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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나를 본받으라(빌3:17-21) 2017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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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7-10-23 07:23 조회 17,692 댓글 0
 
                           나를 본받으라(빌3:17-21)            2017. 10. 22

‘롤 모델’(Role Model)이란 말이 있다. 영어 표기이지만 외래어로 자리 잡은 표현이다. <한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자기가 해야 할 일이나 임무 따위에서 본받을 만하거나 모범이 되는 대상”이라고 했다. ‘역할 모델’이라고도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같은 시대의 인물을 롤 모델로 삼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의 나중을 아직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보다 이 세상을 앞서 살다가 떠난 이들 중에서 롤 모델 삼을 만한 이들이 누구인가.
 
혹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공자, 맹자, 석가모니, 마호메트와 같은 위치에서 해석하려고 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시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참 인간이시며 참신이시다. 예수는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란 말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를 만난 후에 늘 주님을 본받고자하였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나를 본받으라”고 편지하고는 하였다. 바울 안에는 바울이 사는 것이 아니라 바울은 죽고 예수로 사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고백 그대로이다.
 
석가나 공자나 맹자 모두 보통 사람들이 아니긴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저들과 같은 격으로 놓고 보면 안 된다. 예수는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에게만이 구원이 있다. 예수만이 죄와 사망을 이기는 권세가 있다. 예수에게만이 영생의 길이 있다.
 
공자(BC551-479)는 주전 551년 전에 중국 노나라에서 태어났다. 73세를 살았다.
맹자(BC371-289?)는 주전 371년에 중국 추나라에서 태어났다. 82세를 살았다.
석가모니(釋迦牟尼, Śākyamuni, BC624- 544)는 80년을 살았다. 석가는 주전 624년 전에 오늘 날의 네팔 남부와 인도 국경의 히말라야 산맥에 위치한 샤카 족이 통치하던 작은 왕국의 왕자로 태어났다. ‘석가모니’란 ‘샤카 족의 성자’라는 뜻이다. ‘샤카’라는 뜻은 ‘능하고 어질다’는 의미이다. ‘석가모니’라고 부를 때의 ‘모니’는 ‘성자’라는 뜻이다. 한자로는 ‘불타’(佛陀) 혹은 ‘불’(佛)이라고 하고 영어로는 ‘buddha’라고 한다. 석가는 공양 받은 음식을 먹은 후 식중독에 걸렸고 이질로 고생하다가 눈을 감았다. 그는 마지막 목욕을 마치고 사라나무 숲속으로 들어가 북쪽을 바라보고 오른 쪽으로 누워서 두 발을 포갠 다음에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지막 까지 설법을 하다가 눈을 감았다.
이 세상의 각 종교마다 자신들이 존귀하게 여기고 숭배하는 대상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가 다 인생일 뿐이다. 물론 그들을 성자 혹은 성인 혹은 성현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그러나 공자나 맹자나 석가가 예수 이후에 태어난 인생들이라면 저들 모두가 예수를 주목했어야 한다. 공자나 맹자나 석가가 우리를 구원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 인간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다.
 
기독교는 그 어떤 종교처럼 도덕이나 윤리나 수양이나 교훈을 가르치는 정도의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다. 하나님 아버지는 인간과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인간을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요 메시아이시다.
 
아브라함 때에는 아브라함만한 인물이 없었다. 모세 때에는 모세만한 인물이 없었다. 사무엘 선지자 때에는 사무엘만한 선지자가 없었다. 다윗 때에는 다윗만한 인물이 없었다. 그러나 사무엘만 선지자가 아니다. 아브라함도 선지자요 모세도 선지자요 다윗도 선지자였다.
 
예수께서 12제자들을 부르시고 저들과 함께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에 어느 날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가셨다. 그 곳은 유대 땅이 아니다. 거기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질문하셨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그 때 제자들이 세상 사람들이 예수를 바라보는 견해를 전달하였다. 그 당시 세상 사람들은 예수께 대하여 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혹은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여겼다.
 
그 때에 예수께서 물으셨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여기에서 우리도 스스로에게 물어야 하는 질문이 있다. “예수는 내게 있어서 누구이신가”하는 질문이다.
 
베드로는 신앙생활의 우여곡절을 거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증인이 되었다. 성령 받은 초대교회의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천하 만방에 전파하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한 때는 예수를 부인하고 배반하고 저주하고 도망 다니고 숨고 하던 나약한 베드로였지만 그의 나중은 달랐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다. 다메섹의 변화 이전의 사울은 교회의 핍박자였다. 예수 미믿는 이들을 박해하고 잔해하던 살기등등한 유대주의자였다. 그런 그가 다메섹 체험 후에 달라졌다. 그 후로 그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전파하는 성령 충만한 사도의 길을 걸어갔다. 다메섹 체험 이후의 바울은 날마다 주를 닮아가는 삶을 살아갔다.

빌립보서 3장 17절에서 말씀하는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는 말씀은 사도 바울 자신이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생을 살아가고자 씨름했나를 증거 하는 단면이 아닐 수 없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면서도 그와 같은 말을 전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4:16)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11:1)
 
바울은 편지할 때마다 이처럼 감히 자신을 본받으라고 강조하였다. 이는 그가 평소에 날마다 순간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삶을 살아갔는가를 입증하는 내용이다. 엄마가 키우는 어린 아들에게 “너만이라도 제발 네 애비를 닮지 말아라.”하고 말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말인가. 그러나 바울은 스스로 달랐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러면 본 받는 신앙생활이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을 말씀하는 것일까.
 

눈 여겨 보라.
사도 바울은 자신을 본받을 뿐만 아니라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이라고도 말했다. 여기서 말씀하는 ‘우리’란 빌립보서 2장의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포함한 말씀이다. 그렇다. 사도 바울은 언제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아가고자 힘썼다. 뿐만 아니라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 또한 주님을 신실하게 믿고 따르며 섬기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주님을 본받는 삶이란 어떤 모습인지를 깨닫고 늘 도전과 교훈을 받으며 지냈다. 바울을 만나면 누구라도 그런 도전을 받고는 했다.
바울은 이어서 강조한다.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
 
우리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이런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어른, 아이, 청년과 노인 누구든지 예수를 본받으며 살아가는 이들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그리고 예수를 본받고 살아가는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에서 교훈과 도전을 받아야 한다. 예수 믿는 이들은 생각과 말과 행동 하나 하나가 달라야 한다.
 
이는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학교에서나 세상 그 어디에서나 다 마찬가지이다. 눈여겨 볼만 해야 한다. “눈여겨보라”는 ‘스코페이테’라는 헬라어의 뜻은 “자세히 관찰하다.”라는 의미이다. 그렇지 않나. 눈여겨보면 볼수록 한심하고 실망스러운 사람이 있고 눈여겨보면 볼수록 사람이 분명히 다르고 뭔가 깊이가 있고 점점 영적 매력이 있는 사람이 있지 않나.
 
사도 바울이 말하는 자신을 본받으라는 뜻이 뭘까.
핍박자, 박해자, 훼방자, 폭행자에서 변화 받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의 삶을 산 바울을 본 받으라.
전도자 바울을 본 받으라.
십자가 신앙과 부활 복음에 붙잡힌 생을 산 거듭난 바울을 본 받으라.
분명한 재림 신앙에 붙잡혔던 바울을 본 받으라.
땅 끝 선교의 열정의 사람이요 이방의 선교사였던 바울을 본 받으라.
오직 예수 외에는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기던 바울을 본 받으라.
옛날의 화려한 경력과 자랑을 분토처럼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높이고 자랑하며 살아가던 바울을 본 받으라.
가는 곳마다 교회 개척자의 삶을 살던 바울을 본 받으라.
그 어느 누구도 감히 따라갈 수 없는 13편의 성경의 기록자로 쓰임 받은 바울을 주목하라는 것이다.
몸은 비록 약하고 병으로 고생하며 지냈으나 그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불타오르는 복음 전파의 열정으로 가득 찼던 바울을 본 받으라.
가는 곳마다 기사와 이적을 행하던 하나님의 사람, 바울을 본받으라.
온갖 고난과 역경과 핍박과 환난을 극복하며 지침이 없는 전천후 전도자의 삶을 살아간 바울을 본 받으라.
앞치마만 얹어도 병자가 낫도록 하나님의 능력의 종으로 쓰임 받던 바울을 본받으라.
전파하는 주님의 말씀마다 말씀에 권위가 있었던 바울을 본받으라는 말씀이다.
 
사도 바울 당시에 예수를 본 받고 사도 바울을 본받기는커녕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에 대하여 원수로 행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렇게 살아가는 이들은 자신들의 배를 신처럼 여긴다. “먹자, 마시자, 취하자, 즐기자”하고 말하며 잔뜩 먹고 마셔서 터질 듯이 부른 배를 두드리며 살아간다. 바울은 그런 이들에게 경고하였다.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3:19) 공동번역성경으로 읽으면 이렇다. “그들의 최후는 멸망뿐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뱃속을 하느님으로 삼고 자기네 수치를 오히려 자랑으로 생각하며 세상일에만 마음을 쓰는 자들입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배’ 혹은 ‘뱃속’이란 ‘코일리아’는 ‘인간의 온갖 육체적 욕망’을 일컫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대로 살아가고 말초신경의 감각의 만족대로만 살아가는 자들의 끝은 심판을 피할 수 없는 멸망이다. 고린도전서 6장 13절에 보면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고 하였다.
 
유다서 1장 11절에 보면 이 같은 자들에 대하여 “화 있을진저.”라고 경고하였다.
그렇게 살아가는 인생들은 가인의 길로 행하고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가고 고라의 패역을 따라 사는 자들로서 멸망을 받게 될 것을 경고하였다.  그 앞 절인 유다서 1장 10절에 보면 그런 인생들은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고 하였다.
 
울산대학교 법학과 이정훈 교수는 요즘 신문과 방송과 인터넷 매체 등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초등학교부터 ‘반야심경 해설서’를 볼 정도로 종교 철학에 관심이 많았다.  동국대부속고등학교를 나와 1993년 동국대 불교학과에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대학 2학년 때는 머리를 깎고 출가하여 승려가 됐다. 그러나 삶의 근원적 문제, 고통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니 회의감이 들었다. 밥을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그런 느낌이었다. “나는 어떤 존재이며,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에 대하여 알고 싶었다.” 그는 승려 생활을 시작했지만 마음속의 공허함은 채워지질 않았다. 그러다 법철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 교수는 “법철학을 연구하며 좌파법철학에 빠지니 교회는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원수처럼 보였다.” 고 자신의 지난날을 회고하였다. 그 후 서울대 법학대학원에 들어갔다.  1999년엔 군종장교인 군승으로 입대하였다. 군대에서 불교의 포교를 위해 군 법당을 건축했다. 군종장교 전역 후 환속했다. 학승이 돼 사회를 개혁하고 싶어서였다. 이 세상의 ‘걸림돌’인 교회를 깨어 없애기 위해서 장 칼뱅이나 20세기 최고의 신학자였던  칼 바르트 등의 책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그는 말한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배후에는 장 칼뱅과 존 로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구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핵심엔 종교개혁이 있어요. 그게 서구 세계의 ‘심장’이죠. 마침 한국교회의 영성은 바닥에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마음이 급했습니다. 영성이 떨어져 있을 때 적의 심장을 쳐서 쓸어버려야 한다는 비장함이 생겼습니다.” 
이정훈 교수는 불교 신자였던 자신이 개신교로 회심하게 된 계기를 털어 놓았다.  그는 ‘종자연’이라고 불리는 ‘종교자유정책연구원’을 조직하고 기획해서 2005년부터 한국 교회를 무너트리려는 일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종자연은 ‘종교의 자유도 인권’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민사소송과 입법청원, 헌법소원 심판청구, 진정, 신고 등으로 한국교회를 사회와 국가에 악한 영향을 미치는 종교편향 집단으로 내몰아 갔다. 요즘은 고속도로 대형 광고판에서 다시 볼 수 있지만 한때 광고에 어려움을 겪었던 고려은단의 ‘Jesus loves you’ 광고판 제거 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공립학교내 종교 활동 금지, 공무원의 종교적 중립 강화,  교회 내 투표소 설치 반대 등도 관철시켰다. 학내 종교자유를 쟁취하겠다며 한 동안 시끌시끌했던 대광고등학교 기독교 수업과 예배 반대 운동에도 배후에서 앞장섰던 인물이 바로 ‘종자연’의 그였다. 
마치도 교회를 핍박하기 위해 혈안이 되 있던 사울처럼 그렇게 살기등등하던 그가 2007년 여름 어느 날 변했다. 기독교를 알아야 공격할 수 있다고 여기고 청취하던 기독교 TV방송을 시청하던 중에 이런 설교 말씀이 그의 귀에 선명하게 들려 왔다.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평소대로 ‘아이고, 쇼하네. 너나 잘하세요.’ 하고 조롱하는 말을 하려던 순간 그의 혀가 굳어졌다.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강력한 전류가 흘러 내렸다. TV, 맞은편 소파에서 응접실 바닥으로 그대로 고꾸라졌다. “그 자리에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희한하게도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 신학 서적에서 봤던  ‘전적 부패’가 뭔지 몸의 구석구석, 세포까지 느껴졌습니다. 의롭다고 자만했던 저의 죄성이 낱낱이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자리에 내가 앉아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짧은 시간에 죄인을 살리신 창조주 하나님과 구세주이신 예수님이 확실히 믿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삶은 그 순간부터 극적으로 변화되었다. 길을 가다가 교회의 십자가만 바라 봐도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렸다. 2008년 서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울산으로 내려가 울산대학교 법학과에서 교수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현재 사상적 기반이 취약한 한국교회에 종교자유 보호를 위한 법철학을 연구하고 수혈하는 일을 사명처럼 여기며 뛰어 다니고 있다. 이 교수는 “인간의 존엄성은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답을 얻을 수 없다.”고 설명하였다. 이정훈 교수! 그가 드디어 한 인생으로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 것이다.
 
신앙생활이 무엇인가. 사도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늘나라 시민답게 살아가라.
이 세상에는 237개의 국가가 있다. 국제법상 인정된 나라를 포함하면 242개다. 유엔에 속한 나라만도 193개국이다. 그 중에는 미국과 같은 강력한 나라도 있고 중국이나 인도와 같은 10억이 넘는 인구를 가진 나라도 있다. 인구가 가장 적고 면적이 가장 작은 나라는 바티칸(Vatican이다. 바티칸은 면적이 0.44㎢로 여의도 면적의 20분의 1에 불과한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다. 인구가 1000명밖에 되지 않지만 로마 교황청이 그 곳에 있어서 세계 천주교의 중심을 이루는 엄연한 나라다. 아이슬란드는 인구가 33만 명뿐이다. 그렇게 적은 인구를 가진 아이슬란드가 2018 FIFA(국제축구연맹) 러시아 월드컵 유럽지역 예선 I조에서 1위에 올랐다. 엄청나게 잘 사는 나라도 있고 너무나도 못사는 나라도 있다. 자유로운 나라도 있고 북한처럼 백성들을 억압하는 불행한 나라도 있다.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나 동남아시아에는 너무나 열악하게 살아가는 나라들이 적지 않다.
이처럼 어느 나라에서 태어나서 사느냐, 어느 나라의 국민으로 살아가느냐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바울은 태어날 때부터 로마의 시민권자였다. 바울이 20절에서 말씀하는 ‘시민권’이란 ‘국가’ 혹은 ‘나라’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구원 받은 성도는 하늘나라의 시민권자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신 동안에 말씀하신 모든 비유의 중심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인 하늘나라였다. 왜일까. 하나님의 나라는 가상의 세계가 아니라 실존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지구 저편으로 날아가면 우리가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나라에 도착하게 된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실존하는 영적 세계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다운 삶을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시민이면서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아들다운 삶을 사셨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이셨다. 나 한 사람이 한 국가, 한 도시, 한 가족을 대표하는 것이다. 외국에 나아간 대사나 대사관의 직원이나 여행객 한 사람이 파송 받은 상대국가나 방문 국에서 잘못을 범하거나 부끄러운 일을 저지르면 국제적으로 자기가 속한 본국에 크게 망신을 끼치는 경우처럼 말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권자이다. 그러므로 천국시민다운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중국에 가니까 “나의 작은 한 걸음이 문명 대국을 향한 큰 걸음”이라는 내용의 표어를 사방에 써 붙인 것을 보았다.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 가니 인도처럼 힌두교 신앙으로 소를 신을 섬겼다. 시내 한 가운데서 신인 소가 쓰레기장을 뒤지고 있었다. 가는데 마다 도시 한 가운데에도 쓰레기가 넘쳐났다. 멀리 바라다 보이는 에베레스트 산맥의 아름다움과 비교되는 광경이었다.
 
우리가 어느 나라에 가 보면 그 나라의 음식과 의복과 가옥 구조와 풍습과 일상을 체험하게 된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마음속이다. 하늘에 시민권을 두고 살아가는 성도는 그 생각이 달라야 한다. 그 마음가짐이 달라야 한다.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태도가 달라야 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2절에서 이렇게 권면하였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세상을 본 받지 말라고 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하나님을 본 받고, 예수님을 본 받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살아가야만 한다. 내가 성도로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라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며 살아가야 한다.
 
이 세상의 칠십년 혹은 팔십년의 생애는 나그네 인생길이다. 성도는 하늘나라의 시민이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1장 1절에서 성도들에 대하여 ‘흩어진 나그네’라는 표현을 썼다. 맞다. 나그네이다. 그러나 그냥 하룻밤 낯 설은 곳에서 묵고 가는 나그네가 아니다. 베드로전서 1장 2절에 보면 흩어져 살아가는 나그네인 성도들의 삶을 분명하고 명확하게 규정해 주었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했다. 맞다. 그렇지 않나. 하늘나라 시민권자인 성도들은 이 땅에서 처처에 흩어진 나그네로 살아가지만 하나님이 택정하신 자들이다. 하나님이 창세전에 택하시고 미리 아신 자들이다.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신 자들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라고 이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신 자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통하여 죄 사함 받고 자녀의 권세를 덧입혀 주신 자들이다.
 
베드로는 다시 권면하였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 2:11-12) 하늘나라 시민답게 살아가는 신앙의 성숙과 성화의 은총이 있기를 축원한다.
 
 
주를 기다리라.
신앙생활은 주를 기다리는 생활이다. 유대인들과 믿음의 백성들은 이사야나 미가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를 700년이 넘도록 기다렸다. 우리가 대강절 즉 강림절이 되면 기다림의 찬송을 부리지 않나. 105장 ‘오랫동안 기다리던“이란 강림절 찬송에 보면, “오랫동안 기다리던 주님 강림하셔서 죄에 매인 백성들을 자유 얻게 하시네  주는 우리 소망이요 힘과 위로 되시니 오래 기다리던 백성 많은 복을 받겠네” 라고 찬송한다.
 
세상이 살기 좋아 지면 재림 신앙이 흐릿해진다. 우리나라가 일제의 핍박을 받고 6.25 전쟁을 겪고 하던 시절에는 재림 찬송을 많이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요즘은 재림 찬송을 그 때처럼 자주 부르지 않는다. 174-181장까지의 여덟 장이 재림 찬송이다. 그 중에 176장 “주 어느 때 다시 오실는지”라는 재림 찬송을 보면 가사가 이렇다.

“주 어느 때 다시 오실는지 아는 이가 없으니
 등 밝히고 너는 깨어있어 주를 반겨 맞으라
 주 안에서 우리 몸과 맘이 깨끗하게 되어서
 주 예수님 다시 오실 때에 모두 기쁨으로 맞으라”
2. 주 오늘에 다시 오신다면 부끄러움 없을까
  잘 하였다 주님 칭찬하며 우리 맞아 주실까
3. 주 예수님 맡겨주신 일에 모두 충성 다했나
  내 맘속에 확신 넘칠 때에 영원 안식 얻겠네
4. 주 예수님 언제 오실는지 한 밤에나 낮에나
  늘 깨어서 주님 맞는 성도 주의 영광 보겠네
   (후렴)주 안에서 우리 몸과 맘이 깨끗하게 되어서
  주 예수님 다시 오실 때에 모두 기쁨으로 맞으라
 
사도 바울에게는 이처럼 재림 신앙이 분명하였다. 20절의 ‘기다리노니’라는 헬라 말은 ‘간절히 열심히 기다리는 것’을 의미한다. 마태복음 25장의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어리석은 다섯 처녀의 비유처럼 등불과 기름을 예비하고 신랑 오기를 기다리는 신앙이 주님의 오실 날을 기다리는 지혜로운 성도의 신앙이다. 갈라디아 5장 5절에서는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라고 하였다. 히브리서 9장 28절에 보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고 하였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신 동안에 승천과 재림에 대하여 그림처럼 분명하게 교훈해 주신 말씀이 요한복음 14장 말씀이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1-3)
 
우리의 구주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를 본받는 믿음으로 살아가다 보면 때가 되면 주께서 강림하셔서 성도들을 신령한 몸으로 변화시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백성의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실 것이다. 우리의 낮고 천한 몸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스러운 몸의 형체로 부활 승천 영생하게 해 주실 것이다.
 
이와 같은 은총과 약속된 복을 모두 다 누리는 우리가 되기를 축복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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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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