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하는 자들아(빌4:1-3) 2017. 11. 5
교회가 탄생하고 교회가 세워지는 것은 철저히 하나님의 역사이다. 빌립보교회는 마게도냐 지역에 최초에 세워진 교회이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빌립보 지역에 선교 여정 중이던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은 안식일이 되었지만 회당이 없던 그 곳에서 강가로 기도할 만한 곳을 찾기 위해서 나섰다. 여러 여성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루디아라는 자색 옷감장사를 만났다. 그 여성은 하나님을 믿는이였다. 그 때 주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주셔서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루디아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 들였다. 그녀와 그의 집안 사람들이 다 같이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바울 선교단 일행을 자기 집안으로 초청하였다.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하고 강권하여 여러 날 루디아의 집에 머물머 빌립보 시내에 출입하며 복음을 전파하였다. 사도행전 16장 16절에 보면 기도하는 곳을 찾아 가던 중에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났다. 그 귀신 들린 여종은 날마다 바울 일행을 만나면 소리를 질렀다.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이 같이 여러 날을 계속해서 소리질렀다. 며칠 후에 바울이 심히 괴로운 마음을 갖고 그 귀신에게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그 때 귀신이 즉시 나오고 그 여종이 깨끗해 졌다. 그 여종이 점을 치고 돈을 벌게 해서 수입을 잡던 주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장터의 관리들에게 끌고 갔다. 고발 내용을 들은 상관들은 바울과 실라의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쳤다. 그 당시에는 적법한 재판 과정도 없이 그렇게 했던 것 같다. 많은 매를 맞은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갇혔다.
그런데 그 밤에 바울과 실라는 매를 맞아 몹시 아픈 몸으로 계속하여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찬송하였다. 그 때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였다. 닫혀 있던 문이 다 열리고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졌다. 이 일로 인해서 바울과 실라가 도망친 줄로 짐작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하던 간수가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다. 어떻게 해야 구원 받겠느냐는 간수의 질문을 들은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16:31)고 초청했다. 간수는 그 밤에 바울과 실라의 매 맞아 아프고 상처난 환부를 씻어 주고 자기와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았다. 간수는 바울과 실라를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가서 음식을 차려 대접하고 온 집안에 하나님을 믿게 되어 크게 기뻐하였다.
사도행전 16장에 소개된 자색 옷감 장사 루디아, 귀신이 떠나가고 고침 받은 귀신들려 점치던 여종, 빌립보 감옥의 간수와 그의 가족들이 빌립보 교회의 창립 멤버들이다. 이렇게 탄생한 빌립보 교회는 그 후로 부흥하기 시작했다. 이 때는 사도 바울이 두 번째 선교 여행 중이던 AD 49-52년경의 일이다.
복음은 그렇게 퍼져 가는 것이다.
공주 영명중고등학교는 감리교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학교이다. 그 곳 영명학교를 졸업했지만 한 참 후에 예수 사랑교회에서 세례를 받인 이가 유용균 집사이다. 신앙생활하는 아내를 만나서 온 집안에 모두 다 예수를 영접하고 살게 되었다. 어제 장례를 마친 강경자 집사님도 막내 며느리 허성리 집사가 8년여간 모시고 살면서 교회에 모시고 다녔고 노년기에 세례를 받으시고 원로명예집사 직분도 받고 사시다가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셨다. 아들 유용균 집사도 예배당이 없던 공주시 우성면 죽당리 두메산골 산 언덕 집에서 딸 넷 아들 둘 육남매 중의 막내로 태어나 예수 믿는 부인 만나 예수를 잘 믿게 되었다. 이제 찬바람 불면 우리 교회 성탄 트리 하는데 전기 기술을 동원하고 추운 날 고생 많이 하면서 성탄 트리에 불을 밝히도록 애쓰고 수고하고 봉사하는 손길 중에 한 사람이 유용균 집사이다.
유용균 집사가 졸업한 죽당초등학교는 학생이 없에 폐교되고 불교에서 운영하는 노인요양병원으로 변해 있었다. 사방을 뺑뺑 들러 낮으막한 산자락이 병풍처럼 둘러 쳐저 있는 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전통 장례 법대로 꽃 상여에 관을 묶어 ‘요령잡이’의 구성진 가락의 “이제 가면 언제 오나” 하는 선창을 따라서 “어이어 어어”하며 장례하였다. 요령을 흔들며 선창하는 상두꾼의 가사를 가만히 들어 보니,
“충신 내는 우성면과 열녀 내는 죽당리에 꽂이- 진다고 설-워 마라- 명년- 춘삼월 돌-아 오면- 너는 다시- 피련- 마는- 우리- 인생은 한번- 가면-다시- 올줄을 모-르 더라- 가지- 마오- 가지를 마오-불쌍하게 가지를 마소.”
말씀을 시작하며 실명을 일일이 거론하는 것은 빌립보 교회가 그랬기 때문이다.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선교 하다가 붙잡혀 로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한 내용이다. 본문에서는 실명으로 몇 사람의 이름을 거론하고 있다. 유오디아, 순두게, 글레멘드와 같은 이름이다. 바울의 교회사랑, 바울의 성도 사랑은 대단히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을 나의 사랑하는 자들, 나의 사모하는 자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불렀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을 얼마나 사랑하였기에 이와 같은 표현들을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빌립보서 1장 8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모한다고 했다. 바울이 표현한 ‘심장’이란 심장이나 폐나 간을 포함한다. 그 의미는 “정서, 애정, 열정, 근심”등의 처소를 뜻한다.
유모가 어린 아이들을 가르쳐서 키우듯이 아버지가 아들에게 사랑으로 훈육하고 교훈하듯이 말씀하는 사랑이 배어나는 권면을 대하게 된다.
주 안에 서라.
바울 사도의 모든 권면은 ‘주 안에서’라는 강조이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 주 안에서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라, 주 안에서 겸손한 마음을 품으라, 주 안에서 각각 자기보다 다른 사람을 더 낫게 여기라,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한다.
‘서라’는 이 한 마디의 단어 안에 바울이 얼마나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을 사랑하는 지를 알 수 있다. NIV영어 성경에 보면 ‘stand firm in the Lord’ (주 안에서 굳게 서라)고 했다. 여기 ‘서라’는 말은 군대 용어이다. 전쟁에 나아가기 전의 군대가 전쟁에 나갈 준비를 하는 임전태세를 말한다. 군대 훈련소에 입대하면 가장 많이 하는 동작이 ‘차렷’동작이다. 군대에 가면 “ 차렷 자세는 군인의 기본자세이며 안으로는 군인정신이 충만하고 밖으로는 엄숙단정 하여야 한다.”고 가르치고 외우게 한다.
그렇다. 교회와 각 성도들을 향한 주님의 기대와 권면은 악과 싸워 넘어지지 않고 굳게 서는 것이다. 사사 기드온 때에 미디안 군대와의 전쟁이 있었다. 기드온의 300명 용사가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자세이다. 22000명 중에서 싸울 준비가 되지 않은 백성들을 제 집으로 돌려보냈다. 12000명이 돌아갔고 10000명이 남았다. 그 것도 많다고 하신 하나님은 물가로 이끌고 가서 물을 마시게 하셨다. 그 물 마시는 태도를 보고 300명만 남겼다. 허겁지겁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시는 자들은 9700명의 백성들이 다 제 집으로 돌아갔다. 나머지 300명은 개처럼 사방을 경계하면서 손으로 물을 움켜서 입에 대고 목을 축인 자들이 뽑혔다.
신앙생활은 태도의 문제이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좌우편의 두 강도를 보라. 둘 다 강도다. 마땅히 십자가 처형으로 사라질 신세다. 그런데 우편 강도는 자기 곁에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누구신지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그에게는 낙원에 초청 받는 구원의 은혜가 주어졌다. “ 주 안에 서라.”는 말씀은 주 안에서 살아가라는 말씀이다. 주 안에서 살아가면 운명이 바뀐다. 주 안에 굳게 서서 살아가면 현재가 다르고 장래가 다르고 삶이 달라진다.
주 안에 굳게 서서 살아가면 대인관계가 달라지고 물질관이 달라지고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주 안에 굳게 서서 살아가면 하루에 열 번 백번 변하는 변화 무쌍한 내 감정을 다스리고 내 생각을 다스리는 태도도 달라진다. 생각나는대로 말하고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던 사람이 주 안에 굳게 서서 살아가기 시작하면 삶이 달라진다. 사람이 달라진다. 왜 그럴까. 내 마음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와서 계시다면 달라지지 않겠나.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여리고 성에 들어가신 예수께서 뽕나무 위에 올라가 숨어 있던 여리고 성의 세리장 삭개오를 불러 내리셨다. 개역개정 성경에는 ‘돌무화과 나무’라고 되어 있다. 예수께서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여 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삭개오는 다람쥐처럼 급하게 나무 위에서 내려 왔다. 즐거워하며 예수님과 제자들을 자기 집에 영접하여 들였다.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 갔다."고 뭇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삭개오는 앉지도 안고 서서 예수께 말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갑겠나이다.”(눅19:8) 이게 무슨 말인가. 예수께서 삭게오에게 무슨 요구를 하신 적이 있나. 아니다. 단지 예수께서는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하신 것 뿐이다. 그런데 삭개오는 거부하지 않고 예수님을 자기 집안으로 모셔 들였다. 뿐만 아니라 삭개오는 자기 마음 문을 활짝 열고 예수님을 자기 마음 중심에도 모셔 들였다. 예수님은 삭개오가 영접하는대로 그의 집에 들어가서 앉으신 것뿐인데 삭개오 스스로 주 안에서 굳게 선 신앙의 고백을 하며 변화를 시작한 것이다
이게 중요하다. 교회를 5년, 10년 아니 오래도록 다니는 것도 필요하지만 주 안에 굳게 서는 태도의 변화가 중요한 것이다. 매 순간 주 안에 굳게 서서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나. 예수 믿는다가 화가 안나나. 예수 믿는다고 속상하지 않나. 예수 믿는다고 탐심이 다 사라지나. 예수 믿는다고 누구나 다 금방 천사가 되나. 예수 믿는다고 욕심도 없고 미움, 시기, 질투, 원망, 불평, 탄식이 다 사라지고 인생이 항상 개나리 진달래 피는 봄날처럼 형통하기만 한가.
그러므로 “주 안에 굳게 서라”는 말은 예수 안에서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과 범사를 다스리며 점검하며 살아가라는 말이다. 교회도 보니까 ‘가스 점검, 엘리베이터 점검, 소방 점검, 전기 검침, 복사기 점검, 인터넷 와이 파이 점검....” 등등 계속하여 한 달이 멀다하고 정기 점검을 하러 다녀가는 것을 본다.
주님은 우리 각 사람의 신앙이 주 안에 굳게 서서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하는지 그렇지 못한지를 점검하기를 원하신다. 주 안에 굳게 서서 살아가지 못하면 아담과 하와도 뱀 앞에서 무너지고 가인도 하나님 앞에 제사 후에 동생 아벨을 죽이는 살기로 무너지고, 에서도 동생 야곱 죽이겠다고 혈기에 무너지고, 유다는 양 떨 깎으러 먼 길 가다가 며느리 다말에게 무너지고, 삼손은 이방 여인 드릴라의 무릎을 베고 무너지고, 아간은 아이성 전투에서 시날 산 외투와 금은덩어리를 보고 탐심에 무너지고 가롯 유다는 은 삼십 량에 예수님 팔아 버리는 배반자로 무너지지 않았나. 그러므로 주 안에 굳게 서는 신앙생활은 모든 신앙생활의 기본이다.
그래서 바울은 권면한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남과 자신의 삶을 비교하지 말고 주 안에 굳게 서서 주님을 의지하고 살아가야 한다. 매 순간 주님께 기도하고 주님의 은혜를 찬송하며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주 안에서 나 자신의 각양 욕망을 매 순간 다스리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닌가.
같은 마음을 품으라.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했다. 빌립보 교회에는 많은 여성 집사들 중에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유명했다. 좋은 일로 유명한 것이 아니라 서로 자기가 잘났다고 주장하면서 이 두 여 집사의 소문이 로마 감옥에 있는 사도 바울의 귀에 까지 들어 갔다. 이 유집사 순 집사는 빌립보 교회에 충성하던 이들이다. 사실 그렇지 않나.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경우에는 서로 의견 나뉠 것도 없고 부딪힐 일도 없다. 그런데 이 유오디아 집사와 순두게 집사는 빌립보 교회에 충성을 다하는 여집사들이었다. 내가 내 시간들이고 내 돈 들이고 내 헌금 들이고 내 재주 들이고 내 경험들이고 내 은사 들이고 내 열심과 내 충성을 다해서 주를 섬기고 교회를 섬기는데 “왜 나를 알아 주지 않느냐 왜 내 목소리를 들어 주지 않느냐” 그래서 빌립보 교회가 시끌시끌했다.
벤살렘교회를 지을 때 김치를 만들어 한인 가정에 팔았다. 여성 집사 권사들께서 그렇게 하길 원했다. 1000병도 더 담아 팔았다. 그런데 전라도 식과 충청도 식이 달랐다. 새우젓도 액젓으로 할 것이나 통새우 젓으로 할 것이냐를 갖고 의견이 팽팽하였다. 양념이 짜다 싱겁다. 고춧가루가 너무 많이 들어갔다. 너무 허였다. 나중에 보니까 예배당 건축은커녕 교회가 김치 담궈 팔다 말과 두 동강이 나게 생겼다. 나중에는 주일 강단에 김치 병을 들고 올라가서 설교한 기억이 난다.
바울의 강조는 무엇인가.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즉 “주 안에서 하나가 되라.”는 권면을 한 것이다. 생각해 보라. 빌립보교회의 유오디아집사와 순두게 집사는 좋은 일로 성경에 그들의 이름이 기록된 것이 아니라 서로 자기주장이 옳다고 하고 내 말을 들으라 하고 왜 내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느냐고 다투고 씨름하고 얼굴 붉히다가 그만 지난 이천년을 두고두고 빌립보 교회에 고집쟁이 여집사와 문제의 주인공인 두 여집사의 이름으로 기록되고 말았다.
교회나 가정이나 직장이나 사무실 분위기나 다 마찬가지가 아닌가. 서로 자기 주장만 하고 양보가 없다면 행복할 교회가 어디에 있고 평안할 집안이 어디에 있고 즐거울 직장과 사무실 분위기가 어디에 있겠는가. 서로 양보하고 서로 배려하고 서로 다른 사람을 위하고 서로 자기주장을 접고 서로 서로 화목하게 화합하며 살아갈 때에 집안도 행복하고, 교회도 평안하고 직장도 나라도 평안한 것이 아닌가. 잠언에 보면,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지혜 있는 자의 혀는 지식을 선히 베풀고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쏟느니라.”고 했다.
에베소서에 보면,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2-3)
주 안에서 서로 한 마음, 같은 마음을 갖고 평화로운 가정과 교회와 세상을 가꾸어 나가야 할 것이다.
동역자들을 도우라.
이 세상에는 혼자서 할 수 있는 일도 있지만 두 셋이 힘을 합하면 훨씬 효과적인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된다. 요즘 세상에서 많이 사용하는 ‘씨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 동역하는 것은 귀한 것이다. 서로의 힘과 지혜를 합하면 크고 좋고 놀라운 결과를 얻게 된다. 전도서에 보면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이니라.”(전4:9)고 했다. 그 뒤에 이어지는 교훈에 보면,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4:10-12)
위대한 연설가로 알려진 영국의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1874-1965) 역시 말더듬이였다. 그런 어린 아들을 어머니는 늘 격려하고 인정하고 칭찬하고 사랑해 주었다. 그가 자신의 말더듬이 장애를 고친 것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각고의 노력이 있었다. 처칠은 자신의 연설을 위해 말 한마디 뿐 아니라 동작 하나하나에 신경 쓰며 연습했다. 그렇게 대중 연설을 치밀하게 준비하면서 자신의 약점을 고쳐 나갔다. 평생 심한 난독증으로 고생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말 더듬이 학습 장애아였다. 학교에서 꼴찌를 하기도 했다. 초등학교 학적부에는 “희망이 없는 아이”라고 적혀 있을 정도이다. 중학교 때에는 영어 과목에 낙제를 해서 3년이나 유급을 당했다.
그런 그가 영국 역사와 세계사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그래서 인지 그는 연설도 짧게 했다. 옥스퍼드 대학교 졸업식 축사 때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포기 하지 말라. ”(never never never never never never give up) 6번을 반복하여 강조하였다. 그 후 그의 연설 내용을 전해 들은 옥스퍼드 캠브리지 명문대 생들은 제 2차 대전에 나가 목숨을 다해 싸웠고 영국과 유럽을 독일의 힘으로부터 막아 싸워 승리하였다. 연합의 힘 동역자의 힘인 것이다. 미술, 글쓰기에도 능했던 그는 나중에 노벨 문학상을 타기도 했다.
미국의 GE사의 대표인 잭 웰치(Jack Welch, 1932- )도 어릴 적에 말을 더듬었다. 얼마나 심하게 더듬었는지 식당에서 참치 샌드위치 한 개를 주문하면 종업원은 항상 참치 샌드위치 두 개를 줬다. 영어로 참치를 뜻하는 튜나(tuna)를 잭 웰치는 ‘튜-튜나’라고 더듬어 말했기 때문에, 종업원이 ‘투 튜나(two tuna)'로 알아들다. 하지만 잭 웰치에게는 지혜로운 어머니가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자신의 단점을 장점으로 여기도록 만들었다. 어머니는 잭이 말을 더듬을 때면 그에게 “너는 너무 똑똑하기 때문에 그런 거야. 너처럼 똑똑한 아이의 머리를 너의 혀가 따라 오지 못해서 그런 거야”라고 말해줬다. 말이 좇아오지 못할 만큼 빨리 생각할 수 있는 똑똑한 아이이기 때문에 말을 더듬는 것이라고 격려해 준 것이다. 그런 어머니의 용기를 주는 사랑과 격려 덕분에 잭 웰치는 자신이 말을 더듬는 것을 창피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가정은 서로를 사랑하고 돕는 가장 귀한 동역의 장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세상은 모두가 다 끼리 끼리 모인다. 이렇게 연말이 다가 오면 무슨 동창회, 무슨 동우회, 무슨 동향 모임 등등 다 고향 따라, 출신 학교 따라, 직업 따라 지위 따라, 규모와 신분 따라 모인다. 그러나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니다. 어느 누구나 남자 여자 어른 아이 노인 젊은이 할 것 없이 다 같이 모여서 서로 서로 더불어 하나님의 나라 백성의 사랑과 은혜를 나누며 살아가는 곳이 교회이다. 바울이 실명으로 거론한 유오디아나 순두게나 자세한 설명이 없는 이름 글레멘드는 각 사람 모두 다 빌립보 교회에 충성하고 헌신하고 열심을 다하여 주를 섬겨 온 이들이다. 그래서 바울은 저들을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들이라고 했다.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자들”이라고도 했다. 그렇지 않나. 신앙생활이란 것이 서로 낯설은 이들이 모여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를 이루고 형제자매의 사랑을 나눈다. 교회를 교회되게 하고 신앙생활을 신앙생활답게 하기 위해서 서로 다 같이 멍에를 멘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았나.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30) 그렇다. 농사란 것이 멍에를 멘 소를 앞장세우고 밭을 갈고 논을 갈고 산 허리를 갈아서 오곡백과를 심고 가꾸어 농사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당시 소나 나귀나 말의 잔등에 멍에를 메고 밭을 가는 광경을 관찰하시고 이런 교훈을 말씀하셨을 것이다. 두 마리의 소가 함께 멍에를 같이 메고 밭을 가는 농사법은 어느 나라에나 흔했다. 조선의 대표적인 화가 김홍도의 그림 ‘논갈이’에도 그런 장면이 나온다. 어미 소가 멍에를 메는 것이다. 더불어 같이 멍에를 메고 수고하고 땀을 흘리고 애를 쓰고 섬기다 보면 좋은 결과를 맺게 되는 것은 농사의 원리일 뿐만 아니라 생의 원리가 다 그렇다. 그런 충성된 동역자들을 서로 도우라고 했다.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고 격려가 되고 용기가 되고 위로가 되고 사랑으로 돌 볼 때에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이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있다고 했다. ‘생명책’이란 표현은 주로 요한 계시록에서 대하는 표현이다. 신약 성경 중에서 요한 계시록 이외는 이 곳에 단 한 번 이런 표현이 나온다. 그렇다.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을 ‘나의 면류관’이라고 했을 뿐만 아니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다고 격려했다. 면류관이란 주 안에서 살아 간 자들에게 주어지는 영광스러운 나중 상급을 말씀하는 것이다. 요한 계시록 3장의 사데 교회에 편지한 말씀에 보면 “이기는 자의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와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계3:5)고 하셨다.
요한 계시록 21장 27절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에는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고 했다. 바울이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을 사랑하듯이 주님의 사랑 안에서 영원한 면류관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 생명책에 기록되는 영원한 부활 승리의 주인공 다운 삶을 살아가자.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