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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돕지 아니하시면(왕하6:24-33) 2016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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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6-09-15 22:03 조회 20,376 댓글 0
 
 여호와께서 돕지 아니하시면(왕하6:24-33)      2016. 9. 11



고대 전쟁이든 현대전이든 전쟁이 일어나면 모든 것이 폐허가 되고 만다. 2800년 전, 선지자 엘리사는 자신을 죽이려고 도단 성에 기습해 왔던 아람 나라의 군대를 잘 먹이고 마시도록 해서 되돌려 보냈다. 그 이후 여러 해 동안 평안을 유지하던 아람 나라와 이스라엘 간에 다시 전쟁이 일어났다. 아람나라의 군대가 이스라엘에 쳐들어 왔다. 북 왕국 이스라엘의 왕 요람이 살던 사마리아 성이 포위되었다. 요람 왕은 북 왕국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멀리하고 악명 높던 임금 아합의 아들이다. 성이 포위된 채로 시간이 계속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고대 국가들 중에서 높은 성을 쌓고 그 성 안에서 살아가는 생활이란 적들의 침략으로부터 성 안의 생활을 안전하게 보호 받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성이 적들에 의해서 에워싸이고 장기화 되면 굶어 죽고 말 것이다. 장기적으로 성이 포위되면 성 밖에서 성 안으로 보급되는 채소와 과일과 곡식과 고기와 물고기 등 식료품의 조달이 끊기고 만다. 성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비상식량이 끊기면 살아갈 길이 막연해진다.

그 당시 사마리아 성은 아람 나라 군대가 성을 포위한 것으로 인해서 성 안에 극심한 굶주림이 계속되었다. 아람 나라 벤하닷 왕의 전술은 속전속결로 사마리아를 함락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성을 포위하고 있으면 자연히 물자 조달이 끊겨서 때가 되면 왕과 성 안의 백성들이 항복하게 될 것이라는 장기전을 펼치고 있었다. 이미 성 안에서는 먹을거리가 바닥이 났다. 나귀 머리 하나에 은 팔십 세겔을 받고 팔고 사는 일이 벌어졌다. 은 한 세겔이 노동자의 나흘 품값이다. 그러면 팔십 세겔이란 320일 동안 벌어 모은 돈으로 고작 나귀 머리 하나는 사야 하는 형편이 되었다.  320일의 품삯이란 쉽게 계산하면 3200만원을 갖고 나귀 머리 하나를 사서 먹는 지경이 되었다. 무슨 말인가. 아무리 집 안에 금과 은과 보석이 넘쳐나도 먹을거리를 구할 길이 막연해진 최악의 상황이 된 것이다.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다 굶어 죽게 생겼다. 

레위기 11장에 보면 나귀는 부정한 짐승으로 여겨서 먹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심지어는 그 나귀의 머리까지 일 년 수입을 다 주고라도 사서 먹고 생명을 연장해 보려는 이들이 생길 지경이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비둘기 똥을 돈을 주고 사서 먹는 이들도 생겼다. 예전 성경에는 ‘합분태’라는 점잖고 어려운 말로 해석해 놓았었다. 그런데 새로 번역한 ‘개역개정’성경에서는 ‘비둘기 똥’이라고 쉽게 번역해 놓았다. 왜 비둘기 똥까지 돈을 주고 사서 먹게 되었을까. 굶주림이란 그런 것이다. 굶주려 본 분들은 굶주림이 무엇을 의미하나 아실 것이다. 세계 제 2차 대전 때에도 독일이 유럽의 주변 나라들을 쳐들어가며 먹을 것이 없게 되자 개나 고양이도 잡아먹고 심지어는 벌레까지 잡아먹는 일이 빌 비재하였다. 

엘리사 때에 사마리아 성의 형편은 그보다 심각했다. 어떤 젊은 여인들은 서로 그렇게 하자고 약속하고 자기 어린 아들을 죽여 삶아 먹는 엽기적이고 패륜한 일까지 벌어졌다. 이런 참담한 일은 예레미야 선지자 때에도 있었다. 예레미야애가 4장 10절에 보면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이 쳐들어 왔을 때의 상황을 기록해 놓고 있다. “딸 내 백성이 멸망할 때에 자비로운 부녀들이 자기들의 손으로 자기들의 자녀들을 삶아 먹었도다.”라고 했다. 이런 일은 예수님이 부활 승천 하신 후 40여년이 지난 주후 70년에 로마의 티토 장군이 예루살렘에 쳐들어가서 예루살렘이 망할 때에도 있었던 일이다. 

1972년에 남미 우루과이 럭비 팀을 태우고 안데스 산맥을 넘어 칠레로 향하던 경비행기가 산맥 한 가운데서 추락했다. 눈덮힌 안데스 산맥에서 29명이 죽고 72일 만에 16명이 살아남았다. 처음에는 남은 식량으로 버텼다. 초코릿 한 개씩을 나누어 먹으며 버텼다. 나중에는 먼저 죽어간 동료들의 시체를 먹고 버티는 일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1993년에 “얼라이브”(ALIVE)라는 제목의 영화로 제작되면서 다시금 세계인을 놀라게 하였다. 극한 상황이 되면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된다. 

핵 개발로 남한과 세계를 위협하는 북한은 지난 1995년부터 3년 동안 연속적인 자연재해로 인해 무려 200만 명이 굶어 죽었다. 북한 인구의 십분의 일이 굶어 죽은 것이다. 동네 사람이나 가족이 죽으면 뒷산에 매장하는 척하고 다시 파내다가 시체를 삶아 먹는 일이 실제 있었다고 한다. 오늘 날도 북한 인구의 삼분의 일을 심각한 만성 기아 상태에서 연명하며 살아가고 있다. 

당시의 성곽은 성곽 꼭대기로 마차가 지나갈 정도로 폭을 넓게 쌓았다. 어느 날 왕이 성 위로 지나가고 있었다. 그 때에 한 여인이 왕을 바라보고 외쳤다. “나의 주 왕이여 도우소서.” 왕은 대답하였다. “여호와께서 너를 돕지 아니하시면 내가 무엇으로 너를 도우랴.” 아람 나라 군대에 포위된 채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며 하루하루 버티며 지내는 형편 가운데 왕이나 사마리아 성 안에 그 어떤 백성들이나 참담하기는 서로 다 마찬가지였다. 그 때에 왕이 이런 대답을 계속하였다. 왕은 이어서 “타작마당으로 말미암아 하겠느냐 포도주 틀로 말미암아 하겠느냐” 이 말은 왕의 권위를 갖고도 백성들에게 전혀 아무것도 어떻게 해 줄 것이 없는 무력하고 답답한 상황을 숙어적으로 표현한 것뿐이다. 

두 여인이 서로 차례대로 어린 아들을 죽여 삶아 먹고 또 상대방 여인의 어린 아들을 죽여 삶아 먹고 굶주림을 이겨 나가자고 했다. 한 여인을 실제로 제 어린 아들을 죽여 함께 삶아 먹었다. 그 다음에 상대편 여인에게 네 아들을 내어 놓으라고 했더니 어디에다 아들을 숨겨 놓고는 내어 놓지 않았다. 그런 참담한 상황을 성 위로 지나가던 왕에게 탄원한 것이다. 비참한 이야기가 아닌가. 왕은 그 여인의 말을 듣고 자기의 옷을 찢었다. 옷을 찢는 행위는 회개와 변화를 결단하는 겉으로 들어 나는 표현이다. 성 위로 지나가는 왕의 속살이 드러났는데 속에 베옷을 입고 있었다. 베옷을 입는 행위 또한 슬픔과 회개를 상징하는 것이다. 요람 왕은 속에 베옷을 입었고 백성들의 참담한 형편을 들었을 때에 왕복도 찢으며 반응하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북 왕국 이스라엘의 왕이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회개하였다고는 볼 수 없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31절에 보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선지자 엘리사에 대하여 아주 못 마땅한 감정을 몹시 격하게 표현한 말을 보면 그렇다. “사밧의 아들 엘리사의 머리가 오늘 그 몸에 붙어 있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실 지로다.”(왕하6:31) 그 시간에 엘리사는 성 안의 자기 집에 있었다. 엘리사의 집에는 백성들의 지도자들이 그의 곁에 모여 들어서 당면한 전쟁의 비상사태에 대하여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그 때에 왕은 자기 사람을 엘리사에게 보내서 왕의 불편한 심기를 전하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엘리사 선지자는 왕이 보낸 사자가 이르기 전에 이렇게 말하였다. “이 살인한 자의 아들이 내 머리를 베려고 사람을 보내는 것을 보느냐” 엘리사는 여호람 왕에 대하여 ‘살인한 자의 아들’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렇다. 요람 왕은 광적인 살인자 아합 왕의 아들이다. 엘리사는 자기를 죽이러 오는 왕의 사자의 접근도 알았고 그 뒤를 따르는 왕의 출입도 알고 있었다. “그의 주인의 발소리가 그의 뒤에서 나지 아니하느냐”는 말은 왕이 엘리사를 죽이려고 사자를 보내 놓고 마음에 후회가 되어서 그 뒤를 뒤 쫒아 오고 있었다는 정황을 설명해 주고 있다. 엘리사는 자기를 죽으려고 그를 찾아오는 왕의 사신을 자기 집안에 들이지 말도록 명령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왕이 그 뒤를 따라서 급하게 도착하였다. 

왕은 말했다. “이 재앙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왔으니 어찌 더 여호와를 기다리리요.” 이것은 분명한 왕의 변화이다. 성경은 그 상황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지 않다. 어떻게 되어서 엘리사를 죽이려던 왕이 심경을 바꾸고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서 임한 전쟁이라고 고백하게 되었는지의 상황을 설명해 주지 않고 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엘리사의 집 앞에 도착한 왕의 심경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어찌 더 기다리리요.”라는 고백은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청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심정의 고백이다. “여호와께서 너를 돕지 아니하시면 내가 무엇으로 너를 도우랴” 임금의 이 말은 사실이다. 그렇지 않나. 왕인들 이 난감한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고야 어떻게 전황을 바꾸어 아람나라의 군대와 싸워 이길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 세상을 믿음으로 살면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 무슨 도움을 구하며 살아가야 할까.


평화를 지켜 주시는 여호와의 도우심.
열왕기하 6장 23절에 보면 이웃 나라인 아람 나라의 군대가 이스라엘에 쳐들어오지 않는 평화의 상태가 일정한 세월 동안 유지되었음을 말한다. 우리는 잘 안다. 평화란 평화가 유지되는 동안의 평화이다. 계속되던 평화가 일순간에 금가고 깨어지고 만다. 

75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고향과 친척을 떠난 아브라함은 극심한 기근을 겪었다. 아브라함은 기근을 피해 애굽에 내려갔다가 아내를 애굽의 바로 왕에게 빼앗길 뻔한 수모를 겪었다. 물론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아브라함의 경솔한 발언이 원이기도 했지만 여하튼 아브라함이 겪는 마음의 고통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 모든 것이 형통하고 매사에 잘 될 줄 알았으나 그렇지 않았다.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고 성령님을 의지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형통하고 순조롭고 언제나 항상 평화가 넘치는가. 그렇지 않다. 아브라함도 뒤숭숭한 날들이 많았고 그러기는 아들 이삭도 손자 야곱도 야곱의 총애를 받던 아들 요셉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저절로 항상 평화가 보장되지는 않는다. 문제는 살아가면서 겪는 별의 별 일과 사건 앞에서 믿는 자 다운 어떤 태도와 판단과 자세를 갖고 응답하며 반응하며 살아가느냐는 것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차이일 뿐이다. 

고난과 역경과 환난과 곤고와 질병과 사고와 사건 앞에서 하나님의 편에서 나의 삶을 들여다보고 해석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앙인의 모습이다. 요셉은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이다. 형들은 아무 옷이나 입힐 때에도 아버지 야곱은 요셉에게만 늘 채색 옷을 입혔다. 그러나 그런 날이 영원히 계속되질 못했다. 요셉은 17살에 형들의 미움을 받고 애굽에 팔리어 갔다. 노예시장에서 바로 임금의 친위대장인 보디발의 집 노예로 팔려 들어갔다. 요셉은 13년간 노예 생활을 했다. 나중에는 주인마님의 유혹을 어겼다고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갔다. 거기서 바로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맡은 자를 만났다. 나중에 임금 바로의 꿈을 해석 할 자를 찾을 때에 감옥 생활한 떡 굽는 관원장을 통해서 요셉을 소개 받았다. 임금 바로는 기대하는 마음으로 요셉을 감옥에서 불러냈다. 바로 임금의 꿈을 해석한 요셉은 바로 임금을 기쁘고 만족하게 해주었다. 요셉은 그 날로 바로 임금의 총애를 받는 애굽의 제 이인자가 되었다. 요셉은 17살에 노예로 팔려 갈 때에 깨어져 버린 인생의 평화로 인하여 낙심만 하거나 슬퍼만 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의 증손자요 야곱의 아들이었던 요셉의 마음 깊은 곳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 신앙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사람이 믿음으로 살아도 별의 별 일들을 다 겪게 마련이다. 문제는 내가 믿음의 사람으로서 질병과 사건과 사고 앞에 어떻게 반응하며 살아가느냐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은 그 어떤 일을 당하든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의 삶의 깊은 곳에 있는 영혼의 평화를 거두어 가지 않으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가령 창세기의 요셉의 생애를 보라. 요셉이 애굽의 노예 시장에서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 들어갔다. 그런데 그 다음 상황을 기록하는 성경 말씀에 보면 창세기 39장 2-3절에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고 했다. 또 창세기 39장 21절을 보라.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요셉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들어간 감옥 안에서도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하며 지냈다. 또 보자. 창세기 39장 23절,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요셉은 죄수의 신분이지만 간수장의 전폭적인 신뢰를 한 몸에 받으며 감옥 안의 제반 업무를 도맡아 할 정도였다. 2년 세월이 지나고 요셉은 감옥에서 애굽의 바로 왕 앞에 나가서 왕의 답답한 꿈을 시원하게 해석해 주었다. 왕은 그에게 왕의 제 이인자인 총리직에 임명하였다. 바로 왕은 요셉에게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창41:38-39)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앙인의 진가는 환난과 고난과 실패와 질병과 곤고한 역경이 찾아 와서 나의 평화가 깨어지고 평화가 금갈 때에 어떻게 자기 자신의 믿음을 지켜 나가느냐로 구별된다.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면 안 된다. <주님 손 잡고 일어서세요.>라는 찬양이 있지 않나.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마세요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 미리 보면서 감사하세요 
너무 견디기 힘든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이 일하고 계시잖아요 
남들은 지쳐 앉아 있을지라도 당신만은 일어서세요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손 잡고 계시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함을 믿는다면 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잖아요 

왜 이런 슬픔 찾아왔는지 원망하지 마세요 
당신이 잃은 것보다 주님께 받은 은혜 더욱 많음에 감사하세요 
너무 견디기 힘든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이 일하고 계시잖아요 
남들은 지쳐 앉아 있을지라도 당신만은 일어서세요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손 잡고 계시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함을 믿는다면 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잖아요 


필요의 공급자이신 여호와의 도우심.
지혜도 지식도 능력도 역량도 공급자이신 여호와의 손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 한 끼 음식 앞에 진심으로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한 모금 물을 마실 때에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맥박 한번, 호흡 한번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손길 안에 있다. 살아가는 매 순간이 신비요 감사요 축복이요 간증이 되어야 한다. 내가 내 맘대로 사는 것이 아니다. 병들어 보면 안다. 약해져 보면 깨닫게 된다. 내가 나를 내 맘대로 못한다.

지난 2016년 9월 7일, 수요일에 6호선 새절역 지하철 여자 화장실에서 20대 여성이 아기를 낳았다. 예정보다 한 달 먼저 양수가 터지고 급하게 화장실에서 아기를 낳았다. 아들이 태어났다. 화장실 바닥에 피가 뭍어 있는 것을 발견한 한 여대생이 119에 신고하였다. 환경 미화원들의 도움으로 태어난 아기와 산모는 보호 받고 있었다. 근처 옷 가게 주인은 재치 있게 옷가지를 챙겨다주고 태어난 아기가 체온이 떨어지지 않도록 감싸게 해 주었다. 병원으로 옮겨진 산모와 아기는 모두 건강하다고 한다. 

이처럼 시간과 때와 모든 범사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것이다. 어느 산모가 공중 화장실에서 첫 아기를 낳을 계획을 하였겠나. 우리는 인생을 계획하지만 그 모든 범사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이든, 나라이든, 민족이든 하나님의 공급하심 앞에 겸손해야 한다.  

오늘 날 핵 실험을 계속하며 남한과 주변 국가와 세계열강을 긴장 시키는 북한과 남한을 보라. 북한의 국민 소득은 개인당 1200불이다. 남한 국민의 1/22 수준이다. 남한의 핸드폰 보급량은 5500만대가 넘는다. 그러나 북한에는 240만대 정도 있는 것으로 알려 지고 있다. 북한의 전기 생산량은 남한의 4.1% 수준이다. 남북한의 국제 무역 규모는 남한의 1/150 수준이다. 백성들을 이처럼 가난 가운데 허덕이는데도 북한은 전쟁 준비에만 광분하고 있다. 

남한에는 올해도 이 가을에 얼마나 길거리에 시장에 오곡백과가 풍성한가. 물론 품목에 따라서 생산 농가의 마음을 우울하게 하는 품목이 없는 것은 아니라지만 올해도 전국 방방곡곡에 오곡백과가 풍성한 가을을 맞았다. 그런데 북한은 어떠한가. 북한의 백성들은 올해도 어떻게 겨울을 날까 걱정이 태산이다. 누가 먹을 것을 공급하시나. 공장에서 쌀과 밀과 콩을 생산할 수 있나. 들과 산과 바다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않고 어떻게 우리 식탁이 풍요로워 질 수 있는가. 레위기 26장 33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배반하며 살아가면 “너희의 땅이 황무하며 너희의 성읍이 황폐하리라.”고 경고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지 아니하면 민족이라도 재앙을 내리시고 대적의 손에 붙여 패하게 하시겠다고 하셨다. 

이라크 난민 100만 명이 이웃 나라인 시리아에 유입된 적이 있다. 오늘 날은 내전이 계속되는 시리아의 난민 400여 만 명이 주변 나라로 흩어져 들어가고 있다. 오늘 날 유럽의 독일, 프랑스, 영국, 그리스 등이 겪는 리비아 등 아프리카 난민들과 시리아 난민과의 갈등은 우리가 생각하고 상상하는 형편 그 이상이다. 우리도 살기 힘드니 제발 우리나라 국경을 넘어 들어오지 말라고 난민들을 막아 내려고 유럽의 나라들 마다 안간힘을 쓰고 있다.

누가 나라에 평화를 지켜주나. 누가 가정에 필요를 채워 주나. 누가 개인과 가족과 나라와 민족의 필요를 채우고 풍성하게 하는 공급자인가. 북 왕국 이스라엘의 여로람 왕은 아람 나라 군대에 포위된 전쟁 상황에서 탄식하는 여인의 하소연을 듣고 이렇게 말하지 않나. “여호와께서 너를 돕지 아니하시면 내가 무엇으로 너를 도우랴.” 그렇다. 임금의 말은 옳은 말이요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왕의 탄식이었을 뿐 안타깝게도 왕에게 진심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겸손한 믿음은 없었다. 

지금 풍요롭게 살아가고 있는가. 교만하면 안 된다.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 사울이 칼과 창과 군대와 마병과 식량이 없어서 전쟁에서 죽임 당한 것 아니다.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던 아합 왕이나 이세벨이 왕궁에 먹을 것이 없어서 죽은 것 아니다. 헬라의 알렉산더가 먹을 것에 없어서 33살에 죽었겠나. 프랑스의 나폴레옹이나 중국 역사의 진시황이나 몽골의 징키스칸이 먹을 식량이 떨어져서 죽은 것 아니다. 입을 옷이 없어서 죽은 것 아니다.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지 아니하시면 하루 생활의 평화가 금방 깨어지고 만다. 하루하루 필요를 공급 받으며 살아가는 별것 아닌 것 같은 일상이 얼마나 크나큰 기적이며 축복이며 은혜의 하루인지 모른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는 일상생활의 복이 어디서 오는가.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127:1-2) 그렇다.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하루 밤 잠을 자는 것도 내 맘대로 안 된다. 여호와께서 나의 영과 혼과 육의 필요를 공급해 주시지 아니하시면 하루를 살아가는 평범한 하루도 헛된 하루가 되고 만다.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소용없다.  일찍부터 부지런을 피우고 언제 먹는지 언제 쉬는지 언제 눕는지 모르게 극성을 부리며 뛰고 달려도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아니하시면 모든 것이 헛되고 만다. 

그러므로 지금 넉넉지 못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낙담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시는 은혜의 공급자이시기 때문이다. 막상 이스라엘 땅에 아람 나라의 군대가 쳐들어오고 임금이 사는 사마리아 성이 아람 군대에 포위되고 나니 사마리아 성 밖의 그 넓은 들판에 뛰어 노는 수많은 양과 염소와 소와 말과 약대가 그 어느 한 마리도 왕의 손에 들어 올 수 없는 남의 것들이 되고 말았다. 성 밖의 포도나무, 감람나무의 열매가 단 한 톨도 백성은커녕 왕의 손바닥에 올릴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되고 말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라. 하루하루 순간 순간 내 삶의 공급자는 나 자신이 아니다.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아니면 이 세상의 그 모든 풍요가 나에게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들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상황과 형편과 여건을 따라서 낮과 밤, 봄 여름 가을 겨울 날 지키고 보호하시고 필요를 채우시는 분은 전능하신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우리가 393장에서 찬송하는 가사 그대로이다. “오 신실하신 주” 2절에 보면 “봄철과 또 여름 가을과 겨울 해와 달  별들도 다 주의 것 만물이 주 영광 드러내도다 신실한 주 사랑 나타내네..........”


건강과 생명의 근원이신 여호와의 도우심.
자기 건강과 자기 생명을 자기 스스로 맘대로 할 수 있다면 아합과 이세벨이 그런 죽음을 선택하였겠는가. 아합의 대를 이었던 아들 아하시야 왕의 2년 만에 왕권을 물려줄 이유가 있었겠는가. 지금 아람 나라의 침략을 받고 있는 엘리사 당시의 왕 요람도 마찬가지이다. 열왕기하 9장에 보면 본문에 등장하는 북 왕국 이스라엘의 왕 요람은 예후가 쏜 화살에 맞아 죽었다. 예후가 쏜 화살이 요람 왕의 염통을 뚫었고 요람 왕은 자기가 탄 병거 가운데 엎드러져 죽음의 순간을 맞았다. 인간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자신의 생명이다. 아람 나라에 포위된 상태에서 하나님을 원명하고, 엘리사를 원망하며 “사밧의 아들 엘리사의 머리가 오늘 그 몸에 붙어 있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실지로다”라며 교만을 떨던 요람 왕은 오히려 엘리사 선지자 보다 먼저 비참한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장담하며 살면 안 된다. 큰 소리 치며 살면 못쓴다. 우리 선조들은 “낮 말을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고 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하면 “하나님은 우리 하는 모든 말들을 낮에도 들으시고 밤에도 들으신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마음 속에 하는 생각까지도 아신다. 그러므로 생명의 공급자이신 하나님 안에서 겸손하여야 한다. 민수기 6장 22절 이하에 나오는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축복처럼 하나님이 복을 주셔야 한다. 하나님이 지켜 주셔야만 한다. 하나님이 그의 얼굴을 나에게 비추사 은혜를 베풀어 주셔야만 한다. 여호와가 그 얼굴을 나에게로 향하여 주시고 나에게 평강을 주셔야만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축복가운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사람의 건강이나 생명을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다면 북한의 김정일(1942-2011)이 천년이라도 버티며 살지 69살에 눈을 감았겠나. 리비아의 카다피(1942-2011)가 북한의 김정일과 같은 해에 태어나고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다. 우리는 언론 보도를 통해서 카다피의 마지막 비참한 죽음의 현장을 보았다. 겸손하게 살자. 

제주도에서 태어나서 전주에서 자라나고 평양의 숭실학교에서 공부한 시인 김현승(1913-1975)은 목사의 아들이었다. 그의 기도처럼 “가을의 기도”를 드리며 살아가자. 


가을의 기도/ 김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홀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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