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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노라(시20:1-9) 2018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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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8-06-24 23:56 조회 15,559 댓글 0
 
                       원하노라(시20:1-9)                  2018. 6. 17


사람이 한 평생을 살면서 전쟁을 겪지 않고 산다는 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는 지난 5천년 동안 한 반도에서 거의 1,000 여 번의 전쟁을 겪었다고 한다. 최근에 미국과 남북한의 정상들이 만나고 중국, 러시아, 일본 등의 한반도 주변국들의 협조를 구하며 협의하는 그 모든 과정도 6. 25 이후에 전쟁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 아닌가. 

이스라엘의 역사도 전쟁의 역사로 점철된다. 다윗은 하나님이 마음에 들어 하시는 임금이었다. 그러나 그의 시대에도 끊임없는 전쟁을 겪어야만 했다. 시편 20편은 사무엘하 10장의 내용을 배경으로 한다. 다윗 때에 암몬과 아람 사람들이 쳐들어 왔다. 싸우러 나아가기 전에 다윗 왕과 장수들과 용사들과 고관대작들과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막에 나아가서 전쟁출정을 위해서 예배를 드렸다. 시편 20편은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는 전쟁출정을 위한 기도시이다. <공동번역>이나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 보면 매 구절마다 ‘임금’ 인 다윗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는 백성들의 기도 형식으로 되어 있다. 

 <공동번역>으로 읽어 보면 그 기도시의 내용이 훨씬 실감이 난다. 마치도 임금의 안전을 기도하는 백성들의 기도형식이지만 사실은 다윗 자신이 백성들과 자신의 목숨을 하나로 생각하며 드린 전쟁출정시의 내용이다. 

1. 야훼께 비옵니다. 우리 임금이 곤경에서 기도하거든, 야곱의 하느님 야훼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시고 지켜주소서. 
2.성소로부터 임금에게 도움을 내리시고, 시온 산에서 임금을 붙들어주소서. 
3.임금이 바치는 예물을 마음에 두시고 드리는 번제를 달게 받아주소서. (셀라) 
4.임금의 계획을 이루어주시고, 그의 소원 그대로 채워주소서. 
5.임금의 승리를 소리 높여 기뻐하고 하느님 이름으로 깃발 높이 치키리니, 야훼여, 우리 임금의 모든 청원을 들어주소서. 이제는 알았습니다. 
6.야훼께서 기름 부으신 임금에게 승리 주심을, 그 거룩한 하늘에서 그의 기도 들으시고, 오른손 힘차게 뻗어 승리 주심을! 
7.누구는 병거를 믿고 또 누구는 기마를 믿지만, 우리만은 우리 하느님 야훼의 이름을 믿사옵니다. 
8.이 사람들은 휘청거려 쓰러지겠지만 우리는 꿋꿋이 선 채 넘어지지 않사옵니다. 
9.야훼여! 우리 임금에게 승리를 주소서. 우리가 부르짖을 때에 들으소서. 

 다윗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전쟁에 나아가는 임금 자신과 장수들과 용사들을 전쟁 중에 도와주시고 붙들어 주셔서 생명을 보존해 주시며 전쟁에서 승리하여 개가를 부르며 승리의 깃발을 펄럭이며 살아 돌아 올 수 있도록 지켜 달라고 애원하고 간청하는 기도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렇지 않나. 전쟁에 나아가면서 생명의 안전과 보호와 승리를 위하여 기도하지 않을 용사가 그 어디에 있겠는가. 

다윗 왕 때에 이웃 나라인 암몬의 나하스 왕이 죽고 하눈이란 아들이 새 왕으로 등극하였다. 다윗은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암몬의 왕 나하스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고 신하들을 조문단으로 보냈다. 그런데 새롭게 왕이 된 나하스의 아들 하눈은 다윗이 보낸 조문객을 자신들의 왕국을 탐문하기 위해서 보낸 밀사들로 오해하였다. 그래서는 다윗 왕이 보낸 조문객들의 수염을 절반을 깎아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되게 하고 의복의 중동볼기를 잘라 부끄러운 모습이 되게 해서 돌려보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다윗 왕은 저들 신하들의 수염이 다시 자라기까지 여리고에 머물도록 조치하였다. 

국제적으로 이와 같은 무례한 결례를 행한  후에 암몬 사람들은 갑자기 두려운 생각에 휩싸였다. 암몬 사람들은 아람 사람들에게 사람을 보내서 3만 3천명의 지원군을 모병하게 하고 연합 군대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다윗은 요압 장군에게 용사들을 동원하게 해서 아람 군대와 싸울 채비를 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요압 장군은 아우인 아비새 장군에게 맡겨서 용사들을 따로 동원하게 하여 암몬 자손들과 싸울 준비를 하게 하였다. 요압 장군과 아비새 장군의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는 싸우러 나아가서 아람 군대와 암몬 군대를 모조리 무찔러 이겼다. 아람의 군대가 도망치는 소식을 들은 다윗은 왕의 신분이지만 직접 전쟁에 나섰다. 다윗의 군대는 아람의 병거 700대와 마병 4만 명을 무찔러 죽이고 아람의 군사령관 소박을 쳐서 죽였다. 

그러나 전쟁은 이기는 자나 지는 자나 누구나 다 두렵게 마련이다. 전쟁이 무섭고 두렵기는 다윗도 마찬가지요 다윗의 장수들인 요압과 아비새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이다. 다윗은 신분은 왕이었고 전쟁에 능한 용사였지만 언제나 하나님의 절대 도우심과 구원을 간절히 사모하며 기도하고 또 기도하였다. 

종교의 구분을 떠나서 대개의 사람들은 기도하고 소원하는 바가 거의 비슷하다. 그 대상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이든 심지어는 우상 앞에 비는 기도이든 그렇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자신과 가족의 건강, 질병치유, 재물, 자녀들의 학업, 진학, 진급, 결혼, 자녀출산, 가정과 직장과 나라의 안전과 평화, 일상의 행복한 생활 등에 대한 소원과 바람을 가지고 기도한다. 

다윗은 전쟁 앞에서 기도하였다. 그래서 시편 20편의 기도의 시작이 “환난 날에”라고 시작되고 있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환난 많은 세상에서 모든 것이 기적이며 모든 것이 주의 은혜이다. 밤에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었건만 다음 날 아침에 나 자신이나 가족들 중의 그 누군가에게 어려운 일이 찾아 올 수 있다. 

불안한 일이 생기거나 걱정스러운 일이 생기거나 두려운 일이 생기면 불안하고 걱정이 되고 두렵기는 임금이나 신하나 왕이나 백성들이나 누구나 다 마찬가지이다. 걱정, 근심, 염려, 불안, 초조, 두려움, 질병, 실패, 사고, 혹은 죽음의 위기 앞에서 기도하지 않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다윗도 하나님께 전쟁의 불안과 환난 앞에서 기도드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다윗의 기도의 내용을 통해서 우리 각 사람의 일상적인 기도의 모습을 뒤돌아보게 된다. 시편 20편의 본문에 보시면 3, 4, 5절이 끝 부분에 “원하노라”는 표현이 세 번 반복해서 나온다. 그렇다. 기도란 소원하는 바를 하나님께 아뢰고 또 아뢰는 것이다. 다윗은 ‘무엇을 원하노라’고 기도하였나. 


응답(應答)하시기를.
기도하는 것은 사람이지만 그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다윗은 환난 날에 기도하고 있다. 그렇지 않나. 사람이 평안할 때에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이 누가 있나. 그러나 기도할 일이 생기면 기도하라고 하지 않아도 기도하게 된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4장 7절에서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하였다. 

어제 저녁 시간에 가슴 아픈 소식을 들었다. 나의 35년 지기인 후배 목사, 후배 선교사의 부인이 잔기침이 계속되어 동네 병원을 찾았다. 큰 병원에 가 보라고 했다. 서울 삼성 병원을 찾아 갔다. 폐암 4기에 뇌에 까지 암이 전이 되었다는 것이다. 내외는 충격적인 소식 앞에 갑자기아들 딸을 불러 네 가족이 둘러앉았다. 남편과 청년으로 장성한 아들딸들에게 엄마는 말했다.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기도하며 하던 선교 사역을 계속하며 하나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고 지낼 것이니 너무 불안해하거나 초조해 하지 말라”

어떤가.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두려움이 찾아온다. 믿음의 사람이라고 해서 질병, 고난, 환난, 시련이 피하여 가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내 목숨을 맘대로 할 수 있나. 내가 내 생명의 주인인가. 내가 나의 범사를 주관할 수 있나. 아니지 않나. 대학로 서울대 병원에 가면 어린이 병원이 있다. 그 곳에 문병할 일이 있어서 가 보면 어린 아기 혹은 두서너살 된 어린이들의 머리를 빡빡 깎고 암과 싸우며 투병을 시작한 모습을 본다. 그처럼 어리고 천진한 때에라도 고난이 찾아오고 질병이 찾아오고 시련이 찾아온다. 

우리는 하루하루 한 순간 한 순간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나그네 인생길을 살면서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살면 안 된다. 

어느 여름 날 하루살이와 매미가 만나서 하루 종일 같이 놀았다. 저녁이 되자 매미가 말했다. “내일 또 만나서 놀자.” 그 때 하루 살아가 대답하였다. “내일이 뭔데”
하루를 사는 하루살이는 내일이 없다.

매미가 참새와 만나서 한 여름을 같이 즐겁게 친구처럼 지냈다. 늦여름이 되자 참새가 매미에게 말했다. “내년 여름에 또 만나서 같이 재밌게 놀자.” 그 때 매미가 말했다. “내년이 뭔데....”

시편 20편에 보면 1,  6, 9절에 세 번 반복하여 ‘응답’(應答)이란 표현이 나온다. 그렇지 않나. 기도하는 것은 인간이지만 그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기를 바라고 소원하며 기도드리는 것이다.

열왕기 상 18장에 보면 갈멜 산 정상에서 기도하는 바알 숭배자 450명의 기도와 엘리야의 기도 장면이 나온다. 바알 숭배자들이 먼저 기도를 시작하였다. 바알 숭배자 450명은 자신들이 쌓은 제단 위에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각을 떠서 잡아 올려 놓고 기도하고 기도하였다. 그러나 바알이 아무 대답이 없었다.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왕상18:26)하고 빌고 빌었지만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도 없었다. 그러자 바알 숭배자들이 바알에서 제사하는 제단 주위에서 뛰놀며 바알을 불렀지만 바알은 아무 대답, 아무 응답이 없었다. 아침부터 정오가 다 되도록 바알을 부르고 불렀으나 아무 징조가 없었다. 

저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며 엘리야 선지자가 조롱하였다. “큰 소리로 부르라 그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은 그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그가 길을 행하는지 혹은 그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그런데도 묵묵부답이었다. 바알 숭배자들은 칼과 창으로 몸에 상처를 내가면서 더 큰 소리를 바알을 불렀다. 그런데도 아무 응답이 없었다. 이미 정오는 지났고 저녁나절이 되었다. 그 장면을 성경은 이렇게 썼다. “이같이 하여 정오가 지났고 그들이 미친 듯이 떠들어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르렀으나 아무 소리도 없고 응답하는 자나 돌아보는 자가 아무도 없더라.”(왕상18:29)  

그렇다. 죽은 신은 응답하지 못한다. 우상 앞에 아무리 빌고 제사하고 정성을 다하고 공을 쌓고 충성하고 헌신해 보아야 그처럼 어리석고 미련한 일이란 없다. 기도의 응답은 주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시편 50편 15절을 다 같이 읽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다윗의 기도는 계속된다.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어떤가. 우리가 어떻게 기도하여야 그 기도가 이루어질 수 있나. 내 생각, 내 소원, 내 계획대로 계획하고 하나님께 도와 달라고 기도하면 그 기도가 응답되나. 들어 주시나. 내 소원과 내 인생 설계와 인생 계획이 주께 초점이 맞추어 지는 것이 우선이 아닌가.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잠16:1)는 말씀이 무엇인가. 그렇지 않나. 우리가 무슨 일을 설계하고 계획하고 경영할 지라도 그 일이 이루어지고 성취되는 것은 하나님의 손길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요즘 도심에도 감나무에 감이 잔뜩 달려 있다. 그 많은 감 열매가 여름을 지내며 장미가 지고, 태풍이 몰려오고, 나무 가지가 꺾이고, 혹은 오래도록 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고 그런 날들을 지내고 또 지내고 다 지낸 후에 늦가을이 되어 감나무의 이파리까지 다 떨어지도록 파란 늦가을 하늘에 앙상한 감나무 가지에 까치밥으로 매달려 있는 잘 익은 홍시가 되기까지에는 얼마나 긴 세월을 이기고 이겨야 하는가.

6월부터 사도행전을 매일 묵상 분량으로 읽는다. 지난 주 목요일 말씀 분량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을 비롯한 사도들의 복음 전파로 예루살렘에 예수의 부활을 믿는 이들이 점점 많아졌다. 온 도시가 예수 복음, 예수 부활 신앙으로 술렁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가야바와 안나스 대 제사장을 비롯한 대 제사장의 문중이 나서고 관리와 장로와 사두개파가 나서서 사도들을 감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끌어내다가 공회 앞에 세우고 종교 재판을 하였다. 그리고 협박하고 위협하였다. 그 내용은 “예수 이름으로 사람들을 가르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베드로와 사도들은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항변하면서 물러날 기세가 아니었다. 위세에 몰린 공회원들 중에서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졌다. 이게 무슨 말인가.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듯이 사도들을 없애 버리자는 시도였다. 그 때에 바리새인 가말리엘이 나서서 말했다. 가말리엘은 우리가 아는대로 사도 바울을 가르친 대 석학이다. 그는 “율법 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고 하였다. 그가 나서서 말했다. “과거에 드다가 400명의 추종자를 끌고 다녔지만 그가 죽임을 당하자 따르던 사람들이 모두 흩어지고 말지 않았느냐. 그 후에 호적 할 때에 유다가 일어나 백성들을 꾀어 따르게 하였지만 그도 망하고 나니 따르던 사람들이 다 흩어지지 않았느냐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두자.” 그리고 이어서 하는 말이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행5:38-39)

맞다. 그렇지 않나. 사람의 계획이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사람들끼리의 계획이라면 개인이든 가족이든 그 어떤 큰 무리의 일이든 혹은 나라의 국가적인 계획일지라도 이루어 질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나. 공부를 계획하고, 사업을 계획하고, 장사를 계획하고, 전쟁을 계획하고 그 어떤 크고 작은 일을 계획할지라도 그 계획을 이루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시편 20편 1-2절에 보면  평소에 갖고 있던 다윗의 생각, 다윗의 신앙을 엿보게 된다. 

그렇다. 하나님이 높여 주셔야 높여 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도와 주셔야 도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붙들어 주셔야 붙들리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소제를 드리고 천천 만만의 번제를 드릴 지라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열납해 주시고 받아 주셔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 마음의 소원을 허락하시고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모든 크고 작은 계획을 이루어 주시는 분은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모든 기도를 이루어 주시기를. 
이 세상에 기도하며 살지 않는 인생은 단 한 사람도 없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피자 맛을 본 어린여자 아이의 모습이 지난 3월 달(2018년)에 인터넷 뉴스에 사진과 함께 실렸다. 미국 브루클린에 살고 있는 한 아빠,  조디 아비간(Jody Avirgan·37)은이 식당에서 처음 피자를 먹고 만족해하는 딸의 모습을 사진에 담은 것이다. 

그런데 인생을 살다 보면 어떻게 맛있는 피자를 먹을 때처럼 항상 인생이 그렇게 꿀맛처럼 늘 달콤하고 늘 고소하고 늘 만족스러울 수 있는가. 

한쪽에서는 승리하여 개가를 부르는가 하면 다른 한 편에서는 슬픔과 낙담과 충격에 빠져서 비탄에 젖어 신음하며 괴로워하는 이들이 있는 것이 세상사가 아닌가. 
2018 러시아 월드컵 축구가 개막되었다. 세계이 모든 축구 선수들이 모두 다 지단과 데이빗 베컴이나 호날두처럼 방방 나르는 것은 아니지 않나. 

모든 분야의 모든 역사는 웃는 자 곁에 우는 자, 기뻐하는 자 곁에 슬퍼하는 자, 승리의 깃발을 흔드는 자 곁에 패배의 고개를 숙이는 자가 뒤 섞여서 살아간다. 다윗은 여러 차례 전쟁에서 이겼지만 암몬과 아람의 군대와 맞서 싸워서 이번에도 이기리라는 보장이 없다. 전쟁은 열 번이면 열 번, 백번이면 백번 다 불안하고 다 초조하고 다 두렵기는 누구나 다 마찬가지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원하고 원하는 것이다. 

시편 20편 5절을 기도하는 다윗의 심정으로 다 같이 읽자.

“우리가 너의 승리로 말미암아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깃발을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무더워지는 여름과 맞이할 가을과 겨울 올해의 앞날과 다가오는 장래에 하나님께서 다윗의 기도를 들으셨듯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루어 주시길 소망한다. 

6절 이하에는 기도하던 다윗이 하나님께로부터 응답 받은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을 이제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오른 손의 구원하는 힘으로 그의 거룩한 하늘에서 그에게 응답하신다.
세상의 어떤 사람들은 병거나 말을 의지하지만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비틀거리며 엎드러지지만  하나님의 오른 손으로 구원하시는 힘을 의지하는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

그리고는 다윗은 백성들의 마음을 모아서 기도하듯이 다시 한 번 하나님께 기도드린다.
“여호와여 왕을 구원하소서
우리가 부를 때에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언제 어디서나 항상 기도의 영에 붙잡혀 실로 기도하며 살아가며 응답과 간증이 넘치는 범사가 되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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