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사람(왕하6:14-23) 2016. 9. 4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기도의 사람이다. 예수님도 이 땅에서 늘 기도하셨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지 않으셨다. 어떻게 해야 공부를 잘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성공하고 출세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주식 투자를 잘 할 수 있는지 그런 것을 가르치신 적이 없다. 다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하시고 가르쳐 주신 것이 “주기도문”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기도하는 법을 배웠다.
엘리사도 마찬가지였다. 엘리사는 엘리야로부터 기도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엘리사는 기도하여 수많은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한 기도의 사람이었다.
엘리야의 영적 통찰력도 뛰어 났지만 엘리사의 영적 통찰력을 따를 자가 없었다. 아람 나라는 엘리사 당시의 북 왕국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언제나 위협적인 이웃 나라였다. 그런 아람나라의 벤하닷 왕은 호시탐탐 이스라엘에 쳐들어 올 궁리를 계속하고 있었다.
고대 전쟁이나 현대전이나 전쟁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편 군대에 대한 첩보를 미리 확보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아람 나라의 군대 동향과 이동 경로와 전략과 왕이 주재하는 군사 작전의 계획까지를 손바닥의 손금 읽듯이 환하게 알고 있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그 때 그 때마다 이스라엘 왕에게 아람 나라의 군대 동향을 알려 주었다. 그래서는 이스라엘의 군대를 어느 쪽 어디에 배치하여야 하겠다는 제안까지 하게 되었고 그 모든 제안은 척척 맞았다.
북 왕국 이스라엘이 비록 우상을 숭배하고 왕이 나서서 하나님을 멀리 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지만 하나님은 북 왕국에 엘리사 같은 뛰어난 영적 지혜의 사람을 세우셔서 여전히 북 왕국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계셨다. 사태가 이쯤 되다 보니 아람나라의 왕이 불안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도대체 아람 나라에 어느 누가 이스라엘과 내통하기에 아람 나라의 군사 기밀이 일일이 이스라엘 진영에 새어 들어 가느냐는 의문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런 어느 날 아람 나라 임금의 신복 중의 한 사람이 나서서 말했다. “우리 주 왕이여 아니로소이다. 오직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왕이 침실에서 하신 말씀을 이스라엘 왕에게 고하나이다.”(왕하6:12)
그 말을 들은 아람 나라의 왕은 엘리사를 잡아 없애려고 하였다. 그래서는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사가 어디에 사는지를 알아내라고 하였고 그 당시 엘리사의 거처가 ‘도단’성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기까지가 열왕기 하 6장 8절에서 13절까지의 내용이다.
아람 나라의 왕은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서 한 밤 중에 도단 성을 포위하였다. 엘리사를 잡아 없애겠다는 아람나라 왕의 야심 때문이었다. 이른 새벽에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사환이 집 밖에 나섰다가 아람 나라의 군사와 말과 병가가 도단 성읍을 에워싸고 있는 것을 알았다. 어마 어마한 숫자의 군대를 보고 깜짝 놀라서 집안으로 뛰어 들어 가서 엘리사 선지자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선지자 엘리사는 사환의 보고를 받고나서 사환을 위로하였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그리고 기도를 계속하였다. 엘리사 시대에 있었던 또 하나의 기적 장면을 통하여 교훈을 삼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두려움과 기도.
이 세상에 두려움의 감정이 없는 사람은 없다. 왕이라도 두려운 일은 두려운 일이고 부자라도 두려운 것은 두려운 것이다. 전쟁에 능한 장수라도 두렵기는 마찬가지다. 어느 장수가 전쟁에 나가면서 이번 전쟁에서도 반드시 승리하고, 전혀 부상을 입지 않고 죽음의 위협이 전혀 없이 100% 안전하게 전쟁을 마치고 귀환하리라고 확신할 수 있겠는가. 이는 먼 바다에 나가는 어부의 두려움이나, 전쟁터에 나가는 군사의 두려움이나 늘 두렵기는 누구나 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비행기에서 낙하산을 가슴에 품고 뛰어내리는 군사가 항상 그 순간에 휘파람을 불면서 뛰어 내릴 수 있겠는가. “아, 이번이 나의 마지막이 되는 것은 아닌가.”하는 두려움이 왜 없겠나.
이처럼 두려움의 감정은 누구에게나 있게 마련이다.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이 새벽에 집 밖에 나갔다가 그렇게 많은 아람 군대가 도단 성을 포위하고 엘리사의 집을 포위한 것을 보았는데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엘리사 선지자의 첫 마디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왜 사환은 두려워했고 엘리사는 두려워하지 않았는가.” 엘리사는 그 같은 상황에서 사환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 엘리사의 사환은 현실만 보았고 선지자 엘리사는 영의 눈을 열어서 하나님이 보내신 불 말과 불 병거를 보았다.
“불 말과 불 병거”가 무엇일까. 창세기 32장에 보면 20년 만에 고향을 향하여 가던 야곱의 앞길을 ‘하나님의 군대’가 막아서고 있었다. 그 하나님의 사자들을 본 야곱은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고 말하며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고 불렀다. 그렇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즉 ‘마하나임’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하나님의 사자들을 미리 보여 주셨다. 그러나 야곱은 형 에서가 400명의 무장한 장정을 거느리고 야곱 가까이 찾아오고 있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야곱은 그 두려움 가운데 기도하고 도 기도하였다. 얍복 강 이편에서는 자기만 혼자 남고 그 밤에 야곱의 아내와 자녀들과 종들과 모든 짐승 떼를 얍복 강 저편으로 보내 놓고 필사적으로 기도하였다. 그 밤에 천사와 씨름하여 이겼다. 이스라엘이란 새 이름도 받았다. 환도 뼈가 탈골되는 고통도 겪어야 했다. 그렇게 기도하던 야곱의 두려워하던 기도 제목이 응답되었다. 살기를 품고 있던 형 에서는 동생 야곱을 환대하고 서로 얼싸 안고 화해하였다. 기도의 결과였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두려움으로부터 건지신다. 그돌라오멜 연합군에 붙잡혀 간 롯을 아브라함과 그의 집안 남자 318명을 동원하여 되찾아 오게 하신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기도의 사람 모세와 그 백성들을 뒤에서 추격하는 바로의 군대로부터 보호하시고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게 하셨다. 뒤 쫒던 애굽의 군대만 홍해 속에 수장되게 하셨다.
요즘처럼 사고와 사건과 질병과 재난이 끊임이 없는 세상에서 성도가 어떤 믿음을 갖고 살아가야 할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아람 나라 군대의 위협과 같은 전쟁터에서 불 말과 불 병거를 동원하여 보호해 주신다는 믿음이 있어야만 할 것이다. 엘리사는 여호와께 기도하였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사환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나님은 그 즉시 엘리사의 기도를 응답하셨다. 하나님은 두려움 가운데 떨고 있던 엘리사의 사환의 눈을 열어 불 말과 불 병거를 보게 하셨다.
신앙생활이란 무엇인가.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영의 세계를 영의 눈을 떠서 보며 살아가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8:31)라는 믿음으로 살아가며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성도의 모습이요 신자의 모습이 아닌가. 바울은 이렇게 선언한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7-39)
하나님의 사람 선지자 엘리사의 마음에 두려움이 없고 담대하고 평안 할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인가. 엘리사는 보았고 엘리사의 사환은 보지 못하던 불 말과 불 병거를 보는 눈이 있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보호하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시다. 정상적인 아버지라면 육신의 아버지라도 자기 아들딸을 보호하고 사랑하고 아끼는 것처럼 말이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시121:4)라고 하였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질병, 사고, 사건, 실패의 두려움이 파도처럼 엄습하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함께 하심을 굳게 믿고 믿음으로 담대하게 앞을 향하여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자.
마음의 소원과 기도.
우리는 엘리사의 시대에 엘리사는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하나님은 엘리사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하는 기도의 교감(交感)을 보게 된다. 이렇게 엘리사 선지자처럼 우리도 기도하면 그 때 그 때마다 하나님이 척척 응답하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누구나 하게 될 것이다. 도단 성을 포위한 아람 나라의 군사와 말과 병거를 보고 두려움에 휩싸여 있던 사환의 마음을 안정시킨 엘리사는 연이어서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원하건대 아람 군대의 무리의 눈을 어둡게 하옵소서.” 그런데 하나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아람 나라의 그 많은 군대의 눈을 모두 다 어둡게 만드셨다. 그 때 엘리사는 나서서 아람 나라의 군대를 유인하기 시작하였다.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가 찾는 사람에게로 나가리라.” 엘리사는 눈이 어두워 져서 앞을 보지 못하는 아람 나라의 군대를 앞 장 서서 이끌고 사마리아 성으로 갔다. 사마리아 성 안으로 들어 갈 때에 엘리사는 다시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여호와여 이 아람나라 군대의 무리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그 순간 하나님은 엘리사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아람 나라 군대의 눈이 열리게 하셨다. 아람의 군대가 눈을 떠 보니 자기들이 이스라엘 나라의 수도인 사마리아 성 안에 한 가운데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도단 성에서 사마리아 성까지의 거리는 19km이다. 그런 먼 거리를 그 많은 아람 나라의 군대가 눈이 어두워 진채로 엘리사가 가자고 한 대로 따라 갔다는 것은 쉽게 이해되는 상황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아람 나라 군대의 지휘력에 혼란이 오게 해서 도단 성에서 사마리아 성을 향하도록 저들의 방향을 바꾸어 이끄셨음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하는 말 중에 “저것이 눈에 무엇이 씌었지 그렇지 않고서는 그럴 수가 없어.”라고 말할 때가 있다. 아람 나라 군대의 눈을 어둡게도 하고 밝게도 하는 권세가 여호와께 있으시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판단이 흐려지고 욕심에 눈이 멀고 나면 도저히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사건이나 범죄에 휘말리는 경우를 본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사6:9)는 말씀을 해 주신 적이 있으시다. 그렇다. 사람이 마음이 둔하게 되고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되면 보아도 못보고 들어도 못 알아듣고 마음에 깨달음을 갖지 못하는 불행한 상태가 되고 만다.
엘리사를 잡아 없애겠다던 아람 나라의 군대가 도단 성에서부터 엘리사의 인도를 받아 사마리아 성 안에까지 이르렀다. 눈을 밝혀 다시 보고 나니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 성 한 가운데까지 가서 있는 아람군대의 자신들을 발견한 것이다. 이 얼마나 당황스러운 상황인가. 아람 나라의 군대가 사마리아 성 한 가운데 포위되고 말았으니 말이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승리를 소개하는 엘리사 당시의 기적 장면이다. 그렇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사람의 눈을 어둡게도 하실 수 있고 밝게 하실 수도 있으시다.
사도행전 9장에 사울을 보라. 예수 믿는 자들에 대하여 위협과 살기가 등등한 상태로 다메섹 도성을 향하여 가던 사울이었다. 그런 사울의 이름을 부른 분은 예수님이셨다. 주님은 강한 빛을 비추셔서 사울로 하여금 땅에 엎드러지게 하였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부르셨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강한 빛으로 눈이 어두워지게 해 놓고 사울의 이름을 부르셨다. 사울에 땅에 엎드려 눈이 어두워진 채로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가 이를 자가 있느니라.”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었다. 사울은 땅에서 일어났지만 앞이 보이질 않았다. 사람의 손에 이끌려서 다메섹 도성 안으로 들어갔다.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그런 사울의 눈을 뜨게 한 것은 그 도성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 아나니아였다. 주님은 다메섹 성의 직가 거리의 유다라는 사람의 집에 머무는 사울에게 아나니아를 보내셨다. 그리고 그에게 안수하여 사흘 만에 다시 보게 해 주셨다. 사울은 그 순간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눈에 비늘 같은 것이 벗겨졌다. 다시 보게 되었다.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고 강건해졌다. 사울은 그 즉시로 다니면서 자기의 체험을 간증하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개인의 눈이 어두워 져서 못 보게도 하시도 다시 떠서 보게도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께서 엘리사 시대 때에 도단 성에 쳐들어갔던 아람 나라의 군대 모두의 눈을 어둡게 하셨던 여호와시다. 하나님이 하시면 못 하실 일이 없으시다. 전능하신 여호와께서 하시려고 하시면 홍해라도 육지처럼 건너게 하신다. 날마다 만나를 내려 광야의 200만 무리들을 날마다 먹고 살게 하시던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반석에서 물이 터져 나오게 하셔서 그 많은 광야의 백성들과 짐승들이 해갈하게 하시는 전능하신 공급자이시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하늘의 태양이라도 공중에 멈추게 하실 수 있는 전능자이시다. 하나님은 원하시면 죽은 자라도 살려 내시는 생명의 주인이시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셨다.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계셨고 하나님 안에 예수님이 계셨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셨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을 종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친구라고 하리라고 하셨다. 뿐만 아니라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요15:15)고 하셨다. 그리고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15:16)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를 통하여 이렇게 교훈하셨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젊은이이든 장년이든 “못한다, 어렵다, 안 된다, 할 수 없다, 해 봐야 소용없다.” 이렇게 실패주의와 비관에 사로 잡혀 지내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는 세상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인 성도들은 엘리사의 사환처럼 두려움에만 휩싸여 지내지 말고 눈을 열어 나를 도우시는 만군의 주 여호와의 불말과 불 병거를 보는 영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엘리사처럼 기도하여 하나님의 즉각적인 응답을 체험하는 기도의 신비를 경험하는 기도의 사람, 영의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선한 목적으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신다.
우리는 이런 본문을 오해하면 안 된다. “아하, 아무 노력도 아무 수고도 하지 않고 엘리사처럼 기도하면 하나님이 즉시 들으시겠구나.”하는 착각에 빠져서는 안 될 것이다. 엘리사는 아람 군대의 눈이 어두워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자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 그리고 다시 아람 군대의 눈을 열어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하자 즉시 하나님이 아람 군대의 못 보던 눈을 밝혀서 보게 해 주셨다. 마치도 엘리사는 명하고 하나님은 들으시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대로 응답하신다. 기도하면 지혜도 주시고, 인내하게 하시고, 의지도 주시고, 투지도 주시고, 추진력도 주시고, 만날 자를 만나게도 해 주시고, 새롭게 나아갈 길을 인도해 주신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4:2-3)
요즘 무슨 기도의 제목을 갖고 기도하며 지내고 있는가. 이 계절이 되면 대학수능시험을 보는 수험생들의 부모들이 얼마나 열심히 기도하나. 기도한다고 다 만점 받나. 기도한다고 다 명문대학교 가나.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기도하다 보면 하나님은 또 다른 은사와 또 다른 기도의 유익을 선물로 주시는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면 때가 되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온갖 좋은 것을 분명히 이루어 주실 것이다. 응답해 주실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구하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 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7:7)
그렇지 않나. 믿음으로 기도하며 살아가는 성도라면 지금의 나의 모습은 5년 전, 10년 전, 혹은 20년 전, 30년 전에 기도하던 그 기도의 응답과 열매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분명하다. 엘리사는 기도하였고 하나님은 엘리사의 기도를 들으셨다.
기도의 응답과 열매.
아람 나라의 군대가 엘리사의 유인을 받고 사마리아 성 한 가운데 포위되었다. 이스라엘의 왕은 선지자 엘리사에게 물었다. “내 아버지여 내가 치리이까 내가 치리이까.”(왕하6:21) 그 당시 하나님의 사람 선지자 엘리사의 영적 권위는 대단하였다. 임금이라도 선지자 엘리사를 향하여 “내 아버지여”라고 부를 정도의 권위였다.
일순간에 이스라엘의 사마리아 성에 포로로 붙잡히게 된 아람나라의 군대를 어떻게 처치할까 하는 것이 이스라엘 왕의 관심이었다. 그런데 엘리사의 견해는 달랐다. 엘리사 선지자는 저들 아람 나라의 군대에게 떡과 물과 먹을거리를 풍성하게 제공하고 제 나라로 되돌려 보내자고 제안하였다. 이 같은 평화로운 방법으로 아람 나라의 군대를 선대해서 돌려보냈다. 아람 나라의 군대는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사방에 말하였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는 신 여호와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하여 말하고 또 말하였을 것이다. 하나님이 쓰시던 하나님의 사람 선지자 엘리사를 통한 하나님의 기적에 대하여도 말하고 또 말하였을 것이다. 아람 나라 군대와 아람 나라의 왕과 고관대작들은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엘리사와 같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들의 신앙생활에 대하여 듣고 감동하였을 것이다. 기도의 능력을 말하며 여호와의 선지자 엘리사의 기도의 신비를 주변에 말하고 또 말했을 것이다.
도단 성을 거쳐서 사마리아 성에 유인 받았던 아람 나라의 군대들은 이스라엘을 다시 침공하려는 모의에 언제나 반대하였을 것이다. 저들은 똑똑히 보았다. 여호와께서 불 말과 불 병거를 동원하여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지키시고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지를 보았다.
칼과 창과 활로 무장하고 엘리사를 죽이겠다고 쳐들어 왔던 아람 나라의 군대에게 떡과 물을 배불리 먹게 하고 되돌려 보낸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선대와 사랑은 아람 나라로 하여금 다시는 이스라엘을 쳐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랑의 힘은 무기보다 강하다. 사랑의 힘은 칼과 창보다 강하다. 사랑과 용서와 관용의 힘은 사람의 마음을 녹이는 힘이 있다.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롬12:19-20)고 하였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고도 하셨다.
오늘 날 우리는 국가, 개인, 사업, 직장, 교회 등등 모든 면에서 마치도 아람의 군대에 포위 된 것과 같은 두려운 순간을 만날 때가 많다. 각색 질병과 사고와 사건과 삶의 별의 별 위기들이 계속하여 우리 마음의 평화를 깨트리려 하고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랑의 십자가, 용서의 십자가, 화목의 십자가, 새 생명과 부활의 십자가이다. 오늘도 성찬 가운데 죄 사함과 구원의 은총이 각 사람의 영혼에 넉넉하게 임하기를 기도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