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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주 여호와 하나님이여(시25:16-22) 2017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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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7-07-30 17:39 조회 16,255 댓글 0
 
주 여호와 하나님이여(시25:16-22)          2017. 7. 16

헐몬산 새벽 기도회 기간 중이던 저 지난 토요일인 7월 8일에 옥상을 둘러보러 올라갔다. 마치 까치 세 마리가 십자가에 앉아 있었다. 쉽게 보기 어려운 장면이 연출되었다. 10여 장의 사진을 찍었는데 포즈를 취해 주듯이 협조해 주었다.
 
옛 선조들은 아침에 들리는 까치 소리는 좋은 소식을 가져 온다고 믿었다. 1966년에 전국의 응모를 통해서 나라의 새 즉, 대한민국의 국조(國鳥)로 지정된 새가 까치다. 까치는 일주일이면 알에서 깨어난다. 부화할 때는 10g정도이지만 한 달이면 200g의 어미 새로 자라난다. 새 중에는 영리해서 학습과 모방이 뛰어나다. 칠월 칠석에 견우성과 직녀성이 만날 수 있도록 까마귀와 까치가 은하수로 날아 와서 서로를 잇대서 오작교를 만들어 준다는 전설도 있다.
 
웃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건강에도 좋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웃음이 보약이다. 우리 몸에는 650여 개의 근육이 있는데 그 중에 얼굴에만 약 80여 개의 근육이 있다. 이 중에서 웃을 때는 몸 근육 231개, 얼굴 근육 15개 이상이 움직인다.
화를 내면 얼굴 근육 80개 중에서  72개가 경직된다. 15초만 웃어도 12칼로리가 소모되고 수명은 2일 연장된다. “일소(一笑)일소 일노(一怒)일노”라는 말이 맞다.  웃으면 윗몸 일으키기 운동 25번 한 것과 똑같다. 하하하하…웃는 동안에 수명이 계속 연장되는 것이다. 참 놀라운 일이다.
 
이것은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이다. 그래서 웃음치료사들은 “웃음은 운동”이라고 말한다. 웃음은 호사스러운 것이 아니라 실제 영혼육의 운동이다. 전문가들은 웃을 때 세 가지 원칙을 지켜야 효과적이라고 가르친다.
 
첫째, 크게 웃어라.
둘째, 숨을 내쉬는 날숨으로 10초 이상 웃어라.
셋째, 배가 아프도록 숨이 끊어질 듯 박장대소(拍掌大笑)하라.
성경에도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셨다.
웃으면 젊어지고 웃으면 오래 산다. 그러나 하나님 만나면 영원히 살고 예수 안에서 죄 사함 받고 구원 받으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영생한다.
 
시편 25편은 다윗의 시편이다. 기도시이다. 비탄시라고 한다. 곤고와 환난 중에 기도하고 있다. 다윗은 평생 마음의 근심 걱정인 고통이 있었고 살아온 날들의 죄와 허물과 악에 대한 기도가 계속되었다. 외적으로는 그를 죽여 없애려는 원수들과 대적자들의 위협이 끊임이 없었다. 시편 25편은 앞부분인 15절까지의 분량에 보면 3절 말고는 매 절마다 “여호와여, 하나님이여, 주여”라는 표현을 반복하였다. 본문으로 읽은 시편 25편의 마지막 부분의 기도 내용에도 “주여, 하나님이여”라는 표현이 계속된다. 전체적으로는“여호와여”로 시작하여 “하나님이여”로 마치는 기도의 내용을 대하게 된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을 “주 여호와 하나님이여”라고 정하였다.
 
다윗은 무엇을 기도하고 있나. 주 여호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기도하고 있다. 가령 1절을 보라. 주와 여호와를 동시에 부르며 기도하고 있다.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나이다.”이는 다윗이 인생을 의지하거나 우상을 숭배하지 않고 오직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음을 고백하고 선언하는 내용이다. “주 여호와 하나님이여!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진심으로 기도하던 다윗이 진심이 느껴지는 말씀을 대하게 된다. 다윗은 무어라고 기도하였나.
 
 

주여 나에게 은혜(恩惠)를 베푸사 고난에서 끌어내소서.
현대인의 성경의 16절, 17절은 이렇다.
“여호와여, 내가 외롭게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나에게 돌이키셔서 주의 자비를 베푸소서.
내 마음의 고통이 점점 더해 갑니다.
나를 이 모든 괴로움에서 건져 주소서. ”
 
다윗은 왕이지만 자기 마음속에 일어나는 외로움과 고통과 괴로움과 슬픔을 이기지 못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 그렇다. 이런 감정들은 왕이라고 쉽게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권력으로도 해결할 수 없고, 재물이 많고, 은과 금이 많고, 다이아몬드와 보석이 넘쳐나고 주식이 많고 아무리 돈이 많아도 이런 복잡한 감정들이 밀려오면 쉽게 해결되지 않는 법이다. 외로우면 누구라도 외로운 것이다. 괴로우면 누구라도 괴로운 것이다. 슬프면 누구라도 슬픈 것이다. 인생의 고통을 그렇게 쉽게 해결 할 수 있었다면 어찌하여 독한 술이 생겨났겠으며 세상 향락에 빠지고 가정과 인생을 망치는 이들이 왜 생겨나겠는가.
 
평생을 어려서부터 신앙으로 시작해서 신앙으로 살아가려는 이들을 <신신 백화점> 출신이라고 하고 세상에서 방황하고 화류계에 들락거리던 인생이 돌이켜서 회개하고 신앙으로 살아보려고 씨름하는 이들을 <화신백화점> 출신이라고 한단다. ‘신앙에서 신앙으로’를 신신, ‘화류계에서 신앙계로를’ 화신이라고 만든 죠크이다.
 
평생 신앙으로 살아간다고 해서 외로움이나 괴로움이나 슬픔이나 답답한 일이 전혀 없을까. 우리가 살아가며 경험하는 대로 늘 “주여 주여 하고 살고, 하나님 하나님”하며 산다고 해서 걱정 근심 염려 불안 초조 괴로움 질병 두려움이 순식간에 모두 다 안개처럼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니지 않나.
 
믿음으로 살아도 외로울 때 있고 기도하며 살아도 괴로울 때 있다. 생각해 보라. 누가 외로움과 괴로움과 근심과 환란을 원하겠는가. 그러나 살아가다가 보면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다. 항상 개나리 진달래 피는 날과 같은 봄날 인생이 있는가. 항상 물안개 피어오르는 평온한 아침을 맞고 언제나 석양이 그림과 같은 편안한 날만 계속되는 인생이 어디 있는가. 세상살이가 날씨와 같지 않나. 언제는 비가 안 오고 가물어서 “비가 내리게 해 주세요” 하고 기도하던 때가 언제였나. 그런데 10여일 비가 계속 오니까 어디는 물 날 리가 나서 물 피해가 적지 않다. 이래도 어렵고 저래도 힘겨운 게 인생이다. 어떻게 인생이 언제나 엄마 품에서 곤히 잠든 어린 아기와 같이 항상 편안할 수만 있겠는가.
 
새번역 성경에 보면,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롭사오니 내게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 나를 곤난에서 끌어 내소서” 라고 번역하였다.
 
다윗은 우리가 아는 대로 온실에서 나서 자라고 온실에서 왕이 되고 온실에서 40년 왕 노릇 한 인물이 아니지 않나. 다윗은 이스라엘의 변방인 베들레헴 시골 마을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는 다윗을 8번째 막내아들로 낳았다. 어려서부터 늘 들판에 나가서 아버지의 양떼를 돌보는 목동으로 자라났다. 다윗이 블레셋과의 전쟁에 불려 나간 형님들 면회 갔다가 골리앗을 물매 돌 하나로 해결하였다. 전쟁은 그렇게 끝이 났고 이스라엘 안에 소년 다윗은 일약 전국적으로 소문난 주인공이 되었다. 그 전쟁 승리 이후 온 국민들이 노래를 지어 부르기 시작했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 생각해 보라. 사울이 그 당시 이스라엘의 왕인데 온 나라의 백성들 특히 여인들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노래하고 다니니 어느 임금인들 기분이 좋겠는가. 그 당시나 오늘 날이나 권력자들과 통치자들은 백성들이 지금 나를 얼마나 응원하고 지지하고 좋게 평가하고 있는가에 귀가 쫑긋하고 열려 있는 법이다.
 
그런데 온 나라의 백성들이 사울 왕보다 소년 다윗을 높이니 사울 왕이 기분이 좋겠는가. 다윗은 골리앗을 해결한 후에 왕의 관심 가운데 왕의 총애를 받았다. 왕의 사위까지 되었다. 그러나 얼마가지 못하여 왕 사울의 시기가 불같았다. 감당할 수가 없었다. 임금 사울은 세 번이나 다윗의 면전에서 다윗에게 창을 던졌다. 화살처럼 날아드는 창을 피하지 못하였다면 다윗의 목에 창이 꽂히고 말았을 것이다.

사무엘상 19장에 보면 블레셋이 또 다시 이스라엘을 쳐들어 왔다. 다윗은 용맹하게 나가서 블레셋을 물리치고 돌아 왔다. 전쟁에서 돌아 온 다윗은 임금 사울 앞에서 수금(竪琴)을 타고 있었다. 그런데 손에 단창을 들고 있던 사울이 갑자가 그 단창을 다윗에게 던졌다. 다윗은 빠른 동작으로 피했고 사울이 던진 창은 왕궁의 벽에 가서 꽂혔다. 성경에 보면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접하여서 그런 망동을 저질렀다고 했다. 다윗은 그 자리를 떠나서 그 밤에 자기 집으로 도피하였다. 그런데 그 밤에 사울 왕은 전령들을 보내서 다윗을 죽이라고 했다. 다윗의 아내인 사울 왕의 딸 미갈이 이상한 예감을 갖고 한 밤 중에 다윗을 창문으로 도피하게 도왔다. 미갈은 다윗이 잠자던 침상에 사람의 모양을 장식하고 염소 털로 머리를 씌우고 의복으로 덮어 두었다. 그리고 다윗을 죽이려고 온 사울의 전령들에게 “다윗이 병들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사울 왕은 병든 다윗을 침상 째 메어 오라고 호령했다. 사울 왕 자신이 다윗을 침상에 누어있는 상태로 죽이겠다고 소리쳤다. 사울의 전령들이 다시 다윗의 집에 가서 보니 다윗은 이미 피신하여 없었고 다윗의 침상에는 미갈이 다윗을 대신해서 위장해 놓은 장식들만 덮여 있었다.
 
다윗은 그 밤에 도피하여 ‘라마’에 있는 선지자 사무엘을 찾아 갔다. 그리고 악령에  붙잡혀 이성을 잃고 행동하는 사울 왕의 근황을 소상하게 전하였다. 선지자 사무엘은 다윗과 함께 ‘나욧’이란 곳으로 가서 함께 지냈다. 사울 왕은 자기 전령들을 세 번이나 보내고 또 보내서 다윗을 찾아오게 하였다. 그 당시 전령이란 왕의 친위대인 군대다. 사무엘상 19장 20절에 보면 하나님의 영이 사울 왕의 전령들에게 임하여 예언하게 하였다. 하나님이 다윗을 보호하시는 장면이다. 결국 다윗의 은신처를 찾지 못하게 되자 사울 왕이 직접 찾아 나섰다. 23절에 보면 하나님의 영이 사울 왕에게도 임하였다. 이는 무슨 장면인가. 아무리 왕이 나서고 왕의 명령을 받고 다윗을 죽여 없애려는 세력이 라마와 나욧을 샅샅이 누벼도 하나님이 다윗을 보호하시니 찾아 낼 수가 없었다. 다윗을 죽일 수가 없었다. 그 때에 임금 사울이 ‘라마 나욧’을 찾아 가면서 밤새도록 옷을 벗은 채로 지내는 기이한 행동을 보였다.
 
다윗은 소년기, 청년기를 거쳐 가며 사울 임금의 사위가 되고 나라의 중심에 서는 전쟁에 능한 용사가 되었으나 늘 그의 마음은 외롭고 괴롭고 답답하고 곤고하였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와 자비가 아니라면 그의 겪는 고난과 고통의 세월을 이길 힘이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지금 연세 들어가는 왕으로 있으면서도 늘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다.
 
다윗은 8명의 왕비와 여러 후궁들에게서  19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8명의 왕비에게 태어난 자녀만도 19명이었다. 세종대왕의 6명의 왕비에게서 18명의 왕자와 4명의 공주가 태어난 것처럼 말이다. 조선의 왕들 중에서 왕자가 제일 많이 태어났다. 장남이 문종, 차남이 세조다. 세조는 단종을 폐위하여 영월로 유배시키고 자신이 왕이 되어 12년을 통치하였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날 없듯이 그 배 다른 왕자들 사이에 얼마나 뒤숭숭한 일들이 많았나 모른다. 다윗은 심지어 계획적으로 죽인 자기의 부하 장군인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도 미리 범하고 우리아가 죽은 후에 여덟 번 째 왕비로 맞아 들였다. 솔로몬은 밧세바와 다윗 사이에 태어난 왕자이다.
 
하나님은 밧세바를 범한 사건을 책망하시면서 다윗에게 이런 경고를 하셨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삼하12:10)
실로 다윗 임금의 생애는 슬픔과 충격과 두려움과 괴로움과 한숨과 외로움과 근심이 끊임이 없는 날들을 살아야 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와 자비가 아니고는 버티고 살 힘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 다윗이 고백하고 기도하였다. 12절을 보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냐 그가 택할 길을 그에게 가르치시리라.”다윗은 지은 죄와 악을 반복하지 않으려 애통하고 씨름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지켜 가려고 몸부림치는 삶을 살아갔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다윗은 위로 받을 곳이 없었다. 하나님의 자비가 아니면 그 파도처럼 밀려드는 외로움과 괴로움과 고통과 번민과 근심을 이길 수가 없었다. 첫 왕비인 사울 임금의 딸 미갈은 자녀가 없었다. 그리고 둘째 왕비인 아히노암에게서 태어난 첫 아들이 암논이다. 물론 저들은 왕에 등극하기 전에 맞은 부인들이다. 셋째 부인인 아비가일까지 세 부인이 광야와 동굴로 피신 다니던 야인 시절에 맞은 부인들이다.
 
다윗의 장남인 큰 왕자 암논이 배 다른 누이 동생인 다말을 제 집안에 끌어 들여 겁탈하였다. 다말은 ‘타마르’인데 이는 ‘종려나무 열매’를 말한다. 이스라엘은 타마르란 단어를 여자의 이름에 사용하고는 하였다. 부끄러운 일을 당한 공주 다말은 오라비인 압살롬의 집에 거하면서 공주의 옷을 찢어 버리고 슬픔 가운데 두문불출하고 지냈다. 아버지 다윗 임금은 나라 살림에는 분주하게 지내면서도 정작 배 다른 왕자들 간의 갈등이나 그래서는 안 되는 왕자들 간의 못된 행동에 대해서도 징벌과 책망이 불분명한 나날을 보냈다. 이  사건 2년 후에 다말의 오라버니인 압살롬이 양의 털을 깎는 날 아버지 다윗 왕과 신하들을 초청하였다. 다윗은 특정한 왕자의 행사에만 가서는 안 되겠다는 판단이 들었던지 참석을 고사하였다. 대신에 왕자들이 골고루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도록 주선하였다. 장남인 암논을 비롯하여 배 다른 왕자들이 양털 깎는 잔치 자리에 참석하였다. 압살롬은 풍성한 음식과 독한 술을 마련하였다. 잔치의 흥이 더해지자 압살롬의 부하들이 나서서 암논을 죽였다. 사태의 결과는 자기가 책임 질것이니 큰 왕자 암논을 살해하라고 이미 명령하였던 것이다. 겁에 질린 다른 왕자들은 술에 취한 채로 노새를 타고 뿔뿔이 흩어져서 제각기 도망하였다. 암논을 살해한 압살롬은 외가 집이 있는 그술로 도피하여 3년을 지냈다. 그 때에도 다윗은 더 이상의 아무 조치도 하지 않고 슬픈 날들을 지냈다. 결국은 그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 아버지 다윗 왕을 왕궁에서 쫓아내었다. 물론 세월이 지나며 압살롬은 죽임을 당하고 다윗은 다시 왕궁으로 돌아 왔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떠나지 않는 슬픔과 괴로움과 외로움과 고독과 고민과 마음 속 깊은 곳을 짓누르고 있는 고통이 있었다. 임금이길 떠나서 한 인간으로서의 다윗은 그 마음에 깊은 곳에 큰 고통과 아픔과 슬픔이 떠나질 않았다. 참으로 다윗은 기도하지 않고는 한 순간도 자신의 연약함을 이기며 살아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주여 외롭습니다. 주여 괴롭습니다. 주의 내 마음에 근심이 많습니다. 주여 나를 이 고난에서 끌어 내 주십시오. 주여 내게 돌이켜서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여 내 모든 죄를 사(赦)하시고 구원(救援)하소서.
7절에 보면 다윗은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잊으시고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11절에 보면 자신의 죄악이 크니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해 달라고 기도하였다. 새번역 성경으로 대하면“주님, 주님의 이름을 생각하셔서라도, 내가 저지른 큰 죄악을 용서하여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드린 것이다. 다윗의 믿음이 크고 다윗의 신앙심이 깊고 다윗의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이 남다르지만 다윗은 부족함 투성이요 죄악 투성이요 허물이 많은 인생이었다. 그런 다윗 자신이 괴로워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구하며 기도한 기도가 시편 25편이다.
“주여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시25:18)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시25:21)
실로 다윗은 마음속에 가득한 죄와 그를 죽여 없애려고 달려 드는 원수들의 위협 앞에서 한 순간도 주님의 도우심과 보호와 인도하심이 아니면 불안하고 초조해서 견딜 수가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다윗은 이처럼 처절하게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다윗이 힘들어하고 마음 아파하고 하나님 앞에서 여전히 괴로워하며 늘 죄의 문제를 갖고 씨름하는 것이 무엇인가.
다윗은 십계명으로 하면,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이 모든 계명을 하나하나 일일이 범한 죄인이다.

부하 장군 우리아를 계획적으로 전쟁의 일선으로 내 몰아서 죽게 하였다.
이미 그 이전에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왕궁으로 불러 들여 범하였다.
전쟁 중에 왕궁으로 불러들인 우리아 장군에게 특박을 주며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거짓을 꾸며 가며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려고 했었다.

다윗은 곁의 충성된 부하 우리아의 가정의 행복, 부부의 행복한 삶을 도둑질하였다.
다윗은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인“네 이웃의 아내, 남녀 종, 소나 나귀,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계명까지도 차례차례 어기고 범했다.
 
다윗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도 어겼다.
다윗은 그 여러 부인에게서 태어난 아들들을 제대로 가르치고 제대로 책망하고 제대로 훈계하지 못하여 배 다른 형제들 간에 형제 살인과 형제자매 간의 간음과 증오와 보복과 원한과 갈등이 끊임이 없는 불안의 계곡에 갇혀 있었다. 다윗은 스스로 부모에게 효도할 줄 모르는 망나니 같은 왕자들로 인하여 피눈물 나는 세월을 지내야 했다. 다윗은 왕이 된 것 까지는 좋았으나 가정, 아들딸들로 인하여 언제나 슬프고 항상 마음 한 구석에 거대한 바위가 짓누르는 것 같은 죄의 무게를 느꼈다.
다윗의 그런 패륜한 사건들이 다윗의 아버지 이새가 살아 있고 다윗의 어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아무리 왕으로 출세한 아들 다윗이 왕궁의 산해진미로 부모님을 대접한들 기뻐하셨겠나. 아들이 한 나라의 왕이 되어가지고 자기 부하의 가정을 이렇게 짓밟아 망쳐 놓고 그 죽은 부하의 아내를 자기의 왕비로 맞아들여 함께 살았으니 이런 패륜이 어디에 있나. 그런 다윗이 지금 자기의 죄악으로 가득 찬 과거를 끌어안고 기도하고 있다. 밧세바는 다윗의 여덟 번째 부인이요 그에게서 태어난 왕자 솔로몬이 나중에 다윗의 대를 이어 왕이 된다. 그러나 다윗의 기도는 늘 이랬다.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시25:18)
그렇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용서하심이 아니면 죄 사함을 받을 인생이란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로 나아와야 한다. 나의 죄를 씻기는 것은 불교의 힘이 아니다. 유교의 힘도 아니고 힌두교나 이슬람의 힘도 아니다. 나의 죄를 씻기는 것은 권력, 재물, 지위, 학벌, 미모, 건강, 인기의 힘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십자가의 사랑이 아니면 죄 사함 받을 위인이란 이 땅에 단 한 사람도 없다.
 
인천시가 이슬람 자금으로 세우는 이슬람대학교를 송도에 세우려 하고 아시아 최대 규모의 이슬람 사원을 건축하려고 한다고 한다. 이미 확정된 일이라고 한다. 중동 이슬람의 오일머니가 들어 와서 입학금도 무료, 학비도 무료로 하면 우수한 학생들을 이슬람화시키게 되고 결국은 이 나라의 장래가 어떻게 되겠는가. 인천이 어디인가. 1885년 우리나라에 기독교 복음이 처음으로 들어온 제물포 항이 있는 곳이 아닌가.
 
이제는 이단과 사이비뿐만 아니라 우상 숭배와 타 종교의 힘에 밀려서 한국 기독교 100년의 부흥기에 큰 도전이 심각해지고 있다. 다윗이 기도하듯이 “원수의 수가 많고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심히 미워하는”날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지켜 구원해 주지 않으신다면 이 죄 악 된 세상에서 구원 받을 수 있는 인생이란 없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 자비하심만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유일한 길이며 소망이시다. 그러므로 주께로 피하여야 한다. 그래야 사냥꾼의 올무와 같은 세상의 죄와 악으로부터 온전한 구원을 받을 수 있다. 20절, “내가 주께 피하오니” 이것이 다윗의 진심어린 기도이다.
 
인간은 스스로의 의(義)와 공로(功勞)로 구원 받을 수 없다. 우리 각 사람을 불쌍히 여겨 주시고 우리의 죄와 악을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용서해 주시고 잊어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예수님의 긍휼이 아니면 구원 받을 수 없다. 예수님의 십자가 우편 강도가 받은 구원이 무엇인가. 그런 흉악한 강도라도 주님의 용서와 자비와 긍휼을 통하여 구원 받는 것이다.
다시 11절을 보라.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크오니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하소서”그렇지 않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라는 기도는 “주의 자비하신 성품으로 인하여”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자비가 아니면 어떻게 인간의 크고 작은 죄악을 용서 받고 사함 받을 수 있겠나. 7절에 보면 다윗은 지난날의 죄악, 젊은 날의 죄악들로 인하여 괴로워하고 있다. “여호와여 내 젊은 날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라고 기도하였다.
 
“날 구원하신 주 감사 모든 것 주심 감사”찬송을 부르지 않나. 우리가 슬퍼만 하거나 낙심만 하거나 괴로워만 하지 않고 주 안에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갖고 감사하며 살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죄와 허물과 악에서 우리를 건지시며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 삼아 주실 수 있는 사랑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난 날 그 어떤 사악한 죄와 악을 범했다 할지라도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하면 자비와 사랑의 주님은 우리의 지은 과거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자녀 삼으셔서 죄 사함 받고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영원히 누리며 살게 하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시다.
 
 
주여 나를 보호하사 수치와 모든 환난에서 속량(贖良)하소서.
다윗의 기도는 계속된다.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保護)하소서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난에서 속량(贖良)하소서.”(시25:21-22) 그렇다. 하나님의 보호와 죄 사함과 속량의 은총이 아니라면 인간이 스스로 죄에서 구원 받으며 원수들의 살기등등한 위협과 사단 마귀의 궤계로부터
구원 받을 길이란 없다. 몇 주 전 주일에 묵상한 민수기 6장 24절의 모세를 통한 축복 기도 내용이 그러하지 않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그렇다. 주 여호와 하나님의 주시는 복과 지키시는 일상의 보호하심과 햇빛을 비추어 주시듯 공급하시는 은혜와 평강이 아니라면 매 순간 이처럼 악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자란 없다. 더군다나 영생이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이며 사랑이 아닌가.
그 동안 다윗은 자기 자신의 내면의 죄와 사면초가의 원수들의 위협으로부터  하나님의 구원을 기도 하던 중에 기도의 마지막 절에서는 동족 이슬라엘 백성들을 “그 모든 환난에서 속량하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다. 임금으로서 민족적인 구원과 죄 사함과 속량을 위하여 기도한 것이다.
 
권력과 자리만 주어지면 자기 배 채우기에 혈안이 되는 그런 굶주린 이리 떼와 같은 방백들이 섬기는 나라가 아니라 다윗처럼 이렇게 겸허하고 진실되게 기도하며 기도의 내용대로 살아가고자 씨름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는 복된 나라, 복된 도시, 복된 가정, 복된 교회, 복된 인생들이 모두 다 되어야만 할 것이다.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난에서 속량하소서”
“하나님이여 열방을 그 모든 환난에서 속량하소서”
“하나님이여 대한민국을 그 모든 환난에서 속량하소서”
“하나님이여 북한 백성들을 그 모든 환난에서 속량하소서”
“하나님이여 서울을 그 모든 환난에서 속량하소서”
“하나님이여 발로 밟는 땅과 모든 백성들을 그 모든 환난에서 속량하소서”
“하나님이여 우리 교회와 성도들을 그 모든 환난에서 속량하소서”
“하나님이여 우리 가정을 그 모든 환난에서 속량하소서”
“하나님이여 나의 영혼을 그 모든 환난에서 속량하소서”
 
그래서 다윗은 구구절절이 기도하고 있다.
“주여, 여호와여, 하나님이여”라고...
주께서 우리 각 사람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길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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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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