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의 찬가(눅1:39-56) 2017. 1. 22
우리는 출애굽기 15장에서 “모세의 찬가”와 모세의 누이 “미리암의 찬가”를 대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43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히브리 백성들을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게 하신 구원을 체험한 후에 부른 노래이다. 사무엘 상 2장에 나오는 사무엘을 낳은 “한나의 기도” 또한 찬가 중의 백미와 같다. 모세의 노래나 한나의 찬가인 기도는 그 내용이 길지만 미리암의 찬가는 매우 짧고 힘이 넘쳐 난다.(출15:21)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누가복음의 본문 가운데 1장 46절부터 55절까지의 내용은 “마리아의 찬가”라고 이름 붙여진 마리아의 기도요 찬송이 담겨 있다.
마리아가 누구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한 마리아는 급하게 나사렛을 벗어나 유대 산골 마을에 살던 친척인 사가랴의 아내 엘리사벳을 찾아 갔다. 마리아를 영접하는 엘리사벳은 이렇게 축복하였다.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이 말은 엘리사벳의 개인적인 느낌이나 생각이나 입장을 말한 것이 아니다. 41절에 보면,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한 축복의 말이었다.
그렇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로 인해서 여자 중에 가장 복된 여자가 되었다. 마리아의 태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된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복의 근원으로 잉태되고 탄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엘리사벳의 복중에서 자라나고 있던 세례 요한은 자기 곁에 방문한 마리아의 복 중의 예수 그리스도를 환영이라도 하듯이 그의 어머니 엘리사벳의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연이어 마리아에게 축복의 말을 전하였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는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연이어 계속되는 엘리사벳을 통한 축복의 말을 듣고 있던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기 시작하였다.
마리아는 나사렛 마을의 나이 많은 요셉과 약혼한 상태였다. 결혼할 날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그런 마리아가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는 역사적인 주인공이 되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인가. 전적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마리아가 그의 찬가를 통해서 고백하는 하나님 신앙의 내용은 무엇인가.
비천함을 돌보시는 하나님.
“주께서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고 하였다. 그렇다. 나사렛의 마리아는 지극히 평범하고 비천한 소녀였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천사 가브리엘을 보내셔서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게 될 것이라고 알리셨다. 갑자기 당황스럽고 두렵고 무섭고 떨리는 상황에 휩싸이게 되었다. 피할 수도 없고 도망할 수도 없고 숨을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겨우 피하고 숨어들어 간 곳이 유대 산골 마을에 사는 친족인 엘리사벳의 집이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에 평안이 찾아 왔고 엘리사벳을 통한 축복의 말을 들으면서 마음에 안정을 찾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마리아는 이렇게 찬송하기 시작하였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비천한 여종을 돌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사렛의 비천한 소녀 마리아를 돌보셨다. 마리아가 자신을 비천한 여종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맞는 말이다. 마리아는 나사렛의 지극히 평범한 목수의 아내가 될 약혼녀였다. 그런 그의 운명을 바꾸어 놓으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육신이 아들로 낳을 어머니의 태로 마리아의 태를 선택하셨다. ‘비천하다’는 말은 ‘낮은 상태’라는 말이다. 마리아는 자신의 운명을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런 일이 일어 날 수 없는 존재였다. 자기 마을의 어머니 대의 여인들의 삶이 그러하였고 할머니 대의 여인들의 생활상도 마찬가지였다. 조상 대대로 나사렛 마을의 여인들의 운명이란 뻔한 일이었다. 오늘 날의 나사렛도 지극히 평범한 이스라엘의 변방 마을인데 이천 년 전의 나사렛이란 시골 마을 중의 시골 마을이었다. 우리식의 말로 하면 이스라엘의 ‘깡촌’마을 중의 한 곳이었다. 그런 시골 마을 나사렛에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이다. 하나님이 비천한 여인 마리아를 돌보아 주셨기 때문이다.
요즘 국어사전에도 없는 단어인 ‘흙수저’ 혹은 ‘금수저’란 용어가 이 시대의 사회 현상을 대변하는 단어로 쓰이고 있다. 물론 태어날 때부터 입에 금 수저를 물고 태어나는 아기들이 있다. 금수저가 아니라 다이아몬드가 번쩍거리는 수저를 물고 태어나는 아기들이 있다.
그러나 성경의 인물들을 보라. 어느 누가 입에 금 수저를 물고 태어났는가. 하나님이 돌아보신 비천함이 아니었으면 도저히 성경의 주인공으로 기록될 수 없을 인물들이 성경의 중심인물들로 쓰임 받아왔지 않은가.
하나님이 비천하게 여기시고 돌보신 은혜가 아니었다면 우상을 만들어 팔고 우상을 숭배하던 데라의 아들 아브람이 어떻게 언약의 조상으로 부름을 받을 수 있었겠는가. 자식이 없이 나이 들어가던 75세의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찾아 가셔서 그를 언약의 사람으로 불러 내셨다. 하나님이 아브람의 영혼을 돌보신 구원의 시작이 일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래를 하나님이 돌보지 아니하셨다면 어떻게 연세 백세의 아브라함과 연세 구십 세의 사라 사이에 이삭이란 아들이 태어날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이 돌보시면 은혜로운 일들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하나님이 돌보시면 기적이 일어난다.
애굽에 팔려갔던 17살 소년 요셉이 애굽의 노예 시장에서 살아남은 것은 하나님이 그를 비천하게 여기시고 돌보신 은혜가 아닌가. 노예 시장에서 바로 왕의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간 것도 하나님의 돌보심이 아닌가. 요셉은 주인마님의 유혹을 피하려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다. 그러나 감옥 안에서 바로 왕의 술 맡은 관원과 떡 맡은 관원을 만난 것이 하나님의 돌보심이었다.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할 자로 불려 나간 것도 하나님의 돌보심이었다. 애굽의 술객들이 다 나와서 해석하려고 해도 해석하지 못하던 바로 임금의 꿈을 속 시원하게 해석해 낼 수 있었던 것도 요셉을 비천하게 여기시고 돌보아 주신 하나님의 은혜였다. 요셉이 팔십년 동안이나 애굽의 총리대신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비천한 노예 청년이었던 그를 돌보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였다.
바로 임금 때에 태어나는 히브리 노예 가정의 사내아이들을 다 죽이는 명령이 떨어졌다. 모세는 그런 환경 가운데 태어났다. 모세의 부모는 용감하게 모세를 석 달 동안 숨겨 키웠다. 울음소리가 커가자 더 이상 숨겨 키울 수가 없었다. 갈대 상자에 역청을 바르고 어린 모세를 갈대 상자에 담아서 나일 강이 숲에 내다 버려야 했다. 그 날 그 긴긴 나일 강의 그 숲가로 바로의 딸 공주가 시녀들과 함께 그 곳의 강가로 목욕하러 나온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다. 죽을 줄 알았던 모세가 아닌가. 악어의 간식거리로 한 입에 삼켜질 아기 모세가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살아났는가. 하나님이 어린 모세를 돌보시자 바로의 딸 공주의 눈에 모세가 담긴 갈대 상자가 눈에 들어 왔다. 이것이 하나님의 돌보심이 아닌가. 모세는 죽을 줄 알았던 나일 강에서 건짐 받았고 바로의 딸의 돌보는 손길 가운데 왕자의 지위를 누리며 40년을 왕궁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살인자가 되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쳐야 했다. 모세의 나이 80에 그를 돌보신 하나님은 호렙 산 떨기나무의 불이 붙는 환상 가운데서 그를 부르셨다. 그리고 모세로 하여금 애굽에서 동족을 출 애굽시키는 지도자로 쓰셨다. 하나님이 돌보시니 태어 난지 세 달 만에 악어 밥이 되어 죽고 말 어린 모세를 120년 동안 존귀하게 연단하시고 준비하셔서 출애굽을 성취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들어 쓰셨다.
하나님께서 인생의 비천함을 돌보시면 만세에 복된 기적이 일어난다.
룻기의 주인공 룻도 그런 여인이 아닌가. 모압 여인 룻, 남편 잃고 시 아버지의 나라인 이스라엘, 베들레헴에 연세 들어가시는 시어머니 나오미의 손을 잡고 찾아 간 그 마을에서 누가 이방 여인 룻을 거들떠나 보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효심이 지극한 룻을 비천하게 여기셨고 돌보아 주셨다. 하나님은 베들레헴 마을의 대 지주 총각 보아스로 하여금 룻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하셨다.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보리 이삭과 밀 이삭을 주어다가 시어머니 나오미를 섬기며 매끼의 식량을 해결해 나가야만 했던 보잘 것 없던 이방 여인 룻을 돌보기 시작한 것은 보아스를 통한 하나님의 돌보심이었다. 그 여인 룻이 보아스의 아내가 되고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되지 않았나.
다윗도 그렇지 않나. 다윗을 하나님이 돌보아 주시지 않았다면 그를 죽이려고 달려 는 사울 왕의 칼과 창과 화살로부터 어떻게 그가 십 수 년 이상을 목숨을 부지하며 살아남을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비천함을 돌보시는 여호와이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한 비천한 마리아를 돌보셨다. 마리아가 유대 남자들의 돌에 맞아 죽지 않도록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기 까지 하나님의 섬세하신 손길로 마리아를 돌보셨다. 하나님은 비천한 자를 돌보시는 아버지이시다.
은혜로 큰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나사렛의 마리아의 태에 하나님의 아들이 잉태된 일은 큰 일 중의 큰 일이었다. 마리아 자신의 고백처럼 “능하신 아기 큰 일을 마리아에게 행하신 일이었다.” 큰 일을 행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다. 거룩하시다는 말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무흠하심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이 땅의 모든 것 위에 계신 전능자시다. 하나님은 흠과 티가 없으신 분이시다. 레위기 11장 45절에 보면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라고 명령하셨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죄 된 인간이 하나님을 대하려면 하나님 안에서 거룩해져야만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도가 되는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의 은총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새로운 자녀로 삼아 주시고 거룩한 자라고 인정해 주셨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처음에는 제 목표와 제 고집과 제 주장대로 예수를 따르려고 했던 엉터리 제자였다. 그러나 베드로는 여러 번의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과 예수님의 제자 됨을 깨닫고 진정으로 회개하고 성령 충만을 받은 초대 교회의 뛰어난 사도요 복음 전도자가 되었다. 베드로는 그의 첫 편지인 베드로전서 1장에서 이렇게 교훈하였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1:15-16)
성도의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거룩하심을 깨닫고 체험하는 것이다. 창세기 17장에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I am God Almighty)고 자신을 소개하셨다. 그렇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하여 이삭을 선물로 주셨다.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열 두 아들을 낳았다. 오늘 날 이스라엘 1500만 인구의 조상은 사천년 전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다. 독일의 히틀러는 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대인들을 그 당시에 600만 명 이상이나 학살하였다. 명멸을 계속하던 유대인들은 1948년에 이스라엘을 건국하였다. 오늘 날 유대인들은 미국을 비롯하여 세계 열방의 각 분야마다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살아가고 있다.
올 한해 전능하신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 안에서 크고 새롭고 놀라운 일을 행하시도록 기도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 앞에 영광을 돌리고 또 돌리는 찬양과 경배의 삶을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살아갈 때에 하나님은 긍휼을 대대에 이르도록 베풀어 주실 것이다. 50절에 보면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시되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에 이르게 하신다”고 하였다. 여기서 말씀하는 두려워하는 자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깨닫고 하나님은 경외하며 여호와의 그 인자하심을 믿고 따르는 자들을 말한다. 시편 103편 17절에 보면,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에 자손에게 이르리니”라고 하였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하나님은 날아가는 천사의 큰 목소리를 통해서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계14:7) 그리고 이어서 또 말씀하셨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고 하셨다. 그렇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영원히 큰 소리로 영원한 복음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높여 드리는 것이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라는 복음 성가가 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온 맘과 뜻 다해 주 사모합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예수님 찬양 받으소서
예수님 찬양 받으소서
죄사했네 우릴 위해 성령 주셨네
예수님 찬양 받으소서
위로의 성령님이시여
위로의 성령님이시여
우리안에 계셔서 인도하시네
위로의 성령님이시여
이렇게 찬송하고 또 찬송하고 경배하고 또 경배하여야 한다.
성도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우리 가운데 은혜로 큰일을 행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미하며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의 힘센 팔로 그 힘을 보이신다. 하나님께는 팔이 없으시다. 그러나 51절에서 말씀하는 팔의 힘이란 하나님의 능력을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 있는 팔이 힘을 발하시니 하나님은 애굽의 바로 왕의 결박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 건너 광야로 이끌어 내셨다. 하나님의 힘센 팔로 인도하시니 요단 건너 가나안의 일곱 족속을 진멸하시고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의 땅으로 삼으셨다.
하나님은 마리아의 입을 빌려서
교만한 자들과 권세 있는 자와 부자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반대로 비천한 자와 주린 자에 대하여 말씀하였다.
하나님은 권세 있는 자이기 때문에 무조건 내려치시는 포악한 분이 아니시다. 부자이기 때문에 그 재물을 빼앗으시고 빈손으로 보내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의 교만에 대하여 판단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부한 자의 부의 가치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렇다고 하나님은 무조건 비천하기 때문에 불쌍히 여기셔서 높이시고 주렸기 때문에 무조건 배부르게 해 주시는 분도 아니시다. 지난 1월 17일 신문 기사에 따르면 국제구호기금 옥스팜의 보고서 내용을 소개하였다. 빌 게이츠를 비롯한 세계 8대 부자의 재산은 인류의 절반인 하위 36억 명의 가난한 사람들의 재산과 맞먹는다는 통계가 발표되었다. 세상의 부의 불평등이란 것은 이런 것이다. 권력도 마찬가지이고 부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에 그 시대마다 처처에 얼마나 성곽이 많은가. 어떤 이들은 평생토록 주먹밥을 먹어 가며 더운 여름이나 추운 겨울이나 성만 쌓다가 죽어간 이들도 부지기수일 것이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스핑크스를 쌓는 일을 평생토록 하다가 죽어간 이들이 얼마나 많았겠나. 한 사람의 왕이나 한 명의 권력자의 권력 유지를 위해서 노예처럼 살다가 죽어간 이들이 역사 속에 얼마나 많았겠는가.
자료에 의하면, 피라미드는 고대 이집트 왕들의 무덤이다. 지금으로부터 4000-50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이집트의 나일 강 주변에는 지금도 80여 개나 되는 피라미드가 남아 있다. 피라미드는 많은 돌을 쌓아올려 만들었는데, 밑면은 동서남북을 향하는 정사각형으로 되어 있고,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져 맨 위는 뾰족하다. 북쪽에 있는 입구를 따라 내부로 들어가면 긴 복도를 지나 왕이나 왕비의 시체를 안치한 방에 이르게 된다. 시체는 썩지 않도록 미라로 만들었으며, 많은 보물도 함께 들어 있다.
피라미드 중에서 가장 크고 웅장한 것은 카이로 서쪽, 기제에 있는 쿠푸 왕의 피라미드이다. 이 피라미드는 밑변의 한 변이 227m이고 높이가 약 146m이다. 평균 2.5톤이나 되는 큰 돌을 230만 개가량 쌓아올렸다. 소나타 자동차의 무게가 1. 5톤이니까 상상이 되지 않나. 피라미드 한 개의 전체 무게가 684만 톤에 이른다. 이 피라미드는 돌을 운반하는 길을 만드는 데만도 10년이 걸렸다. 지하실을 만드는 데 10년이 걸렸고 피라미드를 쌓는 데 20년이나 걸렸다. 임금 한 사람의 시체를 미라로 보존한 무덤을 만들기 위해서 그런 엄청난 일들을 벌였다. 피라미드 앞에는 얼굴은 사람의 형상이며 몸은 사자 모양을 한 스핑크스가 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이다.
51절의 “교만한 자”란 50절의 “두려워하는 자”와 상반 되는 상태의 인간상을 말한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인생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반목하며 하나님 앞에 교만하게 살아가는 인생들도 없지 않다. 마리아는 “하나님은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다.”고 고백하였다. 그렇지 않나. 요즘 국가 권력의 중심인물들이 겪는 모습을 보면 실감이 나지 않는가. 장관이나 권력자의 곁에서 그림자처럼 행세하던 이들이 굴비 엮이듯 줄줄이 수갑을 차고 죄수복을 입고 고유 번호를 가슴에 달고 감옥에 갇히는 모습을 보지 않는가. 교만한 권력의 마지막 모습은 너나 나나 다 그런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뜻을 떠나서 교만하고 어리석게 행동하며 다윗을 죽이려고 하던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 사울 왕의 마지막이 어떻게 되었는가. 예수께서 태어날 당시에 베들레헴 주변에 태어난 남자 아기들을 모조리 찾아 내 다 죽이던 헤롯 왕이 어떻게 되었는가. 세례 요한의 목을 친 헤롯이 어떻게 되었는가.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흩으시는 신판의 주님이시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고 자신의 비천함을 탄식하지 아니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하나님의 은혜에 목말라하고 배고파하는 자들에게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시편 103편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여호와를 송축하며 여호와의 거룩하신 이름을 송축하고 여호와의 베풀어 주신 은택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인생들에게 좋은 것으로 만족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 도다.”(시103:5)
언약을 영원히 성취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언약 백성들을 도우시는 하나님이시다. 긍휼히 여겨 주시고 언약을 기억하여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약속하신 언약을 자손 대대에 영원히 성취해 나가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언약은 변함이 없으시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고 이룩하시는 하나님이다. 54절의, “그 종 이스라엘”이란 아브라함의 후손들 만을 일컫는 말은 아니다. 각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살아가는 인생들은 누구나 다 이스라엘이 될 수 있다. 마태복음 3장 9절에서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로마서 9장 8절에 보면,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그 종 이스라엘”이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아가고자 하는 성도들을 일컫는 말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고자 하는 인생들을 도우시는 여호와이시다.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그들의 나중을 기억해 주시는 전능자이시다. 세상 권력자의 도움은 잠시 잠간 도움이 될 수 있다. 세상 권력자가 나를 기억해 주면 얼마간은 큰 소리 치고 어깨에 힘을 주고 떵떵거릴 수 있다. 그러나 권력자의 도움이나 권력자가 나를 도와주는 것은 요나가 아쉬워하던 박 넝쿨의 그늘과 같은 것이 아닌가. 박 넝쿨이란 것이 벌레가 갉아 먹으면 일순간에 맥이 없이 축 늘어져 땅에 나뒹구는 것이 아닌가. 세상 권력의 힘이란 박 넝쿨과 같은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팔의 힘만이 영원한 것이다. 405장 찬송,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의 교훈이 그러하지 않나.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 우리 맘이 평안하리니
항상 기쁘고 복이 되겠네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주의 팔에 그 크신 팔에 안기세
주의 팔에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언약의 자손들을 영원히 붙들어 주시고 보존하신다. 굳세게 해 주시고, 도와주시고, 의로운 하나님의 오른 손으로 붙들어 주신다. 창세기 18장 18-19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말씀하신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다.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나님은 언약을 지키는 인생을 아브라함의 자손 삼으신다. 돌들이라도 아브라함의 후손되게 하실 수 있고 돌들이라도 소리 지르게 하신다. 언약 안에서 말씀하신 말씀을 이룩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겸손하게 살아가는 각 사람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