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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하나님의 은혜에 머물라(행13:42-52) 2018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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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8-07-09 21:48 조회 15,574 댓글 0
 
                 하나님의 은혜에 머물라(행13:42-52)     2018. 7. 8

기독교의 신앙생활을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은혜 생활’이라고 할 것이다. 누가 하나님을 믿는가. 누가 주께 기도드리며 사는가.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가. 누가 성령의 충만을 사모하는가. 누가 복음을 전하며 사는가. 누가 주께 충성하고 누가 주의 몸 된 교회를 중심으로 헌신하며 봉사하며 살아가는가. 그 대답은 ‘은혜’이다. 은혜를 받은 정도, 은혜를 아는 정도, 은혜를 입은 정도에 따라서 신앙생활의 정도가 다르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제대로 덧입고 살아가는 성도라면 그 범사가 다르다. 시간 씀씀이가 다르고 재물 씀씀이가 다르다. 취미도 다르고 관심도 다르고 살아가는 목표도 다르다.

예수의 비유 중에 어느 임금이 자기에게 일만 달란트 빚진 자를 탕감해 주었다. 그런데 그가 자기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나서 붙들고 목을 잡고 “내 빚 갚으라”고 다그쳤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자기의 일만 달란트를 탕감해 준 임금의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해 하고 그 은혜를 아는 자가 맞느냐고 질문하셨다. 임금이 그에게 일천억의 빚을 탕감해 주었는데 탕감 받은 그가 자기에게 천만원 빚진 자의 멱살을 잡고 자기 빚 갚으라고 위협했다면 그 소문을 들은 임금의 마음이 어떠하겠느냐는 말씀이다. 이 비유는 베드로가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 까지 하오리이까”하는 질문 앞에 대답해 주신 비유이다. 예수께서는 “일곱 번 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이라도 할지니라.”고 대답해 주셨다.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비유이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 중에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고 질문하셨다. 

그렇다. 은혜를 입은 자, 은혜를 아는 자는 그 일상이 달라야 맞다. 우리가 신앙으로 살아가고 예배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주께로부터 입은 그 큰 사랑과 은총에 대하여 반응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셨다. 그 곳은 예수께서 죽은 지 나흘이 되었고 이미 장례 지낸 나사로를 살리신 마을이다. 그 나사로의 집에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가 벌어졌다. 나사로의 여동생 마르다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대접할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사로는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끼어 앉아서 예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 때에 나사로의 여동생 마리아가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의 발을 닦았다. 온 집 안에 향유 향기가 가득하였다. 그 현장에 있던 가롯 유다가 이 것을 문제 삼았다. 그 비싼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줄 것이지 왜 허비하느냐고 시비를 걸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마리아의 이런 행동을 칭찬해 주셨다. 예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한 일이라고 설명해 주셨다. 온 천하에 어디에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마리아의 향유 옥합을 깨트려 부은 일을 말하여 마리아의 아름다운 행동을 기억하게 하라고 하셨다. 

가롯 유다는 예수의 부르심을 받아서 제자가 되었으나 지난 3년 동안 제자 잡게 행동한 적이 없었다. 요한복음 12장 6절에서는 그를 도둑이라고 했다. 요한복음의 기록자인 요한은 예수와 그의 12제자들의 선교 사역에 후원을 받은 돈궤를 맡았던 가롯 유다가 예수와 12제자들의 사역을 위해서 관리하던 돈궤에서 돈을 몰래 훔쳐 가곤 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가롯 유다의 그런 불의한 소행이 지난 이천년간 두고 두고 성경을 통해서 알려져 오고 있다. 가롯 유다는 제자였지만 이름만 제자였지 도둑질하는 도둑으로 지냈다. 요한 복음 13장 2절에 보면 가롯 유다의 마음에 마귀가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고 했다.

사도행전 1장은 그 가롯 유다의 생이 불행하고 비참하게 끝난 것을 기록한다. 가롯 유다는 은혜를 모르던 자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달랐다. 마리아는 예수의 열 두 제자들 중의 한 사람도 아니요 사도도 아니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은혜를 알던 주인공으로 살았다. 신앙생활의 중요성은 은혜를 아느냐는 것이다. 은혜를 받았느냐는 것이다. 받은 은혜, 깨달은 은혜, 덧입은 은혜를 유지하며 살아가느냐는 것이다. 

바나바와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 머물러 있으면서 매 안식일마다 모여 드는 시민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였다. 42절과 44절에 보면 ‘다음 안식일’이란 표현이 나온다. 어느 안식일에 한 번 복음을 전파하고 끝난 것이 아니라 매 안식일마다 사람들이 바나바와 바울 곁에 모여들었다. 뿐만 아니라 복음의 말씀을 들은 무리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랐다. 44절에 보면,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라고 하였다. 비시디아 안디옥의 시민의 수를 알수는 없다. 그러나 그 도시 안에서 더러 몇몇 사람이 모여 든 것이 아니라 온 도시의 시민이 거의 다 모여 들었다. 동족들인 유대인들은 시기하고 반박하고 비방하였지만 반면에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점점 물밀 듯이 바울과 바나바 곁에 모여 들었다. 

그 때에 바울과 바나바, 두 사도가 강조한 권면이 이것이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행13:43)

현수막에 기록된 대로 이번 제 9차 헐몬산 새벽 기도회의 주제 성구로 정한 말씀이 바로 이것이다. 자, 그러면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는 권면의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머물라.’는 표현을 영어 NIV 성경에 보니까 “to continue in the grace of God.”이라고 했다. 은혜 가운데 머무는 신앙생활을 ‘to continue’ 즉 ‘지속하라’는 것이다. 은혜 생활을 기분 내키면 하고 기분 나쁘면 안하는 것이 아니라 전천후로 하라는 말씀이다. 언제 어디에서 무슨 일을 만나든지 상황과 여건과 사건과 대상에 상관없이 언제나 항상  은혜 생활의 일정한 수위를 유지하며 살아가란 말씀이다. 

자, 그러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머물러 지내며 살아가는 것일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은혜.
신앙생활의 은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꾸준하게 접하는 길이다. 송충이가 솔잎을 먹고 살고 누에게 뽕잎을 먹고 살 듯이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살아가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 혹은 ‘주의 말씀’이란 표현이 여러 차례 나온다.

한 시간 쯤 타는 국내선 말고 10시간 이상 씩 하늘을 날아가야 하는 국제선 비행기를 타는 일은 힘들고 지치는 일이다. 그런 가운데 요즘 대한민국 항공사 중의 한 항공사의 기내식 보급에 차질이 생겨서 큰 곤혹을 치르고 있다. 기내식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1만 미터 상공에서 한 끼의 도시락을 받아서 시장기를 해결하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다. 
사람은 아무리 기름지고 대단한 음식을 먹어도 너 댓 시간 지나면 다시 음식을 먹게끔 되어 있다. 물론 하루에 한 끼 혹은 두 끼니를 먹고 지내는 이들도 있지만 하루 세끼 즉 ‘삼식이’로 사는 것이 맞다. 그러다 보니 국제선 기내식 조달에 문제가 생기면서 항공사의 대표와 임직원들이 큰 몸살을 앓고 있다. 
신앙생활이란 것이 그런 것이다. “날마다 일정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고 묵상하고 지내지 않아도 나는 별로 하루를 살아가는데 큰 불편이 없다.” 만약에 이런 사람이 있다면 아직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아쉬움이 많은 것이다. 

“기도는 영적 호흡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영적 양식이고 전도 생활은 영적 운동이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건강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일정한 양의 음식을 골고루 섭취하고 맑은 공기를 호흡하며 일정한 양의 유산소 운동을 하며 지내는 것이 건강한 사람의 하루 일과가 되어야 하는 것처럼 신앙생활이란 것이 그런 것이다. 

“나는 주일 날 교회에 와서 예배 한 시간 드리고 일주일 내내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듣지도 않고 읽지도 않고 나름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지도 않고 묵상하며 지내지 않아도 전혀 생활하는데 불편이 없다.” 만약에 이런 그 누군가가 있다면 자신에게 질문해 보아야 한다. “내가 과연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가 맞나”하고 말이다.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가운데 “오늘 날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기도를 하도록 가르쳐 주신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는 육의 양식과 영의 양식을 날마다 일정하게 공급받으며 살아가야만 한다. 

성경과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에 쓰임 받은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 중심의 삶을 살아갔던 이들이라는 점이다. 

창세기 5장 21절에 보면, 에녹이 65살에 무드셀라를 낳았다. 그 후에 300년 동안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으며 살았다. 거기에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다는 말씀이 무엇인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을 말하나.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반응하고 응답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맞다. 그게 신앙생활이다. 창세기 6장 8절에 보면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자였다. 그 당시에 많은 사람들은 눈에 좋은 대로 이끌려 다니며 살았다. 노아 당시에 세상에는 죄악이 가득했고 그 마음과 생각과 모든 계획이 항상 악했다. 그러나 노아는 달랐다.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은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아가는 것이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분부와 기대를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 은혜 생활이다. 

모세가 유능해서 출애굽의 지도자가 되었나. 다윗이 뛰어나서 블레셋의 골리앗을 이겼나. 다윗이 똑똑해서 시편의 절반을 썼나. 솔로몬이 잘 나서 성전을 지었나. 느헤미야가 뛰어나서 예루살렘 성곽을 52일 만에 중건할 수 있었나. 세례 요한이 예수보다 위대해서 예수에게 세례를 베풀었나. 예수의 12제자들이 그 시대의 다른 이들보다 잘나서 예수의 부르심을 받았나.  아니다. 모든 것이 주의 은혜이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 때 그 때마다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응답하고 반응하고 순종하며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난 것 뿐이다. 그러므로 그 모든 것의 바탕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분부하는 것이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우리 교회 인터넷 홈 페이지 안에 들어가 보면 지난 2011년 이후의 설교문과 칼럼 400여 편의 내용이 실려 있다. 적지 않은 분량의 어떤 칼럼들은 사오천여명이 읽었다. 어떤 설교문들은 육 칠 천명 이상이 읽은 기록이 있다. 어떤 설교문은 거의 만여 명이 읽은 흔적이 남아 있다. 

우리는 우리끼리 모여서 잠시 예배드리고 헤어지는 매 주일의 일상을 살아간다. 그러나 이제는 언 라인(online)의 세상이 되어서 세상 지구촌 구석구석 어디에서나 자기가 관심을 갖고 찾아 갈 수 있고 돌아 볼 수 있는 곳이 처처에 널려 있다. 

요즘이야 WWW즉 'world wide web'으로 세상이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엮여진 정보망 시대이다. 그 어떤 것도 속일 수가 없다. 숨길 수도 없다. 가릴 수도 없고 지울 수도 없고 부인할 수도 없다. 요한복음 3장 16절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 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는 말씀이 무엇인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203장 찬송가의 가사는 우리나라 감리교의 조창희 목사의 찬송시이다. 그의 아버지는 대전 목동교회의 장로였다. 조창희 목사는 동요와 동시를 많이 쓴 맑은 영혼을 가진 목회자로 이제는 은퇴한 원로이다. 그 찬송가의 가사 1절은 이렇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라 
광야 같은 세상에 길 잃고 방황할 때 
절망중에 빠진 이 몸 하나님 보호하사 
생명 샘이 솟아나와 새 힘이 넘칩니다

그 2, 3, 4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은혜의 말씀이라, 진리의 말씀이라, 사랑의 말씀이라.”고 하였다. 맞다. 그렇지 않나. 찬송가의 가사 그대로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생명을 얻고 은혜를 받고 진리를 깨닫고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간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힘을 얻고 능력을 얻고 격려를 받고 용기를 얻고 지혜를 얻고 소망을 갖게 되고 담력을 얻고 사랑을 깨닫고 공급받고 실천하며 살아간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라고 말씀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는 말씀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성도들의 심령에 때로는 방망이가 되어 우리의 마음에 훈계가 되고 때로는 칼이 되어 우리의 마음에 회개가 일어나게 한다. 

다윗이 고백한 시편 18편의 1-3절을 보라.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이것이 무슨 말씀인가. 다윗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얼마나 많은 은혜를 깨닫고 힘입으며 살았으면 감히 이렇게 섬세하고 구체적인 은혜의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 


땅 끝까지 비추이는 구원의 은혜.
하나님의 말씀은 슬픔 당한 자의 위로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망 중에 있는 자의 희망이시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둠 속에서 헤매고 방황하는 자의 빛이시다. 
하나님의 말씀은 미움과 증오심에 갇혀 있는 자의 마음을 녹이는 사랑이시다. 
하나님의 말씀은 원망과 불평과 탄식과 불화와 반목으로 인하여 원수된 자들 가운데 화평이시다. 
하나님의 말씀은 의심 가운데 사로잡혀 있는 자에게 믿음을 주시는 대답이시다. 
하나님의 말씀은 병든 자의 치유의 시작이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갇혀 지내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약속이시다. 

예루살렘의 청년 사울은 스데반 집사의 죽음을 옳다 여기던 자였다. 그는 가는 곳에서 마다 주변 사람들에게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였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그런 목적으로 다메섹 성을 향해 가다가 변화 받았다. 어둠 속에 있던 사울의 영혼에 구원의 빛이 임한 것이다.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는 말씀은 구약 이사야 49장 6절 말씀의 인용이다. 맞다. 그렇게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와 주를 믿는 성도들을 핍박하고 박해하던 사울이 변화 받았다. 그리고 주님은 사울을 이방의 빛으로 삼으셔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는 선교의 도구로 쓰셨다. 

이 세상에 빛을 이길 수 있는 어둠이란 없다. 빛은 아무리 약한 빛이라도 강한 어둠을 이길 수 있다. 

‘형설지공’(螢雪之功)이란 말이 무엇인가. 개똥벌레의 불빛과 눈빛으로 글을 읽어 가며 이룩한 성공이란 뜻이다.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갖은 고생을 하며 부지런히 학문을 닦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차윤은 공손하고 부지런하며 널리 배우고 다방면에 통했는데, 집이 가난하여 항상 기름을 얻을 수 없자 여름철에 명주 주머니에 수십 마리의 개똥벌레를 넣어 책에 비춰 가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책을 읽었다.” <진서>(晉書)의 〈차윤전>(車胤傳)에 나오는 고사이다. “손강은 집안이 찢어지게 가난하여 항상 눈빛에 비추어 책을 읽었다.” <송제어>(宋齊語)》를 인용한 <초학기>(初學記)에 나오는 고사이다. 

개똥벌레의 빛과 창밖의 눈빛의 도움을 받아 공부해서도 성공하고 출세한 이들이 있었다. 이는 과거나 오늘 날이나 장래에나 누구나 다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빛을 은혜로 받고 살아가는 자들이다. 

한국 신학계의 원로이며 연세대학교 신과 대학의 원로 유동식(1922-  )박사는 1922년생이니까 올해 97세이다. 김형석 박사와 연세가 비슷하다. 그는 평생 신학교에서 후학을 가르쳐 온 한국 신학계의 최고 원로 신학자 중의 한 분이시다. 그가 강조한 바는 ‘은혜’다. 그는 21살 때인 1943년에 일본 도쿄 동부 신학교에 입학했다. 세계 제 2차 대전의 막바지였는데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일본군에 끌려갔다. 6개월간 군사훈련을 받은 뒤 배치된 곳이 일본 규슈 가고시마 해안에 있던 부대였다. 그가 맡은 역할은 해안에 구멍을 파고 숨어 있다가 미군 탱크가 오면 지뢰를 안고 탱크로 돌격하는 거였다. 그런데 1945년 8월 6일에 히로시마에 그리고 사흘 후인 8월 9일에 나가사키에 원자탄이 떨어지면서 전쟁이 끝나고 해방을 맞았다. 청년 유동식은 미군 탱크를 향하여 폭탄을 안고 뛰어 들어 자폭하는 것이 임무였는데 전쟁이 끝나고 살아남았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이다. 그는 “저는 저를 위해, 민족을 위해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주님이 구해주셨어요. 복음이라는 게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그때 복음이 뭔지 정확하게 알았습니다.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는 것,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것, 그게 은혜이고 그게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러면 ‘은혜’(恩惠)란 무엇인가. 나를 구원해 주시는 주님의 그 사랑과 복음의 은총을 깨달아 알고 믿고 증거하며 살아가는 것이 ‘은혜’가 아닌가. 그렇다. ‘은혜’란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인들에게 거저 주시를 선물인 사랑이다. 성도인 우리는 그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나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고 하였다.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이다. 지난 주일에 소개한 대로 샴쌍둥이를 알지 않나. 더러 분리 수술에 성공하기도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태어날 때부터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채 태어나는 경우가 있다. 두 사람인데 머리 둘과 두 몸의 일부가 붙어 있는 채로 태어나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평생을 붙어서 살아가기도 한다. 
세상에는 별의 별 장애와 별의 별 질병이 다 많다. 선천적인 장애도 있고 후천적으로 장애나 상해를 입는 경우도 있다. 별의 별 불행이 다 닥쳐온다. 그래도 그런 여건과 신체 조건과 환경 그대로 하나님의 구원의 빛 안에서 그 구원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감사하고 고백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성도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믿음으로 살아간다고 해서 만사가 형통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은 주어진 고난, 주어진 장애, 주어진 슬픔, 주어진 아픔, 주어진 시련, 주어진 고통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씨름하며 매 순간 주의 은혜를 의지하며 이기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각하여 보라. 우리를 세상의 어둠과 죄와 죽음에서 빛의 자녀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가 큰가. 


영생을 얻은 자의 은혜.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최고의 은혜는 영생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아무리 오래 살고 장수한들 969년을 살았던 무드셀라만큼 살겠나. 모세의 고백처럼 “인생이 칠십이요 강건해야 팔십”이 아닌가.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들에게는 죄 사함과 구원과 영생이 선물로 주어진다. 

본문 46절과 48절의 내용을 보라. 누구는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구원과 영생에서 멀어지고 누구는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는 말씀처럼 택함 받아 구원 받고 영생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의 선물인가.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는 영생하는 자들이다. 풀이나 나무 중에는 일년생이 있고 다년생이 있다. 나무 중에도 어떤 나무는 천년을 살고 삼천년도 산다. 
우리나라의 주목을 말할 때에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락도 한다. 성경의 레바논의 백향목 중에는 솔로몬의 때의 것인 3000년이 넘은 것들이 아직도 살아 있다고 한다. 아프리카에는 8가지 종류의 바오밥 나무가 있다. 그 중에 6가지가 마다가스카르 섬에서 야생한다. 그 평균 수명이 1000살이 넘는다. 건조한 땅에서 물을 흡수하여 천년을 버티고 살아간다. 그래서인지 모양도 희한하게 생겼다. 남아공에는 4천년이 넘은 바오밥나무가 있다. 그 나무의 키가 22m이고 둘레만도 47m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수명을 이 땅, 나그네 인생길의 70-80년으로 제한한 것이 아니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하는 존재들이다. 영생이란 형이상학적이고 공허한 이야기가 아니다. 영생이란 하나님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진 영원한 삶 즉 실존의 세계이다. 

우리가 헐몬산 새벽 기도회의 성구를 정한 시편 133편의 말씀에도 보면,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영생하게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 보면 예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해 주셨다. 

우리는 대개 요한복음 3장 16절만 기억할 때가 많다. 그러나 그 앞의 2구절을 더 보면 이렇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러 그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길 소원하는 성도된 우리 모두에게 영생의 은혜가 늘 충만하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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