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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시46:1-11) 2017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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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7-08-06 23:53 조회 17,343 댓글 0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시46:1-11)           2017. 8. 6
 
믿음으로 살지만 누구나 두려움은 있다. 어느 한 순간이라도 마음속에 전혀 두려움이 없이 사는 사람은 아마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하고 그러므로 매 순간마다 주님을 의지해야 한다. 그러므로 잘 될 때 조심해야 하고 건강할 때 주의해야 하고 형통할 때 삼가며 살 줄 알아야 한다.
 
열왕기 하 18-19장에 보면 앗수르의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쳐 들어 왔다.
이 사건이 시편 46편의 배경이다. 고라 자손을 통해 고백된 시이다.  히스기야 임금은 임금의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했다. 히스기야와  이사야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고 기도하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군대의 칼과 활과 창을 동원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185,000명의 앗수르 군대를 송장되게 하셨다. 앗수르의 산헤립이 니느웨 성으로 도피했다. 그들이 섬기는 니스록 신전에 숨어 들어가 경배했다. 그 뒤로 검객 둘이 따라 들어가서 산헤립을 칼로 쳐 죽이고 아라랏 땅으로 도망쳤다. 역사란 하나님이 침묵하지 않으시고 개입하시면 하나님의 방법대로 진행되는 것이다. 이 일을 처리 하실 때 하나님은 “남은 자, 피하는 자를 통해서 여호와의 열심히 이 일을 이루리라”고 미리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두려운 환난과 징벌과 모욕의 현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예루살렘 성민들을 건져 주셨다.
 
다른 시편인 시편 56편은 다윗의 가드에서 블레셋 사람들에게 붙잡혔을 때에 쓴 시이다. 그 말씀 중에 3절에 보면,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라고 고백하였다. 그렇지 않나 인생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 누구나 두려운 순간에 맞닥뜨릴 때가 있다. 그럴 때 인생을 의지하는 것과 우상을 섬기는 것이 옳은가. 다윗은 두려움의 순간에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였다. 고라 자손은 “여호와가 환난 중에 피할 피난처요 힘이요 큰 도움이시라”고 고백했다.
 
가령 부자라도 중병에 걸릴 수 있다. 대단한 권력을 자랑하던 그 누구라도 원숭이나 나무에서 떨어지듯 높은 지위에서 추락하는 순간이 있을 수 있다.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장수라도 기력이 쇠하는 순간이 온다. 무슨 뜻인가 “산의 뿌리라도 뽑을 것 같고 세상을 뒤 엎을 듯이” 큰 소리 치던 사람도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되는 순간이 올 수 있다. 그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이 온다. 이 세상에는 영원한 젊음도 없고, 영원한 아름다움도 없고, 영원한 권력도 없고, 영원한 자랑거리도 없다.
이 세상에는 영원한 것이란 없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는 법이다. 이 땅에는 영원한 평화도 없고 영원한 우방도 없고 영원한 적도 없다. 오직 여호의 말씀만이 영원한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인생들에게는 누구나 ‘두려움’이란 것이 있다. 두려움은 어른 아이 젊은이 노인 할 것 없이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면 그 두려움을 어떻게 이기며, 어떻게 극복하며 살아가야 할까.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딤후 1:7) 라고 교훈해 주었다. 그렇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기대하시는 마음은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다.” 아기가 엄마 품에 있는데 두렵나. 제비 새끼들이 엄마 제비 아빠 제비와 함께 있는데 두려울까. 두려움은 엄마 품을 떠난 아기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때에 찾아오는 감정이다.
 
“이제 내가 살아도”라는 복음성가를 아시지 않나.
 
“이제 내가 살아도 주 위해 살고
이제 내가 죽어도 주 위해 죽네
하늘 영광 보여주며 날 오라 하네
할렐루야 찬송하며 주께 갑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요
사나 죽으나 사나 죽으나 날 위해 피 흘리신

내 주님의 것이요
이제 내가 떠나도 저 천국가고
이제 내가 있어도 주 위해 있네
우리예수 찬송하며 나는 가겠네
천군천사 나팔 불며 마중 나오네
그러므로 나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요
사나 죽으나 사나 죽으나 날 위해 피 흘리신
내 주님의 것이요”
 
이런 믿음으로 산다면 무서울 것이 무엇이고 두려울 것이 무엇인가. 하루를 살아도 천년을 살듯이 살고, 아니 주 안에서 영원을 살듯이 살고, 백년을 살아도 하루를 살듯이 주 안에서 주를 위해서 살아야 하지 않겠나. 주께서 어느 날 오라 하시면 홀연히 주님 앞으로 돌아갈 그런 믿음이 귀하고 아름답지 않나. 그러므로 지금 충성하고 지금 헌신하고 지금 봉사하고 지금 최선을 다하고 지금 주를 위해 살지 않으면 어느 순간에는 누구나 다 후회만 남고 말 것이다.
 
본문인 시편 46편은 고라 자손의 시이다.
3절에 보면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라고 하였다. 어떤 상황인데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것인가.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가 어떤 상황인가.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
 

우리의 큰 도움이시니.
‘하나님은 환난 중에서 만날 우리의 큰 도움’이시란 말이다. 영어 성경으로 보면 “환난을 당할 때에 언제나 영원히 매 순간마다 시시 때때로 도움이 되시는 하나님”(ever present help in trouble.)이시란 말이다.  그렇지 않나. 사람의 도움이란 도움이 되는 것 같다가고 배신하기도 하고, 이용해 먹기도 하고, 사기 치기도 하고, 복인 줄 알았는데 화가 되어 돌아오기도 하지 않나.
 
그러나 하나님의 도움을 입는 인생들이 경험하는 도우심이란 어 어떤 환난과 고난과 풍파와 시련을 당할지라도 매 순간마다 함께하시되 영원히 함께 하시는 도움이시란 말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가. 로마서 8장에서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하여 개가를 부른다. 로마서 8장 33절부터 39절까지‘새번역’성경으로 대하면 이렇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누가 감히 고발하겠습니까? 의롭다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누가 감히 그들을 정죄하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는 죽으셨지만 오히려 살아나셔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계시며,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하여 주십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

성경에 기록한 바 "우리는 종일 주님을 위하여 죽임을 당합니다. 우리는 도살당할 양과 같이 여김을 받았습니다" 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분을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나. 우리의 신앙 고백이 이래야 하지 않나.
 
살다보면 환난을 당할 때가 있다. 국가적으로는 우리나라의 구한말이 그랬지 않나. 세상에 이웃나라의 자객들이 쳐들어 와서 한 밤 중에 잠자고 있는 왕비를 끌어내어 난자하고 불태워 죽이는 이런 외교적 사건이 어떻게 가능한가. 만약에 요즘 같은 세상에 이런 사건이 국제적으로 벌어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약육강식은 언제나 세상이치다.
 
하긴 1968년 1월 21일 무장공비 김신조 일당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려고 이 지역을 통과해서 세검정 언덕까지 가지 않았나. 가까이에 있는 진관사 입구에 보면 그 당시 무장공비가 이 지역을 지나갔고 그들은 특공 훈련을 받은 무장공비들로 한 시간에 10km씩 이동하는 산을 날아다니는 특수 부대였다는 설명이 팻말에도 나와 있다. 
 
나라 잃은 일이 환란이고, 일제에게 식민지 당한 것이 환난이고, 6.25 같은 전쟁을 겪은 것이 환난이 아닌가. 민주화를 위해서 수많은 이들이 희생당하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고 분신하여 죽고 젊은 아들의 그런 아픔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부모형제들과 고문당하고 고통을 겪은 것이 어찌 환난이 아닌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 끌려 간 것이 환난이고 히틀러에게 히브리인의 2/3 수자인 600만 명이 죽임 당한 것이 민족적인 환난이 아닌가 말이다.
 
요즘 극장가에서 상영 중이라는 1981년의 광주사태를 배경으로 한 영화 ‘택시 운전사’같은 영화는 역사의 사실에 근거한 기록물이 아닌가. ‘군함도’라는 영화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환난이 있다. 환난이 크다. 어느 시대에나 누구에게나 불같은 시험과 환난이 피 할 수 없는 거대한 파도가 되어 덮쳐 온다. 그럴 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나. ‘두렵지 않다’고 대답하면 거짓말 하는 것이다.
 
‘덩케르트’라는 영화도 그렇다. 제 2차 세계 대전 때의 전쟁 실화 영화이다. 338,000명을 안전하게 유럽 본토에서 영국으로  안전하게 후퇴시켰다. 전쟁이란 것이 공격도 전쟁이지만 후퇴도 전쟁이다. 하나님이 돕지 않으시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나. 그 어느 누구라도 두려운 것은 두려운 것이다. 그런데 시편 기자인 고라 자손들은 이렇게 담대하게 고백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시46:1) 이 얼마나 놀랍고 담대하고 위대한 고백인가. 어떻게 이런 믿음으로 살 수 있는 걸까.
 
“하나님 따뜻한 물을 마실까요 아니면 찬 물을 마실까요.”혹은 “하나님 날이 더운데 오늘 점심에 콩국수를 해 먹을까요 아니면 열무김치를 넣고 비빔국수를 해 먹을까요.”이런 기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기도란 대개 인생의 중차대한 결정 앞에 고민하며 기도하는 것이 아닌가. 물론 우리가 날마다 기도하고 순간마다 기도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대개 기도란 나의 생각이나 나의 의지나 나의 결정으로 쉽게 결단할 수 없는 없는 경우에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서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것이 아닌가.
불안하고 초조하고 두렵고 떨리고 분별력이 흐려지고 할 때에 두려워지는 것 아닌가. 그럴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말이다. 그럴 때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는 것 아닌가.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는 32살 때인 1735년에 미국의 조지아에 목회자로 청빙을 받아 선교사로 영국을 떠났다. 그는 대서양을 건너가던 배 안에서  큰 풍랑을 만났다. 그런 뱃길 경험이 처음이었다. 그는 큰 두려움과 큰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런데 죽음을 겁내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26명의 모라비안교 신도들을 보고 감동과 도전과 충격을 받았다. 웨슬리는 미국에서 모라비안 교도들의 지도자였던 슈팡엔버그(August Spangenburg, 1704-1792)에게 목회적 자문을 구했다. 그 때 그는“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십니까?”하는 질문을 받고 자신이 그 때까지 구원의 확신이 없는 것을 알고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근느 이미 25살 때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신학 공부도 많이 하고 23살에 옥스퍼드 대학교의 링컨 칼리지의 연구원이요 교수로 임명 될 정도였다. 그는 이미 그 당시에 날마다 성경 공부하고 모이며 기도하고 모이며 성찬식을 하고는 했다. 그런데 그의 마음에 구원에 대한 확신이 불분명한 것을 깨달았다. 그랬던 그가 신앙생활의 우여곡절을 거치고 영국 역사의 위대한 전도자요 목회자요 신학자요 설교가요 믿음의 거장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미국 목회와 선교에 실패한 그는 영국으로 되돌아갔다. 모라비안 선교단체와 정기적으로 접촉했다. 그는 35살 때에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하고 회심을 체험했다. 그 후에 1739년 브리스톨에서 감리교회를 창설하였다. 영국 국교회인 성공회로 부터 파면을 당해 교구를 박탈당했고 활동을 제재 당했다. 그는 독일로 가서 모라비안 교도의 지도자인 진젠도르프를 만나 여러 가지의 장단점을 배웠다. 존 웨슬리는 50년 동안 야외설교를 했다. 그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로 전도여행을 다녔다. 가는 곳마다 큰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설교를 듣다가 졸도하기도 하고 진동하기도 했다. 그로 인해 웨슬리 부흥운동은 성공회 내부로부터 심하게 반대를 받았다. 존 웨슬리는 일평생 4만 번 이상 설교했다. 25만 마일을 말을 타고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처처에 누비고 다녔다. 그가 죽을 때에는 125,000명의 감리교 신자와 1,500명의 감리교 설교자가 생겼다. 풍랑과 파도 앞에 두려워하던 한 젊은이가 하나님께 사로잡히고 환난과 풍파를 이기는 전도자로 쓰임 받기 시작했을 때에 역사적으로 놀라운 열매를 맺게 되었다.
 
“사나 죽으나 사나 죽으나”라는 고백이 우리 모두의 신앙 고백이요 지금의 찬양이요 영원한 찬양이요 믿음의 증거가 되어야 하지 않겠나. 
 
 
새벽에 우리를 도우시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란 대단한 것이다. 4절의 표현처럼 예루살렘 성에 그렇게 흐르는 시내가 없다.‘한 시내’란 잠시 잠간 흐르는 시내가 아니라 사철 계속하여  끊임이 없이 흐르는 시내를 말한다. 물론 기드론 시내가 있지만 변변치 않다. 그러나 고라 자손의 이 시편 고백은 상징이며 염원이며 간절함이다. 그러므로 4절의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는 고백은 자신들의 간절함을 표현한 것이다. 몇 주 전에 묵상한 에스겔 47장의 에스겔을 통하여 보여 주신 성전에서 흐르는 물의 환상처럼 말이다.  나뉘어 흐르는 그 물이 무엇이기에 하나님의 성 예루살렘 성의 지존하신 분의 성소를 기쁘게 하는 걸까.
 
이런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나. 이런 교회를 가꾸어 가야 하지 않겠나. 이런 교회로 만들어 가야 하지 않겠나. 우리가 4년 전인 2013년 8월 18일 주일에 이 곳 새 성전에서 첫 예배를 드렸다. 벌써 4년 전의 일이다. 이곳에 오기 전에 우리는 응암동 상가 지하실에서 예배드렸다. 한 참을 걸어가서 별관에 식당을 마련하고 그곳에서 점심을 준비해서 함께 나누었다. 그 때 응암동 달동네 어른들께 매 주일마다 사랑의 도시락 반찬을 담아 날랐다. 연탄도 전달하고 쌀도 전달했다. 그 때 식당 주방은 두 평도 되지 않았다. 서너 명 들어서서 일하기도 비좁았다. 거기서 닭똥 같은 구슬 땀을 흘리며 요즘 같은 한 여름에도 150명의 음식을 차려 냈다. 그 때 수고 하고 애쓰던 손길이 지금도 여전하다. 그 때 환경에 비하면 지금은 5성급 호텔 주방 시설이다.
 
누군가가 묵묵히 섬기고 땀 흘리고 수고하고 애를 써서 주일을 맞고 성도들 간에 사랑의 식탁을 마련한다. 매주 점심 식사는 예수 때의 마지막 성찬처럼 거룩하고 숭고한 것이다. 이처럼 준비된 성찬도 성찬이지만 주방에서 차려서 함께 나누어 먹는 음식도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과 희생을 생각하면 한 숟가락의 음식이 거룩한 것이고 그 안에 생명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평하면 안 된다. 감사함으로 받으면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에서 2만 명이 먹고도 남는 벳세다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런 교회를 세워 나가고 있는 것이다. 언제까지나 우리끼리 좋고 우리 끼리 만족한 것으로 하하 호호 해서야 되겠나.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 중에 계시듯이 오늘 날 우리 가운데 계신다. 여기에 계신다. 여러분의 가정에 계시고 여러분의 일터에 계시고 여러분의 출입하는 걸음마다 함께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처소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처소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나.
우리는 대개 새벽이 약하고 새벽에 혼미한데 주님은 새벽 형이시다. 하나님은 24시간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신다. 하나님은 5절의 말씀처럼 특히 새벽에 강하시다.
 
개인적으로는 새벽 기도보다 밤 11시나 혹은 밤 12시에 모여서 자정 기도회를 하면 강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33년을 새벽 기도를 해도 쉽게 적응되지 않는 것이 새벽 기도이다. 그러나 주님은 무어라고 말씀하시나. “하나님이 새벽에 도우시리로다.”라고 했다.
 
미국에 이민 간 목사가 이민 목회를 하면서 새벽 기도를 하려고 계획했다. 미국 교회를 빌려 쓰니까 미국 교회 목사를 만났다. 새벽 5시에 기도회를 하려고 하니 빌려 달라고 했다. 어느 날이냐고 물었다. 날마다 라고 했다. “너 미쳤냐”고 질문했다. 그것도 “새벽 5시에 날마다 설교를 하냐”고 물었다. “그러려고 한다”고 대답했다. “너 그러면 얼마 못가서 일찍 죽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 미국 목사는 “새벽 5시에는 하나님도 주무시는 시간이라”고 타일렀다.
 
우리교회는 아직은 여전히 새벽 4시 전에 일어나서 달려오는 성북동, 돈암동, 삼선동 교우들이 계셔서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심이 공급된다.  4년이 지났어도 진관동 교인과 폭포동 교인들이 성북동파, 돈암동파, 삼선동 파의 새벽 열심을 이기지 못한다. 역전 되는 날이 어서 속히 오길 바란다.
 
요한 웨슬리 목사는 밤 10시만 되면 손님이 있어도 돌려 보냈다고 한다. “어서 자고 내일 새벽 기도 해야 하니 이제 그만들 돌아 가시오”하고 작별을 고했다고 한다.  요한 웨슬리 목사는 88살에 하나님 앞으로 돌아갈 때까지 새벽 기도를 드렸다.
아침 일찍 출근하는 다른 교회 교인을 새벽 기도 후에 자주 만난다. 그 분은 지난 겨울과 봄철에 TV 뉴스에도 여러 번 나온 유명인사이다. 지난 금요일 새벽에도 새벽 기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만났다. 그가“목사님 새벽마다 일찍이 수고가 많으십니다.”하는 인사를 건네 왔다. 우리 인사 하자. “우리도 새벽 일찍이 수고 좀 많이 합시다.”

아브라함도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다. 모세도 그랬고 여호수아도 그랬다. 다윗도 여렸을 적에 아침 일찍이 일어나 양떼를 종들에게 맡기고 아버지의 심부름을 준비했다. 다윗은 아버지 이새가 꾸려준 먹을거리를 잔뜩 짊어지고 아침 일찍부터 출발해서 전쟁에 나간 형들을 찾아 면회하려고 떠났다. 아침 일찍부터 부지런하고 책임감 넘치던 다윗이 블레셋의 골리앗을 이겼다. 물매 돌 다섯 개 중에 한 개의 물매 돌을 던져서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우리 예수사랑교회의 교인들이 그런 교인들이 되길 기도한다. ‘다윗의 물매돌’이 무엇인가. “만군의 주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간다”는 믿음의 물매 돌이 아닌가.  보이는 것으로 평가하면 않 된다.
 
중국 2위 부자인 알리바바 회사의  창업자 마윈(馬雲, 1964-)을 보라. 그는 중국 최대의 전자 상거래 회사의 창업자이다. 그는 '중국 흙수저 신화'의 주인공이다. 그는 가난했다. 돈도 없었고 공부도 못했고 키도 작고 외모도 별로다. 그러나 마윈은 영어에 관심이 많았다. 어렸을 때부터 중국여행 온 미국인들의 공짜 가이드를 자청했다. 그렇게 쌓은 영어실력으로 항저우에서 영어교사와 통역을 하며 지냈다. 그러다 미국에 가서 인터넷이라는 것을 처음 보고 눈을 떴다. 다시 중국으로 돌아 간 그는 사람을 모아 중국 최고의 인터넷 서비스 회사를 만들었다. 그의 재산은 23조이다.
 
마윈은 어렸을 적에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 왕따를 당한 것이다. 의리 때문에 싸우느라 학교 공부는 신통치 않았다. 마윈은 학교 성적이 바닥을 기어서 선생님들이 걱정하는 열등생이었다. 그러나 영어 하나는 잘했다. 엄격했던 마윈의 아버지는 툭하면 마윈을 꾸짖었다. 당하고는 못 참는 성격이었던 마윈도 아버지께 말대꾸를 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대놓고 말대꾸를 할 수 없으니까 영어로 계속하여 말대꾸를 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의 영어 실력은 점점 늘어만 갔다.
 
 CEO에서 물러난 후 마윈은 회사 경영보다는 공익 기금 관리와 운용, 대기오염 개선, 식량 안전, 수질 개선 등을 위한 활동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중국의 급속한 경제성장의 부작용으로 나타난 환경과 소외 문제를 못 본 체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활동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창업이 기업가인 나의 영혼을 불사른 것이라면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내 양심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다.”
 
날마다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기도로 하루를 마감하며 우리 각 사람은 날마다 조금 씩 조금씩 변해가고 성장해 가고 성숙해 가고 주님을 닮아가야 할 것이다. 영어 찬양 가사 “day by day little by little”처럼 말이다.
 
땅이 변한다.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진다.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논다. 바닷물이 넘쳐서 산이 흔들린다. 이 정도의 상황이면 강도 7.0 이상의 지진이나 강한 해일이나 쓰나미가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이걸 알아야 한다. 설마 하는 상황이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다.
 
요즘 세상에 누가 원해서 보트 피플이 되고 누가 원해서 난민이 되나.  
유엔난민기구에 의하면, 전쟁, 천재지변, 사상적 원인으로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떠나 유엔난민기구의 보호를 받고 있는 사람만 해도 2,100만 명이다. 유엔은 전 세계 인구의 약 1%인 7,700만 명가량이 난민 상태에 놓여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 전쟁을 통해 난민이 발생하고 있는 나라는 아프가니스탄·수단·소말리아·콩고 등이다. 이들 국가에서 발생하는 난민은 파키스탄·이란·미국·독일·프랑스· 영국 ·덴마크· 요르단 등으로 이주하고 있다. 조지 부시 대통령 때에 미국과의 전쟁에서 전 국토가 초토화된 이라크에서는 약 22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이들은 이웃나라인 터키·시리아·요르단·레바논·이집트 등지로 물 밀 듯이 쏟아져 들어가고 있다. 시리아·요르단 등에서는 내전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난민들의 탈출이 계속 늘어 나고 있다. 지금 유럽은 나라들 마다 난민 문제로 홍역을 앓고 있다.
 
새벽에 드리는 기도, 새벽의 신음 소리와 새벽의 부르짖음과 새벽의 묵상 중에 하나님은 움직이시기 시작하신다. 새벽이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의 돕는 손길이 바빠지기 시작하신다. 우리가 여기까지 나아 온 것도 인정하든 하지 않든 새벽 기도의 힘이다.
 

우리와 함께 하시니.
 7절과 11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라고 했다. 그렇다. 하나님은 임마누엘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예수의 또 다른 이름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란 뜻의 ‘임마누엘’이 아닌가.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뿐만 아니라 우리 하나님은 무기력한 하나님이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전능하신 하나님, 만군의 하나님이시다. 만군의 하나님이 누구신가. “천만인이 대적한다”고 할지라도 눈도 깜박 하지 않으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지난 주일에 대한 시편 91편 말씀 7절에 “왼쪽의 천명, 오른 쪽의 만명”이라도 하나님이 치시면 일순간에 엎드러지고 만다. 이사야와 히스기야 임금이 기도하니까 앗수르 군대 185,000명이 하루 밤 사이에 송장이 되지 않았나. 시편 2편 4절 말씀처럼 하나님이 비웃으시면 당할 자란 이 땅에 아무도 없다. 하나님이 분을 내시고 화를 발하시고 진노하시면 이 땅에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당 할 수 있는 용사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의 편이 되어 주신다면 이 세상 그 어떤 두려움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은 그의 택한 백성들의 영원한 피난처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러므로 10절 말씀처럼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높임을 받으셔야 한다. 주께서 말씀하신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
 
신명기 31장 6절에 보면,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행하실 것임이라 반드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라”고 약속해 주셨다.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수1:9)
 
 “그들을 두려워 말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그들의 한 사람도 너를 당할 자 없으리라.”(수10:8)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함께 하시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두려움을 이기고 영원한 평화와 사랑으로 승리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두 다 되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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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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