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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원하느냐(막10:46-52) 2018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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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8-10-29 07:51 조회 13,197 댓글 0
 
                      무엇을 원하느냐(막10:46-52)      2018. 10. 28 마틴 루터 종교개혁 501주년


모세가 죽음 직전에 12지파의 후손들을 축복한 말씀이 신명기 33장에 나온다. 그 끝 부분인 아셀 지파를 축복하는 내용 중에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신33:29라는 말씀이 있다. 그렇다. 하나님은 인생을 지으시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 “하나님의 형상대로”가 무엇인가. 온전하고 완전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을 덧입은 하나님의 아들딸로 창조하신 것이다. 에덴동산은 완전하고 영원한 행복이 보장된 동산이었다. 그러한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며 불순종함으로 타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결국은 아담과 하와에게서 태어난 두 형제들 중에서 큰 아들인 가인이 하나님께 제사 드리고 난 후에 동생 아벨을 쳐 죽였다. 가인이 누군가. 하나님께 제사 드리고 예배드리던 인생이 살인마가 된 것이다. 

이 세상의 그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들이 불행하게 살기를 원하겠나. 제정신을 가진 정상적인 부모라면 누구나 다 자기 아들딸들이 행복하게 살기를 원할 것이다. 비정상적 부모가 아니라면 말이다. 하물며 인생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이시랴. 

세상에는 남부럽지 않게 떵떵거리며 살아가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에서 불행을 곱씹으며 씩씩하게 살아보려고 씨름하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사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이는 개인이나 가정이나 한 시대의 고난을 함께 겪어야 했던 민족의 불행한 역사나 다 마찬가지가 아닐까.

일제 식민지와 6.25의 참상이 그러하다. 이 세상에는 부모를 잘 못 만나 학대 받거나 방치된 어린이들도 있다. 남편 잘못 만나 불행이 시작된 아내들도 있다. 그 반대로 아내를 잘못 만나 고민하는 남편들도 있다. 최근에도 계속하여 살인자 가인의 피가 흐르는 인간의 극악한 범죄가 계속하여 일어나고 있다. 

지난해 4월에 있었던 사건이다. 충남 당진에서 성형외과를 경영하던 45살, 의사 A씨는 자신의 집에서 동갑인 45살, 아내 B씨에게 몰래 자신의 병원에서 자신이 처방한 수면제를 먹여 잠들게 한 뒤 미리 준비한 약물을 주입해 살해했다. 아내가 죽자 “평소에 심장 질환이 있었다.”고 말하며 경찰과 119에 아내의 사망 신고를 하였다. 그는 2016년에도 같은 방법으로 아내를 살해하려 했으나 미수에 그친 사실이 추가로 밝혀졌다. 법원은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의사 A씨에게 징역 35년을 선고했다. 그는 “평소 아내와 성격이 맞지 않아 불화가 계속되었고 나를 무시해서 범행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세상에는 나 한 사람의 불행이 나의 불행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가족이나 애매한 이웃들에게 그 불행의 불이 번져 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는 개인이나 가족들 간의 관계가 그러하듯이 국가 간에는 전쟁으로 인한 불행이 그런 참상을 말해 준다. 

하루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들과 함께 여리고 성안에서 성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 길 가에 맹인 거지 한 사람이 앉아 구걸하고 있었다. 이 맹인 거지를 ‘바디메오’라고 한 것 보면 그는 자기 이름도 없이 살아 왔다. ‘바’라는 말은 ‘아들’이란 뜻이다. 디메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였다. 그는 보이지는 않지만 길거리를 가득 메운 무리들이 웅성거리며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고 계시다”고 서로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 때 바디메오는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였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도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자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제발 좀 잠잠하라.”고  꾸짖었다. 그러나 바디메오는 못들은 척하고 더욱 큰 소리를 질러 예수를 찾았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자 예수께서 가시던 길에서 머물러 서셨다. 그리고는 자기를 찾는 그를 불러 오라 하셨다. 그 때 바디메오 곁을 지나던 무리들이 “안심하고 일어나라 예수가 너를 부르신다.”고 웅성거리를 무리들 사이에서 상황을 전달하였다. 맹인은 몸에 휘 감고 있던 겉옷을 내 버리고 뛰어 일어났고 그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예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었다. 그 맹인을 만난 예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그러자 그는“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그 순간 그가 곧 보게 되었고 그 날 이후로 예수를 따르게 되었다. 

오늘 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각 사람을 만나면 예수께서 우리들에게 물으실 것이다. “내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그 때에 우리는 예수께 무엇이라고 대답하게 될까. 

 
불쌍히 여김 받기를 원함.
모든 장애가 다 그러하지만 선천적으로든 혹은 후천적으로든 시력을 잃어서 못 보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장애 중의 하나이다. 보이지는 않지만 예수가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상황을 알게 된 여리고 성의 맹인 거지 바디메오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Jesus, Son of David, have mercy on me.)하고 소리쳤다. 불쌍히 여겨 달라는 말이 무엇인가. 긍휼히 여겨 달라는 말이다. 자신에게 사랑과 관심을 보여 달라는 말이 아닌가.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아 달라는 요청이 아닌가. 

주로 성당의 미사 곡으로 연주되고 불려 지는 “하나님의 어린 양”(Agunus Dei)에 보면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가사가 반복된다. “죄 많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기도의 내용을 담아 찬양한다. 

그렇다. 과거나 오늘 날이나 모든 인생들은 하나님 앞에 불쌍히 여겨 주시길 기도드려야 한다. 긍휼히 여겨 주시고, 자비를 내려 주시길 기도드려야 한다. 

프랑스의 작가 빅토르 위고(Victor-Marie Hugo, 1802-1885)의 소설 <레미제라블>(Les misérables)은 '가난한 사람들', '비참한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miserable’이란 단어는 “불쌍한, 비참한, 불행한, 가련한, 아주 딱한, 가엾은(pitiable), 슬픈, 육체적으로 괴로운, 고생스러운”등의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빅토르 위고가 1862년에 발표한 장편 소설이다. 주인공 장 발장은 굶주려 죽어 가는 불쌍한 조카 7명의 먹을거리를 구하려고 빵 한 조각을 훔쳐 전과자가 되었고 19년을 감옥에서 지냈다. 그러나 우여 곡절 끝에 속죄와 자기희생을 통해 성인(聖人)으로 거듭나는 사랑이 넘치는 장 발장의 일생을 그리고 있다. 작가인 빅토르 위고는 “한 저주받은 비천한 인간이 어떻게 성인이 되고, 예수처럼 살아가고 하느님의 마음에 들게 살아가는지”를 써 내려 가고 싶었다고 말했다. 

<레미제라블>의 작가인 빅토르 위고 자신의 삶도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노폴레옹 당시의 장군이었던 그의 부모는 늘 싸우고 늘 다투고 늘 으르렁거리며 살았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따로 애인이 있었다. 결국 빅토르가 9살 때부터 별거하기 시작했다. 빅토르가 19살 때에 어머니가 죽자 몇 주 만에 아버지는 평소의 애인과 결혼하였다. 아들 빅토르에 대하여 관심이 많던 아버지는 빅트로가 20살 때 어려서부터 좋아하던 아델 푸세와 결혼하자 가난한 집 딸과 결혼한다고 반대하고 결혼식장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처갓집보다 더 가난하고 아무것도 없던 빅토르는 처갓집에 살면서 4남매를 낳았는데 세 아이는 어려서 죽고 하나 남은 아이도 정신병자여서 늘 불행을 달고 살아가야 했다. 그런 그가 평소에 늘 어려서부터 좋아하던 글 쓰는 솜씨로 펴낸 시집 <오드와 그 밖의 시들>과 소설(아이슬란드의 한>을 동시에 발표하면서 일약 20살에 주변의 작가들로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 후 여러 편의 희곡들과 시와 소설을 쓰면서 점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글쓰기에 갇혀 살던 빅토르의 아내는 남편의 친구와 불륜에 빠진 사실이 드러났다. 빅토르는 호세아처럼 그런 아내를 용서하고 곁에 남겨 두었다. 

39살 때에는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이 되는 명예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41살 때에 평생 어려서부터 정신병으로 고생하던 딸이 물에 빠져 익사하는 불행을 겪기도 하였다. 그 후 빅토르는 한 동안 우울증으로 고생하며 일체의 글씨기를 중단하고 두문불출하는 날들을 지내기도 하였다. 끝없이 찾아오는 불행을 딛고 일어나서 쓰기 시작한 소설이 <레미제라블>이다. 

정치적으로 불안정하고 가난하고 불행한 시민들이 넘쳐 나던 시절의 작가 빅토르 위고의 위상은 대단하였다. 그의 나이 83살이던 1885년 5월 22일 그는 폐렴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엄숙하게 치러졌다. 6월 1일, 그의 관을 실은 마차가 파리 시내를 지나는 연변에는 20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일손을 내려놓고 나와서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애도하였다.  

영국에 셰익스피어가 있었다면 프랑스에는 빅토르 위고가 있을 정도로 그는 프랑스 국민들에게 존경을 받고 사랑을 받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 자신은 자신에게 우겨 쌓여 있는 불쌍하고 불행한 환경을 씩씩하게 이겨 내며 살아갔다. 

예수는 그를 찾고 의지하는 인생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는 주님이시다. 예수는 가시는 곳마다 그를 찾아오는 각색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귀신들린 이등에게서 귀신을 내어 쫓아 건강한 삶을 회복시켜 주셨다. 이는 그 당시나 오늘 날이나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주께 나 자신을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기도하고 의지할 때에 주님은 우리 각 사람의 형편을 따라 성령을 통하여 위로하시고 손 붙잡아 주시고 새 힘을 주시는 주님이시다. 말씀을 통하여 마음의 상처와 우울을 극복하게 해 주신다. 
<주님여 이손을 꼭 잡고 가소서>를 찬양하자.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약하고 피곤한 이 몸을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꼭 잡고 날인도 하소서.


보기를 원함.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는 예수의 질문을 들은 맹인 거지 바디메오의 대답은 분명하였다.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그렇지 않나. 이 세상에 “보기를 원하나이다. 듣기를 원하나이다. 말하기를 원하나이다. 걷고 뛸 수 있기를 원하나이다. 오그라든 손이 펴지길 원하나이다. 이 음식 저 음식 가리지 않고 먹기를 원하나이다. 한센병으로 피 고름 나는 피부가 깨끗해지길 원하나이다. 물과 불에 뛰어 들게 하고 무덤 사이에서 살아가게 하는 귀신이 떠나가고 새 사람이 되길 원하나이다. 탐심과 탐욕과 음란과 원망과 불평과 시기와 질투하게 하는 어리석음과 불행으로부터 벗어나길 원하나이다. 그리함으로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마음껏 주를 찬미하고 경배하길 원하나이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늘 기도 생활에 힘쓰며 범사에 감사하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기를 원하나이다.”오늘 날 우리 가운데에는 이렇게 간청할 인생들이 얼마나 많은가. 

맹인 거지 바디메오가 예수를 가리켜 소리 지를 때에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친 것은 ‘메시아야’라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리라는 기다림과 믿음을 갖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처럼 바디메오는 비록 볼 수는 없었으나 ‘나사렛 예수’께서 그가 앉아 구걸하던 여리고 성문을 지나가고 계시다는 사실을 웅성거리는 무리들 틈바구니에서 듣고 크게 소리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비록 그가 맹인이요 거지였으나 하나님의 아들인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메시아를 만나면 자신의 못 보던 눈을 뜰수도 있으리라는 믿음과 기대와 소망을 갖고 살았음이 분명하다. 

나는 강화도 시골에서 자라날 때 참으로 우울할 때가 많았다. 다른 애들은 인천 서울에서 태어나서 살아가는데 나는 하필 왜 전기불도 없고 TV는커녕 라디오도 없는 섬에서 태어나 살아야 하나. 마을에 있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높은 고개 셋을 넘어 다녀야 하는 중학교를 다녔다. 비가 오면 비 맞고 눈이 오면 눈을 맞았다. 옷은 물에 빠진 생쥐처럼 비에 흠뻑 젖어도 책 보따리는 적시면 않 되니까 평소에 책가방 속에 큰 비닐을 넣어 가지고 다녔다. 만약에 비가 오면 우비는 못 써도 책가방은 비닐로 싸 감아서 책이 젖지 않게 하였다. 시골에서 논틀 건너고 높은 고개 넘어서 한 시간을 걸어가면 고등학교였다. 거기 가니까 나는 시골 마을에서 다니는데 읍내에서 버스를 타고 다니는 애들이 여럿이었다. 그게 또 부러웠다. 읍내에는 제과점도 있고 빵집도 있고 만두집도 있고 만화방도 있고 극장도 있다는데 우리 시골 마을에는 구멍가게 두 곳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야말로 하늘과 산과 논과 밭과 들판을 가로 질러 흘러가는 냇물 밖에는 없었다. 가을에 고추잠자리는 많이 봤다. 귀뚜라미 소리는 많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어려서 집 앞에 있는 초등학교 도서실에 있는 책이란 책은 거의 다 빌려다 봤다. 세계 우인 전집으로부터 책이 많지도 않았지만 더 이상 빌려 볼 책이 없을 정도로 빌려다 보고 또 빌려다 보았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런 환경이 불쌍한 환경이 아니었다. 도시도 좋지만 시골이 좋다. 도시 아이들은 여름 방학에 시골 외가에 가면 논의 벼가 뭔지 몰라서 가르쳐 주면 쌀 나무라고 한다. 도시 아이들은 쌀농사가 어떻게 되는지 콩과 들깨, 참깨, 고구마와 감자와 옥수수와 완두콩, 밀과 보리와 인삼이 어떻게 심기고 자라나고 가꾸어지는지를 잘 모른다. 

뭐 요즘 아이들이야 컴퓨터 잘하고 게임 잘하면서 탈선만 안하면 때가 되면 다 유능한 자원으로 자라나게 될 것이다. 문제는 거기에다가 예수 바라 보는 믿음이 더해져야 한다. 

이는 어른 아이 남자 여자 누구나 다 마찬가지이다.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하는 간절함은 인생 최대의 소원을 아뢴 것이다. 선생님이여 하고 예수를 향하여 ‘랍오니여’라고 부른 것은 예수에 대한 최고의 경의를 담아 표현한 호칭이다. 예수에게 ‘랍오니여’라고 말한 장면이 요한복음 20장에 나온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그 새벽에 빈 무덤을 들여 다 본 마리아가 울면서 예수를 찾고 있었다. 예수의 시체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께서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하고 먼저 말을 건네셨다.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줄로 착각하였다. 그 때에 예수께서 “마리아야”하고 그의 이름을 부르시자 예수이신 줄 알아차린 마리아가 예수를 향하여 “랍오니”하고 말했다. 그 ‘랍오니여’하는 말이 예수를 향한 최고의 존칭이다. 그런데 바디메오가 지금 예수를 향하여 “랍오니여 보기를 원하나이다.”하고 보고 싶은 간절한 소원을 아뢴 것이다. 

맞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육신의 눈이 안 보여 세상을 못 보고 사는 것이 답답하고 불행한 것처럼 성도가 영의 눈을 뜨지 못하면 그것처럼 불행하고 안타까운 일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바디메오는 육의 눈이 보이질 않아서 맹인(盲人)으로 지냈다. 이 세상에는 글을 배우지 못해서 까만 것은 글씨요 하얀 것은 종이라고 여기며 지내는 이들이 과거에는 참으로 많았다. 군대에 간 아들이 편지를 보내도 못 읽는 어머니가 동네 이장을 찾아 가서 대신 읽어 달라고 하던 시절이 있었다. 문맹(文盲)이라고 하지 않나. 영의 세계에 대하여 무지한 사람은 영맹(靈盲)이라고 할 것이다.

최근에 전 산업연구원장을 지냈고 지금은 경희대학교 국제대학원의 특임교수로 있는 김도훈 교수의 글을 감명 깊게 읽었다. 그는 문맹의 상태를 문맹율, 문해율, 문무수율로 구분해서 설명하였다. ‘문맹율’(文盲率)이란 그야말로 글을 읽는 이들과 읽지 못하는 이들의 비율을 말한다. 우리나라가 100년 전이나 일제 시대와 다르게 요즘은 문맹율이 2%정도 밖에는 안 된다고 한다.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그런데 그 다음에 ‘문해율’(文解率)이란 글을 읽기는 읽는데 그 글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느냐 알지 못하느냐의 비율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의 문해율은 OECD상위국들 중에서 갑절이나 높다고 한다. 심각한 내용이다. 글을 읽기는 읽는데 그 뜻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말이다. 또 하나는 ‘문무시율’(文無視率)이다. 김도훈 교수는 ‘문무시율’이란 단어는 자신이 만든 표현이라고 설명해 놓았다. 그리고 예를 들었다. 

가령 우측보행이란 표시를 보면서도 무시하고 좌측으로 걷거나 아무렇게나 되는 데로 걷는 이들의 경우는 ‘문무시율’로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화단 앞에 세워진 팻말‘후면주차 금지’는 화단의 화초와 꽃을 자동차의 매연으로부터 보호하자는 취지의 홍보판이다. 그런데 그런 팻말을 보고도 지키지 않는 경우를 ‘문무시율’에 포함시켰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노약자. 임신녀용 의자’표식을 보고도 뻐젓이 버티고 가는 젊은이들의 경우도 ‘문무시율’에 포함시켰다. 

그걸 보면서 생각하였다. 오늘 날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고 듣고 적지 않게 알지만 그 말씀을 나의 신앙생활에 적용해서 구체적으로 실천하지 못하고 그냥 그렇게 살아간다면 영적으로 영무시율이 높은 상태라고 할 것이다. 이런 경우는 건강한 신앙 상태가 아니다. 이런 경우는 영맹한 상태일 뿐만 아니라 영해율이 낮고 영무시율이 높은 상태이다. 늘 말씀을 새롭게 듣고 대하지만 무시하는 것이다. 내 방식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교회에서 혹은 예배 시간에 선포되고 들려지고 깨달아지는 말씀을 교회 안에 버려두고 세상에 나갈 때는 다시 내 방식으로 나가서 사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상태이다.  가령 우리가 십계명을 안다. 그 중에 하나님께 대한 계명은 물론이고 사람들에 대한 여섯 가지 계명을 보라. 부모 공경이 첫째다. 그 닫음은 살인과 간음과 도둑질과 거짓증거와 탐심을 금지한 내용들이다. ‘생명 존중, 이웃의 가정 보호, 이웃의 재물 보호, 이웃의 인격 존중, 이웃의 사유 재산 인정’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여 계명으로 정하여 주신 말씀이다. 

하나님만 섬겨라. 우상 숭배하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 망령되이 일컫지 말아라. 안식일 즉 오늘 날 주일 신앙을 가져라. 주일날 놀러 다니지 말고 주일날 장사하고 일하지 말고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성도들과 이웃을 돌아보는 생활을 하란 말씀이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하여 교훈해 주셨다.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사랑하기를 네 몸을 사랑하듯 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그런 말씀을 알지만 그것을 구체적으로 내 삶에, 내 신앙생활에 적용하여 지켜 실천해 나가려 하지 않는다면 영무시율이 대단히 높은 상태가 되고 만다는 말이다. 영적으로 병든 상태이다. 나무가 병들면 500년 혹은 1000년 된 고목(古木)이라도 쓰러지고 둘레가 몇 아름씩 되는 거목(巨木)이라도 쓰러지고 만다. 

사사기 시대 말기에 엘리 제사장이 그랬고 그의 두 아들인 장차 제사장의 대를 이을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그랬다. 저들 삼부자는 철저히 영무시율이 극도에 달하였다. 결국 두 아들이 전쟁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두 아들의 죽임 당한 비보를 전해들은 제사장 엘리도 의자에서 쓰려져서 숨을 거두었다. 그런데  성경은 그 모든 상황을 살다 보면 죽을 수도 있는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저들의 생명을 거두어 가신 것으로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생명이든 재물이든 건강이든 인간관계이든 다 그렇지 않나.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면 병들기 시작한다.  볼 수 있을 때에 영의 눈을 활짝 떠야 한다. 

구약 시대 마지막 선지자인 말라기에서는 국가적인 십일조 신앙 회복 운동을 촉구하셨다. 십일조와 헌물을 도적질 하지 말라고 책망도 하셨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기본이기 때문이다. 열의 하나를 주께 봉헌하는 태도를 통해서 나의 모든 수입과 재물이 주께로부터 공급된다는 흔들리지 않는 신앙관을 가지고 주를 섬기는 것이 십일조 신앙이다. 이건 자녀들에게도 분명하게 가르쳐야 할 뿐만 아니라 부모들이 앞장서서 모범을 보이고 실천해야 한다. 

우리는 바대메오처럼 육의 눈만 뜨기를 원하지 말고 영의 눈이 활짝 뜨이길 원해야 한다. 그리함으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2)는 히브리서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믿음으로 구원 받기를 원함.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하고 말하는 바디메오에게 예수는 “네 원대로 되어라” 하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예수는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축복하시자 그 즉시 보게 되어 예수를 따르기 시작하였다. 보기를 원했는데 예수께서는 바디메오 안에 있는 ‘구원 받는 믿음’을 주목하셨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칭찬해 주셨다. 구원 받는 믿음이 무엇인가. 예수 만나면 문제가 해결된다. 예수 만나면 눈이 뜨일 수 있다. 예수 만나면 삶이 달라질 수 있다. 예수 만나면 새 삶이 전개될 수 있다는 믿음 말이다. 

이 시간 스스로에게 물어 보자. 과연 나에게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가. 구원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예수를 만나 예수로 인하여 인생관이 바뀌고 삶의 가치관이 바뀌고 장래의 소망이 분명해져야 한다. 왜 공부하는지, 왜 사회 생활하는지, 왜 직장생활 하는지, 왜 사업하고, 왜 장사하고, 왜 돈을 벌어야 하는지, 왜 사회적은 입지와 역할을 감당하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구원 받은 믿음의 사람다운 대답이 있어야 한다. 예수 믿고 죄 사함 받고 천국 백성 되는 것이 놀라운 은총이며 선물이다. 그러면 천국 백성이 된 하나님의 자녀가 자신의 불행이나 역경을 극복하고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고 긍휼히 여겨 주셔서 영의 눈을 뜬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아가려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최근에 국민일보에 실린 기사를 보았다. 산업용 펌프 생산업체로 기업을 일군 청우공업주식회사 안상구(81세) 회장이다. 그는 가난한 집의 7남매 중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아니 해 본 일이 없을 정도다. 남은 날들 동안 재산을 바쳐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순종하며 살기를 원한다고 했다. 그 동안 아프리카 가난한 어린이 돕기에 앞장 서 왔으나 최근에는 북학에 나무 심기, 유실수 심기 운동에 열심을 다하고 있다. 80년을 살아오면서 돈, 명예, 권력을 다 누려 본 그는 말한다. “돈 명예 권력 등 아무리 좋은 것도 항상 나쁜 것을 동반하고 찾아오고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최근에 그는 북한에 생명나무 심기에 5억, 북한의 평양 말고 두메 산골 어린이들을 위해서 꿈나무 캠페인에 1억, 가난한 나라 어린이들 초청해서 축구 교실 여는데 2억, 아프리카 우간다의 자립 마을 후원금 1억 등 계속해서 기업의 이억을 퍼내기에 바쁘다. 

 1997년 IMF때에 순식간에 100억이 날아가 버리는 경험도 하였다고 했다. 그 후에 지금 와서 뒤 돌아 보니 그렇게 큰돈이 사라지기도 하고 다시 큰돈이 벌리기도 하는 것을 보면서 재물이란 것이 성경 말씀처럼 아침 햇빛 앞에 사라져 가는 안개와 같은 덧없는 것을 절절이 경험하였다고 했다.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맡기고 양심적으로 성심껏 살면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간증의 말도 했다.  그는 이런 말도 남겼다. “내가 이만큼 좋은 일을 했으니 하나님이 또 복을 주시리라고 기대하거나 남들의 칭찬을 기대하지 않는다. 받은 사람이 잘되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으로 이미 충분한 보답을 받은 것 아니겠느냐”그렇다. 왜 보기를 원해야 하나. 왜 듣기를 원해야 하나. 왜 말하기를 원해야 하나. 왜 걷고 뛰길 원해야 하나. 왜 부자 되고 왜 재벌 되고 왜 돈 잘 벌고 왜 지위 명예 힘을 얻으려 하나. 섬김을 받고 교만하고 으스대려는 것이 아니라 남을 섬기고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 오게 하는데 쓰임 받기를 소원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구원 받는 믿음이 아니겠는가.

지난주에 헨리 아펜젤러(1858-1902) 선교사 탄생 160주년 기념행사가 있었다. 정동에 있는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정원에 3미터 높이의 동상도 세워졌다. 학술 발표회도 있었다. 그는 27살이던 1885년 4월 5일에 갓 결혼한 아내와 함께 이 땅에 와서 44년을 살다가 성경 번역을 위해 밤배를 탔던 길에 돌아오지 못하고 서해안 깊은 바다에 수장되었다. 그는 배재 학당을 세우고 정동 제일 교회를 세우고 인천에 내리 교회를 세웠다. 언더우드와 손잡고 연세학당이 세워지는데도 일조하였다. 그가 세운 배재 학당의 교훈은 이것이다.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
欲爲大者當爲人役

영의 눈을 활짝 열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하자. 그리고 구원 받은 믿음의 사람다운 삶을 실천하며 살아가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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