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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이적을 보이시는 하나님(미7:14-20) 2017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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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7-05-01 22:22 조회 16,304 댓글 0
 
이적을 보이시는 하나님(미7:14-20)        2017. 4. 30


66장 분량의 이사야서나 52장 분량의 예레미야서에 비하면 선지서의 말씀들 중에서 미가서는 그리 긴 말씀의 분량은 아니다. 7장 분량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미가 선지서의 역사적인 비중은 이사야서나 예레미야서와 그 어깨를 나란히 한다. 미가서는 이사야서처럼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아 예언이 포함되어 있는 소중한 선지서이다. 미가서 5장 2절에는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들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는 말씀이 바로 그 말씀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시되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이라는 예언이 바로 미가서에 나오는 예언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영원까지 계신 분이심을 선포하고 있다. 어느 날 우현이 나사렛의 마리아의 태를 빌려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그의 근본이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는 강조인 것이다. 

미가는 농촌 사람이지만 지리적으로 앗수르와 애굽의 군대가 자신이 살던 그 지역에서 전쟁하는 전쟁의 참상을 보았다. 그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미가는 이스라엘의 대외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에 기초한 정의감이 강했고 가난한 자들에 대하여 불쌍하게 여기는 동정심도 컸다. 

‘미카’라는 이름의 뜻은 “누가 여호와와 같은 자인가?”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미가 선지자가 언제 사람인지, 어디 사람인지에 대하여는 미가서 1장 1절이 알려 주고 있다. 미가서 1장 1절에 보면, 그는 남 유다의 20명의 왕들 중에서 제 11, 12, 13대 왕이었던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때에 활동한 인물이다. 주전 734-701년이 그가 선지자 활동한 기간으로 알려져 있다. 주전 722년에 북 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하였으니 그와 같은 시대에 활동하던 예언자였다. 

그가 태어나 살던 곳은 ‘모레셋’이란 곳이다. 모레셋은 예루살렘 남서쪽에 위치한 산악지대의 농촌 마을이다. 그 곳은 당시에 블레셋의 가드 지역과 연접한 곳이었다. ‘가드’라는 지명이 우리에게 익숙한 이유는 무엇일까. 다윗 때에 다윗이 물매 돌을 던져 이긴 블레셋의 거인 장수 골리앗이 가드 사람이기 때문이다.  

예레미야 26장 18절에 보면, 예레미야는 미가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들에 대하여 예언한 말씀을 비중 있게 인용하여 예언하고 있다. 미가서 4장 3절과 이사야서 2장 4절은 서로가 같은 내용을 사용하여 예언한 말씀인 것을 대하게 된다. 

미가서 4장 2절에 보면,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와 똑같은 말씀이 이사야서 4장 3절에서도 인용되기 때문이다. 

미가서에는 3차례에 걸쳐서 “들으라”는 강조를 담고 있다. (1:2, 3:1, 6:1) “들으라”는 것이다. “백성들아 들으라, 통치자들아 들으라, 이스라엘아 들으라.”는 형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악을 행하며 범죄하며 우상을 숭배하며 세상적인 탐심에만 붙잡혀 살아가는 백성들과 통치자들에게 경고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목소리를 높여서 말씀하셔도 백성들이 그 말씀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나. 선지서의 모든 말씀들은 그 말씀을 듣는 이들이 귀로 들을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듣고 가슴으로 들어서 깨우치고 회개하고 변화되고 주께로 가까이 돌아오라는 초청이시기 때문이다. 만약에 듣지 아니하면 심판하시리라는 말씀과 함께 진심으로 회개하고 그 지은 죄를 깨닫고 주께로 돌아오면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의 모든 죄와 악과 허물을 용서하시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하시겠다는 회복의 희망을 말씀하고 계시다.

미가서 6장 8절은 미국의 제 39대 대통령을 지낸 민주당 출신의 지미 카터(1924- , 재위 1977-1981) 대통령의 취임 연설에서 인용한 성경 말씀으로 우리에게 더 잘 알려져 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He has showed you, O man, what is good. And what does the LORD require of you? To act justly and to love mercy and to walk humbly with your God.)

미가서 맨 마지막 분량인 본문은 희망을 버리지 않던 미가의 기도로 시작된다. 미가서 7장 14절은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상을 고발하며 하나님의 용서와 돌보심을 구하며 기도하는 내용이다. 미가 선지자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출애굽하게 하시던 때의 이적과 같이 “내가 그들에게 이적을 보이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우리 하나님은 이적을 보이시는 하나님이시다. 

목자(牧者)이신 하나님.
하나님은 양떼를 이끄는 목자처럼 언제나 어디서나 섬세하신 손길로 양떼를 돌보신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들을 양떼처럼 이끄시며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며 시원을 물을 마시게 하시고 좋은 꼴을 먹게 하시는 목자와 같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은 미가서 7장 10절의 말씀처럼 “네 하나님 여호와가 어디 있느냐”고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자들을 조롱한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자신의 경험, 자신의 실력, 자신의 지위, 자신의 건강, 자신의 재물, 자신이 쌓아 놓고, 모아 놓고, 이루어 놓은 그 성을 왕국 삼고 자신의 배를 두드리며 살아가려 한다. 

마치도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예수의 비유에 나오는 어리석은 농부의 모습과도 같다. 어느 해에 농부가 농사해서 풍년이 되었다. 앞으로 몇 년 동안 땀 흘려 수고하며 애 쓰고 농사하지 않아도 놀고먹고 즐기며 살만큼 넉넉한 농사가 되었다. 창고를 늘려 짓지 않으면 그 많은 풍성한 곡식들을 다 쌓을 곳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 때 농부가 속으로 말했다. “이렇게 농사가 잘 되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그런데 그 밤에 하나님이 그 농부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눅12:20) 여기까지 비유로 말씀하신 후에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비유는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예수께 찾아 와서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라는 요청의 말을 들으신 후에 비유로 대신 대답해 주신 말씀이시다. 

그런데 미가의 예언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날을 겪어야 했다. 14절의 “옛날같이”라는 기도가 무엇인가. “옛날같이 바산과 길르앗에서 먹이시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다. “바산”이란 풍요의 상징과 같은 땅이다. “바산의 암소”라는 성경의 표현은 바산의 풍요함을 상징하는 말이다. 모세의 노래인 신명기 32장에 보면 “바산에서 난 숫양과 염소와”라는 표현이 있다. 이처럼 지리적으로 ‘바산’은 풍요한 곳을 상징하는 지명이다. 길르앗이란 곳도 마찬가지다. 길르앗은 요르단의 동쪽에 위치한 기름진 목초지이다. 민수기 32장 앞부분에 보면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들이 그 곳, 길르앗의 풍요로운 목초지를 보고 자신들의 양떼를 먹일 수 있도록 그 땅을 달라고 간청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지금 어떻게 되었다는 말씀인가. 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미가가 이런 기도를 드려야 했는가. 옛날에 그 풍요롭고 기름지던 목초지를 왜 빼앗기게 되었는가. 미가의 기도 내용이 무엇인가. 14절에 보면, “갈멜의 삼림에 홀로 거주하는 주의 기업의 양 떼를 먹여 주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다. 목축하는 이들은 양떼를 이끌고 널따란 들판의 광활한 목초지와 시원하게 흐리는 물줄기를 따라서 이동하길 원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어찌하다가 “주의 기업”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갈멜의 산림 속의 척박한 산악지대에서 홀로 지내듯이 외롭게 숨어서 지내는 양떼와 같은 신세가 되었는가. 이스라엘이 범죄함으로,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함으로 그 풍요롭고 좋던 길라앗과 바산의 목초지를 빼앗기고 갈멜의 깊은 산속의 척박한 환경에서 뜯어 먹을 풀을 찾아 헤매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는 내용의 기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가의 기도에는 여전한 희망을 붙잡고 기도하고 있다.

“주의 지팡이로 인도해 주시고, 주의 기업인 양떼와 같은 주의 백성들을 먹여주세요.” 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 미가 선지자가 기도하는 “주의 기업의 양떼”라는 이 기도 내용에 주목해야 한다. 양떼는 양떼인데 그냥 양떼가 아니라 주의 기업인 양떼이다. 여기서 말씀하는 ‘기업’이란 ‘유업’을 말한다. 그렇지 않나. 가난한 자에게는  단 한 마리의 양이라도 그 양이 그 가정의 소유의 전부라면 그 양 한 마리가 그 가장의 희망인 기업이며 유업이 될 수 있다. 왜 그런가. 그 한 마리에서 시작해서 열 마리도 될 수 있고, 백 마리도 될 수 있고,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떼도 이룰 수 있는 축복의 불씨와 같은 것이니 말이다.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은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에게 이어서 내려오던 유업인 양떼를 한 마리도 유업으로 이어 받지 못했다. 형이 먼저 받아야 할아버지 이삭으로부터의 축복 기도를 먼저 받고 나서 결국은 형 에서의 분노를 견디지 못해서 형과 함께 지내던 부모님의 집으로부터 도망쳐 나와야 했다.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가서 거기서 지냈다. 거기서 일했고 거기서 장가들었다. 그런 세월이 꿈처럼 20년이 흘러 갔다. 하나님이 먹이고 돌보지 않으셨다면 야곱은 장인의 집에서 늙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 야곱의 답답한 기도를 하나님이 응답해 주셨다. 그렇게 해서 얻은 재산이 아롱지고 다롱지게 태어난 자기 몫의 양떼들이다. 야곱은 아버지의 집을 떠난 지 20년 만에 그 많은 양떼와 염소 떼와 소떼와 낙타를 이끌고 고향으로 향하였다. 20년 전에는 지팡이에 보따리 하나 메고 떠났는데 두 떼의 많은 짐승들과 4 아내와 11아들과 외동딸 ‘디나’까지 대 가족을 이루었다. 

그렇게 시작해서 번성한 민족이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 민족인데 지금 ‘갈멜’의 산 속에 숨어 지내듯 홀로 거주하며 외롭고 고독하고 불안하고 답답하고 초조한 운명이 되었다. 왜 이렇게 되었나. 하나님의 뜻을 떠나 범죄하고 우상 숭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이다. 그처럼 하나님이 자기 백성 삼으신 동족들이 겪는 고난의 한 가운데에서 미가 선지자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주의 지팡이로 인도하시고 주의 기업인 양 떼를 먹이시옵소서.”
지금 비록 하나님의 심판 앞에 위기를 겪고 있고 갈멜의 산 속 깊이 피하고 쫓겨 숨어 들어가 사는 신세처럼 되었지만 “하나님! 이 양 떼 같은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고 주의 지팡이로 인도해 주시고 주의 기업인 양떼를 먹여 주세요.”하고 절절히 간절한 심정으로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만이 인생을 배 불리 먹이시고 갈 길을 인도하시고 곰과 사자가 우 굴대는 험한 세상에서 보호하시는 양떼의 목자와 같은 분이심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매사에 “내가, 내가, 내가.....”라고 말하며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아니하신다. 

오늘 날의 우리들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개인이든 가족이든, 어느 기업의 경영이든 한 국가이든 민족이든 다 마찬가지가 아닌가. 내 개인의 건강이나 안녕을 지키는 것이 나 자신의 힘이나 지혜로 가능한가. 한 국가의 안전이나 한 민족의 운명을 지켜 나가는 것이 군대만의 힘이나  정치인 몇 사람만의 힘만 가지고 가능한가. 

누가 우리를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인가. 우리는 선지자 미가처럼, 하나님의 사람 다윗처럼 고백할 수 있어야겠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 때 여호와께서 새롭게 이적을 보여 주실 것이다. 


지존(至尊)하신 하나님.
미가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이 대답하셨다. “내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과 같이 내가 그들에게 이적을 보이리라.”(미7:15) 모세 때의 출애굽을 하나님도 이적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시다. 그렇지 않나. 200여만 명의 히브리 노예들이 홍해를 육지처럼 건넌 것이 하나님이 보여 주신 이적이다. 그 많은 무리들에게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여 주시고 배부르게 해 주신 것이 하나님의 이적이다. 반석에서 생수가 터져 나와서 그 많은 광야의 백성들과 짐승들이 해갈하며 지낸 것이 하나님의 이적이다. 마라의 쓴 물이 단 물 되어 마시게 된 것도 하나님이 보여 주신 이적이다.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 뜨겁게 작열하는 태양 볕으로부터 선선한 그늘을 만들어 주신 것이 하나님이 보여 주신 이적이다. 밤에는 불기둥으로 갈 길을 인도하시고 밝혀 주신 것도 하나님이 보여 주신 이적이다. 

하나님을 불평하고 원망하다가 불 뱀에 물려 죽어 가던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만들어 장대 높이 매어 달게 한 놋 뱀을 쳐다보는 이들마다 죽지 않고 살게 하신 것이 하나님이 보여 주신 이적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이스라엘 백성들을 죄와 악에서 건져내시기 위해서 앗수르나 바벨론의 손아래 넣으셨을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랑하신다. 그래서 때가 되면 이방 나라의 손아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내실 것이다. 이방 나라들은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이적을 보고 그들의 손으로 입을 막고 그들의 귀가 막힐 것이다. 하나님이 이적을 보이시면 힘이 있던 백성들이라고 뱀처럼 티끌을 핥는 날이 올 것이다.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이적 앞에서 땅에 기는 벌레처럼 떨게 될 것이다. 숨어 지내던 좁은 구멍에서 나와서 두려워 떨며 말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주로 말미암아 두려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주와 같은 신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18절의 표현 그대로이다.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이 세상에 신으로 모시는 이방 사람들의 그 모든 신들, 일본이나 인도 사람들이 신이라고 섬기는 그 많은 우상들 수백만 혹은 수 억개의 우상을 다 합쳐도 이적을 보이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대신 할 신이란 이 땅 그 어디에도 없다. 우리나라로 하면 전국 각처의 아름다운 산자락마다 나무를 깎아 만들고 돌을 다듬어 세우고 금과 은과 동을 녹여 부은 그 많은 우상들을 다 모아도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과 같은 신은 없단 말이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창조주이시며 섭리주이시며 만물의 주관자이시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이시다. 그래서 ‘지존(至尊)하신 하나님’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우리가 그런 가사로 지존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경배하지 않나.

지존하신 주님 이름 앞에 
모두 무릎 꿇고 다 경배해 
거룩하신 주님 보좌 앞에 
엎드려 절하세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주 
하나님의 영으로 경배 드리리 

우리는 지존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찬송하고 기도하고 섬기고 따르고 의지한다. 지존하신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럴 때에 행복과 기쁨과 감사와 만족과 보람과 삶의 의미를 더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애굽의 바로가 보낸 군대와 마병을 홍해 가운데 수장시키셨다. 
하나님은 모세 때에 광야 길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는 길을 막았던 미디안의 군대를 멸하셨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떠난 죄악의 도성 소돔과 고모라에 하늘에서 유황불을 비 내리듯이 내려 심판하셨다. 
하나님은 전쟁하지 않으시고 앗수르의 군대 185,000명을 송장 되게 하셨다. 
하나님은 싸우는 방법이 아닌 방법으로 사마리아 성을 포위하고 있던 아람나라의 군대를 모두 다 도망가게 하셨다. 급하게 도망친 아람 나라 군대는 그 많은 전리품들을 모두 다 버리고 도망가 버렸다. 

지존하신 하나님이 이적을 보이시면 별의 별 이적들이 다 일어났다. 그 지존하신 성경의 하나님이 오늘 날 우리가 믿고 경배하고 예배드리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은 이미 골고다 언덕에서 사탄의 권세를 깨트리셨다. 그 분은 양 손과 발에 못 박히셨고 옆구리에 찌른 창으로 인해서 심장의 피와 물 한 방울까지 다 쏟으시고 운명하셨으나 “다 이루셨다.” 17절에서 대하는 미가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은 사탄의 세력을 깨트리시고 승리하시는 하나님의 지존하신 권세를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탄의 세력을 티끌을 핥는 뱀처럼 짓 밟으셨다. 땅에 기는 벌레처럼 진멸하셨다. 지존하신 하나님의 완전한 승리 앞에 다시 고개를 들 사탄의 세력이란 없다. 

신자의 나중과 교회의 나중 영광이 이러할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의 약한 자들을 섬기고 돌보아야 할 것이나 복음의 최후 승리를 믿고 나가는 하나님의 군대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권세는 에베소서에서 고백하고 증언한 사도 바울의 증언대로 성취되고 완성될 것이다.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엡1:20-23) 이런 영광스러운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권세가 지존하신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영원무궁할 것이다. 아멘 


사랑이신 하나님.
우리 하나님은 죄악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다. 14절과 18절의 ‘기업’이란 ‘inheritance’ 즉 ‘유업’을 말씀하신다. 지난  주일에 베드로전서 1장에서 대하였던 그 같은 말씀이시다. 그 유업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이라고 하셨다. 성도는 그 유업을 잇는 자라고 하셨다. 

세계 최고의 부자인 빌 게이츠(Bill Gates, 1955- )의 2017년 초 재산은 860억불이다.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98조원 정도이다. 1년 만에 12조 이상이 늘었다. 그의 재산은 1초마다 평균 150불씩 늘어나고 있다. 그에게는 두 딸과 한 아들, 삼 남매의 자녀가 있다. 21살, 14살의 딸과 17살 된 아들이다. 그러나 빌 게이츠는 그 많은 재산을 재단의 기금으로 만들고 자녀들에게는 세상을 보람되게 살아갈 수 있는 필요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할 뿐 유산을 분배하는데 비중을 두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아주 조금씩만 골고루 나누어 줄 것이라고 했다. 그 조금이 1000만 불이다. 최근 1불이 1140원이다. 그러므로 1000만 불은 114억이다. “인생이란 결코 공평하지 않다. 이 사실에 익숙해져라.” 이것은 빌 게이츠가 한 말 중의 하나이다. 빌 게이츠의 미국 시애틀 집은 한 장의 사진으로 보기에는 면적이 너무 넓다. 집을 관리하는 직원만도 300명이다. 전기와 IT 관련 기사만도 100명이다. 그래도 하나님의 나라의 천국 집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기업, 하나님의 유업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기업, 유업, 상속 이란 용어 앞에 서면 대개는 일정한 분량의 재산을 자녀에게 나누어 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기업’ 혹은 ‘유업’이란 그런 정도의 차원이 아니다. 세상에 가치 있는 그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고 바꿀 수도 없는 하나님과 나 와의 관계에서 주어지는 신분의 변화, 영원한 관계의 언약, 바로 이것이 유업이란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무엇이 따로 필요한가. 내가 아버지의 집에 영원히 거하게 된다면 내 몫의 그 무엇이 왜 따로 필요한가. 그냥 아버지의 집에 아버지의 자녀로 살아가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상속자로서의 영광과 누리는 영광이 아닌가. 이것을 깨달은 다윗의 시편 23편의 고백이 그러하지 않나.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23:6)

인애를 기뻐하신다고 하였다. 여기서 ‘인애’란 ‘긍휼’을 말씀한다. 하나님은 인애와 긍휼이 풍성하심으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신다. 진노하시려던 화를 푸시고 택한 백성들을 다시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시다. 사랑의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신다. 그래서 19절의 말씀처럼 우리가 지은 죄악을 발로 밟으신다.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는 하나님이시다. 발로 밟는다는 뜻이 무엇일까.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을 이 땅에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뱀의 머리를 발로 밟게 하셨다. 이것은 복음의 승리를 선언하는 순간이다.  

옛적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렇게 하셨고 야곱에게 그렇게 하신 것처럼 성실과 인애로 택한 백성들을 붙들고 지키고 인도하실 것이다. 각양 이적을 보여 주시며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양떼를 인도하시듯 인도하실 것이다. 진정으로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기 백성들답게 소망 가운데 부활 신앙을 갖고 세상과 죄와 내 안의 각양 탐심을 물리치고 이기며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풍성한 은혜가 늘 함께 하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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