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동역자들(빌2:19-30) 2017. 10. 15
세상의 그 어떤 일이든 혼자서 시작하고, 혼자서 성취하는 경우란 거의 없다. 그 어떤 일이든지 그 누군가의 도움을 통해서 이룩되는 것이다.
가령 무인 우주선이든 우주인이 탄 유인 우주선이든 우주선을 우주 공간에 쏘아 올려 소정의 목적을 달성하려면 그 일을 이룩하기 까지 수백 명 아니 수천 명 혹은 그 이상의 천체 우주공학을 전공한 학자들이 밤을 새워가며 연구하여야 한다. 10년 20년 혹은 50년 그 이상 연구에 연구를 계속해서 업적을 이루어 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60년 전인, 1957년 10월 4일에 소련은 '스푸트니크 1호'를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으로 우주 공간에 쏘아 올리는데 성공하였다. 스푸트니크 1호가 발사된 후 소련의 우주비행사 Y. A. 가가린을 궤도에 진입시키기 까지는 4년이 더 걸렸다. 1961년 4월 12일에 있었던 일이다. 그 후 소련과 미국은 서로 앞 다투어 가며 여러 우주선을 계속 발사했다.
1969년 7월 20일 우주비행사 닐 암스트롱과 에드윈, 올드린이 아폴로 11호 달착륙선을 타고 '고요의 바다'(Mare Tranquillitatis)로 알려진 황량한 달 평원에 착륙하여 인간의 직접적인 달 탐사가 시작되었다. 미국의 우주비행사들은 5차례 달 탐사 여행을 했다. 이들은 달의 여러 지역과 지형을 탐사하면서 수천 장의 사진을 촬영했고, 월석과 토양의 많은 표본을 채취했다. 달의 내부구조를 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광범위한 과학적인 실험을 수행했다.
소련은 유인우주선을 달에 착륙시키지는 않았지만 1970년에 로봇 차량인 무인월면차(Lunikhod rover)를 달 표면에 올려놓았고 그 후 계속하여 무인 우주선을 달 표면에 보내 연구를 계속해 왔다.
1958년 7월 29일에 시작된 미국 항공 우주국인 ‘NASA'는 미국 정부가 운영하는 기관이다. “For the Benefit of All”(모두에게 이익을)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전문 직원의 수만 17,500여명이다. 일 년 예산만도 193억 달러이다.
하나님의 사역도 마찬가지다.
모세의 곁에는 여호수아와 같은 젊은 수종자가 있었다. 모세의 출애굽 이후 광야 생활에는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 등의 수 많은 일꾼들이 광야 생활 중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데 쓰임 받았다. 저들은 역할과 보직과 분담이 달랐을 뿐 하나님이 가능하게 하신 출애굽과 광야 생활 중에 모세의 소중한 동역자들이었다. 물론 애굽의 고기 가마와 애굽의 과일과 좋은 먹을거리들을 그리워하며 불평하고 원망하는 무리들도 없지 않았지만 말이다.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해 엔게디의 광야로 막벨라의 동굴로 피신하던 십 수 년의 긴긴 세월 동안 그의 곁에서 머물고 지내길 원하는 사회 부 적응자들 400여명과 동거 동락을 같이 하였다. 나중에 다윗이 왕이 된 후에도 다윗이 통일 왕국의 왕으로 40년간 이스라엘을 통치 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하나님의 크신 은혜요 도우심이었지만 다윗의 탁월한 통일 왕국 이스라엘의 역사를 발전 시켜간 동역자들의 연합의 힘을 빼어 놓을 수 없다.
하나님은 자연을 통해서도 섭리하시지만 사람을 통해서 일하신다.
느헤미야가 52일 만에 예루살렘 성곽 중건 공사를 마칠 수 있었던 것도 마찬가지다. 느헤미야 혼자의 힘으로 이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52일간 옷을 벗지 못하고 한 손에는 연장을 들고 한 손에는 무기를 들고 전쟁하듯 대역사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서 3년간의 사역을 마치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40일 후에 하나님의 곁으로 승천하셨다. 그러나 이 땅에 남겨 진 맛디아를 보충한 12제자와 성령 받은 120여 성도들이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부흥의 불씨가 되었다.
예수를 믿고 따르는 이들과 교회를 핍박하던 살기등등한 사울이 변화 된 후에 사도 바울의 생은 이방 복음 전파를 향한 위대한 전도자의 삶이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신약 성경 27권 중에서 13편의 그를 통한 선교 편지들이 성경에 포함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사도 바울은 성령께 붙잡히고 주님께 사로 잡혀 존귀하게 쓰임 받은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런 사도 바울의 사역이 위대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곁에 그를 돕는 수많은 동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두 주에 이어 오늘 세 번째 묵상하고 있는 빌립보서의 2장 본문에 보면 바울의 훌륭한 동역자들 중의 두 인물인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에 대한 말씀이 나온다. 디모데는 누구이고 에바브로디도는 누구인가. 저들 두 사람 모두 바울이 바울 되기까지 바울을 끔찍이 아끼고 위하고 섬기던 자들이다. 바울 사도의 선교 사역이 위대하고 성공적이고 역사적일 수 있었던 힘은 디모데나 에바브로디도와 같은 수 많은 동역자들의 협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빌립보서를 쓸 당시에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는 신세였다. 오늘 날도 감옥에 갇혀 지내는 일은 힘든 일이다. 그런데 생각하여 보라. 이천 년 전의 감옥 환경이 얼마나 열악하였겠는가. 이제 바울은 나이도 젊지 않고 건강도 예전만 못하다. 그러나 바울의 선교 열정은 식지 않고 있었다.
빌립보서와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를 감옥에서 썼다고 해서 옥중서신이라고 한다. 그 중에 에베소서나 골로새서는 구원에 관한 기독교 교리를 자세하게 풀어 쓰고 있다. 그러나 빌립보서는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의 형편을 헤아리며 마음을 훈훈하게 하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그 특징은 바울은 빌립보서의 4장 분량인 길지 않은 편지에서 ‘나’라는 표현을 무려 52번이나 반복하여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편지들과 다르게 구약의 내용을 전혀 인용하지 않고 있다는 점도 특이하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신을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도 함께 본 받는 자로 살 것을 진심으로 권면하고 있다. 또 하나의 특징은 기쁨의 강조이다. 지금 바울은 감옥 안에 있다. 그런데도 그의 수 없이 반복되는 강조는 기쁘게 살아가라는 것이다. 가령 빌립보서 2장 18절을 보라.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디모데나 에바브로디도는 감옥에 갇혀 있는 사도 바울의 기쁨일 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기쁨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린 자들이었다.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은 정성을 모아서 감옥에 갇혀 지내는 사도 바울을 돕고 후원하는 옥바라지 기금을 에바브로디도 편에 전달하였다. 빌립보서 4장 18절을 잠시 보라.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은 바울을 기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자들이었다.
우리는 대개 빌립보서 4장 13절을 기억한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우리는 이 문장을 불가능을 주 안에서 가능하게 하는 격려의 성경 구절로 많이 기억하고는 한다. 그러나 앞뒤 문장을 연이어 묵상해 보면 그렇게 간단한 표현이 아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었고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은 그런 사도 바울을 진심으로 위했다.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은 늘 바울을 생각했다. 그 생각이 싹이 났고 바울을 돕는 일에 구체적이었다. 빌립보서 4장 14절에 보면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은 사도 바울의 괴로움에 함께 참여한 자들이었다. 주님은 바울의 손을 빌려서 그 일을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빌4:14)고 칭찬해 주었다. 바울을 통해서 세워진 교회들이 적지 않았지만 정작 바울이 감옥에 갇히고 어려움을 겪을 때에 구체적으로 행동하며 바울을 아끼고 돕고 후원하고 바울이 옥중 생활을 잘 감당하고 열방을 넘나드는 사도의 삶을 힘 있게 살아가도록 후원하는 일에 제일 앞장 선 교회가 빌립보 교회였다.
그런 사실을 바울은 빌립보서 4장 후반부에서 언급하고 있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빌4:15-17)
당시에 바울이 감옥에 갇혀 지내는 것처럼 예수사랑교회가 설립되고 이 곳에 터를 마련하고 둥지를 틀고 지난 4년 세월을 지내 오도록 나 자신은 예배당 건물에 갇히고 이 사역에 갇혀 지내왔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마찬가지이고 내일도 또 그런 시간을 가질 것이다. 이것이 개척자의 고뇌요 개척자의 고난이요 개척자의 순간순간이요 개척자의 과정이요 개척자의 우여곡절이요 개척자의 간증이요 개척자들을 통해서 이룩해 나가시는 하나님의 일이 분명하다고 믿는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 디모데나 에바브로디도나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의 옥바라지가 한 번 두 번 계속되어서 힘을 얻고 약한 체력을 버티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한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누군가가 도움이 되고 누군가가 힘이 되고 누군가가 버팀목이 되고 누군가가 하나님이 감동으로 쓰임을 받이 않았다면 갈바를 알지 못하던 우리 회중이 지난 칠년 10개월 동안 여기 까지 나아 올 수 있었겠나.
며칠 전 수요일 밤 예배 시간 한 시간 전에 어느 권사님이 5층 나의 사무실을 방문하였다. 그는 울먹이며 눈시울을 붉히며 나에게 간증하였다. “목사님! 저나 우리 가정이 그래도 매주 주일이 있고 주일 예배가 있어서 여기까지 이기고 버티며 살아 왔습니다.” 이게 무슨 고백인가. 우리는 주일이면 사방팔방의 원근각처에서 이 곳 구파발 한 귀퉁이 북한산 자락에 둥지를 튼 이곳까지 달려 와서 예배를 드리고 각각 집으로 돌아간다.
모세의 광야 생활의 버팀목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건축하게 하신 성막이었다. 성막을 중심으로 12지파의 200여만 백성들이 동서남북에 진을 치고 살았다. 날마다 하나님은 만나를 내려 주셨다. 그 때 그 때마다 반석에서 생수가 터져 나오게 해 주셔서 그 많은 백성들과 그 많은 양과 염소와 육축들이 물을 마시며 살아갔다. 고기 타령할 때마다 바람으로 메추라기를 몰아다 주셔서 고기를 먹게 하셨다.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작열하는 햇볕을 가려 주셨다. 추워지고 어두워지는 밤에는 불기둥으로 저들의 가는 길을 밝혀 주셨다.
우리가 고백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누구신가.
요즘 날마다의 묵상 분량으로 읽는 이사야서에 보면 남 왕국 유다의 히스기야 임금의 때에 앗수르의 산헤립 왕이 보낸 랍사게 장군과 앗수르 군대가 유다 성읍 46곳을 이미 점령하고 남아 있는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였다.
앗수르의 산헤립은 온갖 말을 동원해서 하나님을 조롱하고 우롱하고 비난하였다. “너희가 믿는 여호와 신앙으로 잘 된 것이 뭐 있느냐”고 조롱하였다. “너희가 부르고 믿는 여호와가 너희를 내 손에서 건지고 보호할 수 있느냐”고 우롱하였다.
히스기야 임금은 왕복을 벗고 베옷을 갈아입고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엎드려서 선전 포고문을 펼쳐 놓고 기도하였다. 대신들도 줄줄이 굵은 베옷을 갈아입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셨다.
이사야서의 오늘 묵상 분량인 37장 21절부터 38절까지에 보면 하나님이 이기게 하신 전쟁의 역사가 나온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임금 히스기야와 대신들과 방백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천사를 동원하셔서 185000명의 앗수르의 군대를 치셔서 시체가 되게 하셨다.(사37:36) 기도하여 승리하게 하신 역사적인 전쟁 승리의 장면이 오늘 묵상 분량인 이사야 37장이다.
하나님은 죽은 신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교회의 장로님, 권사님들은 거의 다 아시는 대로 우리는 지난 몇 주 동안 교회의 기도제목을 갖고 기도해 왔다. 그런데 지난 월요일 낮에 우리 교회에 등록하고 다니신지 일 년 2개월쯤 되신 부부 집사님 가정이 은평뉴타운 안에 있는 시가 4억 상당의 상가를 우리교회의 선교 센터로 기증하시는 의사를 전해 왔다.
저들 부부는 이미 30 대 초반의 젊은 시절부터 섬기던 교회의 예배당 건축에 살던 집을 담보하며 앞장서서 헌신할 정도로 주님의 선한 사역에 본을 보인 가정이었다. 그 당시에 어린이였던 아들 딸 남매는 모두 명문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자랑스러운 의사로 활동하고 있다. 의사인 아들과 간호사인 며느리, 의사인 딸과 의사인 사위! 저들 부부는 간증하고 고백하였다. “모든 것이 감사한 것뿐입니다. 모든 것이 주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저희 가정에 복을 많이 내려 주셨습니다.”
윤병한 권사 김숙희 집사님 가정의 6억 상당의 밭을 팔아 고스란히 바나바처럼 교회에 헌신 하신 바가 오래지 않다. 하나님은 올 해가 다 가기 전에 또 다시 새로운 가정을 통해서 4억 상당의 헌신을 하게 하셨다. 생각해 보라. 있다고 드릴 수 있나 가졌다고 드릴 수 있나. 하나님의 감동과 은혜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사도행전 4장의 바나바가 그런 인물이었다. 그러나 사도행전 5장의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소유를 팔아 헌신 하고도 사도 베드로 앞에서 남편과 아내가 차례대로 죽어 실려 나가지 않았나. 왜 그랬을까. 사도행전을 읽다가 보면 5장 2절에 소유를 판 값 중에서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고 했다.
재산을 봉헌하는 일은 부부 중에 남편이나 아내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부부가 서로 뜻이 하나로 통하고 맞아야 가능한 일이다. 한쪽에서라도 반대하고 아니라고 하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번에도 남편과 아내 부부 집사님의 마음을 골고루 감동하게 하셔서 이런 헌신을 하게 하신 것이다.
우리는 은평뉴타운 한 가운데 있는 그 곳이 미션 센터가 되어 그야말로 전도와 선교의 중심축을 이루는 장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오늘 이 자리에서 이름을 밝히기를 조심스러워 하는 저들 부부의 믿음을 주께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의 믿음처럼 점점 존귀하게 하시고 복되게 해 주시길 축복한다.
본문을 잠시 보자. 바울의 동역자들
사정을 알고 진실히 생각하는 자.
우리가 잘 아는 디모데는 바울에게 있어서 어떤 존재였나. 빌립보서 2장 19-20절에 보면,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의 사정을 잘 알고 안위를 나눌만한 인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디모데는 사도 바울과 뜻을 같이 하는 선교의 사람이었다. 20절의, “뜻을 같이 하여”라는 말은 같은 마음과 일치된 심령으로 매사를 감당해 나갔던 동역자임을 말하는 것이다. 바울과 디모데는 아버지와 아들과 같은 관계였다. 실제 나이차이도 그랬다. 젊은 디모데는 연세 들어가는 바울에게 자식이 아버지에게 하는 것처럼 대하였다. 22절에 그런 내용이 나오지 않나.
디모데는 그 어느 누구도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뛰어나게 충성된 인물이었다. 바울에게 있어서 디모데는 그림자와 같은 인물이었다. 모세 곁에 여호수아가 그랬다. 다윗 곁에서 요나단이 그랬다. 예수님의 곁에서 베드로는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지만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12제자들 중에 베드로 만한 인물이 없었다.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이후에 성령 받은 초대 교회의 부흥기의 중심에는 사도 베드로가 있었다.
나는 우리교회의 성도들인 어른 젊은이 어린 아이 할 것 없이 누구나 다 그런 존귀한 인물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역사의 현장에 구경꾼이 아니나 주인공으로 살아가고 섬겨 나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몇 주 전에 여의도 한강 변에서 불꽃놀이 축제가 있었다. 우리는 불 꽃 놀이를 구경하는 구경꾼이 아니라 나 자신이 이 시대에 불꽃과 같은 삶을 살아가야 한다.
올해 우리는 강단에 예배 절기 초에 불을 밝힌다. 이 녹새 초는 11월 말 추수 감사 절기 까지 계속될 것이다. 성탄절을 맞이하는 강림절 4주간 동안은 보라색 촛불이 예배당을 밝힐 것이다. 초는 불꽃이 타 올라 점점 녹아 없어진다. 녹아짐으로 어둠을 밝히는 것이다.
지난주에 무슨 책을 읽다가 그런 표현을 보았다. 소금은 녹기 전에는 형태가 있다. 그러나 소금이 녹고 나면 눈에 보이지 않는다. 배추를 절일 때 한 움큼씩의 소금을 뿌린다. 뿌릴 때는 소금 알맹이가 보이지만 그 소금이 배추 잎에 모세관을 따라 녹아 삼투압 되어 흡수되고 나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소금이 녹으므로 맛을 내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그런 소금의 원리를 아시고 우리들에게 산상 수훈에서 교훈해 주신 것이다. 마태복음 5장 13절에 소금이 맛을 내려면 녹아 없어져야 한다. 성도는 세상의 소금이다. 교회의 소금이요 사역의 소금이요 가정의 소금이요 하루 하루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소금이 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인 그런 인물이었고 디모데나 에바브로디도가 그런 인물이었다. 저들은 쇼윈도 안에 갇혀 있는 마네킹 같은 인생이 아니었다. 저들은 폭풍(暴風) 한설(寒雪) 몰아치는 세파의 중심에서 복음을 들고 열방을 향해 나아가고 때로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때로 매도 맞았다. 수고 하고 애쓰고 여러 번 잠을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는 날들을 견디고 이겨 내야 했다.
신앙으로 산다고 해서 누구나 다 디모데와 같고 에바브로디도와 같은 것은 아니었다. 바울은 그런 모습을 빌립보서 2장 21절에서 언급하고 있다.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이것이 무슨 말씀인가. 다 주여 주여 하는 것 같지만 정작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하자고 하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뿔뿔이 흩어질 뿐 누구나 다 시간 바쳐, 재물 바쳐, 은사 바쳐, 생명 바쳐 주님의 일에 충성하고 헌신하는 게 아니더란 말이다.
그 당시나 오늘 날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아무리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고 아무리 곡을 하여도 따라 울지 못하는 이들은 어디나 있다. 함께 춤추지 못하고 함께 울지 못하는 이들로 인해서 속상해 보아야 아무 소용없다. 반대로 피리 불 때 함께 춤을 추는 몇몇 사람, 내가 울 때에 함께 울어 주는 그 몇몇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복음이 전파되어 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약한 자를 들어서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신다. 어리석은 자들을 통해서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의 지혜와 다르다. 하나님의 계산법은 인간의 계산법과 다르다. 하나님은 필요하시면 칼과 창과 활을 동원하지 않으시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기적을 체험하게 해 주시지 않았나.
하나님이 하시면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는 없다. 바울이 그런 사람이었고 사도 바울 곁의 디모데가 그런 인물이었다. 빌립보서 2장 20절에 보면 바울은 디모데를 그렇게 인정하고 있다.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우리도 하나님의 나라 사역에 디모데처럼 이럼 모습으로 쓰임 받는 각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복음을 위하여 함께 수고하는 자.
디모데나 에바브로디도의 특징은 사도 바울의 곁에서 함께 수고한 복음의 동역자들이었다. 동고동락이란 말이 있지 않나. 그렇다. 신앙생활이란 그래야 한다. 새로운 꿈의 공동체라는 표현은 우리 회중이 출범하던 초기에 주님이 나의 마음에 갖게 하신 생각이다. 그러므로 사실 우리교회 이름은 그냥 “예수사랑교회” 아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려면 “새로운 꿈의 공동체 예수사랑교회”라고 해야 맞다. 더 정확하게 하려면 “새로운 꿈의 공동체 기독교 대한 감리회 예수사랑교회”이다.
우리는 밤나무와 상수리 나무의 베임 받은 곳의 구루터기와 같은 공동체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은 남은 자들을 통하여 역사를 새롭게 써 가신다. 우리의 첫 해가 그랬고 한 해 한 해가 그랬다. 복중에 잉태된 생명, 태어나 품 안에서 잠 자던 어린 아기가 커서 소년 소녀가 되고 청년이 되고 열방을 넘나드는 장년이 되는 것 아닌가.
우리 그런 교회, 그런 공동체, 그런 만족이 있는 성도들의 연합을 이루어 가자. 바울 곁의 디모데나 에바브로디도는 복음을 위하여 함께 형제되고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로 연합하여 살아갔다. 여기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처럼 위대하거나 디모데처럼 대단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의 이름의 뜻은 ‘매력적인’이란 의미이다. 그는 그 이름처럼 평범한 듯 하지만 그를 파송한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을 대신해서 진심으로 로마 감옥에 갇혀 있던 바울을 찾아 갔다.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은 정성으로 사도 바울 후원금을 모어서 에바브로디보 편에 전달하였다. 그 옥바라지 기금을 받아 들고 사도 바울이 감격해 한 것이다. 그래서 4장에서 그런 편지를 쓰게 되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4:11-12)
사도 바울의 마음에는 언제나 교회 중심, 그리스도 예수 중심, 하나님 중심, 복음 중심의 신앙으로 꽉 차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 대해서도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고 칭찬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칭찬하면서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라고 극찬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희생하는 자.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회를 출발해서 로마를 방문하고 로마 감옥의 바울을 만나고 바울을 섬기고 바울 곁에 얼마간 머물면서 바울을 대하는 동안에 병에 들었다. 성경은 그의 병명을 자세히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27절에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라는 표현을 보면 중병에 걸려 죽음의 위기를 넘겼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긍휼히 여겨 주시고 불쌍히 여겨 주셔서 살려 주셨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회를 대표하여 바울에게 보냄 받을 정도로 성도들의 신임이 두터운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이 병에 들어 형편이 어려워지지 자신이 병든 것으로 인해 자신을 염려할 빌립보교회의 성도들로 인하여 오히려 마음에 근심을 갖던 마음이 세심하고 신중하고 심성이 깊고 남을 진심으로 배려할 줄 아는 덕스러운 성품의 소유자였다.
29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고 권면하였다. 디모데나 에바브로디도는 주 안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을 만한 믿음과 인격과 성품을 지닌 인물들이었다.
에바브로디도가 죽을 병에 걸림으로 바울도 근심했고 그가 병에 들었다는 소식을 접한 빌립보교회의 성도들도 근심이 되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고침을 받고 새롭게 건강을 회복한 그를 빌립보교회에 서둘러 급히 돌아가도록 돌려 보내면서 감옥 안에서 써서 그의 손에 들려 보낸 편지가 빌립보서이다. 26-29절까지의 말씀에 보면 그런 바울의 심정과 에바브로디도의 신중한 태도가 절절이 뭍어 난다. 바울이 대단한 인물이었지만 에바브로디도 또한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속한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을 진심으로 사모하고 다시 만나길 원했다. 자신이 병에 든 소식으로 인해서 걱정하고 염려하고 근심하게 될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을 배려하는 그의 마음이 구절마다 배어난다. 바울, 디모데, 에바브로디도! 저들은 모두가 주 안에서 복음을 위하여 희생적인 삶을 살았던 위대한 복음의 동역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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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그런 성도들로 연합하자. 우리 그런 교회로 세워가자. 우리 모두 각 사람이 어른, 청년, 어린이 할 것 없이 누구나 다 그런 주의 거룩한 복음 전파 사역에 동참하는 동역자다운 동역자들답게 존귀하게 쓰임 받으며 살아가자.
바울인 편지 안에서 근심과 기쁨 이란 단어를 교차하며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근심이 변하게 기쁨이 되게 해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시다.
370장 찬송을 펼쳐 보라. 그 시작이 무엇인가.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주님만 따라가리.
그 두려움이 변하여내 기도 되었네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되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주님만 따라가리
내 주는 자비하셔서 늘 함께 계시고내 궁핍함을 아시고 늘 채워주시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내 주와 맺은 언약은영 불변하시니 그 나라 가기까지는 늘 보호하시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주님께서 우리들의 나아가는 길에 복을 주시고 은혜와 평강을 더하실 줄로 믿는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