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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거하라(요15:1-10) 2018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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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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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8-09-17 11:33 조회 14,284 댓글 0
 
                      내 안에 거하라(요15:1-10)         2018. 9. 16
   

인간이 포도 농사를 지은 지는 역사가 꽤나 오래다. 창세기의 노아도 홍수 후에 포도 농사를 지었다. 

우리나라에 개량 포도가 유입된 것은 1901년이다. 프랑스 신부 안토니오 콩베르(1875-1950, 한국 이름-공안국)가 묘목을 가져 왔다. 그가 주임 신부로 있던 안성시의 구포동 성당 마당에 묘목을 심었다. 성찬용 포도주를 담그기 위한 목적이었다. 나중에 그 성당의 한 교인에 의해 안성시 서운면에서 처음 대량으로 재배되기 시작하였다. 그 곳은 오늘날도 포도 농사로 유명하다. 기후가 적절하고 일교차가 커서 포도의 맛과 향이 풍부한 포도생산의 최적지로 알려져 있다. 매년 포도축제를 개최해 포도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있다.

올해 전북 고창군의 포도 농장주인 도덕현 농부는 14년 전에 심어 가꾼 포도나무 한 그루에서 4500송이의 포도를 수확하게 되었다.(2018. 9. 14. 뉴스) 포도나무 줄기의 길이만도 40미터에 이른다. 이 포도 나무 외에도 20여 그루의 포도나무마다 1000여 송이의 포도가 주렁주렁 열렸다. 도덕현 농부는“포도농사 풍작의 비결은 친환경 유기농법에 있다. 특제 비료에 두부 비지와 대나무, 참나무 톱밥이 들어간다.”고 설명했다. 이 농장에서 천연재료로 만든 비료는 포도나무의 면역력을 강화시켰고, 농약 한 번 치지 않은 철저한 토양 관리로 포도나무에 생기가 넘치게 가꾸었다. 포도나무에 물을 줄 때도 줄기 가까이에 준 것이 아니었다. 뿌리에서 좀 더 멀리에 물주기를 해서 뿌리가 유전적인 능력을 갖고 점점 깊고 점점 멀리까지 뿌리 내려가도록 가꾸었다. 

대개의 포도나무는 3-4미터 정도 자라고 30-40송이 정도의 수확을 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그런데 도덕현 농부는 한 그루에서 그 100배의 수확을 하게 된 것이다. 그 포도나무 한 그루가 차지하는 포도밭의 면적이 300평이라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어느 백화점 식품부에서 그 포도를 전량 구매하려고 교섭하였다. 그러나 도덕현 농부는 예전에 출하하던 대로 수확하여 출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성경 속의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나무는 세 가지이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와 감람나무 즉 올리브 나무이다.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의 영적 특권을 상징한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의 민족적 특권을 상징한다. 감람나무는 이스라엘의 종교적 특권을 상징한다. 

성경에 처음으로 포도나무가 등장한 곳은 야곱이 요셉을 축복하는 내용이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창49:22)라는 말씀이 나온다. 여기서 말씀하는 ‘담을 넘는 가지’가 포도나무를 상징하는 것이다. 

예레미야 2장 21절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하여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찜이냐”고 실망하시고 책망하신 말씀이 나온다. 

호세아 10장 1절에는 이런 말씀도 나온다.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번성할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라는 말씀도 나온다. 열매가 무성한 포도나무가 축복인 것은 맞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번성하고 번영하면 할수록 우상의 제단을 늘려 갔고 우상인 주상을 아름답게 꾸미는 민족으로 타락해 갔던 시대를 지적하시고 안타까워하시는 말씀이다. 

포도나무는 더위를 잘 견디고 뿌리를 땅 속 깊숙이 잘 내리기 때문에 어지간한 광야 지역이나 경사진 산지에서도 잘 자라고 포도 열매가 잘 맺는다. 그러하다 보니 팔레스타인과 같이 덥고 건조한 기후와 산악 지역이라는 불리한 조건에서도 잘 자란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씀하는 포도나무는 안정된 생활과 평화와 번영을 상징한다. 열왕기상 4장 25절에 보면 솔로몬 왕 시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평안을 누리며 살았던 모습을 그렇게 비유하기도하였다. “솔로몬이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더라.”

하나님은 미가 선지자의 입을 빌려서 시대적은 평안을 그렇게 묘사하기도 하였다.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모세의 노래인 신명기 32장 32-33절에는 하나님을 떠날 때의 불행과 심판에 대하여 경고하시는 말씀도 나온다. “이는 그들의 포도나무는 소돔의 포도나무요 고모라의 밭의 소산이라 그들의 포도는 독이 든 포도이니 그 송이는 쓰며 그들의 포도주는 뱀의 독이요 독사의 맹독이라.”

이사야서 5장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에 극상품 포도나무로 심으셨다고 하였다. 망대를 세우고 포도즙 틀을 준비하였는데 야생포도가 열렸다고 지적하였다. 하나님은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어 놓고 극상품의 포도송이가 열리기를 기대하셨으나 야생 포도가 맺힘으로 실망하셨다. 

구약이 말씀하는 포도는 풍성함, 풍요, 번영, 번성, 창대함을 상징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포도나무 비유는 그 이상의 영적 교훈을 담고 있다. 

요한복음 15장의 본문은 예수님의 포도나무 비유이다. 예수님은 참포도나무이시고 하나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주를 믿는 성도는 포도나무의 가지이다. 포도나무를 가꾸는 농부는 부지런히 포도나무에 정성을 기울인다. 아무데나 심지 않고 좋은 땅에 심기를 원한다. 통풍도 잘되고 햇빛도 잘 들고 토양도 좋은 곳에 포도나무를 심어 가꾸기를 원한다. 거름을 주고, 불필요한 가지를 치고 정성을 기울인다. 썩은 가지나 죽은 가지는 잘라 버린다. 

예수께서는 포도나무 비유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관계,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자녀인 성도들과의 관계에 대하여 교훈해 주셨다. 


참포도나무이신 예수.
모든 나무가 다 그러하듯이 포도나무는 뿌리와 줄기와 가지로 되어 있다. 그 가지에서 순이 나고 자라나 꽃이 피고 열매가 맺고 풍성한 포도송이로 자라난다. 

과거에는 강화도의 논밭에서 농사하는 오곡백과 이외의 주 산업은 인삼과 화문석 등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인삼밭이 사라지고 처처에 마을마다 포도 농사가 한창이다. 요즘은 밭은 물론이고 논에 흙을 메워서 밭을 만들고 포도 농사를 하기도 한다. 산자락에도 개간해서 포도나무를 심어 가꾼다. 아마도 단위 면적당 소득이 다른 작물에 비해서 높기 때문인 것 같다. 
포도 농사를 하는 것을 오며 가며 관찰해 보면 포도 수확이 끝나면 자지잔 가지들을 모두 다 잘라 버린다. 앙상하게 줄기만 남겨 두고 겨울을 난다. 추운 겨울을 나고 봄이 되면 그 줄기에서 여린 싹이 움트기 시작하여 가지가 자라 오른다. 그 가지에서 순이 자라고 꽃이 피고 포도 열매가 맺혀서 자라나기 시작한다. 포도 꽃은 배꽃이나 복숭아나무 꽃처럼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못한다. 그러나 미색의 여리고 여린 꽃이 시들 즈음이 되면 아주 미미한 열매들이 송알송알 자라 오르기 시작한다. 봄이 가고 여름의 땡볕을 받으면서 포도송이가 송알송알 탐스럽게 자라나기 시작한다.

저렇게 여리고 약해 보이는 일년생 가지에 어떻게 저렇게 탐스럽고 풍성한 포도송이가 주렁주렁 매달려 자라날 수 있을까 신기하기 까지 하다. 그런데 그 여리고 약해 보이는 가지들은 모든 가지들마다 일일이 포도나무의 원 줄기에 붙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참포도나무요”라는 말씀의 그 ‘포도나무’라는 말씀은 포도나무의 줄기를 말씀한 것이다. 그 줄기는 땅 속의 보이지 않은 흙 속에 깊이 감추어져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2장의 가나 혼인집에서 결례용 돌 항아리에 채웠던 물로 극상품 포도주를 만들어 주셨다. 요한복음 2장의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표적 사건과 요한복음 15장의 ‘나는 참 포도나무요’라는 말씀은 깊은 연관성이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도나무와 같은 인생들로 살아가길 기대하셨다. 그래서 430년간의 애굽 노예 생활에서 건져 내셨다. 모세를 앞장 세워서 광야로 이끌어 내셨다. 이것이 출애굽 사건이다. 하나님은 광야 사십년의 연단과 시험을 통해서 여호수아와 갈렙을 앞장세운 광야세대만을 요단강 건너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다. 저들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가나안의 번영한 철기 문명과 우상 숭배를 척결하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는 민족으로 살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 정착하여 살아가는 동안에 눈에 보이는 물질문명에 마음을 빼앗기고 우상 숭배에 빠져 지냈다. 이 같은 모습은 사사 시대 내내 그러하였고 사울 임금의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은 이사야, 예레미야, 호세아, 아모스 선지자등을 통해서 경고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극상품 포도나무로 심으셨지만 야생 들포도나무를 생산하는 나무로 전락했다고 지적하셨다. 그처럼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영적 변질의 상태는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더 극심해져만 가고 있었다. 그 때에 하나님은 세례 요한을 보내셔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회개와 변화를 촉구하셨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첫 메시지도 마찬가지였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무슨 의미인가. 

하나님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이스라엘 민족과 이 땅의 모든 백성들이 참포도나무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라는 말씀의 ‘참’이란 헬라 원어인 ‘알레디네’는 ‘진실된’이란 뜻이다. 하나님은 도적이요 삯꾼이요 강도와 같이 타락해 버린 백성들에게 ‘진실된’주께로 돌아오라고 초청하고 계신 것이다. 그렇다. 예수만이 참포도나무이시다. 예수 이외의 그 모든 것들을 모양만 포도나무일뿐 가짜이다. 요즘 이 땅에 판을 치는 각종 이단과 사이비들은 다 가짜 포도나무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유일한 참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 와야 한다.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고 따르고 순종하여야 한다. 

1901년 이전에 우리나라의 산야에는 머루가 다였다. 그러나 1901년에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들여온 포도나무 묘목이 오늘 날까지 각종 다양한 개량종 포도나무의 시작이었듯이 이 땅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점점 건강하고 건전하게 번져 나가야만 한다. 그 뿌리를 복음의 기초에 든든하게 내리고 참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줄기가 이 땅에서 가정과 개인마다 잘 자라나도록 하여야 한다.  

참포도나무의 원줄기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 있지 않는 가지는 그 어떤 열매도 맺을 수가 없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2절의 말씀처럼 예수께 붙어 있어야만 한다. 성도인 우리가 예수께 붙어 있어서 열매를 많이 맺으면 맺을수록 농부이신 하나님은 포도나무의 가지인 우리를 점점 깨끗한 가지로 손질하고 다듬어 주신다. 하나님이 포도나무의 가지인 성도들을 깨끗한 가지로 다듬어 풍성한 포도열매를 맺도록 하시는 원리는 말씀이다. 참포도나무의 줄기이신 예수께 붙어 있는다는 말은 3절 말씀의 내용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거하는 생활을 말한다. 3절의 ‘내가 일러 준 말’이란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모든 말씀 즉 ‘로고스’의 말씀을 일컫는 것이다. 그렇다. 예수 안에 거하는 생활이란 7절 말씀과 같은 것이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5장이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서 말씀 생활, 기도생활, 제자의 도에 대하여 차근차근 말씀해 주셨다. 다시 7절을 보라.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란 말씀이 무엇인가. 우리는 신구약의 모든 말씀을 더하거나 빼지 말고 믿고 따르고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 그처럼 신구약의 모든 말씀 안에서 균형 있는 말씀 신앙을 가지고 원하는 것을 구할 때에 나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이 이루어져 가게 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주여 주여’ 하고 매어달리고 금식하고 간구하여도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예수의 아우인 야고보는 야고보서 4장 3절에서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밤낮 ‘주여 주여’ 한다고 우리가 기도하고 소원하는 바가 내  원대로 척척 다 이루어지고 응답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안에 거하고 예수의 말씀 안에 거하면서 기도하고 간구하고 마음의 소원을 아뢰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내 뜻대로, 내 소원대로 이루어지지 아니할 지라도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깨닫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순종하며 살아가는 겸허한 지혜 또한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참포도나무의 원줄기이신 예수께 붙어사는 생활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생활이다. 이렇게 좋은 계절 가을에 날마다 틈틈이 일정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여 영의 양식을 풍성하게 하는 주의 은총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한다. 

 
농부이신 하나님.
전북 고창의 4500송이 포도 열매를 풍성하게 맺은 그 나무는 14년 전에 주인을 잘 만난 것이다. 포도나무라는 것이 처음에는 젓가락 같은 묘목이다. 그런 포도나무가 대개는 3-4미터 자라나고 만다. 그러나 도덕현 농부는 친환경 농사법에 의해서 농약도 전혀 주지 않고 자신의 개발한 유기농 비료를 사용해서 정성스럽게 포도나무를 가꾸었다. 그 포도나무의 줄기는 무려 40미터에 이르렀다. 거기서 해마다 자라나는 가지를 쳐서 무성하게 번식된 포도나무는 300평의 포도나무 밭을 한 그루의 포도나무 그늘로 덮었다. 신비하지 않나. 그 포도나무는 다른 묘목과 함께 심기어졌으나 주인의 손길에 의해서 다른 성장기를 갖게 되었다. 포도나무 스스로 4500송이를 맺힌 것이 아니다. 그런 성공적인 농사의 결과를 위해서 불철주야 수고하고 연구하고 애쓰고 심혈을 기울인 농부의 손길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그렇지 않나. 이 세상에서 부모를 잘 만나는 것이 귀하고 복되듯이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야 한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시작이다.

본문은 포도 농사 이야기를 말씀하시는 것 같지만 아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내 인생의 농부로 만나야 한다는 강조이다. 그렇다. 신앙생활의 출발은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는데서 부터 시작된다. 하나님 체험, 예수 체험, 성령 체험으로부터 신앙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어려운 말로 하면‘실존적인 영적 체험’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 체험, 예수 체험, 성령 체험, 은혜 체험이 없이도 신학교에 입학할 수 있다. 어머니 아버지의 강요나 요구에 떠 밀려서 신학교에 입학할 수 있다. 학점도 딸 수 있고 졸업도 할 수 있다. 목회자가 되는 과정 고시도 치룰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하고, 은혜 체험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의 신학교 생활이나 목회자 생활은 얼마나 답답하고 불행한 일이겠는가. 

본문을 자세히 보라. 1절에 언급된 농부이신 아버지에 대한 말씀이 8절과 9절과 10절에 반복해서 언급된다. 하나님을 내 인생의 농부로 모시고 살아가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8절) 하나님 아버지를 나의 인생, 나의 신앙생활의 농부로 모시고 살아가는 특징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 안에 거하며 그 사랑을 생활 속에 실천하며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9절)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를 내 신앙생활의 농부로 모시고 살아가는 증거는 10절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사랑의 계명을 지키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10절에서 말씀하는 ‘내 계명’이 무엇일까. 요한복음 13장 34절에 보면,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사랑의 계명을 말씀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여호수아, 갈렙, 기드온, 드보라, 사무엘, 다윗, 이사야 등을 자주 언급한다. 왜인가. 저들의 특징이 무엇인가. 저들은 모두가 다 한 결 같이 하나님은 자신들의 삶의 농부 삼고 살아간 이들이다. 그렇지 않나. 하나님을 농부 삼고 예수께 붙어서 살아간 인생들의 이야기가 성경에 가득하다. 기독교 이천년의 역사도 참포도나무이신 예수께 붙어 산 믿음의 사람들의 일화로 가득하다.

세월이 지나면 우리교회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예수사랑교회의 긴긴 역사에 이런 신앙의 인물들이 있었다고 이야기 할 날이 올 것이다. 우리가 지난 133년의 한국교회 역사를 말할 때에 언급하는 역사적인 신앙의 인물들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포도나무 가지인 성도.
예수께서 포도나무의 줄기이시고 성도들은 그 포도나무에서 자라나는 가지이다. 포도나무 가지로 포도나무 줄기에 붙어서 수분과 영양을 받아들이면 싹이 나고 꽃이 피고 포도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것이다. 그것이 8절에서 말씀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수의 제자다운 삶이다. 성도가 이름뿐인 성도 즉 교인으로 머물 뿐 성도다운 성도가 되지 못하고 제자다운 제자가 되지 못한다면 얼마나 아쉬운 일인가. 본문의 포도나무 비유 가운데 예수께서 가장 자주 언급하신 표현이 무엇인가. ‘열매’라는 단어이다. 그렇다. 포도나무는 열매로 대답하는 나무이다. 포도나무는 크게 굵게 자라서 건축재로 쓰거나 가구를 만들거나 그 어떤 다른 용도로 쓸 수 있는 나무가 아니다. 덩굴식물에 속하는 포도나무는 그 줄기가 보기에 어줍지 않다. 보잘 것 없다. 그러나 일단 그 줄기에 새 싹이 나서 가지로 자라나면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어 있다. 

이사야서 1장 12절의 말씀처럼 성전의 마당만 밟는 자들이 되어서야 되겠는가. 이왕 예수 믿는 것 예수 우편의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처럼 겨우 구원 받는 부끄러운 구원의 주인공이 되어서야 되겠나. 나의 시간, 나의 재물, 나의 소득, 나의 재주, 나의 은사, 나의 경험, 나의 역량, 나의 사회적인 지위를 총 동원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이 땅에 주를 믿는 이의 수를 점점 더해가는 일에 앞장 서야 하지 않겠는가.

지난 주일에 있었던 일이다. 결혼해서 따로 분가하여 생활하는 아들 내외가 하던 사업이 예전 같이 활발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그 전에는 매달 꼬박 꼬박 잘 드리던 십일조 생활을 최근에 전혀 하지 못한 사실을 부모가 알게 되었다. 부모님이 나서서 1,000만원을 마련해서 십일조로 헌금하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렇게라도 하여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는 부모의 마음과 신앙이 무엇인가. 우리는 그와 같은 부모 세대의 신앙생활에서 무슨 교훈을 받게 되는가.

요즘 한국 교회의 교계에서는‘제 4차 산업 시대의 한국교회의 미래’에 대한 연구와 심포지엄이 열리고 다양한 발제가 계속되고 있다. 이 땅에 실존하던 거대한 공룡들이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멸종한 것처럼 이 땅의 교회가 병들면 쓰러질 수도 있고 유럽이나 북 아메리카의 교회들처럼 쇠퇴기를 맞을 수도 있다는 경고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포도나무의 가지와 같은 성도들이 참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서 농부이신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서 열매가 풍성한 한해 한해를 살아갈 수 있을까. 예수의 본문 비유에 자주 사용하신 또 하나의 표현은‘내 안에 거하라.’는 강조이다. 5절에도 보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하셨다. 

어제 팜트리오케스트라 가을 음악회가 4층 케페에서 열렸다. 베토벤의 ‘에그먼트 서곡으로부터 시작해서 하이든(Joseph Haydn,1732-1809)의 심포니 101번의 ’시계‘라는 제목의 작품 중에 제 1, 2악장 연주가 있었다. 중간마다 지휘자의 곡 해설도 있었다. 베토벤의 교향곡은 9곡, 말러는 10곡인데 비하여 하이든의 교향곡은 무려 106곡이나 된다. 어떻게 한 사람이 그렇게 많은 작곡을 할 수 있었을까. 하이든의 <천지 창조>, <사계> 등이 유명하다.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그는 6살 때부터 음악적으로 돋보이기 시작하였다. 8살 때부터 주변 마을의 초등학교 교장이면서 성가대 지휘자였던 사촌 형 인 요한 마티아스 프랑크의 집에 머물면서 그에게서 음악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하이든은 노래도 잘했고 여러 악기도 골고루 연주했다. 나중에는 독학으로 음악적 재능을 키워 나갔다. 전성기에는 그보다 24살이나 어렸던 모차르트 혹은 헨델, 베토벤과도 교류를 가졌다. 베토벤의 초기에는 그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런 폭 넓은 교류가 하이든에게는 음악적 영감을 더욱 깊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하이든의 명성은 오스트리아, 독일, 프랑스,네델란다, 영국 등 유럽 전역으로 번져 나갔다. 그가 64살이던 1796년에는 스페인의 카디스에서성 금요일 예배를 위한 교향곡〈7가지 마지막 말씀 The Seven Last Words〉이 헌정되었다. 

그가 임종하기 1년 전인 1808년 그의 76회 생일을 기념하는 빈 축하 연주회였다. 연주회에서는 명연주자들에 의해 〈천지창조〉가 연주되었고, 병이 들어 누워 있던 하이든이 부축을 받고 직접 참석했다. 그는 팔걸이의자에 힘겹게 앉은 채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연주회장에 들어와 귀족들이 앉는 곳에 함께 앉았다. 그를 기념하는 시가 낭송되었고, 박수갈채가 연주회장을 뒤흔들었다. 그가 자리를 떠나려 하자 왕년의 제자 베토벤이 무릎을 꿇고 스승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이것은 최후로 참석한 공개연주회였다. 하이든! 그의 명성과 음악적인 모든 업적과 공로는 농부이신 하나님의 손길 안에서 주어진 영감이요 지혜요 축복이었다. 그의 죽음 후 묘지가 파혜쳐 지고 목이 잘려 나갔다. 도굴된 것이다. 오스트리아 귀족중 1명이 음악에 천재적 재능을 가졌던 하이든의 뇌를 조사하고 싶어 유태인인 피터와 로젠바움에게 부탁해서 파헤쳐진 일이었다. 오스트리아 정부가 나서도 해결할 수 없는 불행한 사건이었다. 그 후 100여 년 동안 하이든의 뇌는 여러 사람의 손으로 옮겨져 갔다. 145년만에 하이든의 머리 유골이 반환되었다. 수십만명이 그의 해골 반환식에 참석하였다. 또한 오스트리아 대통령 및 정치인들이 하이든의 미사에 대거 참석해 대 음악가의 안식을 간절히 소원했다. 그제서야 머리를 찾은 것에 대해 하이든 후손들에게 정식으로 사죄했다.

그렇다. 포도나무의 가지인 성도들이 좋은 열매를 맺는 비결은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이다. 6절 말씀은 경고다. 예수 안에 거하지 못하고 예수 떠나면 버려져 마르게 된다. 버려져 말라 버린 가지는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 그러므로 성도는 항상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여야 한다. 이번 가을에도 커피 브레이크 성경공부 요한복음 과정에 함께 참여 하시든 하시지 못하시든지 날마다 일정하게 성경 말씀을 가까이 대하며 연구하고 묵상하고 삶에 적용하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주의 자녀다운 일상생활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신다.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된다.
그래야 주님 안에서 열매가 풍성한 삶을 가꾸며 살아가게 된다.

세상적으로 성공하고 출세한 사람들을 교회 문 밖에 나서 보면 넘쳐 난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시는 바는 무엇인가. 나의 참포도나무이신 예수 안에서 살아가고 내 삶의 농부이신 하나님의 손길 안에서 살아갈 줄 아는 인생이어야 참으로 열매 풍성한 인생이라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은혜와 축복이 넘쳐나고 간증되는 나날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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