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에 오신 예수(막1:14-20) 2024. 1. 21
기나긴 인류의 역사 중에 그 누군가가 누려 온 영광스러움 중의 하나는 성경의 기록자가 되었다는 점이다. 마가가 그런 주인공 중의 한 사람이다. 마가는 성령 강림의 현장인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의 주인집 아들이다. 그는 부요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사도행전 12장 12절에 보면 헤롯에 의해 옥에 갇힌 베드로를 위하여 초대 교회 성도들이 한 곳에 모여서 기도하였다. 그 곳은‘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의 집’이었다. 성경이 마가의 어머니에 대하여만 언급할 뿐 아버지에 대하여 전혀 거론하지 않는다. 아마도 마가의 어머니는 남편을 잃고 홀로 남은 형편이었던 것 같다. 이처럼 마가의 어머니 집은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자주 모여 기도하는 곳이었다.
마가복음은 사 복음서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되었다. 마가는 바나바의 생질이다.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바나바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떠날 때 젊은 마가를 데리고 갔다. 사도행전 13장에 보면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은 바나바와 바울이 제 1차 선교를 떠날 때도 대동하였다. 그러나 중간에 마가는 선교 현장의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 버렸다. 그런 후유증으로 바울은 제 2차 선교 여행 때에 마가를 다시 데리고 가려고 한 바나바와 갈등을 겪고는 서로 헤어지고 말았다. 결국 바나바는 자기 주장대로 마가를 데리고 떠났고 바울은 실라와 함께 제 2차 선교 여정을 시작했다. 그리고는 12년 세월이 흘렀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 1차 투옥되었을 때에 그 곳 감옥에서 마가를 다시 만났다. 옥에 갇힌 바울을 마가가 찾아가서 돌보고 섬겼던 것이다. 이는 얼마 동안 마가를 못 마땅하게 여기던 사도 바울이 이미 마가와 화해하고 마가 또한 사도 바울의 곁을 지키는 소중한 동반자가 되었음을 알게 하는 장면이다. 사도 바울은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4:11)라고 하였다. 베드로는 마가를 “내 아들 마가”(벧전5:13)라고 까지 표현한 것을 보아서 마가는 나중에 초대 교회에 대단히 중요한 인물로 자리매김한 것을 넉넉히 알 수 있다. 마가는 누구에게나 유익한 하나님의 사람, 성령의 사람, 말씀의 사람으로 성장해 있었다.
나중에 기록된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의 내용 대부분이 마가복음과 중복되는 것을 보면 베드로의 곁에서 아들처럼 사랑을 받으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과 행하신 기적의 내용을 성령의 감동으로 낱낱이 기록한 마가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은 복음 중의 복음이 아닐 수 없다.
마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라는 짧고 명쾌한 내용으로 복음서를 기록하고 있다. 오늘 읽은 본문에 보면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의 주목을 받으며 그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서 사십일 간 금식하신 후에 갈릴리에 가셔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셨다.
갈릴리는 역사적으로 이방의 침략이 반복되었던 곳이었다. 그러하다 보니 인종적으로 혼합되고 다양한 문화의 영향을 받아 온 지역이었다. 긴 긴 역사 가운데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의 지배와 영향을 받아 온 곳이었다. 따라서 혼합 종교와 우상 숭배가 극심하였다. 본문 14절의“세례 요한이 잡힌 후에”라는 표현은 세례 요한의 시대가 끝났음을 암시한다.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가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셨다. ‘하나님의 복음’이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신다는 내용을 함축한 표현이다.
냉대받고 비천하게 취급되며 조롱을 받던 이들이 살던 땅 갈릴리에 가신 예수께서는 저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 이 시간 그 내용을 살펴보는 중에 은혜가 되길 바란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알라.
예수께서 말씀하신 첫 내용은 “때가 찼다”는 것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었다. 우선 “때가 찼다”라는 말씀이 무엇일까. 여기서 말하는 ‘때’란 ‘카이로스’(καιρός)라는 시간인데 이는 ‘결정적인 시점’을 말한다. 헬라 사람들은 시간을 카이로스와 크로노스로 구분하여 표현했다. 역사적인 시간, 수직적인 시간이 카이로스의 시간이다.
인류가 최초로 유인우주선을 달에 착륙시킨 것은 1969년 7월 20일이다. 인간이 처음으로 달에 발을 디뎠다. 그런 시간이 ‘카이로스’의 시간이다.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된 날이 그런 날이다. 대한민국이 건국된 날이 그런 시간이다. 6. 25전쟁이 발발한 날이 그런 날이다. 내가 태어난 날이 그런 시간이다. 내가 엄마가 되고 아빠가 된 날이 그런 시간이다. 내게 다가 오는 주님 앞에 서게 될 순간도 그런 시간이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성탄은 이처럼 때가 찬 일이었다.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사십일 금식 후에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한 것도 때가 찬 일이었다. 성경은 철저히 때를 말씀한다. 예수는 어느 날 우연히 이 땅에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예언하신 대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은 장차 십자가의 고난과 죄 사함을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때가 찼다’는 말씀은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구원의 때가 임박했다는 선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말씀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나라 혹은 천국은 이 세상 나라와 분명히 구별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통치 아래 있는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에덴 동산의 창조와 연관되어 있다. 하나님의 통치 영역이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란 하나님의 천지 창조로부터 이해하여야 한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인간은 하나님을 멀리 떠난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택하시고 부르신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시려는 노력을 계속해 오셨다. 그 중의 하나가 노아 홍수 사건이다. 그 후에도 하나님은 언약하신 한 사람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완성하시려는 노력을 계속하셨다. 그러나 죄와 허물이 많은 인간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보다는 세상을 더 사랑하고 짝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세 시대에 율법과 계명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이 무엇인지를 계속하여 말씀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을 이룰 수는 없는 법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와 용납이 아니고는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갈 길이 없다. 하나님은 이 땅에 구원의 선물로 보냄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선언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룩하신 구원의 길이 무엇인지를 선포하신 말씀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도 하나님의 나라는 존재하였다. 하나님의 나라는 공간과 시간의 개념이 아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계가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성도들을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삼으신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인생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다.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하여 전 우주적 구원을 완성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안에 있는 자와 하나님 밖에 있는 자를 알곡과 쭉정이를 구별하시듯 할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자와 그렇지 못할 자를 구분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표현하는 말 중에,
‘이미 그러나 아직’
(already not yet)
이란 표현보다 더 명확한 표현은 없다. 예수의 초림인 성탄과 함께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가시화될 것이다. 예수의 재림 때에는 주 안에 잠자던 이들의 영과 육이 부활한 존재로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한 삶을 누릴 것이다.
마가복음 9장 1절에 보면, 예수께서“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자들도 있느니라.”라고 하셨다. 마태복음 6장 10절의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 가운데 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서 이루어 진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5장 5절에서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라는 경고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의 실존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그림자와 같은 곳이다.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다운 교회, 성도다운 성도의 삶을 통하여 장차 임할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의 삶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은 하나님 안에서 주님의 자녀가 되어 구원의 은혜를 누리고 전하며 살아가는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의 실존을 매 순간마다 경험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회개(悔改)하고 복음(福音)을 믿으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 깨닫고 믿는 하나님의 자녀라면 마땅히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게 마련이다. 그러면 “회개(悔改)란 무엇인가”마가복음 1장 4절에 보면 세례 요한은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였다. 회개란 아담과 하와에서 시작된 불순종과 타락 의 상태에서 돌이켜서 영혼육의 온전한 변화의 삶을 살아가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므로 회개란 죄와 악의 상태를 청산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첫 걸음인 것이다. 그리고 ‘복음을 믿으라’는 권면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깨달아 알고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이다.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첫 걸음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되는 순간이다. 이것을 요한복음에서는“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라고 하였다.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다. 지금 당장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고 누리며 그것으로 족하다. 현재만 있을 뿐 나중이란 없다. “천국은 무슨 천국, 지옥은 무슨 지옥”그러면서 떠들며 산다. 아버지의 유산을 받아서 타국에 갔던 둘째 아들처럼 허랑방탕하며 주색잡기를 즐기며 산다.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먹자 마시자 즐기자”라고 허세를 부리며 산다. 저들에게 내일이란 없다. 심판이란 단어는 생각하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하는 순간이 분명히 온다. 농부가 타작 마당에서 타작하는 것과 같은 순간이 찾아 온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한다. 복음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께서 이룩하신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을 받아야 한다. 로마서 1장 17절의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말씀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의는 복음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믿는 믿음이 없이는 믿음에 이를 수가 없다. 사도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1:16)라고 하였다.
여권이 없이는 상대 국가에 입국할 수 없다. 또한 유효 기간이 지난 여권을 가지고도 입국이 불가능하다. 이처럼 구원은 현재적인 것이다. 지금 내 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분명한 신앙 고백이 있어야 한다. 회개가 무엇인지 깨닫고 회개해야 한다. 그래야 죄 사함을 선물로 받는 것이다. 죄 사함이 없이는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을 누리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죽은 후에 가는 천국, 하나님의 나라 개념이 아니라 지금, 현재, 내가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느냐는 말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믿으라”라는 말씀이 나의 것이 되려면 그 동안 의심하고 거부하던 하나님을 나의 영혼의 아버지로 영접해야만 한다.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아가려는 의지적인 나의 노력이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회개와 믿음을 합하여 회심(回心)이라고 한다.
사울은 다메섹 체험 이전까지 자신이 하나님을 잘 믿는 믿음의 사람이라고 자처하였다. 그러나 그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을 다녀가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사울은 다메섹 체험 이후로 완전히 변화된 새사람이 되었다. 그는 삼일 동안 앞을 못 보았다. 그리고 삼일 만에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고 성령 충만을 받았다. 예수가 누구신지 깨닫게되었다. 그 날 이후로 그는 우리가 아는 사도 바울의 생을 시작하였다. 그는 순교하기 까지 복음을 믿고 전하는 회개한 복음 전파자가 되었다. 그는 다메섹 체험 이후로 생명을 바쳐서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는 복음 전파자의 삶을 살았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
예수께서는 곧 이어서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제자로 부르셨다. 예수는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라고 초청하셨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갔다.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 세배대와 품꾼들의 곁을 떠나서 예수를 따라 나섰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예수의 제자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의 첫 출발이다.
신앙생활은 나 혼자 겨우 예수 믿고 사는 생활에 멈추어선 안된다. 예수께서는 우리 각 사람이 “사람을 낚는 어부의 삶”을 살아가길 원하신다. 공부하는 목적도, 아들딸 낳아 기르고 가르치는 목적도, 회사와 직장 생활하고 사업하고 장사하는 목적도 내가 “사람을 낚는 어부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수단이어야 한다. 내가 건강을 관리하고 운동도 하고 영양 섭취도 골고루 하고 대인관계의 폭을 넓히며 원만하게 세상 가운데서 살아가는 목적도 “사람을 낚는 어부의 삶”을 성공적으로 살기 위한 목적이어야 한다.
나의 어머니 신영순 권사는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이다. 강화에서 태어나서 93년을 강화도에서 사시다가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친정의 여섯 남자 형제들은 모두 다 대학을 졸업했다. 그중에 넷은 목사이고 둘은 장로다. 나의 어머니는 나를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키워 주셨다. 나를 회개의 길과 복음을 믿는 길로 인도해 주셨다. 나로 하여금 사람을 낚는 자의 삶을 살아가도록 이 길로 인도해 주셨다. 우리는 다 신학교에 갈 필요는 없다. 다 목사가 되고 다 선교사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나 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야만 한다.
주님은 말씀하셨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18-2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