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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씨와 땅(마13:1-9, 18-23) 2017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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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7-09-17 23:11 조회 16,802 댓글 0
 
씨와 땅(마13:1-9, 18-23)              2017. 9. 17
 

예수께서 ‘씨 뿌리는 비유’를 하실 때에 12제자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2절에 보면 큰 무리에게 말씀하신 비유이다. 같은 본문인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다루는 마가복음 4장 13절에 보면,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는 말씀을 하셨다. 무슨 말씀인가. 그 많은 비유의 내용이 다 중요하지만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담긴 교훈을 깨달아 알고 믿지 못하면 다른 말씀도 마찬가지라는 말씀이시다.
 
갈릴리 해변 가에 큰 무리가 몰려섰고 예수께서는 배에 올라가 앉으셨다. 큰 무리가 해변에 둘러서서 예수의 천국 비유 말씀을 들었다.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렸는데 더러는 길가에, 더러는 돌밭에,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졌다. 그리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졌다. 나중에 보니 좋은 땅에 떨어진 씨만이 30배, 60배, 100배로 열매를 맺었다. 씨는 다 같은 씨인데 왜 길가와 돌밭과 가시떨기 위에서는 결실하지 못하였을까. 그 이유는 어린 아이들도 안다. 신앙생활이란 것이 그런 것이다.  내 신앙이 자라나지 못하는 이유가 뭔지 안다고 해서 내 신앙이 자라는 것이 아니다. 내 신앙생활이 결실하지 못하는 원인을 파악했다고 해서 내 믿음 생활에 열매가 맺히는 것이 아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의 말씀을 하신 후에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제자들이 말하는 ‘그들’이란 큰 무리를 말한다. 예수 곁에는 가시는 곳마다 큰 무리가 그를 찾아 왔다. 병 고침 받기 위해서나 혹은 가족이나 아들딸의 귀신을 내어 쫓아 달라고 예수를 찾는 이들이 큰 무리였다. 배가 고프니 떡을 달라고, 목이 마르니 물을 달라고, 내 가족이 죽어 가니 살려 달라고 예수를 찾아오는 무리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10절부터 17절까지의 내용을 보라. 예수께서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된 제자들이 있고 허락되지 않는 자들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게 무슨 말씀인지 긴장되지 않나. 천국 비밀의 말씀을 깨달아 알고 믿고 열매를 풍성히 맺는 생활에 점점 넉넉해지는 이들이 있고 반면에 그 있는 것조차도 빼앗기는 이들이 있다고 하셨다.
 
예수의 다양한 천국 비유의 요지는 천국의 비밀을 깨달아 알고 믿고 믿음이 점점 더 좋아 지고 결실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12절에서 말씀하는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차이란 극에서 극이다.
 
‘있는 자’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예수의 십자가 복음을 믿는 자들의 마음을 말한다. 그들은 죄 사함과 구원과 영생과 천국 백성의 영원한 복이 자리 잡게 된다. 반면에 ‘없는 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자다. 천국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는 자이다. 영적으로 우매하고 무지해서 아무리 많은 말씀을 들어도 길가와 같고 돌밭과 같고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 상태에서 세월만 보내고 있는 자이다. ‘없는 자’는 예수의 말씀을 들어도 모르고 보아도 모르고 깨닫지를 못한다. 예수의 그 수많은 기사와 이적들을 보아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라는 믿음이 생기질 않는 자들이다.  14-15절에 인용하신 이사야 6장의 말씀에 보면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그렇다고 진단하고 계시다. 이사야서 6장의 말씀을 인용하신 예수의 말씀의 절정은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고 하셨다. 이게 무슨 말씀인가. 하나님 편에서 보면 완악한 백성들의 마음을 주께서 더욱 완악하게 하신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 편에서 보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즉 메시아이신 것을 거부하고 배척하고 인정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죽이려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그 ‘큰 무리’로 분류하는 무리들 중에는 ‘대 제사장, 서기관, 바래새인’들을 포함한 유대교의 종교적인 집권층도 포함된다. 저들은 나름대로 모세의 율법을 알고 믿고 행하며 금식하고 선한 행동을 하여 쌓아올린 종교적인 업적을 은근히 자랑하며 유대교 안에서 누리는 세상 복이 적지 않다. 지위도 높고 돈과 재물과 권력이 막강하다. 좋은 집에 살며 호의호식하며 살아간다. 저들은 천국에 대한 관심이 별로 필요 없다. 이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하고 잘 먹고 잘 살면 그것으로 족할 뿐이다.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사야 6장의 말씀을 인용해서 대답해 주셨다. 마음이 둔하게 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고 하셨다. 세상은 황무하고 황폐해 질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남은 ‘그루터기’가 ‘거룩한 씨’라고 하셨다.(사6: 13) 성읍과 주민과 가옥과 토지가 황폐해 질지라도 그 중에 남아 있는 십분의 일조차도 다시 또 황폐하게 되고 황무하게 될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그루터기’의 ‘거룩한 씨’가 중요한 것이다. 그 ‘거룩한 씨’는 메시아 즉 그리스도 예수를 일컫는 예언의 말씀이다.  
 
요즘 월요일마다 고려대학교 가까운 곳의 한 교회에 전국에서 150명의 목사님들이 모여서 6시간씩 공부를 한다. 우리 조원들 중에 ‘그루터기 교회’의 담임 목사가 있다. 교회 이름이 ‘그루터기교회’이다. 아마도 이사야 6장의 이와 같은 말씀에서 교훈과 진리를 깨닫고 그런 교회 이름을 정했을 것이다.
 
이사야 6장 13절에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13장의 시작은 ‘그날’이란 시제로 부터다. 이 말씀은 12장 후반부의 내용과 이어진다. 어느 날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를 만나보고 싶어서 찾아 왔다. 예수 곁에는 많은 무리가 휩싸여 있던 날이었다. 그 날 그 때에 예수는 어느 집안에 계셨다. 그 집 밖에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여러 동생들이 찾아 와 있었다. 그 때 예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키며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고 선포하셨다. 예수의 12제자는 모두 남성들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저들 12제자가 나의 어머니이며 나의 동생들이라고 선포하셨다. 이게 무슨 말씀인가. 하나님의 나라는 혈육의 관계, 가족 관계, 친족 관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제자이냐 아니냐”로 대답을 찾아야 한다는 선언을 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하신 말씀이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마12:50)고 교훈해 주셨다. “제자이냐 아니냐와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느냐 아니냐”로 구분해야 한다고 이처럼 도전하셨다.
 
그날,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를 찾아 온 그날 천국 비유를 해 주셨다. 마태복음 13장에는 모두 7개의 천국 비유 말씀이 담겨 있다. 그 중에 본문으로 읽은 말씀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라고 불리는 비유이다. 그러면 이 비유의 말씀은 천국의 비밀에 대하여 무엇을 말씀하시는 비유인가.
 

복음의 씨.
씨를 뿌리는 자가 들에 나가서 씨를 뿌린다. 그 씨는 좋은 씨이다. 그렇지 않나. 농사해 보신 분들은 알 것이다. 농부는 절대로 아무런 씨나 뿌리지 않는다. 농부는 가장 좋은 씨를 구별하여 보관하였다가 뿌린다. 이와 같은 씨 뿌리는 원리는 동서고금이 다 마찬가지다. 생각해 보라. 형편없는 씨를 뿌리는 농부가 어디 있겠나.
 
그 씨가 복음이다. 예수는 이 땅에 씨로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아담의 후손들인 타락한 인간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심어 주기 위해서 오신 복음의 좋은 씨가 곧 ‘예수’이시다. 그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며 곧 ‘하나님의 나라’ 그 자체를 말씀하시는 것이기도 하다.(마13:38)
 
예수는 그를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 땅에서 자기 자신이 복음의 좋은 씨이신 것을 끊임없이 증거 하셨다. 그 복음의 씨를 받아 들이면 하나님의 자녀인 천국 백성이 되는 것이다.
 
씨를 뿌리는 자는 농부이다. 최근의 포도나무 비유에서 포도나무를 가꾸시는 분은 농부이신 하나님이신 것처럼 씨 뿌리는 자는 하나님이시다. 혹은 예수님이시다. 마태복음 13장 37절에, “좋은 씨를 뿌리는 자는 인자요”라고 말씀해 주셨다. 예수 자신이 좋은 씨를 뿌리는 농부시란 말이다. 혹은 성령님이 좋은 씨를 뿌리는 분이시다. 혹은 이 복음을 깨달아 알고 영접하고 누군가에게 이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자들도 좋은 씨를 뿌리는 자들이다.
 
길거리와 사거리에서 열심히 전도하는 것 같지만 이단과 사이비 신자들은 자신들의 교조의 어리석은 가르침에 사로잡혀서 맹목적으로 전도한다. 그들이 뿌리는 것은 좋은 씨가 아니라 가라지의 씨를 뿌리는 것이다. 예수는 가라지 비유에서 복음의 좋은 씨를 뿌려야 하는데 사람들이 잠자는 동안에 원수들이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간다고 말씀해 주셨다.(마13:36-43)
 
그러므로 복음의 씨를 뿌리는 자가 누구냐 즉 남자냐 여자냐 어른이냐 청년이냐 아니면 어린 아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씨를 뿌리는 자의 그 씨가 반드시 ‘좋은 씨인 복음(福音)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요즘 날마다의 묵상 분량으로 대하는 이사야서의 주인공인 이사야 선지자는 반 백 년 동안이나 하나님의 말씀의 좋은 씨를 이 땅에 뿌리기 위해서 동분서주했던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농부가 뿌린 복음의 씨가 땅으로 비유된 사람의 좋은 마음에 떨어지면 30, 60, 100배로 결실하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씨가 뿌려졌더라도 그 땅이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이면 아무리 많은 씨가 뿌려지고 아무리 오래도록 계속하여 씨가 뿌려지더라도 아무 소용없다. 요즘 젊은이들 표현을 빌리면 ‘꽝’이다.
 
하나님이 이 땅의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좋은 씨를 이 땅에 보내셨다. 그 좋은 씨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 좋은 씨를 받아 들이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게 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라는 말씀이 바로 그것이다. 좋은 씨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복음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영접하고 나면 우리 각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이것은 놀라운 권세요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권세요 영원한 권세이다.
 
그렇지 않나. 이 세상에서 육신의 부모만 잘 만나도 아버지 것이 다 내 것이요 어머니 것이 다 내 것이 되지 않나. 그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딸이 되는 것은 이 세상의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존귀하고 영광스럽고 영원한 권세이다. 이 땅에 모세의 율법으로 완성할 수 없는 구원의 완성을 위해서 복음의 거룩한 씨로 보냄을 받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좋은 씨인 복음이 이 땅에 뿌려진지 벌써 2,000년이 넘었다. 문제는 그 복음의 좋은 씨를 받아 들이는 내 마음의 밭, 내 마음의 땅이 어떤 땅이냐가 중요하다. 심전개발(心田開發)이란 말이 있지 않나.
 
 
길가와 돌밭과 가시떨기.
예수의 이와 같은 비유의 말씀을 못 알아들은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다. 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어린 아이라도 알아들을 수 있는 천국의 비밀이다. 그런데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길가, 여전히 돌밭, 여전히 가시떨기인 상태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교회를 다니느냐 안 다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집과 아파트의 현관에 교패가 붙어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도 아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와서 씨를 뿌렸다. 그런데 그 좋은 복음의 씨가 떨어진 땅이 길가요 돌밭이요 가시떨기이면 어떻게 되겠나. 말씀을 안 듣는 것이 아니다. 본문 19절부터 23절까지 보라. “천국 말씀을 듣고, 말씀을 듣고, 말씀을 들으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라는 ‘말씀’과 땅과의 관계를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말씀하는 말씀이란 ‘좋은 씨’인데 그렇게 좋은 씨가 뿌려졌으나 땅이 길가이고 돌밭이고 가시떨기이다 보니 전혀 결실하지 못하고 말았다는 경고이다.
 
생각하여 보라. 내 마음이 길가와 같은 상태인 것을 알기는 아는데 내 스스로 내 마음의 길가와 같은 상태를 좋은 땅으로 만들 수 있나. 어떤가. 돌밭과 같고 가시떨기와 같은 내 마음의 땅의 상태를 알기는 아는데 내가 내 마음을 좋은 땅으로 바꿀 수 있나. 어떻게 좋은 땅이 될 수 있나.
 
길가가 무엇인가.
수백 명 수천 명이 늘 밝고 지나다녀서 아스팔트처럼 딱딱해진 길가 말이다. 농부가 좋은 씨인 복음을 뿌렸는데 그 씨가 길가에 떨어졌다. 떨어지자마자 새들이 날아 와서 쪼아 먹어 버렸다.  유대 나라에는 300여종의 새들이 있다. 그 새들 중에 어떤 새이든 잽싸게 날아들어서 길 위에 뿌려진 좋은 씨를 쪼아 먹어 버렸다. 이는 에베소서 2장 2절의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일컫는 것이다. 사탄 마귀가 날아들어서 내 마음의 땅에 씨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 좋은 복음의 씨를 쪼아 먹어 버린다. “길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눅8:12)라고 풀이해 주셨다. 남편이 마귀가 아니다. 자식이 마귀가 아니다. 내 마음의 땅에 마귀가 가로 막고 말씀을 그 때 그 때마다 마귀가 집어 심키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로 좋은 씨를 수 천 수 만 개 뿌린 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인간의 마음의 상태가 그런 이들이 이 세상에는 많다. 교회 안에, 예배드리는 우리 가운데도 있을 수 있다. 있을 수 있다가 아니라 분명히 길가와 같은 마음 밭이 있다. 그런 이들은 복음의 좋은 씨를 계속하여 끊임없이 거부하는 상태이다. 예수 때에는 대제사장들과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그 대표적인 무리들이었다. 저들은 본디오 빌라도의 힘을 빌려서 복음의 좋은 씨인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19절, “듣고 깨닫지 못한 자”의 마음은 길가와 같은 마음이다. 거기 ‘악한 자’가 마귀이다.
 
또 하나, 돌밭은 무엇인가.
이는 땅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말씀하시는 것을 우리가 잘 안다. 흙이 얇은 돌밭이라고 하셨다. 팔레스틴의 땅들 중에 이와 같은 땅이 많다. 겉에는 흙인 것 같은데 워낙 흙이 먼지처럼 덮여 있고 그 얇은 흙 아래에는 널따란 돌밭으로 되어 있다. 그런 땅에는 아무리 좋은 씨를 뿌려도 흙이 얇기 때문에 뿌리가 나는 듯하다다는 금방 타 죽고 만다. 싹이 자랄 수가 없다. 돌밭 위에 덮인 얇은 흙에 뿌리를 내리고 싹이 났으나 뜨거운 햇살이 비치자 타 죽고 말았다. 같은 본문을 누가복음에서는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라고 설명해 주셨다.
 
돌밭과 같은 마음이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기는 받는데 그 속에 뿌리가 없어서 잠시 말씀을 듣고 기뻐하는 것 같으나 금방 주저앉아 버리는 이들의 마음을 말씀한 것이다. 조금만 환난과 박해가 와도 곧 넘어지고 주저앉고 마는 신앙 상태를 말씀한 것이다. 번번이 사탄 마귀에게 말씀을 다 빼앗기고 마는 상태이다.
 
벳세다 광야에서 물고기와 보리떡으로 배부른 기적을 체험한 무리들과 비슷하다. 생선 주면 생선 먹고 떡 주면 떡 먹고는 그냥 그만인 상태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질 못한다. 마태복음 19장에 등장하는 예수를 만나러 왔던 부자 청년과 같다.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씀을 듣고 그가 부자인고로 심히 근심하며 떠나가고 말았다. 예수는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19:21)고 하셨다. 그가 예수를 만나러 올 때는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는 거룩한 질문을 갖고 왔다. 그러나 예수의 말씀을 듣던 중에 인생의 궁극적인 대답을 얻지 못하고 재물이 많은 부자인고로 근심하며 예수의 곁을 떠나가고 말았다. 어려서부터 십계명을 잘 지키던 부자 청년이었으나 재물 사용에 대한 예수의 권면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근심하며 예수의 곁을 떠나가고 말았다. 오늘 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매 예배 시간마다 자기 재물과 예수와의 관계에서 자기 상태를 확인해야 한다. 재물에 대한 탐심 때문에 예수의 말씀이 막히면  안 된다. 말씀을 듣기는 듣는데 악한 자라고 설명해 주시는 마귀에게 좋은 씨인 복음을 다 빼앗기면 안 된다는 말씀이다.
 
제자인 가롯 유다가 그랬고 초대 교회의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랬고 사도 바울 곁의 데마가 그랬다. 그들은 한 때 꽤 불이 붙는 믿음 같았으나 말씀을 마귀에게 빼앗기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지 못하였다.
 
가시떨기 같은 마음도 있다.
좋은 씨가 뿌려지긴 했으나 그 마음에 가시 떨기가 가득하여 그만 가시의 기운 때문에 좋은 씨가 싹이 나서 크게 자랄 수가 없다. 마음 밭이 가시떨기와 같은 신앙생활이란 신앙생활을 하긴 하는데 믿음이 자라나지 못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이다. 교회를 멀리하는 것도 아니고 예배를 안 드리는 것도 아니다. 말씀을 대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기도를 드리지 않는 것도 아니다. 봉사를 안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인가. 길가나 돌밭이 내면적인 문제들이라면 가시떨기란 환경적인 것이다. 외부의 여건에 따라서 이리 기울고 저리 기울어진다. 가시떨기 때문에 좋은 씨의 기운이 막히고 만다.
주님이 비유로 쓰신 ‘기운’(마13:7)이란 ‘푸뉴마’(πνεϋμα)는 성령(聖靈)이다. 세상의 염려와 재물에 대한 유혹과 탐심이 성령의 기운을 막고 있는 이들의 신앙 상태를 말씀한 것이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골고루 나온다. 누가복음 8장의 같은 본문에 보면 가시떨기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은 이렇다.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눅8:14)
 
늘 말씀을 듣기는 듣는다. 그러나 문제는 뭔가 하면 이 세상살이에 대한 염려가 너무나 많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염려’라는 표현은 ‘메림나’(μεριμνα)인데 이는 ‘마음이 나뉜다. 마음이 분열된다.’는 뜻이다. 마음이 나뉘고 분열되는데 어떻게 말씀이 결실 할 수 있겠나. 그런 이유 때문에 말씀이 막혀서 결실하지 못하게 된다. 또 ‘재물의 유혹’이란 재물이 점점 많아지고 풍성해 지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돈이 너무 좋고 재물이 너무 좋은 상태다. 그래서 열심히 일하고 사업하고 장사하고 투자하고 직장 생활하는데 돈과 재물에 대한 집착과 유혹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말씀을 늘 듣기는 듣지만 욕심 때문에 말씀이 막히고 만다. 22절에 예수께서 그렇게 지적하시지 않았나. 누가복음 8장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내용에 보면 ‘재물과 향락’에 대한 미련이 너무나 크다. 그래서 성령이 역사하는 기운을 다 막아 버린다. 그러니까 세월만 흐르고 나이만 먹고 교회와 성도들의 주변을 떠나지 않고 맴돌기는 하는데 말씀이 뿌리 내리질 못해서 결실하지 못하고 늘 그냥 그런 상태에 머물고 만다. 왜 그런가. 가시떨기의 기운이 너무 세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의 좋은 씨가 뿌리 내리고 열매 맺을 수가 없게 된다.
 
 
좋은 땅.
그러면 좋은 땅이란 어떤 마음 상태인가. 내 마음이 길가와 흙이 얇은 돌밭과 가시떨기와 같은 상태라면 어떻게 해야 좋은 땅이 될 수 있을까. 나 스스로의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다. 생각해 보라. 내가 길가이고 돌밭이고 가시떨기인데 내가 스스로 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나. 아니다. 농부가 와서 나의 상태를 개간해야 한다. 길가와 같은 굳은 마음을 갈아엎어야 한다. 그리고 좋은 땅의 흙은 퍼다 부어야 한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예수로 접붙임 받아야 한다고 설명해 주었다. 완전히 변화되고 전혀 새로운 나로 거듭나는 상태를 말씀하신 것이다.
 
어렸을 적에 논의 흙이 좋지 않으면 좋은 흙을 돈을 주고 사다가 덤프트럭으로 수 십대씩 붓는 것을 보았다. 그렇게 해야 한다. 누가 해야 하나. 스스로 할 수 없다. 내 마음의 상태를 아는 농부가 내 마음의 길가를 갈아 업고 돌밭의 돌을 하나하나 제거해서 부드럽고 좋은 땅으로 개간하고 가시떨기의 뿌리를 모조리 다 뽑아 내 버리고 일일이 좋은 땅으로 개간하여야 한다.
 
호세아 10장 12-13절에 보면,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너희는 악을 밭 갈아 죄를 거두고 거짓 열매를 먹었나니 이는 네가 네 길과 네 용사의 많음을 의뢰하였음이라.”고 교훈하고 경고하셨다. 여기 강조하는 바가 무엇인가. “여호와께서 오사”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주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 속에 임하셔야 한다. 그 분이 내 마음의 땅에 오셔서 내 마음을 주님의 마음으로 바꾸어 놓으셔야 한다. 이걸 한 마디로 하면 “은혜 받았다. 성령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누가 그렇게 할 수 있나. 농부이신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개간해 주셔야 한다. 내가 몸부림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나의 마음의 상태를 진단하시고 개간해서 좋은 땅을 만들어 주셔야 한다. 주일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이 내 마음의 길가, 돌밭, 가시떨기를 좋은 땅으로 갈아 업고 좋은 열매를 30, 60, 100배로 결실하는 주인공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자. 이 시대 최고의 영성가요 저술가였던 달라스 윌라드의 책, <마음의 혁신>은 이와 같은 신앙적 회의와 질문 앞에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은 땅 신앙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를 차근 차근 설명한 참 좋은 책이다.
 
이번 부흥회가 그런 부흥성회가 되길 바란다. 심령 부흥성회라고 하지 않나. 심령에 부흥이 일어나야 한다. ‘부흥’이란 말이 그런 말이다. ‘revival’이란 말이 다시 새롭게 된다는 말이다. 그냥 길가, 돌밭, 가시떨기의 상태로 방치하고 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개간해서 좋은 땅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농부이신 하나님, 농부이신 주님을 내가 내 한심한 마음의 주인으로 모셔 드려야 한다. 물론 주님을 내 마음에 모셔 들이는 것도 성령의 역사이긴 하지만 의지적으로 내가 간절히 원하고 사모하여야 한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계3:20-21)
 
일일이 거론하자면 사도행전 이후 지난 2000년 동안 복음의 좋은 씨를 좋은 땅 심령에 받아 드린 신앙의 거장들의 삶을 보라. 그 수많은 증거와 간증들을 보라.
 
베드로가 그런 주인공 아닌가.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하고 박해하던 사울이 다메섹에서 부르심을 받고 변화되고 성령 받은 후에 위대한 사도, 위대한 좋은 땅 인생으로 30, 60, 100배의 결실을 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지 않았나.
 
서머나 교회의 폴리캅 감독, <고백록>을 쓴 4세기의 성자 어거스틴,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의 저자로 잘 알려진 중세의 토마스 아 켐피스, 마틴 루터, 쟌 칼빈, 얀 후스, 요한 웨슬리, 구세군의 창시자인 윌리엄 부스, 한국 선교의 사람들이었던 헨리 아펜젤러, 언더우드는 모두 좋은 땅 인생이었다. 미국 북감리교의 파송 선교사였던 의료 선교사 윌리엄 스크랜턴(William Benton Scranton, 1856-1922)은 좋은 땅 신앙의 주인공이다. 윌리엄 스크랜턴은 의사 신분으로 조선에 와서 시병원을 세우고, 상동교회, 아현교회, 동대문 교회 등을 설립하였다.
 
호레스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1932)도 복음의 좋은 씨를 좋은 땅 신앙으로 가꾸어 풍성한 결실을 주님께 드린 주인공이다. 오늘 날 연세대학교 의과대학과 세브란스 병원의 시작인 ‘제중원’의 시작은 호레스 알렌 선교사의 크나큰 업적이다. 1884년 12월 4일에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보수파 민영익이 자객의 칼을 맞고 목덜미에서 피가 솟구쳤다. 14명의 한의사들이 달려들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동맥이 끊기고 일곱 군데나 칼에 찔려 죽어가는 민영익을 치료하고 석달 후에 회복시켜 낸 주인공이 호레스 알렌 선교사이다.
 
입당 제 4주년을 맞고 좋은 계절 가을을 맞은 우리 모두의 마음이 좋은 땅 심령이 되기를 소망한다. 이번 부흥회에 매 시간 주의 종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농부이신 하나님의 마음, 농부이신 예수님의 마음, 씨를 뿌리는 자의 마음을 깨달아 회개하고 통회하며 내 마음을 찢고 주님이 나의 길가와 같고 돌밭과 같고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 밭을 성령으로 갈아엎고 좋은 땅으로 개간해 주시기를 간절히 사모하자. 좋은 땅 심령 되어 100배의 극상품 포도를 결실하는 축복의 주인공이 모두 다 되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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