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벧전1:3-9) 2017. 4. 23
곽남태(김명숙) 권사 가정의 친 손자 손녀 세 명이 사순절 개근을 하였다. 물론 엄마 품에 안기고 외할머니 품에 안겨 나오긴 했지만 40일을 새벽마다 일어나서 사순절 기도회에 참석하였다. 5살 시온이, 3살 온유 그리고 갓 돌이 지난 라온이가 그랬다. 부활 주일 새벽까지 41일을 채웠다. 그런데 부활주일이 지난 월요일 새벽부터 엄마가 일어나질 않으니까 자다 말고 새벽에 습관처럼 깨어 일어난 어린 것들이 “엄마 우리 계속해서 자도 되는거야”하고 묻더란다. 우리 옆에 한번 물어보자.
“우리 계속해서 자도 되는 겁니까.”
예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시던 그 날 아침 예수를 부인하고 배반하고 저주하고 도망갔던 베드로가 나중에 성령 받고 변화되었다. 베드로는 성령 충만한 은혜의 사도의 삶을 살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께로 돌아 와 세례를 받고 성령 안에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베드로 전서는 베드로를 통해서 남긴 두 편의 편지 중의 하나이다. 베드로는 소아시가 각처(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여진 나그네 된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아지기를 기도하고 있다.
베드로는 성도들을 가리켜서,
흩어진 나그네들.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자들.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해서 택하심을 받은 자들.
이라고 표현하였다. 사방으로 흩어져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아지기를 기도하며 편지를 시작한 베드로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다. 찬송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풍성하신 긍휼을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 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찬송한다는 원어는 ‘감사하며 찬미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이란 단순한 동정의 차원이 아니다. 죄와 허물 가운데 죽었던 인생을 구원하시는 도우심이 하나님의 크신 긍휼이시다. 오늘 날의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라면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까. 벤살렘교회 목회 할 때에 동네에 큰 공동묘지가 있었다. 입구 정문 좌편에는 ‘부활’ 그리고 우편에는 ‘공동묘지’라고 쓰여 있었다. 사진을 보라.
거듭나게 하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 하신 예수 안에서 거듭나게 하심을 체험한 자들이어야 한다.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와 예수의 대화처럼 성도란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다.
거듭난다는 것은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을 말씀한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하셨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이라야 영이다. 그 니고데모가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다 도망간 그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의 시체를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함께 정성을 다하여 장례하지 않았나. 니고데모는 점점 거듭난 제자의 삶을 살지 않았나.
사도 바울은 거듭남에 대하여 로마서 6장 11절에서 이렇게 편지하였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그렇다. 거듭남이란 죄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미국개척 당시에 복음을 전하던 청교도들은 복음을 전파하며 이렇게 설명하였다. “당신이 한 번 태어나면 두 번 죽고 당신이 두 번 태어나면 한 번 죽습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 요한 계시록 20장 6절에 보면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고 했다.
거듭난다는 것이 무엇인지 정리가 되는가.
미국에는 풋볼 경기가 치열하다. 워싱턴 DC에 속한 팀이 레드스킨이란 팀이다. 그 이름이 인디언들의 피부색을 상징하는 특정한 인종을 지칭하는 표현이라서 오늘 날은 그 이름 사용에 이견이 많지만 과거에는 그 레드스킨 팀의 위용이 대단하였다. 챔피온 십을 몇 번이나 거머쥐는 뛰어난 팀이었다. 그 팀의 신화적인 코치 중에 조 깁스(Joe Gibbs)라는 분이 있다. 침례교회의 집사이다. 신실한 크리스찬이다. 미국 명예의 전당에 오른 인물이다. 그를 좋아하는 한인들은 그래서 그가 TV에 나오면 “조 집사님 나왔다.”고 할 정도였다. 이름이 조 깁스니까. 그는 시간이 되는대로 초청을 받아 간증 집회도 하였다. 그가 어느 교회에서 한 간증 중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그의 가까운 친구가 애완견을 키웠다. 미국 사람들은 별의 별 애완동물을 다 키운다. 개, 고양이, 앵무새, 돼지, 토끼...하루는 그의 친구가 퇴근하는데 그의 집 개가 집 앞 잔디밭에 쭈그리고 앉아서 무슨 하얀 동물을 물고 있더란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급하게 가까이 가서 보니 토끼 한 마리를 물어 띁고 있었다. 바로 옆집에서 키우던 애완동물 토끼였다. 당황한 그 친구의 친구는 서둘러 토끼를 개의 입에서 빼앗아서 목욕실로 갖고 갔다. 수돗물을 틀고 목욕을 시켰다. 비누로 씻고 샴푸를 닦고 드라이어로 말리고 향수를 뿌려서 안고 집 밖으로 나갔다. 이미 어두워진 시간이었다. 조심스럽게 옆집의 토끼장을 들여다보니 토끼장이 비어 있었다. 그 토끼를 그 장에 넣어 놓고 돌아 왔다. 그 날 밤잠도 제대로 못 잤다. 다음 날 출근해서 일하고 저녁에 일찍 집으로 왔다. 궁금해서 옆집을 기웃거리는데 이웃 집 남자가 집 밖으로 나왔다. “Hi How are you doing?”하고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데 그 남자가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더니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묻자 그가 말하기를 “삼일 전에 토끼가 죽어서 토기공원묘지에 장례하기 전에 시간이 없어서 뒤 뜰 잔디밭에 가매장을 했는데 어느 놈이 죽은 토끼를 캐내다가 목욕까지 시키고 향수까지 뿌려서 토끼장에 다시 넣어 놓았다.”고 말하더란다.
그 조 깁스 집사가 간증하는 말은 이것이었다. 우리가 죄와 허물로 죽은 자인데 죽은 토끼 같은 우리를 시체를 목욕시키고 향수 뿌린다고 산자가 되냐는 말이다. 그렇지 않나. 죽은 시체를 목욕시키고 향수 뿌린다고 구원이 임하나. 그렇게 한다고 거듭나게 되나.
영국의 죠지 휘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 목사는 그 당시의 요한 웨슬리 목사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유명한 복음 전도자였다. 아니, 요한 웨슬리조차 비교할 수 없는 뛰어난 복음 설교가요 대 각성 운동의 중심인물이었다.
그는 가난한 여인숙 집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골목을 누비고 몰려다니며 친구들과 거짓말, 욕설, 음담패설, 극장 출입, 카드놀이, 후진 삼류 연애 소설 읽기 등으로 날마다를 보내며 지냈다. 그는 가난한 아이들이 다니는 무료 시립 중학교에 다니면서 헬라어와 라틴어와 웅변술을 배웠다. 그는 명석하였다. 18살에 옥스퍼드 팸브로그 대학교에 근로장학생으로 입학하였다. 1729년, 학교 안에서 ‘홀리 클럽’(Holy Club)을 통해서 요한 웨슬리를 우연히 만났다. 요한 웨슬리의 동생인 찰스 웨슬리가 죠지 휘필드에게 ‘홀리 클럽’의 성경 공부와 기도 모임을 소개하였고 죠지 휘필드에게 종교심이 있는 것을 알고 아침 식사 모임에 초대하였다. 회심 체험을 하게 된 그에게 찰스 웨슬리는 책 한권을 선물하였다. 헨리 스쿠갈의 <인간의 영혼 속에 계시는 하나님의 생명>이란 제목의 책이었다. 죠지 휘필드는 웨슬리 형제와 함께 성경 공부, 기도 모임, 기독교 계율 실천, 기독교 경건 서적 읽기 등을 통하여 ‘홀리 클럽’의 멤버들 중에서 가장 경건하고 가장 복음 운동의 중심에 견고하게 붙잡혀 세워지는 주목 받는 학생이 되어 갔다. 22살에 성직 임명을 받은 죠지 휘필드는 목사 안수를 받은 후에 런던의 여러 교회에 초청 받아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그 설교는 듣는 이들의 마음을 흔들었고 그의 명성은 영국 전체로 소문이 번져 갔다.
그는 영국과 미국을 오가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는 18,000번에 달하는 설교를 하였다. 그는 건물 밖 길거리와 광장에서 몰려드는 주민들에게 설교하였다. 작게는 몇 백 많게는 몇 천, 몇 만 명 앞에서 설교하였다. 8만 명이 동시에 모여 들기도 하였다. 그는 34년 동안 지칠 줄 모르는 설교가였다. 그는 순수하였고 지침이 없었다. 그는 지칠 줄을 모르는 열정에 사로 잡혀 있었다. 55살의 죠지 휘필드는 타다 만 초가 아니라 다 타서 녹아내린 촛불처럼 하나님 앞에 돌아가기 전날도 많은 사람들에게 야외에서 설교하였다. 천식이 심해진 그는 그의 임종을 지키는 이들에게 다시 마지막 설교와 복음을 부탁하고 눈을 감았다. 죠지 휘필드의 장례 설교는 요한 웨슬리 목사가 맡았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요한 웨슬리의 “보편 속죄설”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죠지 휘필드였다. 그래서 한때는 저래 가지고 요한 웨슬 리가 천국에 가겠느냐고 비난하고 신앙적으로 갈라서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복음 안에서 화해한 죠지 휘필드에게 사람들이 물었다. “천국에 가면 요한 웨슬리를 만날 수 있을까요.” 그 때 죠지 휘필드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네 아마도 못 만나 볼 것 같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하나님의 보좌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 있을 것이고 우리는 거기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죠지 휘필드답게 대답한 일화이다. 죠지 휘필드의 설교는 진지하였고 감동적이었다. 그의 설교는 사자의 포효와 같았고 거룩한 격렬함이 있었다.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조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의 열정적이고 연민에 가득 찬 설교는 설교를 시작하던 당시나 그가 눈을 감던 날이나 차이가 없었다. 그는 길거리에서 불신자에게 전도하면서 “나를 믿어 주세요. 나는 당신과 함께 감옥에도 죽는데도 함께 갈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없이 나 혼자 천국에 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 얼마나 확신에 찬 복음 전파인가.
죠지 휘필드는 생의 3분의 1을 미국 선교 현장에 나섰다. 배를 타고 대서양을 13번이나 건너 다녔다. 그는 하버드와 예일 대학에서도 설교하였다. 그의 설교를 들은 학생들은 변하였다. 학생들은 교실과 기숙사에서 찬송과 기도를 끊이지 않았다. 예일대학교도 마찬가지였다. 죠나단 에드워드 목사는 예일 대학의 분위기를 전하였다. 죠지 휘필드의 설교를 들은 학생들은 변하였고 진지해졌다고 했다.
죠지 휘필드를 적대시 하던 한 사람이 1756년에 이런 글을 남겼다. “죠지 휘필드를 추종하는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 중에 그를 만나기 이전에는 비열하고 나쁜 사람들이었으나 지금은 건전하고 경건하고 사회의 충실한 일원이며 왕의 충직한 신민이 되었다.” 죠지 휘필드 목사의 설교 주제는 한결같이 “거듭남”이었다. “You must be born again”이 그의 설교의 주제였다. 그의 설교를 듣고 은혜 받은 젊은이가 늘 그의 곁을 따라 다니며 집회에 수종을 들었다. 한번은 그 청년에 죠지 휘필드 목사에게 물었다. “아니 목사님! 어째서 목사님은 늘 같은 주제의 설교만 하십니까?” 그 때에 죠지 휘필드 목사는 그 청년을 똑 바로 바라 다 보며 다시 큰 소리를 외쳤다.
“왜냐하면 너는 반드시 거듭나야 하기 때문이다.”
(Because, You must be born again)
산 소망이 있게 하심.
주를 믿는 다는 것은 이전과 전혀 다른 차원의 소망을 갖고 살아간다는 의미이다. 이전에는 세상 낙이 즐거웠지만 이제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기뻐하고 만족하며 보람되게 살아가는 천국 백성의 모습을 말한다.
예수를 만난 후와 예수를 만나기 전의 모습은 전혀 다른 것이다. 찬송가 597장의 “이전에 주님을 내가 몰라 영광의 주님을 비방했다. 지극한 그 은혜 내게 넘쳐 날 불러 주시는 고마워라.” 이런 찬송을 자신의 과거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을 비교하며 부를 수 있는 것이 성도의 변화된 삶의 모습이다.
지금은 잠실의 수 천 명이 모이는 큰 교회지만 과거에 조그마하게 개척해서 부흥해 가던 때의 이야기이다. 과거에 그 교회가 기도원에서 전 교인 여름 수련회를 열었다. 그런데 담임 목사가 가만히 숙소의 창밖을 내다보니 오후 휴식 시간에 기도원 아랫마을에서 노란 색 양은 주전자를 양손에 들고 기도원을 향해 올라오는 남자 교인들을 목격하였다. 그게 뭔가 궁금해서 나중에 알고 보니 남자 교인들이 기도원 아랫마을에서 막걸리를 사가지고 기도원에 날라다가 마시는 것이었다. 기도원에 여름 수련회에 따라 나서기는 나섰는데 은혜를 받는다든지 기도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몰래 남의 시선을 피해서 막걸리 사다 먹던 그런 남자 교인들이 섞여 있었다. 그들이 변해서 은혜를 받고 집사도 되고, 권사도 되고 장로도 되었노라고 목회 간증하는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있다.
사람이 은혜를 받아야 소망이 바뀐다. 성령을 받아야 소망이 달라진다. 믿음이 생겨야 이전과 다른 산 소망 가운데서 살아가게 된다. 베드로는 그냥 소망이라고 말하지 않고 “산 소망”이라고 하였다. “living hope” 스스로 물어 보라. 내게 있어서 산 소망이란 무엇인가. 인기를 쫓고, 명예를 쫓고, 권력을 쫓고, 돈을 쫓고, 보석만 쫓고, 재물만 쫓고, 세상 자랑만 쫓는 것은 죽은 소망을 품는 자들과 같다. 독수리의 알을 품으면 독수리가 태어지만 독사의 알을 품으면 뱀이 태어난다.
우리나라 영종도에 동북아시아 최초 최대 규모의 외국인 대상 카지노가 문을 열었다고 한다. '파라다이스 시티‘(PARADISE CITY)라는 이름으로 영종도 인천국제공항 국제업무단지에 개장했다. 대지규모가 축구장 46배 크기인 33만㎡에 달한다. 파라다이스시티는 지하 2층, 지상 10층 규모로, 세 방향으로 뻗어 가는 'Y자' 형상의 건물을 지었다. Y자 모양 건물 길이가 각각 120m이다. 세 방향의 건물이 중앙에서 만나서 서도 통하게 건축되었다. 파라다이스그룹 전필립 회장은 파라다이스시티 개장 초기에 연 150만 명이 방문할 것으로 추산했다. 파라다이스그룹은 파라다이스시티, 워커힐·부산·제주그랜드 카지노 사업장 등 그룹 총 매출 예상액이 2017년 8천800억 원이다. 다음 해에는 1조 1천억 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그렇게 버는 돈이 부럽나. 그런데 돈 쓰고 다니는 150만 명 중에 끼지 못해서 아쉽나. 예수 안에 산 소망을 갖고 살아가는 성도들이라면 그런 식의 경제생활, 그런 식의 여가 생활, 그런 식의 취미 생활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 그런 식의 목적으로 비행기를 타고 국경을 넘어 가지 않는다.
1930년대 미국은 대 공황을 겪고 있었다. 미국 뉴욕시의 맨해튼에는 이탈리아계 마피아가 들끓고 있었다. 골목마다 슬롯머신에 마약, 놀음, 살인, 매춘, 방화, 폭력이 난무하였다. 불안과 공포와 두려움의 도시였다. 그런 복잡한 도시에 1933년에 피 오렐로 라과디아(Fiorello H La Guardia, 1882-1947)시장이 새롭게 당선되었다. 뉴욕에서 태어난 그는 애리조나 주에서 성장했다. 16살 때에 어머니를 따라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이주했다. 22살 때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민국 통역관으로 활동하면서 틈틈이 뉴욕대학교에서 법률을 공부해서 28살 때에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공군조종사로 자원입대했다. 하원 의원과 판사 생활을 거치고 뉴욕시 시장에 당선되었다. 그가 판사 시절 배고파 우는 손자를 위해서 빵을 훔치다가 붙잡힌 할머니에게 벌금 10불을 판결하면서 자기에게도 똑 같이 판결하고 자신이 그 할머니를 대신하여 벌금을 낸 판결로 유명하다. “이 할머니가 빵을 훔친 죄는 우리 모두의 죄입니다. 그러므로 저 자신에게도 10불의 벌금형을 판결합니다. 이 재판장에 참석한 여러분에게는 50센트의 벌금형을 부과합니다.” 재판 참석자들은 놀라는 표정으로 어리둥절하였다. 그 재판이 끝나자 빈손이었던 그 할머니는 자신의 벌금 10불을 빼고 난 47불 50센트가 그의 손에 남아 있었다. 시장이 된 후 피 오렐로 라과디아 시장은 목숨을 내어 놓고 죽기를 각오하고 마피아 소탕을 위해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는 마피아의 살해 위협을 넘어서서 담대하게 맞서 싸웠다. 직접 나서서 해머를 들고 슬롯머신을 때려 부쉈다. 부패한 뉴욕시의 경찰 조직을 개편하였다. 뉴욕 마피아의 두목인 찰스 루치아노(Charles Luciano)를 체포하였다. 나중에는 감옥에서 그를 이탈리아로 영구 추방시켰다. 노동조합을 후원했으며 시정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뉴욕 시 헌장의 개정작업에 착수했다. 석탄 파업 중에는 노사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사무실에 추운 겨울에 난방공급을 중단시키는 등 강공을 펼치기도 하였다.
1945년까지 12년 동안 그가 시장으로 일하는 동안에 그 전의 두려움과 공포와 가난의 상징과 같던 뉴욕 시는 마피아가 사라졌다. 그가 시장으로 일하는 동안 뉴욕은 살기 좋은 도시, 경제적인 도시, 아름다운 도시, 안전한 도시, 깨끗한 도시, 가보고 싶은 도시, 세계 경제의 중심도시로 변모하였다. 1953년, 뉴욕 시는 그의 성을 따서 공항에 이름을 붙였다. 뉴욕 3대 공항중의 한 곳인 ‘라과디아 공항’의 이름은 그렇게 탄생되었다. 1993년 미국의 역사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이 모여서 미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고 뛰어난 시장 1위에 라과디아 시장을 선정하였다.
우리나라 법조계와 정치계와 의회에 이런 정신을 가진 인물들이 늘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10년 전 ‘바다 이야기’라는 게임 시설이 전국의 골목마다 넘쳐 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사행성 오락실을 전국 방방곡곡에 허가해서 전국의 서민들의 주머니에서 조 단위의 돈을 긁어모았다. 우리나라의 그런 식의 정치를 하던 정치인들과 라과디아 시장은 그 소망의 차원이 다르지 않나. 1947년 9월 21일, 그의 나이 64살에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뉴욕 시민들은 뉴욕의 상징적인 공공건물들의 수자만큼이나 자랑스러운 일을 많이 하다가 세상을 떠난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아쉬워하였다. 그날 뉴욕 타임즈 신문은 “열정적이며 적극적이었던 그는 때로는 화재 현장에 달려가고 때로는 비행기를 타고 전국을 날아다니며 일했다. 그는 모든 문제의 현장을 누비고 다녔다. 그는 타고난 투사였다. 그는 상대방이 히틀러이든 길거리의 시정잡배이든 상대를 가리지 않고 맞섰다. 뉴욕의 늘어난 수많은 공공건물의 수 만큼이나 많은 역할을 했던 작은 거인이 숨을 거뒀다.”는 사설을 실었다. 그의 죽음을 슬퍼한 뉴욕 시민들은 30일 동안이나 조기를 내어 걸었다.
그의 아버지는 이탈리아 계 이민자였다. 그의 어머니는 유태인이며 이탈리아계였다.
미국 군대에서 밴드 마스터로 근무하던 아버지는 불량 납품 식품을 먹고 탈이 나서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죽음의 원인을 알게 된 라과디아가 평생 부패나 불의와 싸우는 길을 걸어가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성장기에 엄마를 따라 다니며 유럽 여러 나라의 대사관과 영사관에서 일했다. 덕분에 그는 영어는 물론 히브리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프랑스어, 헝가리어, 크로아티아 어에 능통하였다.
생각해 보라. 요즘, 오늘, 아니 지금 나의 소망은 무엇인가.
“내 맘의 주여 소망되소서.”라는 찬송이 있다. 484장의 찬송가사이다. 언제부터인가 개인적으로 이 찬송을 자주 부르고는 한다. 생각해 보라.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다양한 소망을 갖고 살아가나. 그러나 진실한 마음으로 자신에게 질문해 보라. 무엇이 나의 소망인가.
물론 병약한 이들에게는 건강해지는 것이 소원이다.
가난한 이들은 돈 걱정, 돈 염려 없이 살아 보는 것이 소원일 수 있다.
외롭게 살아가는 이들은 누군가가 나를 알아주고 말 벗 해 줄 사람이 있었으면 하는 소원이 있을 수 있다.
학생들의 소원, 젊은이들의 소원, 직장인의 소원, 사업가의 소원, 장사 하는 분의 소원, 연구원의 소원, 공무원의 소원, 요즘처럼 대통령 후보로 나선 15명 후보들의 소원이 각각 다를 것이다.
오늘 날 이 세상을 살아가는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녀로서 갖는 소망은 무엇인가.
유업을 잇게 하심.
유업이 무엇인가. 베드로는 분명하게 선포하였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and into an inheritance that can never perish, spoil or fade - kept in heaven for you)
썩지도 않고, 더럽지도 않고, 쇠하지도 않는 유업이 무엇인가. 베드로 사도가 사용한 유업, 상속, 하늘의 기업을 뜻하는 ‘클레로노미아’(κληρονομία)라는 이 단어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가나안을 일컫는 말이다. 여호수아 때에 가나안에 점령해 들어가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제비 뽑아 나누던 그런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표현은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과 동일시해서 사용되었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시16:5)라고 고백하였다. 다윗에게 있어서 산업과 소득과 분깃은 곧 풍성하신 하나님의 공급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하나님은 다윗의 전부이셨다.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기도 했다. 다니엘서 마지막 장의 마지막 절인 다니엘서 12장 13절에 보면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 날에는 네 몫을 누릴 것임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하나님 안에서 살아 간 성도들에게 이 세상을 마치는 날 각 사람의 몫의 누릴 영원한 상급을 기업으로, 유업으로 구별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다. 이것이 상속자의 영광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17절에서 이렇게 교훈하였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相續者)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Now if we are children, then we are heirs -- heirs of God and co-heirs with Christ, if indeed we share in his sufferings in order that we may also share in his glory.)
디도서에 보면,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so that, having been justified by his grace, we might become heirs having the hope of eternal life.)
히브리서에 보면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자인 성도들은 천사들이 수종(隨從)을 드는 자들이라고 했다.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Are not all angels ministering spirits sent to serve those who will inherit salvation?) 성도의 구원이란 그 자체가 상속자의 상속을 보증하는 구원이란 말씀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상속자들을 말세에 예비하신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신다.(5절) 그러한 하나님의 보호를 가능하게 하는 힘은 믿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상속자의 영광을 유업으로 누릴 성도들은 여러 가지 겪는 시험으로 인하여 근심에 빠지지 말고 오히려 크게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6절)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나할 상속자의 유업을 이을 성도의 믿음이란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믿음이 아니다.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지지 아니할 금보다도 더 귀한 믿음이어야 한다. 금은 이 세상의 것이지만 믿음은 현세와 내세에 보증이 되고 약속이 되는 영원한 영광을 얻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믿음은 장차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실 믿음인 것이다.(7절) 광물학에서는 금은 1톤의 광석 속에 단 2그램의 금만 있어도 금광석이라고 한다고 한다. 우리의 믿음이 그러하지 않나. 이처럼 우리 속에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기적은 일어날 것이다. 불같은 시련과 연단을 통해서 신자의 믿음 속에서 불순물이 제거 되고 나면 순결한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예수를 믿고 따르며 섬기고 사랑하는 성도들에게는 설명할 수 없는 기쁨과 영광스러운 즐거움을 기뻐하게 해 주신다.(8절)
일본에서 태어나고 미국에서 공부한 건축가 반 시게루는 종이를 재료로 건물을 지었다. 뉴질랜드에 지진으로 무너진 예배당을 종이로 지었다. 700명이 예배드릴 수 있는 크라이스트 교회를 건축하였다. 모든 재료는 다 종이다. 우리는 약하고 미천하나 전능하시고 존귀하신 하나님의 손길에 붙잡히면 거듭나게 하시고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영원한 유업을 잇게 하시는 이런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9절의 “영혼의 구원”이란 육을 따로 떼어 설명하는 구원이 아니다. 영혼이란 영과 육을 포함한 전인격적인 모습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의 구원이란 전인격적인 구원을 의미한다. 9절의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는 말씀은 영과 혼과 육의 전인적인 온전한 구원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하나님 아버지가 기대하시는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 되며 강건하게 살아가되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상급을 유업으로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인도의 세계적인 다이아몬드 그룹 '하레 크리슈나'(Hare Krishna)의 CEO이자 창업자인 사브지 도라키아(Savji Dholakia) 회장은 보너스로 업무 성과가 좋은 직원들에게 400채의 아파트와 1260대의 자동차를 보너스로 지급했다. 또 56명에게는 보석 이 담긴 상자를 선물해 총 1716명의 직원이 큰 보너스를 받았다. 보너스 총액은 우리 돈으로 85억 5천 만 원에 이른다. 그는 이미 5년 전부터 이와 같은 보너스를 제공해 왔다. 앞으로 5년 안에 5,500명의 모든 직원들에게 아파트와 자동차를 마련하도록 해 줄 것이라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세상 기업의 좋은 주인만 만나도 사원들이 이런 혜택을 누리거늘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상속자의 영광을 누리도록 유업을 잇게 해 주시지 않겠는가.
베드로 사도가 여기서 말한 유업을 잇게 하신다는 말씀은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이어지는 유업을 말씀하는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리는 이와 같은 존귀와 영광이 영원한 상급으로 주어지는 축복의 주인공들이 모두 다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