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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성령을 받은 한 몸(고전12:12-31) 2019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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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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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9-01-27 13:55 조회 12,813 댓글 0
 
                 한 성령을 받은 한 몸(고전12:12-31)    2019. 1. 27


고린도 전서 12장은 로마서 12장과 에베소서 4장과 함께 ‘은사장’이라고 한다. 은사(恩賜)에 관한 내용을 주로 담고 있기 때문이다. ‘ 카르스마’(χάρισμα) 즉 ‘은사’(恩賜)란 주를 믿는 성도들에게 주께서 은혜의 선물로 허락하신 각양의 다양한 재주와 능력들을 일컫는 말이다. 은혜로 ‘거저 나누어 주다’는 뜻에서 생긴 단어이다. 하나님은 개인의 신앙 향상과 주의 몸된 교회를 이루는 성도들의 건강한 연합을 위하여 은혜의 선물인 은사를 공급해 주신다. 

사도 바울은 은사를 몸의 지체로 설명해 주었다. 사람의 몸에는 다양한 지체들이 있다. 우리는 그 여러 가지 보이는 지체와 보이지 않는 몸 안의 모든 지체들을 통 틀어서 ‘몸’이라고 한다. 몸이 건강하려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사지백체의 구석구석이 골고루 건강해야 한다. 몸의 어느 한 지체라도 병이 들거나 사고를 당해서 지체 중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하고 건강한 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는 교회인 성도들의 머리이시다. 교회인 성도들은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필요를 공급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를 믿는 성도들은 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서로를 섬긴다. 각 사람에게 주어진 은사를 따라서 서로를 대하고 주의 몸된 교회를 섬기며 살아가는 것이다. 13절 말씀에 보면 ‘한 성령’, ‘한 몸’이란 표현이 골고루 나온다. 오늘 말씀의 제목을 ‘한 성령을 받은 한 몸’이라고 정하고 묵상하려고 한다. 


한 몸과 여러 지체.
12절에 보면,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 하였다. 우리의 몸이란 것이 여러 지체가 하나로 연결되어서 각기 제 기능을 하므로 몸을 이루는 것이다. 몸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몸된 성도들의 거룩한 연합이 그러한 것이다. 

사람의 몸은 많은 수의 뼈와 그 뼈를 덮고 있는 근육과 살과 이목구비(耳目口鼻)와 오장육부(五臟六腑)와 혈관(血管)과 신경(神經) 조직으로 형성되어 있다. 

에스겔 37장에 보면 하나님은 선지자 에스겔로 하여금 골짜기에 가득한 뼈를 바라보게 하셨다. 그리고 그 뼈들을 향하여 명령하게 하셨다. 뼈들에게 여호와의 생기가 들어가게 해서 살아나리라고 명령하게 하셨다. 뼈들이 연합하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그 위에 가죽이 덥혔다. 그 상태에서 생기를 향하여 명령하였을 때에 생기가 들어갔고 큰 군대를 이루었다. 

엄마의 태 안에서 아기가 수정되는 신비의 순간을 통해서 한 생명이 잉태되고 자라난다. 우리 몸의 뼈는 신생아일 때 약 450개에 달한다. 그러나 자라나면서 서로 뭉치고 합쳐져서 어른이 되면 206개가 된다. 몸의 뼈대를 이루는 등뼈, 머리뼈, 갈비뼈 등이 74개다. 팔다리뼈가 126개다. 귓속뼈가 6개다. 그 가운데 가장 긴뼈는 넓적다리에 있는 대퇴골(大腿骨)이다. 그 길이가 50cm정도 된다. 넓적다리뼈는 무려 평균 270kg의 압력을 견딜 만큼 강하다. 가장 작은 뼈는 귓속뼈 가운데 가장 안쪽에 있는 등자 뼈인데 2mm정도의 작은 크기이다.

머리와 목과 몸과 팔다리에 뼈를 중심으로 두뇌와 눈, 코, 귀, 입과 오장 육부가 형성되어 있다. 그 모든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하면 열 손가락, 열 발가락은 물론 손톱 하나 발톱 하나라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사도 바울은 발과 손과 귀와 눈과 머리등의 지체를 예로 들면서 설명하고 있다. 손과 발 그리고 눈과 귀는 서로 다른 기능을 통해서 몸에 붙어 있는 지체의 기능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설명을 하고 있다.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고전12:17)

우리가 사람이 북적거리는 길을 걷거나 차량이 많이 달려가는 복잡한 도로에서 운전할 때에 눈은 눈대로 바쁘고 귀는 귀대로 역할을 하게 된다.  우리 지방에 농아인 교회가 있다. 담임 목사 내외도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한다. 그러나 볼 수는 있다. 볼 수 있으니 운전을 하기는 하지만 전혀 들리지 않기 때문에 주변의 차량에서 들리는 경적 소리를 전혀 들을 수 없다. 운전을 하기는 하지만 언제나 불안하고 보는 것만으로 운전하기에는 큰 부담을 갖고 운전할 수밖에는 없다. 그렇지 않은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기능이 골고루 건강한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

며칠 전에 어느 권사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보청기를 잃어 버려서 새로 맞추어 사용하는 동안 몇 주 전의 주일 예배 때에는 거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상태에서 예배를 드려서 너무나도 안타까웠다고 하였다. 

생각하여 보라.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고 입과 혀로 말할 수 있다는 이 기능들이 연합해서 우리의 일상생활을 건강하게 영위해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요리를 하거나 음식을 먹을 때에도 코로 음식의 냄새와 향기를 맡는다. 입으로 음식의 맛을 느낀다. 눈으로 음식의 소담스럽고 아름다운 형형 색색의 조화를 보며 즐기며 음식을 먹게 된다. 귀로는 음식을 씹는 소리를 통해서 음식을 더욱 맛있게 먹는 즐거움을 더할 수 있다. 국물을 후루룩 후루룩 마시는 소리와 딱딱한 과일을 꼭꼭 씹어 먹는 소리가 서로 다 다르다. 

이처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와 향기를 맡고 입으로 음식을 먹는 그 모든 기능들이 조화의 아름다움을 이루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지혜서인 <탈무드>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멀리 있는 과수원의 사과나무를 바라다보았다. 멀리 있는 사과를 눈이 먼저 보고 발에게 가자고 명령했다. 발이 달려가서 팔을 움직여 손이 사과를 땄다. 사과를 따는 동안 사과나무 가지 끝에 달려 있는 사과를 향하여 정확하게 손이 닿도록 눈이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입이 입을 크게 벌리고 맛있게 사과를 먹었다. 발과 다리와 팔과 손과 눈이 입에게 불평할 수 있다. 

“발과 다리인 내가 걸어갔고 내 눈이 사과의 위치와 높이를 알려 주었고 내 팔과 손이 사과를 땄는데 입아 너는 뭐 한 일이 있다고 맛있게 사과를 혼자 다 먹어 치운단 말이냐” 

그런데 어디 그런가. 그런 불평이 맞나. 입이 맛있는 사과를 먹어 주었기 때문에 다시 팔과 손과 다리와 발과 눈이 더불어 기운을 얻고 힘을 내서 즐겁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게 아닌가. 사과를 먹는 동안 코는 사과의 향긋한 향기를 즐겼다. 귀는 아삭 아삭 맛있게 사과를 씹어 먹는 소리를 들으며 함께 즐거워했다. 눈은 사과를 먹는 동안 사과의 새빨갛게 잘 익은 아름다운 색깔을 보며 다시 그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었다. 

그러므로 21절의 말씀처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는 교훈이 얼마나 적절한 가르침인가. 


서로 같이 돌보는 여러 지체.
사실 가만히 생각하여 보라. 우리의 몸이란 것이 겉으로 보이는 부분이나 몸 안에 보이지 않는 오장 육부와 뼈마디와 근육과 살과 신경 조직과 혈관과 그 혈관 안을 흐르는 피 한 방울에 이르기 까지 소중하지 않은 것이 그 어디에 있나. 인간은 약 60조개의 세포로 형성되어 있다고 한다. 신비하지 않나. 그 모든 세포들이 생성되고 사라지면서 인간이 수명을 유지하고 보존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사람은 태어 날 때의 뇌 세포의 수가 140억 개 정도라고 한다. 그 중에서 40 억개 정도를 사용하며 살아간다. 그 중에서 20살 이상이 되면 노화가 시작되어서 날마다 10만개 정도의 세포가 죽는다. 그렇게 살아가다 보면 80세 정도가 되면 40억 개의 뇌세포가 20억 개 정도만 남게 된다. 사람이 연세가 들어가면서 노망을 하게 되는 경우는 그런 이유들 때문이다. 그러나 뇌를 많이 사용하고 단련을 계속하면 뇌 세포가 줄어드는 속도가 느려져서 연세가 들어도 뇌 건강이 좋은 상태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근육 운동도 좋고 뼈에 좋은 영양을 섭취하는 것도 좋지만 몸의 보이지 않는 약한 곳을 더 귀하게 여기고 보호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처럼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다. 

24절에 보면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신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몸 안에서 분쟁이 없고 여러 지체가 서로를 돌보도록 창조하셨다. 25절 말씀에 보면,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이것은 몸의 다양한 지체가 서로 보완하여 몸의 균형과 질서를 유지하고 건강한 삶을 이어 갈 수 있도록 도우시는 유기체의 신비이다. 

지금 사도 바울은 사람의 몸과 그 여러 지체를 말씀하려는 것이 아니다. 몸과 여러 지체의 유기체적인 연합을 설명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인 성도들의 연합에 대하여 말씀하는 것이다. 

주님은 왜 성도들에게 각기 다른 은사를 주신 것인가. 서로의 다양한 은사를 통해서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시려는 목적에서 그리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한 지체의 고통을 모든 지체의 고통으로 받아들이고 한 지체의 영광을 모든 지체의 영광을 받아 들여서 함께 즐거워 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그러하지 못하다면 그 상태는 지체의 상태가 아닌 것이다. 그렇지 않나. 내 몸의 어느 부위가 아프면 그 부위만 아픈 것이 아니지 않나. 몸의 어느 부분이 아프면 온 몸이 아프고 그래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온 몸이 고통을 당하게 된다. 내 몸의 어느 부분이 아픈데 전혀 상관없이 쿨쿨 잠을 잘 수 있다면 그런 몸을 가진 사람은 참으로 심각한 것이다. 고통과 즐거움, 아픔과 기쁨을 한 몸으로 함께 느끼는 것이 몸이란 유기체이다. 우리의 교회 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주변 성도들이 겪는 고통이나 누리는 영광에 대하여 남 이야기 하듯 한다면 그 사람은 아직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성도의 연합이 된 영적 상태라고 할 수 없다. 

13절을 잠시 보자. 이는 유대인이냐 헬라인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종이냐 자유자냐의 문제도 아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것이 많다. 혈통이 다르고 신분이 다르고 빈부귀천이 다르고 사회적인 신분과 지위와 역량이 서로 다 다르고 나이도 다르고 성별도 다르고 경험도 다르고 고향도 다르고 취미도 다르고 다른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고린도 전서 12장 13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맞다. 성도인 우리는 한 성령으로 인하여 성령 세례를 받은 한 몸이다. 다 한 성령을 마시는 자들이다. 요즘은 에이즈를 비롯해서 위생이나 보건 등의 문제 제기가 심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지만 초대 교회와 중세 시대의 성찬은 한 잔의 포도주를 서로 함께 같이 마셨다. 

내 앞의 성도가 입술을 대고 포도줄 마신 같은 잔에 다시 내 입술을 대고 한 잔의 같은 포도주를 마셨다. 13절의 설명이 그런 내용이다. 물론 신학적으로 하면 거듭남을 말씀하는 것이고 성령의 임재를 말씀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거듭남과 성령의 임재는 과거의 일회적인 사건으로 추억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하여 지속적으로 누리며 살아가는 성도의 상태이며 하나님의 자녀의 상태를 말씀하는 것이다.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다는 말씀이 이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살아가는 성도들이라면 서로 약한 지체를 돌보아야 한다. 몸의 덜 귀하게 여기는 지체를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듯이 돌보아야 한다.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게 하여야만 한다. 그것이 몸의 각 지체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케스트라의 단원과 같고 연주자와 같다. 다 지휘자 일 수는 없다. 다 피아니스트 일수도 없다. 다 바이올린이나 첼로를 연주하는 것도 아니다. 오케스트라에는 심벌즈나 트라이앵글의 역할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심벌즈의 소리, 트라이앵글의 연주가 되어야만할 그 때 그 순간을 놓치면 안 된다. 왜냐하면 긴 오케스트라 연주의 전 곡 중에 그 순간에 반드시 연주 되어야 하는 심벌즈의 소리, 트라이앵글의 소리는 전체 모든 단원들의 각기 맡은 모든 제각기의 악기 소리만큼 똑 같은 비중으로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 악기의 연주 시간을 놓쳐서도 안 되고 대강 지나쳐서도 안 된다. 그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어서 완벽에 가까운 오케스트라 연주가 가능해 지는 것이다. 각양 은사를 따라 주를 섬기고 성도의 연합을 갖는 교회 생활, 신앙생활이란 그런 것이다. 한 몸을 이룬 여러 지체의 연합이란 25절의 말씀처럼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 그것이 가능하도록 은사를 주셔서 서로 같이 돌보게 하신 것이다. 

어린이 그림책 중에 <힘자랑 재주자랑> 이란 책이 있다. 힘이 센 곰과 빠르게 잘 달리는 토끼와 나무를 잘 타는 원숭이가 함께 모여 살고 있는 마을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제가 제일 잘 났다고 뽐내며 힘자랑 과 재주자랑을 했다. 그곳에 두더지도 함께 사는데 두더지는 곰처럼 힘도 없고, 토끼처럼 잘 달리지도 못하고, 원숭이처럼 나무도 잘 타지 못하여 늘 친구들에게 무시당했다. 그런데 어느 날 토끼집에 불이 나서 아기토끼가 위험하게 되었다. 이때 땅을 잘 파는 두더지가 땅속으로 들어가서 아기토끼를 구해왔다. 곰과 토끼와 원숭이는 두더지가 자기들보다 약하다고 늘 무시하고 깔보았는데 정작 위험한 순간에 아기토끼를 살려 낸 것은 두더지였다. 

  
그리스도의 몸인 여러 지체.
사도 바울은 몸과 여러 지체를 설명하던 중에  27절에서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 하였다. 그렇다. 고린도전서 12장은 성도의 연합과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로서의 하나님의 선물에 관한 말씀이시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 사도, 선지자, 교사, 능력 행하는 자, 병 고치는 은사, 서로 돕는 은사, 다스리는 은사, 각종 방언하는 은사 등을 성도들에게 골고루 주셨다. 그 모든 은사들은 모든 것이 소중한 것이다. 사도, 선지자, 교사 등의 직분의 은사도 그러하고 능력을 행하거나 병을 고치거나 방언을 하거나 통역을 하는 그 모든 직능별 은사도 서로 다 소중한 것이다. 그러므로 남의 은사를 부러워하거나 무시하면 안 된다. 그 모든 은사들이 조화를 이루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건강하게 세워 나가는 것이다. 

에베소서 4장 11-12절에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하였다. 

이 모든 은사를 가장 건강하게 활용하고 서로를 섬기는 바탕은 사랑이어야 한다. 사랑이 없으면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 사랑이 없으면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아무 것도 아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많이 구제하고 혹은 자신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아무 유익이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 사랑이 없이 행하는 은사와 섬김은 자칫 잘 못하면 자기만족이요 자기 위안이요 자기 자랑이요 자기 공로를 드러내려는 교만과 어리석음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여야 한다. 주님을 사랑하는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진심으로 사랑하는가. 성도들의 고통을 진심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아파하며 그 영광을 진심으로 영광을 영광스러워하고 함께 즐거워할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면 위선이다. 거짓이다. 가짜이다. 자기 당착이다.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인디언의 속담 중에 “친구란 내 슬픔을 등에 지고 가는 사람이다.”라는 교훈이 있다. 인디언의 또 다른 속담 중에는“네가 태어났을 때에 네가 울고 세상이 기뻐하였듯이 네가 세상을 떠날 때에 세상 사람들이 울고 네가 기뻐할 수 있도록 세상을 살아가라.”

오늘 성경 본문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12:31) 

그리고 이어지는 사랑장인 고린도 전서 13장  마지막 절의 말씀은 이렇게 끝난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2:13)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을 이룬 성도다운 삶을 가꾸어 가며 충성된 신자의 삶을 살아가는 나날이 되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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