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고백(시139:1-10) 2024. 1. 14
어느 학교 급훈 중에 “엄마가 다 보고 있다”라는 급훈이 있다고 한다. 오늘 말씀 가운데 보면 “하나님이 나를 살펴 보시고 아신다”는 내용이 반복되고 있다. 무려 일곱 번이나 ‘아신다’는 고백을 연이어 하고 있다. 시편 139편은 다윗이 늘그막에 쓴 시편으로 알려져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신앙고백을 담고 있는 ‘찬양시’이다. 다윗의 시편인 73편 분량의 시편 중에서 시편 139편은 시편의 월계관이라고 별칭 붙여지는 다윗의 시편 중에서 최고봉으로 꼽히는 시편이다.
다윗은 70살에 주님 품에 안겼다. 30살에 왕이 된 후에 40년 동안 왕이었다. 그의 나이 60살 즈음에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겪었다. 그의 생애 최악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다윗은 체험의 사람이다. 다윗은 하루도 한 순간도 마음 편할 날이 거의 없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다윗은 하나님의 임재와 실존과 동행하심을 절절히 체험하며 살았던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사실은 우리 각 사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날마다 순간마다 이러저러한 새로운 체험의 연속 가운데서 살아간다. 다윗은 하나님을 믿는 가정환경에서 낳고 자라났다. 그런 다윗의 마음과 생각을 다스리는 것은 하나님 신앙이었다. 그가 하나님 중심의 생각과 판단에서 멀어졌을 때에 극악한 범죄를 저질렀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에 죄와 악을 가까이 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매 순간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주님이시라는 고백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하나님을 인정한다면 어떻게 내 마음대로 살아갈 수 있겠는가. 우리가 기도할 때에 고백하고 표현하는 내용 그대로 살아간다면 감히 어떻게 하나님을 등지고 살 수 있겠는가. 24절 분량의 시편 139편의 앞부분인 1-6절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즉 하나님의 전지성(全知性)에 대하여 고백한다. 그리고 이어서 7-12절에서는 ‘어디에나 계신 하나님’에 대하여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13-18절에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하여 고백하고 있다. 마지막 부분인 19-24절은 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다윗 자신이 하나님 안에서만 얻을 수 있는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은혜에 대하여 고백하고 있다. 다윗은 하나님과 동행하던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는 평생토록 살아온 지난 날들을 회상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다.
나를 살펴보시는 하나님.
1절과 3절에 보면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다”라고 하였다. <개역한글>성경에서는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라고 하였다. 이는 좋은 의도에서 자세하게 살펴보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광부가 광맥을 탐지하는데 쓰는 용어이다. 정탐꾼들이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낯 설은 땅을 정탐하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과 처지와 상황을 살펴보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 각 사람의 생각과 마음가짐과 의도하는 바를 살펴보시는 하나님이시다. 어린 아기를 양육하는 유모는 아기의 밤과 낮을 끊임이 없이 살펴본다. 어느 순간이라도 눈을 떼는 순간에 아기에게 위험한 일이 생길 수도 있다. 구강기(口腔期)의 아기들은 뭐든지 입에 집어 넣으려고 할 때가 있다. 이러한 때에는 특히 조심하지 않으면 않된다. 뭐든지 손에 잡히는 대로 입에 집어 넣으려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이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삶을 누리며 살아가길 원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계속하여 끊임이 없이 주의 백성들을 보살피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에덴동산의 하와와 아담이 범죄한 것처럼 인간은 언제나 세상의 죄와 악에 노출되어 있다. 한 순간만이라도 하나님 의식을 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나를 살펴보시는 하나님의 눈길을 벗어나서 범죄할 수 있다. 타락할 수 있다. 사탄마귀의 꾀임에 넘어갈 수 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란 나를 사랑의 눈으로 살펴보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매 순간 의식하는 생활이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은 대개가 그렇지 못하다. 남들이 나를 보고 있을때에는 표정이나 자세나 걸음걸이나 마음가짐을 단정히 하려고 한다. 그러나 혼자 있을 때나 남들이 나를 보고 있지 않다고 여길 때가 문제이다. 우리나라 조선 시대의 성리학자 퇴계 이황(李滉, 1502-1571)은 “혼자 있을 때에 바르게 행하는 것이 참다운 사람의 자세이다.”라고 말했다. 공자(孔子, BC 551-479)는 <논어(論語)> 중용(中庸) 편에는 ‘신독(愼獨)’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이는 “홀로 있을 때에 도리에 어긋남이 없도록 말과 행동을 삼가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군자는 보이지 않을 때에 경계하고 삼가며 들리지 않는 곳에서 조심하고 두려워해야 한다.”라고 교훈하였다.
성도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말하고 하나님 앞에서 행동하는 것처럼 살아가려 해야 한다. 늘 말하지만 ‘신전의식’(神前意識) 즉 ‘코람 데오’(Coram Deo)의 신앙으로 살아가야 한다. 요한 계시록 1장 14절에 보면 “주님의 눈은 불꽃 같다”라고 하였다.
아이성 전투 때에 아간은 하나님을 속이고 여호수아를 속였다. 전쟁 명령을 어겼다.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과 금 덩어리를 훔쳐다가 감추었다. 이러한 사실이 전쟁 실패의 원인으로 드러났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눈을 속이려 했던 아간과 그의 아들과 딸과 소와 나귀와 양떼와 그의 가족이 거하던 장막과 살림살이 모두를 아골 골짜기에서 돌로 치고 불태워 죽였다. 그 후에야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가 멈추었다. 여호수아 7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반면에 날마다 순간마다 자신의 범사를 살펴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려 했던 창세기의 요셉은 달랐다. 요셉은 여주인의 유혹을 피하여 도망하였다. 그 결과 요셉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과 마음과 삶의 대소사를 살펴보시는 하나님은 요셉을 일순간에 애굽의 총리대신의 자리에 까지 높여 주셨다. 하나님은 선악 간에 판단하시고 심판하시며 보상하시고 상급과 복을 내려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라는 말씀을 좌우명처럼 여기고 살아야 할 것이다. 지금 악인의 번성을 부러워하지 말고 나의생각과 범사를 살펴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생활하고 하나님과 더불어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예수 당시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금식과 기도와 십일조 생활에 철저하였다. 그러나 주님은 저들의 위선과 외식하는 종교화된 타락을 지적하고 책망하셨다. 오늘 날 우리의 금식 생활, 우리의 기도 생활, 우리의 십일조 생활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과는 차원을 달리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감사하고 주님이 우리 각 사람과 각 가정에 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여서 날마다 주마다 달마다 금식을 비롯한 경건 생활과 기도 생활 뿐만 아니라 십일조 신앙에도 자원하여 기쁜 마음으로 주를 섬겨 가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나. 초대 교회의 성령 받은 성도들은 바나바처럼 밭이라도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 믿는 사람들이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였다. 사도행전 4장 32절에 보면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라고 하였다.
이번에 전라북도 익산의 29교회가 연합으로 모이는 집회 인도 차 며칠간 그곳에 머무는 동안에 하림의 김홍국 장로에 대한 간증을 들을 기회를 다시 가졌다. 하림의 김홍국(1957 - )회장은 올해 67살이다. 초등학교 4학년이던 11살 때에 외할머니가 병아리 10마리를 그에게 선물하였다. 남달리 가축을 좋아하고 사랑하던 그의 손길에서 10마리의 병아리는 번식하고 증식되었다. 고등학교 학생 시절에는 닭이 5,000마리 돼지가 700마리였다. 그가 학교에서 수업 받고 있으면 쉬는 시간에 결제를 받으려고 정문 밖에 직원들이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였다. 그 당시에 이미 축산업 사업자 등록을 한 18살의 청소년 사업가였다. 19살에 설립한 황동 농장이 오늘 날 ㈜ 하림의 모체이다. 4년 만에 조류독감이 유행해서 농장 문을 닫을 형편이었다. 그런데도 마켓의 진열대에 쌓여 있는 소세지 등 가공 식품의 가격은 변함이 없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날 이후로 그는 사육과 가공과 유통을 일체화 하는 통합 경영의 원리를 깨달았다고 한다. 나중에는 축구장 8개 면적의 가공육 공장을 건설했으나 IMF 위기를 맞았다. 부도 위기에서 국제금융공사(IFC)의 투자 유치를 2달 만에 받아 냈다. 국제금융공사의 실사 팀이 한국에 와서 그의 사업 현장을 실사했고 국내 기업 최초로 투자 유치를 받아냈다.
2003년에는 공장이 전소하는 화재를 겪었다. 다시 조류 독감이 번졌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의 도전은 계속되었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고 예배의 사람이었고 살펴보시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고 의지하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익산 신광교회는 그가 기증한 15,000여평의 대지 위에 웅장한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그는 수천억의 아파트 공사가 가능한 땅을 예배당의 터전으로 기증했을 뿐만 아니라 예배당 건축에도 발 벗고 앞장섰다. 2014년 26억에 나폴레옹이 쓰던 이각모를 경매로 구입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이 땅의 후배와 젊은이들에게 도전 정신을 교훈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지난 2023년 말에는 세계적인 굴지의 해운회사인 HMM을 인수한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 국제 화물 수송선 한 척에 6m 컨테이너 24,000개를 선적할 수 있는 엄청난 규모의 화물 수송선이다. 알헤시라스라는 이름의 이 배는 길이가 400m이고 배의 폭이 61m이다. 이 배가 한번 운항을 마치면 평균 소나타 3,400대를 생산하는 정도의 재화를 벌어 들인다고 한다.
병아리 10마리를 품에 안고 외할머니 집에서 돌아 온 11살짜리 소년이 세계적인 기독교 기업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오늘날 김홍국 장로는 “나로 나되게 보살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뿐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새해 둘째 주일은 매년 청지기 주일로 지킨다. 오늘 따로 십일조 설교를 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우리는 다윗과 같이 분명한 신앙 고백 가운데 살아가야 할 것이다. 3절에 보면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라고 하였다. 나의 범사를 살펴 보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 안에서 살아가는 한해와 앞날이 되기를 축원한다.
나를 아시는 하나님.
7번이나 반복되는 ‘아신다’는 말‘야다’(,ידה)는 피상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체험을 통해서 아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신다. 나의 생각, 나의 체질, 나의 전부를 나보다 더 잘 아신다. 주님은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신다. 멀리서도 나의 모든 생각을 밝히 아신다.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신다.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다. 23절에 보면, 하나님은 내 마음을 아신다. 내 뜻을 아신다. 주님은 나의 기쁨, 나의 슬픔, 나의 만족, 나의 고통, 나의 번민, 나의 고뇌를 나보다 더 잘 아신다. 그러므로 주께 아뢰고 기도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13절에 보면, 하나님은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신 분이시다. 나의 내장을 지으신 분이시다. 14절에 보면, 나를 심히 기묘하게 지으신 분이시다. <개역한글성경>에서는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라고 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은 나를 신묘막측하게 지으셨을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태에서 만드시기 전부터 나를 너무나도 잘 아신다. 17절에 보면, 다윗은 “나를 향하신 주의 생각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라고 주님을 높이고 경배하고 있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신을 너무나도 잘 아시는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 안에서 살기를 소망하고 있다. 18절에 보면,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484장 찬송가 <내 맘의 주여 소망 되소서>의 1절 가사에 보면,
“내 맘의 주여 소망 되소서 주 없이 모든 일 헛되어라
밤에나 낮에나 주님 생각 잘 때나 깰 때 함께 하소서”
라고 찬송하고 있다. 이는 1,200년 전인 8세기 때에 어느 아이리쉬(Irish) 신앙인의 고백이다. 그 때나 오늘날이나 아일랜트는 척박한 땅이다. 그러나 저들은 환경만 바라보지 않고 믿음의 주님을 바라보고 의지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은 나의 체질과 나의 생각과 나의 소원과 나의 기대와 나의 관심과 나의 욕망과 나의 범사를 너무나도 잘 아시는 전능하신 아버지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기쁘고 즐겁고 행복할 때에도 나를 아시지만 그 뿐만 아니라 우리가 괴롭고 답답하고 우겨싸임을 당하고 속이 상하고 힘겹고 견디기 어려운 고난을 당할 때의 나의 형편도 너무나도 잘 아신다.
출애굽이 무엇인가. 출애굽기 2-3장에 보면 하나님은 탄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음과 고통의 소리를 들으시고 그 근심을 아셨다. 그 고통의 현장을 보셨다. 그리고 모세에게 동족을 애굽으로부터 광야로 이끌어 낼 것을 명령하셨다. 그리고 분명하게 약속하셨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3:12)
믿음이란 무엇인가. 나의 형편을 잘 아시는 사랑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리라는 믿음 그것이 성도의 믿음, 신자의 믿음이 아닌가.
하나님은 창세기의 요셉이 겪는 환난과 억울함을 아셨다. 하나님은 모세의 생각과 그의 나아가는 길을 미리 아셨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열망하던 다윗의 중심을 아셨다. 시편 139편 23절에 보면 다윗은 하나님이 그를 살피시고 그의 마음을 아시며 그를 시험하신다고 고백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뜻을 아시는 하나님을 절대 의지하는 믿음으로 살아가고자 씨름하였다. 24절에 보면, “내가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라고 겸손하게 주께 매어 달렸다.
하나님은 끌려간 땅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어 놓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하던 다니엘의 중심을 아셨다. 그러므로 다니엘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사자 굴 속에 던져진 다니엘과 함께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을 버리지도 않고 떠나지도 않겠다는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있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믿음을 아셨다. 그러므로 범사를 아시는 하나님이 풀무불 속에서도 저들 세 친구와 함께 하셨다.
하나님은 죄가 없으신 예수께서 십자가 꼭대기에 달려 처참하게 죽어가는 그 현장을 아셨다. 하나님은 하라고 하신 분부와 사명에 충실하기 위해서 죄편 강도의 조롱 앞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묵묵하고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 들이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순간을 아셨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의 영광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에게 새 생명을 선물해 주셨다.
새해가 밝았으나 달력이 새해의 것으로 바뀐 것 말고는 바뀐 것이 하나도 없다. 내 형편, 내 처지, 내 살림살이, 내 일상, 내 체질, 내 약함을 하나님은 너무나도 잘 아신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나의 범사를 주님께 맡기는 것이다.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다. 주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우리가 때때로
“아시지요 아시지요 아시지요 주님”
이라고 찬송한다. 맞다. 주님은 나의 생각과 범사를 잘 아신다. 나를 잘 아시는 주님께 의지하고 기도하면 주님께서 나의 범사를 복되고 하시고 아름답게 하시고 만족하게 하실 것이다.
나를 인도하시며 붙드시는 하나님.
나를 살펴 보시고 잘 아시는 하나님은 언제 어디에나 계시다. 다윗은 시편 139편 8- 10절에서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라고 하였다. 맞다. 하나님은 하늘 꼭대기에도 계시고 바다 속 깊은 곳에도 계신다. 동쪽 끝에도 계시고 서쪽 끝에도 계신다. 천지 사방 그 어디에도 하나님이 아니 계신 곳이란 없다. 하나님은 밤중에도 내 곁에 계시고 한 낮에도 내 곁에 계신다. 그래서 다윗은 7절에서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라고 겸손한 마음으로 믿음을 고백하고 있다.
하나님은 택한 자의 걸음을 인도하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사람을 힘 있고 의로우신 주의 오른손으로 붙들어 주신다. 10절의 ‘거기서도’라는 고백을 주목하여 보라. 다윗은 이 세상 그 어디에나 계신 주님께서 하늘과 땅과 바다 끝에서라도 자신을 만나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다.
다윗은 알았다. 사울 왕의 칼과 창을 피해서 이 광야 저 광야로 피신 할때에 누가 다윗을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셨는지를 알았다. 다윗은 들짐승처럼 이 동굴과 저 동굴로 피해서 숨어 다니며 십 수년 동안 불안하고 초조한 나날을 지내야 할 때에 누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시고 갈길을 인도하시며 그의 오른 손을 붙들어 주셨는지를 알았다. <주의 곁에 있을 때>라는 401장 찬송이 다윗의 때에도 있었다면 아마도 다윗은 이 찬송가를 즐겨 불렀을 것이다.
2절에 보면,
“피난처인 예수여 세상 물결 험할 때
크신 은혜 배푸사 나를 숨겨 주소서
주여 주여 나를 인도하소서
빠른 세상 살동안 주여 인도하소서”
그래서 다윗은 그의 노년기에 이르러서도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우리는 다윗의 또 다른 시편인 시편 23편 2-3절을 기억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다윗은 이처럼 반복해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있다. 이런 은혜와 동행의 은총이 날마다 간증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