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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베드로를 돌이켜 보신 주님(눅22:54-62) 2017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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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7-04-09 21:08 조회 18,495 댓글 0
 
베드로를 돌이켜 보신 주님(눅22:54-62)        2017. 4. 9  종려주일


오늘은 예수께서 호산나 찬미 가운데 새끼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평화의 왕으로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종려 주일이다. “호산나”는 “나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이다. 오늘부터 다음 주일인 부활주일을 맞기까지의 이 한 주간을 고난(苦難) 주간 혹은 수난(受難) 주간이라고 한다. 이 기간은 기도와 말씀과 금식과 복음 전파와 선행 가운데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지내는 때이다.  

사도행전을 통해서 우리가 만나는 성령을 받은 베드로 사도의 나중 행적은 위대하다. 베드로는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나중에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당한 사도이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승천하신 이후에 마가의 다락방에 함께 모여 기도하던 120명 중의 한 사람이었다. 예수의 제자였던 사도 베드로! 그는 기도하던 중에 성령을 받았다. 더불어 같이 성령 받은 120명의 성도들 가운데서 베드로가 앞장서서 체험과 믿음을 증거 하였다.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성령 받은 이후의 베드로의 설교는 성령의 불이 주변으로 번져 가게 하는 큰 동력이 되었다. 그 때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이들이 3천명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대단하게 쓰임 받던 베드로의 과거를 더듬어 보면 베드로에게도 나약한 모습이 없지 않았다. 결정적인 순간에 너무나 나약하고 비겁하고 부족한 속내를 다 드러내고 말았다. 유월절 만찬을 마치고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겨 주신 예수께서는 그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 가셔서 밤새도로 기도하셨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새벽에 가롯 유다에게 배반 받고 붙잡혀 끌려 가셨다. 베드로는 예수를 붙잡으러 온 대 제사장들과 칼과 몽치를 든 성전 경비대장들과 장로들 앞에서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오른쪽 귀를 칼로 쳐서 잘라 버렸다. 예수께서는 말고의 잘려 나간 귀를 주워서 제 자리에 붙여 주셨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요18:11) 

새벽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칼을 뽑아 휘두르며 꽤나 의협심이 있는 자처럼 행동하던 베드로였다. 그러나 예수가 끌려가신 대 제사장 가야바의 집 뜰에서 비겁해졌고 나약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시간에 베드로 이외의 모든 제자들은 이미 다 뿔뿔이 흩여져 버린 후였다. 그나마 베드로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 뜰로 끌려가시는  예수의 뒤를 멀찍이 뒤 따라 가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이미 사탄이 밀 까부르듯이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을 시험할 순간이 다가 오고 있다고 경고하신 바 있다. 주님의 그런 말씀을 듣고 있던 베드로는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눅22:33)라고 큰 소리 친 적이 있다. 그렇게 장담하던 베드로인데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고난의 날 아침에 무너져 버렸다.

우린 베드로의 모습에서 반면교사의 교훈을 받게 된다. 누구라도 자신의 믿음을 자랑하면 안 된다. 교만해서도 안 된다. 시편 147편 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들은 붙드시고 악인들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도다.”라고 하였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행동보다 말이 먼저 앞서면 안 된다. 

종려 주일인 2천 년 전의 오늘, 예수께서는 평화의 왕으로 새끼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예수께서는 죽임 당하시던 날 새벽녘에 붙잡히셨고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 끌려 가셔서 심문을 받으셨다. 빌라도의 법정으로 끌려가신 예수는 강도인 바라바를 놓아 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무리들의 고함 소리 가운데 사형 언도를 받으셨다. 

본문은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 안으로 끌려들어 가신 예수와 그 뒤를 따라 간 베드로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신앙생활을 하여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도전을 받게 하는 말씀이다. 


예수를 멀찍이 따라가던 베드로.
예수의 총애를 받던 베드로인데 주님이 가야바의 뜰에서 심문을 받기 시작하시는 그 아침에 베드로는 예수를 멀찍이 따라가고 있었다. 가롯 유다의 배반의 입맞춤과 함께 예수는 칼과 몽치로 무장한 자들에게 붙잡히셨다. 마가복음 14장 50절에 보면,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고 하였다. 그나마 베드로는 붙잡혀 끌려가시는 예수의 뒤를 멀찍이 따라가고 있었다. 베드로의 마음속에 자기 자신도 붙잡혀 끌려가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운 생각과 이미 홀로 붙잡혀 끌려가시는 예수의 앞일에 대한 불안과 염려가 컸을 것이다. 결국 베드로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사태를 지켜 볼 생각으로 멀찍이 뒤 따라 갔을 것이다. 

그나마 도망가 버린 다른 제자들에 비하면 베드로의 행동이 다르긴 다르다. 그러나 평소에 예수를 위해서라면 감옥에라도 가고 죽는 길이라도 피하지 않겠다고 큰소리치던 베드로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오늘 날 우리들은 어떤가. 평소에 말하는 것만 가지고는 모른다. 정작 위기를 만났을 때에 행동하는 것을 보아야 알 수 있다. 주님의 몸된 교회의 사역을 하다 보면 매 순간마다의 위기 앞에서 성도 각 사람의 믿음의 분량의 진면모가 들어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이 시간 우리 각 사람은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스스로 대답해 보아야 할 것이다. 

나와 예수님과의 거리는 어느 정도인가. 나와 주님의 몸 된 교회와의 거리는 어느 정도인가. 역사는 말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행동하는 믿음에 의해서 역사는 변화되어 가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역사로 하면 도산 안창호, 칠응 안중근, 매헌 윤봉길, 백범 김구, 월남 이상재, 남강 이승훈 등과 매국노 이완용의 이름이 다른 점은 무엇인가. 주기철, 손양원, 전덕기 목사들의 이름이 역사에 계속하여 거론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역사의 위기 앞에 옳게, 바르게, 용감하게, 믿음의 사람답게 행동하지 않았다면 어찌 저들의 이름이 우리에게 기억될까. 독일 교회의 마틴 루터나 본 훼퍼, 체코슬로바키아의 얀 후스, 스코틀랜드의 잔 낙스, 미국 교회의 잔 에드워드를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의 아우 야고보는 야고보서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7)고 하였다. 평소에는 그 사람의 믿음의 진가를 알 수가 없다. 위기를 당하였을 때에 순간적으로 판단하고 처신하는 모습이 그 사람의 됨됨이며 믿음의 분량인 것이다. 

만약에 베드로가 칼을 뽑아 들고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치던 모습처럼 예수가 붙잡혀 끌려 갈 때에 “야 이 대 제사장들과 성전의 경비대장들아 나의 선생님을 붙잡아 끌고 가려면 차라리 나를 붙잡아 끌고 가라.” “나의 주님 예수를 잡아 가지 말고 나를 잡아다 죽여라.”하고 달려들었다면 그 날 베드로는 어떻게 되었을까.  

신앙생활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까이 하는 생활이다. 아니 가까이 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분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생활이다. 그러므로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생활이어야 한다. 

여호수아 23장 8절에 보면 여호수아의 유언이 나온다. 여호수아는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가까이 하기를 오늘까지 행한 것 같이 하라.”고 하였다. 그렇다. 신앙  생활이 무엇인가. 여호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생활이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친구와 같이 여기셨다. 늘 묵상하지만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 다윗,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엘리야, 엘리사 모두 다 여호와 하나님을 가까이 한 믿음의 선조들이 아닌가. 

예수가 끌려가시는 그 시간 멀찍이서 따라가던 비겁했던 베드로가 나중에 사도행전 역사의 중심에 서서 쓰임 받는 사도가 되고 전도자가 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믿음으로 재무장하고 성령 충만을 받은 열매가 아닌가. 이렇게 비겁하게 행동하던 베드로가 나중에 성령 받고 담대한 복음 전도자가 되었다. 성령 받은 후에도 날마다 시간 마다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였다. 그 성전 미문 앞에는 걷지 못하는 사람을 사람들이 메어다 놓으면 거기 앉아 구걸하고는 하였다. 그런데 하루는 그 거지를 향해서 선포하였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렇게 말하고 그의 오른 손을 잡아 일으켰는데 그가 일어나 걷고 뛰고 성전 안에 들어가 하나님을 찬미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베드로와 요한은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이들과 서기관들이 주목 하는 인물이 되었다. 베드로와 요한과 사도들은 열심히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였다. 제사장들과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은 사도들이 전하는 예수 부활의 복음이 싫어하면서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을 붙잡아서 감옥에 가두었다. 다음 날 대 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대 제사장의 문중이 일제히 다 모였다. 저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비롯한 사도들을 위협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협박하였다. 그 때에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였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4:19-20)

이렇게 비겁하게 행동하던 베드로가 어떻게 해서 이처럼 담대한 복음 전도자로 변모할 수 있었을까. 성령 받아야 한다. 은혜 받아야 한다. 성령을 멀리하고 주님을 멀리하고 쓰임 받은 성경의 인물과 기독교 이천년 역사의 인물이란 없다. 내가 주를 멀찍이 대하면 주께서도 나를 멀찍이 대하실 것이다. 내가 주를 가까이 하면 주께서도 나를 가까이 대해 주실 것이다. 


예수를 부인한 베드로.
오늘 날, 국가적인 격동기에 그 동안 나라 살림을 맡아 하던 이들 중에서 자신의 지난날을 ‘모르쇠’로 일관하는 이들을 보라. 저들로 인해서 온 국민들이 실망하고 있지 않나. 예수께서는 3년 밤낮으로 제자로 불러서 대하였던 베드로에게서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게 되었다. 베드로가 누군가. 예수께서는 공생애 기간 내내 매사에 언제 어디서는 베드로를 앞장 세우셨다. 변화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변형되시고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하시던 그 날, 그 곳에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셨다. 거기 함께 동행 하신 세 제자 중에 베드로가 빠지질 않았다. 마태복음 16장에서 대하는 대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Who do you say I am?)는 질문 앞에 베드로가 나서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하였다. 예수께서는 감동 받으셨고 베드로에게 마음껏 축복하는 말씀을 해 주셨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7-19)

그런 대단한 칭찬과 축복의 말씀을 들은 베드로인데 지금 여기 대제사장 가야바의 뜰에서 왜 이 모양인가. 누가복음에는 부인하였고 했지만 마태복음 26장의 같은 본문을 다룬 내용에 보면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하였다. 마태복음은 누가복음의 본문보다 훨씬 자세하다. 베드로는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노라.”,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고 단호하게 부인하였다.  한 여종과 또 다른 여종과 또 다른 곁에 섰던 사람 앞에서 부인하고 맹세하며 부인하고 저주하며 맹세하였다. 가야바의 바깥뜰에서 불 쪼이고 있던 베드로를 알아 본 여자 종이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고 물었는데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예수를 ‘그 사람’이라고 말하던 그 순간의 베드로의 비겁한 태도를 상상해 보라. 이와 같이 신앙이 무너져 가는 점진적인 과정은 마치도 수렁에 깊이깊이 빠져들어 가는 모습과도 같다. 

오늘 날 나는 다른가. 결정적인 순간에 이렇게 비겁하게 말하고 치졸하게 행동하고 불신앙으로 처세하는 모습이 나에게는 없는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매 순간 예수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고 시인하는 생활이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마10:32-33)고 가르쳐 주셨다. 

어제 구파발 역에 가서 전도하였다. 전도를 마치고 돌아오려는데 다른 입구에서 신천지 책자를 쌓아 놓고 포교하는 신천지 청년 자매 3명과 남자 청년 한 명을 보았다.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한창 젊은이들이 어떻게 하다가 저렇게 되었을까.

우리 교회의 청년들과 어른, 어린이들은 누구나 모두가 다 어리석은 이단이나 사이비에 단 한 명도 빠져들지 않기를 바란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담대하게 시인하는 믿음의 용사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소원한다.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한 베드로.
베드로가 세 번이나 반복하여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고 맹세하며 저주하며 부인할 때에 곧 닭이 울었다. 예수께서는 그 순간에 고개를 돌이켜서 자신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베드로를 바라다 보셨다.  그 순간을 그린 그림 한 장을 보자.
 
베드로는 그 순간에 예전에 주께서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눅22:61)는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큰 소리를 통곡하였다. 회개하는 울음과 통곡은 감상적인 눈물과 다른 것이다. 자기 설움, 자기감정에 못 이겨서 우는 울음이나 통곡을 회개라고 할 수는 없다. 자기 탄식도 진정한 회개와는 거리가 멀다. 베드로는 이 날 이렇게 부끄러운 경험을 하고 통곡을 하고도 금방 쉽게 그의 불신앙적인 태도를 바꾸지는 못하였다. 더군다나 닭 우는 소리와 심문 받으시던 예수께서 자기를 바라다보시는 경험을 하고도 여전히 그 날 예수의 곁을 떠났다. 결국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포함한 모든 제자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도망가 버린 상태에서 홀로 외롭고 처절하게 십자가를 지셔야만 했다. 어머니 마리아와 이모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와 갈릴리에서 올라온 여인들만이 울며 슬퍼하며 예수의 뒤를 따랐을 뿐이다. 

예수께서 골고다 언덕까지 끌려 가셔서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시던 그 시간에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도망가서 한 곳에 숨어 있었다. 삼일 후 새벽에 예수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에 갔다가 알게 되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찾아가서 전하였다. 누가복음 24장 12절에 보면 베드로는 그 새벽에 예수께서 부활하신 빈 무덤에까지 달려가서 들여 다 보고 확인하였다. 그날 밤에도 여전히 제자들은 한 곳에 숨어 있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엠마오로 가던 글로바라 이름 하는 제자와 또 다른 한 제자와 함께 걸어가시며 자신의 고난과 부활에 다하여 이야기를 나누셨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는 저들의 눈을 가리셔서 자신을 몰라보게 하셨다. 저녁에 엠마오에 도착하신 예수께서는 가시던 길을 더 가시려고 하였다. 그러나 글로바와 또 다른 제자는 예수를 집으로 초대하고 함께 식탁에 앉았다. 음식을 함께 먹기 전에 예수께서 감사 기도를 드리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 때 그들의 눈이 밝아졌고 예수이신 줄을 알아보게 되었다. 그 순간 예수께서는 그 자리를 떠나셨고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글로바와 다른 제자는 그 밤으로 예루살렘으로 다시 올라 갔다. 그리고는 열 한 제자들이 숨어 있는 곳을 찾아 갔다. 그리고 그 날 오후에 있었던 자초지종을 자세하게 전달하였다. 그 시간에 예수께서 그 자리에 나타나셨다. 제자들은 놀라워하고 무서워하며 그들 앞에 보이시는 예수가 부활하신 예수가 아니고 영이신가 하고 생각하였다. 그 때 예수께서는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하고 축복하셨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손과 발의 못 자국을 보여 주셨다. 그리고 먹을 것이 있으면 좀 달라고 하셨다. 제자들이 구운 생선을 한 토막 드리자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받아 잡수셨다. 

그  후에 베드로를 비롯한 일곱 명의 어부 출신 제자들은 그물을 챙겨 가지고 갈릴리에 가서 물고기를 잡으려 하였다. 베드로, 도마, 나다니엘,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다른 두 제자들이 같이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 날 밤 새벽녘이 되도록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하였다. 요한복음 21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 시간에 갈릴리 해변에 찾아 가셨다. 멀리 해변에 서 계신 예수를 제자들은 알아보지 못하였다. 예수는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고 말을 건네셨다. 제자들은 “없습니다.”하고 대답하면서도 그들에게 말을 건네는 분이 예수신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예수의 말씀대로 그물을 던졌고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물고기를 잡았다. 그 때에 요한은 자기들에게 말을 건넨 분인 부활하신 예수님이신 것을 알게 되었다. 요한이 “주님이시다.”하고 말하자 베드로는 옷을 벗고 물고기를 잡다 말고 겉옷을 두른 채로 물속에 뛰어 들었다. 

그 날 새벽, 예수께서는 갈릴리 해변에 숯불을 지펴 놓으시고 떡과 생선을 구워서 제자들에게 먹게 하셨다. 예수는 조반을 먹은 후에 특별히 베드로와 대화하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런 대화가 세 번 반복되었다. 예수께서는 “내 어린 양을 먹이라.”, “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반복되는 분부를 세 번이나 하셨다. 

베드로가 주님을 멀찍이 따라 가고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며 닭 우는 소리를 듣고서야 통곡하며 울던 그날, 예수께서는 홀로 붙잡혀 그렇게 고난을 당하시고 옷을 벗겨 제비 뽑는 무리들 가운데서 온갖 조롱을 다 당하셔야 했다. 예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을 치고, 손바닥을 얼굴을 때리는 조롱을 다  당하셔야만 했다. 얼마나 채찍에 맞고 또 맞으셨는지 거반 죽은 상태가 되었다. 머리에는 가시관을 씌웠고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넘어지고 쓰러지며 채찍에 맞고 또 맞으셨다. 끌려 나온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대신 져다 주지 않았다면 이미 예수의 힘으로는 더 이상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갈 힘이 없었다. 

예수의 잔등과 얼굴과 온 몸은 피투성이가 되고  살점을 찍어 내는 무서운 채찍질이 사정없이 계속되었다. 그렇게 예수께서는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려 처절하게 못 박혀 죽으셨다. 그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제자다운 제자로, 사도다운 사도로, 부활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자다운 전도자로 회복하여 쓰셨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충만한 성령을 부어 주셔서 그를 존귀하고 위대한 초대교회의 복음 전파자가 되게 하셨다. 베드로는  “쿠오바디스”의 내용처럼 로마에서 복음을 전파하다가 붙잡혀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하였다. 

베드로! 성령 받은 베드로는 더 이상 예수를 멀찍이 따라가는 나약한 베드로가 아니었다. 베드로! 성령 받은 베드로는 이제 더 이상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는 그런 비겁한 베드로가 아니었다. 성령 받은 베드로는 더 이상 통곡하지 않았다. 그는 담대해 졌고 그는 가는 곳 마다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을 담대하게 전파하는 권능 있는 전도자의 모범이 되었다. 

일주일이 지나면 부활 주일이다. 예수 부활의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자의 삶을 살자. 이 세상에 나아가서 무슨 일을 하든지 예수 부활을 전파하는 우리 모두가 되자. 학생은 학생대로 어른은 어른대로 남자 여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예수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담대한 전도자가 되자. 

우리 주님은 더 이상 무덤에 누워 계신 주님이 아니시다. 

“살아 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길 인도 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 하네”

이와 같은 찬송과 신앙 고백과 복음 전파의 담력이 충만한 전도자의 삶을 살아가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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