀신 들린 딸을 고쳐 달라고 크게 소리 질렀다. 예수께서 대답을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 여자를 냉대하시는 듯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 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 앞에 가까이 다가 와서 엎드려 절하며 “주여 저를 도와 주세요”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여자는 “주여 옳소이다.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매여 달리듯 말했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라고 말씀하시자 그 때로부터 그의 딸에게서 귀신이 떠나가고 깨끗하게 나았다.
마가복음 5장에 보면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를 찾아 왔다. 간곡하게 부탁했다. 어린 딸이 병들어 죽어 가고 있다고 했다. 심방해 주시고 딸의 머리에 손을 얹어 달라고 간청했다. 함께 가시는 길에 사람들이 무리져서 따랐다. 그 무리 가운데 열두해 혈루병을 앓던 여인이 함께 있었다. 그 여자는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다. 이 의사 저 의사 만나 돈만 탕진했지 하혈 병이 낫질 않았다. 이 약 저 약 써 보았으나 병은 점점 중해가고 아무 효험이 없었다. 그런 그녀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예수 가까이 다가가서 예수의 뒤에서 예수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에게는 예수의 옷에 손만 대도 자신의 병이 고쳐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예수의 옷자락에 손만 댓을 뿐인데 병이 나았다. 그런데 예수는 자신에게서 능력이 누군가에게 나간 것을 아셨다. 예수는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주님 곁에서 이리 밀치고 저리 밀치는데 누가 손을 댓다고 그러십니까”라고 반응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주변으로 둘러 보셨다. 그 때에 한 여자가 두려워 떨면서 예수 앞에 엎드려서 자신의 모든 사실을 말했다. 열두해 혈루병으로 고생해 온 얘기와 예수님 옷 자락에 손만 대도 자기의 병이 고쳐질 것이란 믿음이 있어서 그랬노라고 말했다. 그의 말을 들으신 에수께서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막5:34)라고 축복해 주셨다.
그날 예수께서는 열두해 혈루병에서 나음을 받은 여인을 축복하시고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 찾아 가셨다. 그런데 이미 어린 딸은 죽은 후였다. 많은 사람들이 웅성 거리며 울며 크게 통곡하고 있었다. 예수는 “소녀야 일어나라”라고“달리다굼”(막5:41)이라고 말씀하시며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다. 열두살 된 회당장의 딸이 다시 살아났다. 살아 일어나 걸어다녔다. 사람들이 크게 놀라워했다. 예수께서는 살아난 어린 딸에게“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시며 이 일을 소문내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나 예수께서 행하신 기사와 이적은 이 마을 저 마을, 이 도성에서 저 도성으로 점점 소문이 퍼져나갔다.
신앙 생활이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생활이다. 시작된 사순절 새벽기도 순례자들과 더불어 온 교회와 모든 성도들의 믿음이 더욱 더 돈독해 지는 복된 계절이 되기를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