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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게 해 드리는 효도(잠23:24-26) 2017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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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7-05-14 17:26 조회 16,128 댓글 0
 
즐겁게 해 드리는 효도(잠23:24-26)         2017. 5. 14 어버이주일


우리나라에 오일장이 서듯이 중국 시골에도 과거에 닷새 만에 장이 섰다. 장(場)이 서게 되면 어느 집 아들은 그동안 모은 나뭇짐을 지게에 지고서 장에 팔러 나갔다. 늦은 저녁이 되면 연세 많은 어머니는 이제나 저제나 아들을 기다리고는 했다. 어두워지는 늦은 시간에도 돌아오지 않으면 어머니는 걱정이 되어 동구 밖까지 나가서 아들을 기다렸다. 멀리서 한 사람씩 보이기 시작하자 어머니는 좀 더 멀리 보기 위해 나무 위로 올라갔다. 이 애틋한 마음을 담은 한자가 어버이를 뜻하는 “親”(친)자이다. 이제 아들은 시장에 가서 나무를 팔아 그 돈으로 어머니께 드릴 생선과 고기를 비롯한 몇 가지 반찬과 생필품을 사들고 오다가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어머니를 만나게 된다. 아들은 어머니에게 공손하게 말한다. “어머니! 다리 아프실텐데 어찌 여기까지 나오셨어요. 제가 업어드릴 테니까 이 지게 위에 타세요.”  그리고는 연세 많은 어머니를 지게 위에 태우고 걷는 아들의 모습이 한자의 “孝”(효)자 라고 한다. 부모를 공경하고, 부부간에 우애하며, 자녀들을 사랑으로 키우며 살아가는 가정은 더 바랄 것이 없는 행복한 가정이 아닌가. 

이 세상에 아버지 어머니 없이 태어난 인생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물론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손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 내신 최초의 인간이지만 말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부모에 의해서 태어나고 사랑과 정성으로 양육 받아 독립된 성인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부모를 일찍이 잃은 고아라도 그 누군가를 통해서 보호받고 생명을 부지하며 성장해 온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생명이 이 땅에 가능하도록 나를 낳아 주신 그 자체만으로도 부모에게 감사하고 효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바사, 즉 페르시아의 아하수에로 왕의 왕비로 간택된 히브리 처녀 에스더는 고아로 자라났다. 성경은 에스더의 부모가 어떤 일로 인해서 어린 딸을 남겨 놓고 일찍이 세상을 떠났는지에 대하여는 설명해 주지 않는다. 에스더는 어려서부터 용모가 곱고 아리따웠다. 사촌 오빠인 모르드개는 그런 여건의 에스더를 자기 딸 같이 양육하였다. 에스더 2장 7절에 보면 그런 말씀이 나온다. 그처럼 부모 일찍 잃고 외롭게 자라나던 에스더를 역사적인 인물로 자라나도록 친아버지와 같은 사랑을 쏟은 인물이 사촌 오빠 모르드개이다.

세월이 지나고 에스더는 바사 제국의 왕 아하수에로의 왕비가 되었다. 그 당시 왕 곁의 하만이란 자가 유대인을 말살하려던 간계가 드러났다.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다.”하고 삼일 간 동족이 함께 금식하며 기도하여 동족 구원의 선봉에 나섰다. 하나님은 그처럼 단 한 사람을 통하여 일하시고 한 가정을 통하여 한 시대의 구원역사를 이루어 가신다. 에스더서는 에스더와 사촌 오빠 모르드개의 끈끈한 사랑과 가족애와 민족정신과 하나님을 향한 신앙관을 보여준다. 

에스더서의 나중은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몰살당할 뻔한 위기에서 하만이 오히려 나무 꼭대기에 달려 죽고 모르드개는 왕의 총애를 받는 바사 제국의 제 2인자가 되었다.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이다.”는 결단과 각오로 나섰고 사촌 오빠 모르드개의 신앙적 조언에 대하여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이야기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부모, 어떤 자녀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까를 교훈하는 역사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높은 나무에 달려 죽을 줄 알았던 모르드개는 오히려 살아남았고 유대인 모두가 크게 존경하는 인물로 자리매김하였다. 하나님이 믿음의 사람 모르드개의 목숨을 건져 주신 것이다. 모르드개는 허다한 형제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모르드개는 왕의 곁에서 지혜롭게 바사 제국을 통치하며 그의 백성들의 이익을 도모하였다. 뿐만 아니라 모르드개는 그의 모든 종족들의 안위자였다. 그런 심성과 인품과 역량을 지녔던 모르드개의 에스더 사랑은 에스더를 당시의 대국 바사의 국모가 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한량없는 은총을 누리고 전하였다. 인생은 심은대로 거두는 법이다. 하나님은 사랑을 심고 선을 심는 자에게 보응하신다. 

가정, 부부, 부모 자녀의 관계란 이런 것이어야 하지 않겠나.
효도가 무엇인가. 부모님께 맛있는 것 사드리고, 보약 해 드리고, 병원 모시고 다니고, 일정하게 한 결 같이 용돈 잘 챙겨 드리고, 여행 시켜 드리고, 자주 찾아뵙고 하는 것이 다 좋지만 가장 잘하는 효도는 부모의 마음을 즐겁게 해 드리는 것이어야 한다. 

본문인 잠언 23장 25절에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를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고 했다. 그렇다. “이만 하면 나도 효도하는 것이다.” 하고 자기 마음에 위안이 되게 하려는 식의 효도를 효도라고 하기에는 아쉬움이 있다. 강남 사거리에 빌딩을 갖고 있는 어느 노부부는 큰 아들은 의사, 둘째 아들은 교수, 막내아들은 회사의 사장이란다. 그런데 어버이날이 되었다. 세 아들 다 아니면 세 아들 중에서 어느 아들이라도 와서 연세 많은 부모의 가슴에 카네이션 달아 드리고 맛있는 것 대접하겠지 하고 하루 종일 기다렸는데 세 아들, 세 며느리 어느 자식 하나 얼씬도 하지 않았다. 오후 늦게야 한 아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너무 바빠서 뵈러 갈 시간이 없으니 어머니 아버지 저녁 사 잡수시라고 10만원 통장에 넣어 드렸으니 맛있는 거 사 잡수세요.” 아니 부모님이 강남 사거리에 있는 빌딩의 주인인데 돈이 없나 금이 없나 은이 없나. 돈이 문제가 아니다. 빌딩이 문제가 아니다. 출세한 자식이 문제가 아니다. 잘 나가는 며느리가 문제가 아니다. 효란 무엇인가. 물질의 문제가 아니다. 마음의 문제이다. 본문은 말씀한다. “네 아버지 어머니를 즐겁게 하며 너를 낳은 어머니를 기쁘게 하라.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 

과거나 오늘 날이나 자녀 양육도 쉽지 않고 아들딸과 며느리 사위에게 효도 받기도 쉽지 않다. 그러면 잠언이 말씀하는 효도란 무엇인가.


의롭고 지혜로운 자녀.
효도하는 가정에 효자가 태어나고 효녀가 자라나는 법이다. 내가 부모에게 잘 못하는데 내 자녀들이 내게 효도하리라고 기대하면 되겠나. 자녀는 어려서부터 어른들이 하는 말과 행동 하나 하나를 보고 배우는 법이 아닌가. 

어느 교회학교 남자 아이가 집에서 성경을 읽는데 십계명을 읽고 있었다. “네 부모를 공격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아빠가 아들이 십계명을 읽는 소리를 들어 보니까. “네 부모를 공격하라.”고 읽고 있었다. “애! ‘네 부모를 공경하라’이지 ‘네 부모를 공격하라.’가 뭐냐.” 그 때 어린 아들이 아빠에게 대답하였다. “그런데 왜 아빠는 할아버지와 이야기 할 때에 항상 할아버지에게 공격하는 이유는 뭐에요.” 

창세기의 야곱이 요셉만 특별히 사랑하고 그에게만 채색 옷을 입혀 키웠다. 그것은 교육적으로 옳은 방법이 아니었다. 마땅히 다른 아들딸들을 골고루 사랑하고 골고루 대해야 옳을 텐데 야곱은 요셉을 다른 아들들과 다르게 대하였다. 그러나 요셉의 편에서 보면 자기는 다른 형제들과 다르게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로 태어난 요셉은 천진난만하고 정직하였다. 배 다른 세 엄마에게서 태어난 열 명의 형들이 한 집안에서 생활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어린 요셉의 마음에는 거슬리는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형제들이 많다 보니 열 명의 형제들은 서로 아버지를 속이고 때때로 어머니를 속였다. 잘 못하는 일들이 한두 가지 아니었다. 요셉은 배 다른 형들의 일상을 보면서 마음에 아니라고 여겨지는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 야곱에게 그 때 그때 마다 말하였다. 그런 요셉을 야곱은 다른 아들들보다 더 사랑했고 요셉에게만 유독 아름다운 채색 옷을 입혀 키웠다. 그러나 그런 날들이 계속되지는 못하였다. 

요셉은 배 다른 열 명의 형들에 의해 도단 성에서 애굽으로 팔려 가고 말았다. 요셉을 팔아 버리려고 결심한 도단 들판의 열 명의 형제들의 눈에 이스마엘 상인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낙타에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싣고 애굽에 팔러 다니는 국제상인들이었다. 요셉은 은 이십 냥에 애굽의 노예 시장으로 옷이 벗겨진 채로 팔려 갔다. 열 명의 형제들은 빨가벗긴 요셉의 채색 옷에다가 짐승을 잡아 피를 발라서 아버지 야곱에게 전달하였다. 그리고는 “우리가 이것을 발견하였으니 아버지의 아들의 옷인가 보소서.”하고 자작극을 꾸몄다. 

이 열 명의 아들들은 아버지 야곱을 속이고 아버지 야곱의 마음에 아들 요셉을 잃은 슬픔으로 가득 차게 한 패륜한 아들들이었다. 요셉은 아버지 곁에서 자라나던 17년 동안 아버지의 기쁨이 되어 드렸다. 아버지를 시시 때때로 즐겁게 해 드린 아들이 요셉이었다. 창세기 37장 3절에 나오는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라는 말씀을 대할 때에 “아하.. 아버지 야곱이 요셉만 편애 했네”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반대로 하면 요셉은 어려서부터 다른 형제들과 다르게 사랑스럽게 행동하는 아들이었다. 이유 없이 사랑스럽고, 괜히 사랑스럽고, 그냥 사랑스럽고 마냥 사랑스러운 그런 아들딸이 있지 않나. 물론 다 사랑해야 하고, 골고루 사랑해야 하지만 그냥 사랑이 가고 왠지 모르게 더 사랑스러운 자녀가 있지 않나. 요셉은 아버지 야곱에게서 그런 사랑을 받으며 자라난 아들이었다. 어려서부터 17살이 되도록 아버지의 그런 넉넉한 사랑을 받으며 자라던 요셉이 도단성의 들판에 심부름을 갔다가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애굽에 노예로 팔려 가는 아들이 되고 말았다.

노예시장에 팔려간 요셉을 사들인 사람은 애굽의 왕 바로의 신하였던 친위대장 보디발이었다. 요셉은 그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노예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요셉은 그 낯 설은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이 남달랐다.

본문인 잠언 23장 24절에 보면 “의롭고 지혜로운 자식이 그의 부모에게 큰 즐거움이 된다.”고 하였다. 요즘 우리나라에는 60대 이상의 부모에게 기대서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80%가 넘는다는 통계가 있다. 캥거루족처럼 말이다. 캥거루는  탯 속에서 33일 동안 자라고 1-2센티미터의 땅콩만한 벌레 같이 아주 작은 새끼로 태어난다. 어미 캥거루의 3만 분의 1 정도로 태어난다. 스스로 어미 캥거루의 깃털을 기어올라서 가슴에 있는 육아낭 주머니에 들어가 네 개의 젓 중에 하나를 찾아 물고 한 달 동안 더 자란다. 점점 자라난 새끼 캥거루는 그 육아낭 주머니를 드나들면서 일 년 가까이 더 자라난다. 그렇게 해서 초원을 두 발로 껑충 껑충 뛰어 다니는 어미 캥거루가 된다. 보통 2미터, 큰 것은 3미터나 된다. 몸무게도 65kg이나 나간다. 보통 캥거루는 9미터를 뛰어 오른다. 최고 기록은 13. 5미터라고 한다. 시속 50km를 달릴 수도 있다. 캥거루는 호주, 뉴기니, 뉴질랜드에서만 사는데 무려 3,400만 마리나 된다고 한다. 호주 인구가 2,300만 명인데 사람 수보다 더 많다. 무섭게 먹어 치우고  일 년에 한 마리씩 낳아 번식한다.

왜 요셉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하는 것일까. 하나님은 노예생활을 시작한 요셉과 함께 하셨다. 요셉은 비록 노예였지만 하나님은 그를 형통한 자 되게 하셨다. 하나님은 노예의 땅 애굽을 요셉을 키워 내는 캥거루의 육아낭 주머니처럼 사용하셨다. 

주인 보디발도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시는 것을 계속하여 목격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요셉으로 하여금 하는 일들마다 형통하게 해 주셨다. 요셉은 비록 노예 생활이긴 하지만 주인 보디발로부터도 은혜를 입으며 생활 하였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의 제반 가정 총무 일을 도맡아 하게 되었다. 보디발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맡겼다. 요셉은 주인 보디발의 모든 동산과 부동산에 대하여 손바닥처럼 낱낱이 알고 그 살림살이를 도맡아 하게 되었다. 요셉을 향한 보디발의 신임은 두터웠다. 하나님은 요셉을 위하여 보디발의 집에 복을 내려 주셨다. 주인 보디발은 알았다. 자기 집의 밭의 농사뿐만 아니라 집안의 제반사가 형통해져 가는 비밀이 노예 요셉이 믿는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요셉은 더 이상 아버지를 뵐 수 없는 남의 나라에서의 노예 생활을 계속해야 했지만 그의 마음에는 분명한 신앙관이 있었다. 자신이 비록 남의 나라에 버려진 고독한 청년기를 보내고 있지만 하나님 안에서 잘되리라는 소망이 있었다. 요셉은 주인에게 인정받는 종으로 살아  남아서 때가 되면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이고 언약 가문의 후손다운 삶을 가꾸어 가야겠다는 분명한 꿈과 믿음이 있었다. 그러하다 보니 요셉은 주인 내외 앞에서도 언제나 정직하고 공의로운 판단과 말과 처세를 하였다. 요셉은 노예였지만 그냥 노예가 아니었다. 그는  주인이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은 꿈이 많은 히브리 청년이었다. 요셉은 언제나 땀내 나는 옷과 열심히 일하느라 구슬땀에 젖고 흐트러진 머리 모양이었으나 그의 마음가짐은 언제나 반듯하였고 그의 심성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청년다운 아름다움과 매력이 있었다. 요셉은 노예였지만 “그의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다.”(창39:6)

무엇이 효도인가. 누가 효자 효녀인가. 어머니 아버지가 나를 보시든 못 보시든 내가 부모의 곁에서 지내든 못 지내든 그 마음에 세상을 의롭게 살아가고자 하고 지혜롭게 개척해 나가려는 태도를 갖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요셉은 그런 인물이었다. 그런 요셉이 천신만고 끝에 나중에는 여 주인의 성적 유혹을 뿌리친 죄로 누명을 쓰고 감옥에 쳐 넣어졌다. 그러나 요셉은 감옥에서도 그 행동이 달랐다. 그 요셉을 기억하고 임금 바로 앞에 불러낸 이는 이태 전에 감옥에서 서로 만난 적이 있던 바로 왕의 술 맡은 관원이었다. 세상을 의롭게 살고, 지혜롭게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에 있으나 감옥에 갇혀 있으나 그 언행이 달라야 한다. 요셉은 매사에 어딘가 다른 사람이었다. 요셉은 애굽에 노예로 팔려 간지 13년 만에 바로 임금의 꿈을 해석하고 애굽의 제 2인자인 총리가 되어 애굽 전국을 다스리며 나중에는 가족 모두를 고센 땅에 정착 시켜 먹여 살렸다. 

요즘 수요일마다 묵상해 가는 창세기의 요셉의 생애 중에 가나안의 대 기근으로 인하여 못 만날 것 같던 아버지 야곱을 만나는 장면을 다시 대하게 된다. 죽은 줄 알았던 아들 요셉을 22년 만에 총리 요셉의 모습으로 만나게 된 아버지 야곱이 이렇게 말했다.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창46:30)

무엇이 부모를 즐겁게 하고 기쁘게 하는 효도인가. 죽은 줄 알았던 요셉은 하나님 안에서 의와 지혜로 자신을 지켜 간 효자 요셉의 모습으로 장성해 있었다. 요셉은 연세 많은 아버지 야곱을 정중하게 영접하여 애굽의 고센 땅에 모시고 나중 17년 간 효성을 다하였다. 


부모가 원하는 즐거움.
효가 무엇인가. 부모를 즐겁게 해 드리는 것이다. 어머니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고 즐겁게 해 드리는 길이 무엇일까. 아들딸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고 어떻게 부모에게 해 드려야 어머니가 기뻐하시고 아버지가 즐거워하실까. 내가 아들 딸 낳고 부모가 되어 보아야 나를 낳고 길러 주신 부모님의 심정이 실감나게 이해가 되는 법이다. 옛 어른들의 말씀 중에 “너희도 애 낳고 길러 봐라. 그 때 되면 부모 심정이 이해가 될 것이다.”란 말씀이 있지 않나. 

樹欲靜而風不止(수욕정이풍부지)
子欲養而親不待(자욕양이친부대)

라는 글이 있다. “나무가 조용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쳐 주질 않고, 자식이 효도를 하고자 하나 부모가 기다려 주시질 않는다.”는 뜻이다. 공자가 제자들과 길을 가다 고어(皐魚)가 노상에서 울고 있는 것을 봤다. 몹시 울며 슬퍼하는 고어를 보고 그토록 슬프게 우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때 고어가 대답하였다.

“저는 세 가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첫째는 유학 중에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이요, 
둘째는 저의 고상한 뜻을 받아들여줄 군주를 만나지 못한 것, 
셋째는 진정한 친구와 지금은 사이가 멀어진 것입니다.”

이어 “아무리 나무가 조용해지기를 원하더라도 불어오는 바람은 그치질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자식이 효도를 하려고 할 때까지 부모는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돌아가시고 나면 다시 뵙지 못하는 것이 부모입니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아버지를 즐겁게 해 드리고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은 그 때 그 때마다 하여야 할 일이다. 나중에 잘 하겠다는 말은 헛말이 되고 말 수도 있다. 나중에 잘 모시겠다는 계획은 이루어지지 못할 수도 있다. 내가 잘 해드릴 수 있는 날을 아버지 어머니가 기다려주시지 않고 늙고 돌아가시고 말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께 헌신(獻身)하는 일
나라에 충성(忠誠)하는 일
부모께 효도(孝道)하는 일
자신에게 성실(誠實)하게 
대하며 살아가는 그 모든 일들이 다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을 다하여 예배드리는 일도 오늘, 지금이 중요하다. 하나님께 헌신하는 일도 오늘 그리고 지금이 중요하다. 주일 날 산과 바다로 놀러 다니고 주일 날 잔치 집 찾아다니고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주일 날 낚시 다니고 주일 날 등산 다니고 주일 날 골프 치러 다니면 하나님이 즐거워하실까.

“하나님 제게 복을 주시면 차차 나중에 점점 잘 하겠으니 내게 복을 좀 주십시오.” 이렇게 막연하게 나중에, 장래에 하나님께 헌신하겠고, 주님의 몸 된 교회의 모든 사역에도 차차 나중에 헌신하겠다는 그런 막연한 생각이나 계획이나 다짐은 언제나 다음, 다음 언제나 나중, 나중이란 막연한 미래의 시간과의 약속일 뿐 허망한 약속이 되고 말 가능성이 크다. 

이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일, 나를 죄에서 건지시고 자녀 삼으시며 영생을 선물로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일도 마찬가지다. 오늘과 지금의 헌신과 충성스러움이 없이 나중에 잘 해 보겠다는 막연한 마음으로는 자기 자신도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말 것이다. “하나님 지금은 아니고요 나중에 돈 잘 벌면 십일조도 제대로 하고 충성하며 신앙생활 할께요.” 이런 약속이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속이며 스스로 거짓말하는 것이다. 

내가 속한 나라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세금도 철저히 내고 국가에 충성되게 살아가는 모습, 가정에서 아버지 어머니를 즐겁게 해 드리고 기쁘게 해 드리는 그 모든 일들과 자기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진지하고 성실하게 대하며 살아가는 그 모든 것들이 다 마찬가지이다. 

“修身齊家治國平天下”(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말이 무엇인가.
자신을 잘 갈고 닦을 줄 아는 사람이 가족들에 대하여도 잘하고 부모님께 대하여도 효도하게 되는 법이다. 자신과 가족과 부모와 내외간에 그리고 자녀들에게 제대로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야 사회생활도 제대로 하게 되고 나라의 그 무슨 일을 맡아도 잘 하게 된다. 개인이나 가정사가 편협 되고 부부 사이에 문제가 심각하고 매사가 왜곡되고 거짓과 위선이 있는 사람이라면 사회생활도 마찬가지고 그런 사람에게 나라의 그 어떤 일을 맡겨서는 더 더군다나 그 결과가 악해지고 말 것이다. 

채근담(菜根譚)에 “父慈子孝”(부자자효)라는 말이 있다 “부모는 자식을 자애롭게 사랑으로 대하고 자식은 부모께 효도하는 것은 그리해야 할 일이다.”라는 뜻이다. 

어렸을 적 시골집에 손바닥만한 작은 크기의 <明心寶鑑>(명심보감)책이 있었다. 누런 종이에 작은 한문 글씨와 한글 설명이 꽉 차 있었다. 그 효행 편에 보면 이런 글이 나온다. 

“孝順還生孝順子 忤逆還生忤逆子”
(효순환생효순자 오역환생오역자)  

“효도하고 순종한 사람은 또한 효순한 자식을 낳을 것이며, 오역한 사람 즉 부모를 거역하는 자는 다시 부모를 거역하는 자식을 낳으리라.”는 뜻이다. 오(忤)자나 역(逆)자나 다 “거스르다. 배반하다, 거역하다”라는 뜻이다. 처마에서 떨어지는 한 방울 씩의 낙수 물을 보고 그 교훈을 깨달으라고 하였다. 자녀들은 부모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따라 배우고 행하게 된다. 오늘을 살아가는 부모인 나의 모습이 내일의 자녀들의 모습이다.  

경행록(景行錄)에는 “아내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모를 섬기면 효자가 될 수 있다”(以愛妻子之心 事親卽曲盡其孝)고 했다. 증자(曾子)는 “孝慈者 百行之先”(효자자 백행지선)이라고 말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온갖 행실에 앞선다.”는 뜻이다. 

불교나 유교나 다른 종교인들인 기독교를 폄하하려 할 때에 기독교인들은 불효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런가. 절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부모 공경을 첫째가는 계명으로 강조하셨다. 그렇지 않나. 십계명 중에서 앞의 네 가지는 하나님께 관한 것이다. 그러나 나중 여섯 가지 계명 중의 그 첫째인 제 5 계명은 부모 공경에 대한 강조이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20:12) 에베소서에서 사도 바울은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6:1-3)고 했다.
아버지 어머니가 예수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 되어 살아가시도록 하는 것이 부모를 가장 즐겁고 기쁘게 해 드리는 일이다. 몇 해 동안 우리와 함께 신앙생활 하던 김행섭 권사와 이해숙 권사 내외는 서울대학을 졸업한 부부이다. 오래도록 지방 도시와 서울에서 입시 학원을 운영하였다. 외아들 호세는 호주에서 치과의사 공부를 하고 있다. 김행섭 권사는 호주 생활 중에 틈틈이 신학을 공부하고 여러 해 만에 지난 해 연말에 목사가 되었다. 이번에 한국을 방문하고 연세 들어가시는 부모님을 뵈면서 그 동안 세례를 받지 못하신 아버지의 머리에 물을 얹고 아들 목사가 세례한 일이 있었다. 그는 나에게 물었다. “그래도 되는 거지요.” 육적으로야 부모 자녀 관계지만 영적으로는 먼저 예수 영접하고 목사 된 아들이 아버지께 구원의 복음을 전하고 예수 영접하고 세례 받으실 기회 갖게 섬겼으니 주님이 기뻐하실 일이 아닌가. 


존경 받을 만한 부모.
잠엄 23장 26절을 “<표준 새 번역 성경>에서 보면 “내 아들아! 나를 눈 여겨 보고, 내가 걸어온 길을 기꺼이 따라라.”(My son, give me your heart and let your eyes keep to my ways.) 다시 해석하면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내가 가는 길을 눈 여겨 보아라.”라는 뜻이다. 

여기서 잠언 기자가 아버지의 심정으로 말하는 “내 길”이란 그냥 세상을 먼저 살아 왔으니 경험해서 아는 그런 정도의 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과 훈계 앞에 신실한 믿음의 사람으로 순종하며 의로운 신자의 삶을 살아오고자 씨름했던 신앙 선배로서의 아버지의 걸어 온 길을 눈 여겨 보고 따르라는 초청이다. 

우리가 신앙 고백처럼 고백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란 표현이 그런 표현이 아닌가.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의 나이가 75세였다. 그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을 만들어 팔며 우상을 섬기던 이였다. 그런 환경에서 아브람도 나이 75세가 되었다. 그런데  75살 된 아브람을 어느 날 하나님이 불러내신 것이다. 그리고 그를 부르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자로 구별 받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느 날 아브람에게 찾아 와서 아브람을 만나 주신 사건이지만 아브람의 편에서 보면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나선 용기 있는 행동이 귀한 것이다. 그렇게 출발해서 아브람은 수 없이 많은 우여 곡절을 거치며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이요 언약의 사람으로 다듬어져 갔다. 어느 날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15:6)는 라는 말씀은 얼마나 대단하고 귀한 말씀인지 모른다. 우리가 아브라함, 아브라함 하는 근거가 되는 말씀이 이것이기 때문이다.  

26절에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라는 아버지의 심정이 무엇인가. 이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서 아버지를 진심으로 존경하는 것이 효도하는 것이다. “네 마음을 내게 주며”를 NIV 영어 성경에 보면 “give me your heart.”,이라고 하였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의 무슨 마음을 달라는 것인가. 효도란 무엇인가. 아들이 자신의 마음을 아버지께 드리는 것이 효도다. 그렇지 않나. 예수 그리스도는 효자 인생을 사셨다. 예수는 마지막 날 밤에도 이마에서 흐르는 땀방울이 핏 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시며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기 위하여 씨름하는 간절하고 안타까운 기도를 드리셨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26:42)는 기도가 무엇인가. 아들 예수는 아버지 하나님께 자신의 몸과 마음을 온전히 다 드리는 기도를 드린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효가 아닌가. 

<아버지 당신의 마음이 있는 곳에>라는 찬양의 가사에 보면,

“...나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내모든 뜻 
아버지의 뜻이 될 수 있기를 
나의 온몸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내 모든 삶 당신의 삶 되기를”

이라는 가사의 고백이 반복되는 것을 본다. 그렇다. 우리가 신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나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서 나의 마음을 아버지께 드리는 삶을 말한다. 효자란 나의 마음이 아버지께 진심으로 전달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인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던 아브라함과 아버지 아브라함의 부르심에 순종했던 아들 이삭의 모습이 창세기 22장에 나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요구하셨다. 아브라함은 다음 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서 하나님이 일러 주신 모리아 산을 향하여 사흘 길을 걸어서 갔다. 아브라함은 두 종들에게 거기서 기다리라고 했다. 그리고 아들 이삭과 함께 모리아 산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돌아오겠다고 말했다. 산 아래에 도착한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에게 번제 나무를 지게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불과 칼을 들고 부자간에 둘이 산에 올라갔다. 아들 이삭이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내 아들아 번재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실 것이다.” 한참 모리아 산을 오르다 보니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에 도착하였다. 아브라함은 그 곳에 제단을 쌓았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아들에게 제단을 쌓으라 한 흔적이 없다. 나이 많은 늙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친히 끙끙거리며 그 곳에 제단을 쌓았다. 그 제단 위에 나무를 벌려 놓았다. 그 상황을 지켜보던 이삭이 도망치지 않았다. 아버지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그 제단  나무 위에 눕혔다.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아들 이삭을 잡으려 하였다. 

여기 우리의 상식으로 쉽게 이해되거나 받아들여지지 않는 장면이 드러난다. 그 순간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었다. 아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듣고 행하시는 그 모든 과정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효”란 이런 것이다. “효”(孝)란 잠언 23장 26절이 말씀하는 대로 아들의 마음을 아버지께 드리는 행위이다. 아들의 시선으로 아버지의 가시는 길을 눈 여겨 보며 순종하는 것이다.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잠23:26)라고 했다. 

늙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행동에 그대로 순종하여 아들 이삭은 결박된 채 제단의 제단 나무 위에 눕혀져 있다. 이미 아버지 아브라함은 칼을 빼어 들고 아들 이삭을 잡으려 하고 있다. 창세기 22장 10절에 보면 분명히 그런 기록이 있다.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그 순간에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자 즉 천사를 동원하셨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손에 칼을 든 채로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그 때에 천사가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네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2) 이것이 무슨 말씀인가. 이 체험 이후로 아들 이삭은 분명하게 깨달았을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어디까지인지. 철저하게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며 살아가는 아버지 아브라함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며 아들 이삭은 사람이 아들로서 아버지를 어떻게 대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체험으로 알게 되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효자였다. 아브라함은 하늘 아버지를 향한 믿음을 말씀하신 대로 순종하는 순종을 보인 효자였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향한 효심을 보고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아들 이삭이 야곱을 낳았고 야곱이 열 두 아들을 낳아서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이룬 것이다. 

하나님은 그 번제단 바라 가까이에 숫양 한 마리를 준비하고 계셨다. 수풀에 뿔이 걸려 있던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 이삭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이름 지었다. “여호와 이레”는 “하나님이 준비하신다”는 뜻이다. 이리하여 효자 이삭이 탄생되게 된 것이다. 사람은 보고 배우는 것이다. 효도하는 집안에 효자가 난다. 하나님의 일도 충성하고 헌신하는 가정에 그 후대가 대를 이어 충성하게 된다. 
최근에 새벽마다 며칠간 묵상한 ‘룻기’에 보면 작은 자부 오르바는 남편이 죽은 후에 제 동족들에게로 돌아 가 버렸다. 그러나 큰 며느리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서 이스라엘의 시댁 마을 베들레헴을 향하였다. 그 때는 보리와 밀을 거드는 계절이었다. 보리 이삭과 밀 이삭을 주어다 먹는 일 밖에는 딱히 달리 할 수 있는 경제 활동이 불가능한 환경이었다. 룻은 날마다 들판에 나가서 밀 이삭과 보리 이삭을 주어다가 시어머니 나오미를 섬겼다. 그런 룻이 베들레헴의 대지주 보아스가 기업 무를자로 나서면서 보아스의 아내가 되었다. 룻은 보아스를 통해서 오벳을 낳고 오벳이 이새를 이새가 다윗을 낳았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고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룻1:16-17)는 신앙을 갖고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나섰던 룻의 운명이 변한 것이다. 룻은 모압 땅에서 남편 죽고 두 아들 다 죽은 불쌍한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은 효부였다. 하나님은 그런 심성의 효도하던 며느리 룻에게 삶을 새롭게 출발할 길을 열어 주셨고 룻은 보아스의 사랑을 받는 아내요 다윗이 탄생하는 다윗 가문의 증조할머니가 되었다. 

우리 교회에서 가장 가난했던 가정 중의 한 가정이 최근에 성북동 언덕에 3층짜리 대 저택을 구입하였다. 10년 동안 우리 집에 사시사철 각색 김치와 반찬을 공급해 주시는 한봉선 집사, 조영심 권사님 가정의 이야기다. 십 수 년 전 성북 동 언덕의 월세방에서 다시 시작했다. 길거리에 절인 김치를 갖다 놓고 현장에서 버무려 팔았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온 가족이 똘똘 뭉쳐서 다시 일어났다. 아들 한 상훈은 결혼식 전날 밤새도록 일하고 결혼식장에 섰다. 결혼식이 시작되려는데 신랑 아버지가 내게 말했다. “목사님 신랑이 어제 밤새 떡집에서 일하느라 잠을 전혀 못 잤는데 주례사 말씀 하실 때 신랑이 졸아도 이해해 주세요.” 그렇게 해서 일어난 가정이다. 며칠 전에 아버지와 아들이 땀을 흘리며 집을 수리하고 있는 현장에 방문하였다. 성북동이 다 내려다보이고 남산이 한 뼘 거리에 눈높이로 환히 바라다 보이는 곳에 삼층집을 마련하였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하나님이 내려 주신 복이 아닐 수 없다. 그 집 전 주인이 남겨 놓고 떠난 응접실 벽의 액자에는 이런 글이 걸려 있었다. 










내 아이들을

두려움 앞에서
자신을 잃지 않는 사람 
정직한 패배에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 
승리 앞에서 
겸손할 줄 아는 
그러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깨끗한 마음과
높은 목표로서 
스스로를 다스리게 하소서
그리고 참으로 위대한 것은 
소박함에 있다는 것과
참된 힘은 
너그러움에 있다는 것을 
내 아이들로 하여금 
마음에 새기도록 해 주소서 

모든 가정들이 부모님께 효도하고 내외간에 사랑하며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계 열방 가운데 잘 키워 내는 복된 가정들이 다 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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