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신앙(Ⅴ)(마28:16-20) 2018. 4. 29
친구 목사의 딸이 어려 해 전에 한동대학교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후에 워싱턴 DC에 있는 웨슬리 신학대학원에 신학을 공부하려고 유학을 갔다. 거기서 장로 아들인 유학생을 만나서 사귀고 결혼하였다. 신랑은 한국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그 곳에 유학 간 청년(김희락)이었다. 두 딸을 낳았는데 첫 딸의 이름이 ‘김아나’라고 했다. “‘아나’가 무슨 뜻인데”라고 할아버지가 된 친구 목사에게 물었더니‘부활’이란 뜻의 헬라어인 ‘아나스타시스’에서 따 왔다고 했다.
맞다. 우리말 성경에‘부활’ 로 번역된 성경의 헬라어 단어는 ‘아나스타시스’ (ἀνάστασις)이다. ‘다시 일어서기, 죽음에서 부활, 자리에서 일어남, 죽음에서 일어남,’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동사형인 ‘아니스테미’(ἀνίστημι)는 ‘다시 일어나다, 똑바로 서다, 죽음에서 일으키다, 나아가다, 자리에서 일어나다, 들어 올리다’는 뜻이다.‘한 가운데로, 중앙에,’의 뜻을 가진 ‘아나’(ἀνά)와 ‘서다, 이룩하다, 두다, 세우다, 옆이나 가까이 서다, 확고한 마음을 가지다, 권리를 포기하지 않다’ 의 뜻을 가진 ‘히스테미’(ἵστημι)의 합성어에서 유래된 단어이다.
그렇다. 부활은 성경이 선포하는 모든 진리의 말씀 한 가운데 우뚝 선 영원하고 확고하고 변하지 않는 분명한 진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이 땅에 기독교는 전파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교회도 존재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예수의 12제자들 중에서 가롯 유다는 주께서 유월절 만찬을 행하시던 식사장소를 떠난 후로 주님을 배반한 자의 불행한 마지막을 맞고 말았다. 그 후로 새로운 제자 맛디아를 충원하여 열둘을 채우기 이전 까지 예수의 제자는 11명이었다. 본문은 한 제자의 수가 줄어들고 11제자가 남은 상황을 기록해 두고 있다.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이 어느 산인지에 대하여는 의견이 분분할 뿐 분명하게 어느 산인지는 알 길이 없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계신 동안에 늘 산을 가까이 하셨다. 모세가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가령 마태복음 5장 1절에 보면 예수께서 교훈하신 5-7장까지의 함축된 교훈들이 산 위에 올라가 앉으셔서 하신 교훈이다. 그래서 ‘산상수훈’(山上垂訓)이라고 하지 않나. 마태복음 8장 1절에는 산에서 내려오시는 예수의 모습에 대하여 기록하였다. 마태복음 17장 1절에는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산에 오르셨던 ‘변화산’체험의 내용을 대하게 된다. 마태복음 24장에는 감람산에 올라가서 앉으신 예수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그 때에 그의 곁에 제자들이 조용히 다가가서 여쭈었다. ‘성전의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지는 날이 올 것’이라고 말씀하신 내용에 대하여 질문하였다.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을 것이며 주님이 임하시는 세상 끝 날에는 무슨 징조가 있을 것입니까”유월절 만찬을 마치신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밤을 새워 기도하기 위하여 가셨던 곳도 감람산이었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산에 올라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시기도 하셨고, 산에 올라 기도하시기도 하셨다.
우리가 아는 대로 예수께서 지정하신 산에서 부활 하신 예수를 뵌 것이 제자들에게 처음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곳에서 제자들은 예수께 경배하였다. 예수께 ‘경배’(敬拜)하였다는 표현은 마태복음에 여기 단 한 번 나온다. 헬라어 ‘프로스쿠네오’(προσκυνέω)는‘경외심을 갖고 엎드려 절하다’는 뜻이다. 이 단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수의 부활 이후에 비로소 제자들이 예수를 왕으로 경배한 것이다. 여기‘경배’라는 이 단어는 ‘왕에게 절한다’는 의미이다. 그 동안 대개의 제자들은 예수를 선생을 의미하는‘랍비’라고 부르고는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를 향하여 경배하게 된 것이다. 이는 고난당하시고 죽임 당하셨으나 부활하신 예수는 왕이신 그리스도이시며 메시아이시고 참 하나님이시며 참 구주이신 것을 시인하는 경건한 행위이다.
제자들이 나서서 예수께 경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의심은 부활 이후의 예수의 모습의 성스러움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이전의 모습과 너무나 달랐기 때문일 수도 있으나 예수의 부활을 체험한 수많은 무리들 즉 500여 형제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 중에서 예수의 부활을 의심하는 자들이 없지 않았음을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權勢)를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는 창세 이전부터 하나님의 본체(本體)이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는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한 권세이셨다. 그런 주께서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리고 고난을 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셨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사흘 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심으로 예수의 권세는 죄와 사망으로 이길 수 없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권세이심을 온 천하에 공포하신 것이다.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는 예수의 말씀은 이전에는 없던 권세인데 지금은 아버지께서 주셨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예수 안에 있는 권세는 이미 아버지 안에서 함께 부여 받은 권세이셨다. 예수의 권세는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하나인 일체의 권세이셨다. 그 권세는 이 땅에 그를 믿는 자들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천국 백성 삼으시는 권세이시다.
주께서 나아와 말씀하셨다. “가라, 제자를 삼으라, 세례를 주라,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네 가지이다. 그 하나하나의 명령하신 동사의 의미가 크다.
가라.
‘가라’는 말씀을 좀 더 정확히 직역하면 ‘가라 그리고 나서’라는 의미이다. 한 곳에만 머물러 있지 말고 열방으로 나아가라는 말씀이시다.
“가서 제자 삼고, 가서 세례 주고, 가서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명령을 하신 것이다.
그렇지 않나. 가라는 이 명령에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메, 도마, 마태를 비롯한 11제자들 모두가 열방을 향하여 나아가고 또 나아가는 전도자들이 되었다. 선교의 사람들이 되었다. 사도행전 1장에서 만나는 12명의 빈자리에 충원된 새로운 제자 맛디아도 ‘가라’는 이 선교 명령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 맛디아는 누가복음 10장 1절에 언급된 70명의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 70인의 제자들 중에서 인정받고 주목 받던 인물이 제비 뽑혀 가롯 유다의 빈자리에 충원된 것이다.
이처럼 제자의 사명은 앞으로 나아가고, 낯 설은 곳으로 나아가고, 복음이 전파되지 못한 미개척지를 향하여 열방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12제자들을 비롯한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가라’는 이 명령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 스데반 집사가 순교 당한 후에 집사 빌립은 사마리아 도성에까지 가서 전도하였다. 사도행전 21장 9절에 보면 빌립의 네 딸들도 모두 다 선지자요 전도자의 삶을 살았다. 사도행전 8장에 보면 천사는 빌립을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곳까지 가도록 지시하였다. 그 곳에서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 맡은 관리인 내시를 만나게 되었다. 성령의 지시를 따라 수레를 타고 자기 나라로 가고 있는 국고 맡은 관리인 내시를 만났다. 그는 예루살렘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제 나라로 가고 있던 중이었다. 수레 위에서 이사야서를 읽으며 가고 있던 그의 마차에 올라타서 성경 말씀의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이사야서 53장의 내용의 주인공이 메시아이신 예수이신 것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말씀을 듣고 있던 그의 마음이 뜨거워졌다. 마침 물이 있는 곳에 이르러서는 거기에서 물로 세례를 받고 제 나라로 돌아갔다.
이처럼 한 사람이 받아들인 복음의 체험으로 인하여 이미 에디오피아는 2000년 전에 기독교의 복음이 왕성하게 전파된 기독교 국가로 발전해 왔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130여 년 전에 미국과 캐나다와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 호주 등지에서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쏟아져 들어온 선교사들이 있었다. 그들 중에는 의사나 간호사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가라’는 선교 명령을 준행한 복음 전파의 사람들이었다.
마태복음 28장의 18-20절을 ‘선교 대 위임령’(the Great Commandment)이라고 한다. 그 중에서‘가라’하는 명령은 전도와 열방 선교를 가능하게 하는 첫 출발 명령이다. 오늘 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불신 가족과 일가친척에게로 가고, 직장으로 가고, 일터로 가고, 사업의 현장으로 가고, 세상을 향하여 계속하여 끊임없이 나아가는 것이다.
“가라 가라 세상을 향해”라는 어린이들이 주로 부르는 밝고 경쾌한 복음성가가 있다.
“가라 가라 세상을 향해/가라 가라 말씀을 가지고
가라 가라 온 땅을 향해/가라 가라는 예수님 명령
우리 모두 모두 가겠어요/ 온 땅에 모든 어린이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겠어요
우리 모두 모두 가겠어요/ 온땅에 모든 어린이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겠어요”
어른 아이,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가정, 학교, 직장 그 어디나 향하여 복음을 들고 나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고 부활 신앙의 실제여야만 할 것이다.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
마태복음 25장 32절에 양과 염소의 비유 내용 중에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라는 말씀이 나온다. 그렇다. 복음이 전파되고 예수 부활의 복음이 전파되는 일에는 민족과 나라의 경계가 없다. 어느 민족 그 누구에게나 골고루 복음이 전파되어야만 한다. 복음 전파의 대상은 피부색, 인종, 언어, 문화, 풍습, 빈부귀천 남녀노소 그 어느 누구에게든지 제한이 없어야만 한다. 우린 그런 사명을 새롭게 하는 결단의 찬송을 부르지 않나.
가서 제자 삼으라 세상 많은 사람들을
세상 모든 영혼이 네게 달렸나니
가서 제자 삼으라 나의 길을 가르치라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하리라
어제 점심시간에 필리핀 선교사인 김영환 목사가 다녀갔다. 부목사 시절에 그의 가정에 심방 간 적이 있었다. 그는 그 당시에 신학교 학생이었다. 지금은 필리핀 타클로반에서 선교하고 있다. 5년 전인 2013년 필리핀 전역에 슈퍼 태풍 ‘하이옌(Haiyan)이 큰 피해를 입혔다. 그 중에 가장 피해가 컸던 곳이 타클로반이었다. 타클로반은 과거 필리핀 통치자 마르코스의 부인 이멜다 여사의 고향이다.
2013년 11월 8일, 김영환 선교사의 두 아들과 4 가족은 그 현장의 2층 집에 있었다. “아! 이렇게 죽음의 순간이 찾아오는 구나”하고 가족들이 부둥켜안고 임종 기도를 드렸다. ‘일엽편주’(一葉片舟)라는 단어를 쓰는데 그야말로 어머 어마한 배들이 종이배처럼 구겨지고 파손되고 뒤집히고 순식간에 거대한 파도가 육지를 뒤덮어 밀려들어 왔다. 속수무책의 공포의 장면이 영화처럼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언론 보도 마다 사망자 수의 발표가 달랐다. 어느 방송사에서는 1만 명, 어느 방송사에서는 3만 명이라고 했다. 최근에 김영환 선교사가 현지인 세례를 베풀었다. 젊은 여자 청년이 간증하였다. 5년 전 그 엄청난 태풍 피해 현장에서 자신은 나무에 매달려 겨우 살아남았다. 곁에 휩쓸려 가는 사람을 도우려고 손을 내어 밀었는데 자기 어머니의 시체였다고 간증하였단다. 산자와 죽은 자가 뒤 엉킨 재난의 현장이었다. 지난 2004년 인도양의 22만 명의 목숨을 삼킨 쓰나미 이후 최악의 태풍을 만난 재난이었다.
그런 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 그 곳에는 주민 등록이 되어 있지 않은 어린이가 많다고 한다. 카톨릭 국가인 필리핀은 성당에서 돈을 받고 영세를 주기 때문에 너무 가난해서 세례도 못 받고 그러하다 보니 신분을 알 수 없는 아기들과 어린이들이 널려 있다고 한다.
‘제자를 삼으라’는 명령은 ‘훈련된 복음의 사람을 세워 나가라’는 말씀이다. 제자는 양육되는 것이지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태어나는 것으로 사람 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 땅에 모든 포유류들은 태어나자마자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제 발로 걷고 뛰고 활동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사람은 아기가 태어나면 최소한 10개월 내지 일 년 동안 정성을 다하여 돌보지 않으면 서지도 못하고 걷지도 못한다.
이처럼 태어난 아기를 양육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듯이 제자를 삼는 과정이 없이 제자가 되는 경우란 없다. 이는 오늘 날 우리 각 사람이 다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통해서 제자가 되는 과정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지금도 그 영향을 누군가로부터 받고 누군가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누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가.
부르심을 받은 자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르려 하는 자
분부하신 주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려는 자
끊임없이 계속하여 주님의 말씀을 배우고 준행하려는 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삶의 근본으로 삼고자 하는 자
사나 죽으나 주의 나라와 의를 위하며 주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고자 하는 자여야 주의 제자가 아니겠는가.
입술로만 ‘주여... 주여...’ 하고 주께 기도하며 살아가는 것 같지만 이방 사람들처럼 기도하고 우상 앞에 비는 자들처럼 기도하면서 살아가는 자들을 주의 제자라고 할 수는 없다. 밥 주세요 떡 주세요. 가족 평안하게 해 주세요. 자녀들 잘 되게 해 주세요. 무병장수하게 해 주세요. 만사형통하게 해 주세요. 어려움 없게 해 주세요. 재물 좀 주세요. 늘 이런 식의 기도를 드리며 지내는 정도를 갖고 기도라 할 수 있겠는가.
물론 좋다. 필요하다. 그러나 최소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내용에 비추어 성도라면 어떤 기도를 드리며 살고 어떤 삶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이 과연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일까. 스스로 신앙의 현 주소를 확인하고 점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영국의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1761-1834)는 구두수선공으로 일하던 중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인도의 선교사가 되었다. 그는 복음 전도뿐만 아니라 인도의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해 최초로 남녀공립학교를 세웠다. 세람푸르 대학교도 세웠다. 그들의 건강을 돌보기 위해 의료 진료소를 경영했다. 그는 또한 인도 사회의 평등을 위해 노력했다. 유아를 살해하여 제사하는 악한 풍습을 막는데 앞장섰다. 특히 인도 문화의 잘못된 관습 중 하나인 ‘사티 의식’을 깨뜨리기 위해 노력했다. 힌두교에서는 남편이 죽으면 부인을 남편의 시체와 함께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불에 태워 죽이는 관습이 있었다. 이러한 비인간적인 관습을 추방하기 위해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캠페인을 벌이는 등 수년 간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 사티 의식이 법으로 금지되었다.
구두 제화공 출신이었던 그의 인도 세람푸르 선교는 현대 선교사역의 한 원형이 되었다. 그는 벵골어 문법을 세우고 사전을 만들었다. 나중에는 '벵골어의 아버지'라고 불렸다. 침례교도가 된 뒤 여러 해를 노샘프턴셔 몰턴에서 목회자로 활동했고 그곳 학교에서도 가르치면서 구두제화공 일을 계속했다. 그는 동료 목사 12명과 함께 영국 침례교 선교협회를 창설했다. 이 협회의 첫 선교사인 윌리엄 캐리와 의사인 존 토머스는 인도의 캘커타로 갔다. 인도에서 인디고 물감 공장 감독관이 된 뒤부터 협회의 재정지원을 받지 않았다.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며 성경 번역을 시작했다.
그는 포트윌리엄대학에서 벵골어·산스크리트·마라티어를 가르쳤다. 성경을 벵골어·오리야어·마라티어·힌두어·아삼어·산스크리트로 번역했다. 또한 성경 일부를 29개의 다른 언어와 방언으로 번역했다. 마슈먼과 함께 보티아어 문법책을 편집했고 6개 언어의 문법책을 준비하고 3권의 사전을 편찬한 언어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세람푸르에 출판사를 세우고 원예학자 윌리엄 록스버러의 〈벵갈의 식물 Hortus Bengalensis〉(1814)·〈인도의 꽃 Flora Indica〉(1832)을 편집·발행하였다. 학교에 산문 교과서를 보급하는 일도 도왔다. 그는 인도 농업조합을 세우는 데도 기여했다.
이처럼 윌리엄 캐리는 교사, 언어학자, 사회개혁자, 선교사로 일하면서 인도 민족을 제자 삼기 위해 자신의 생애를 바쳤다. 19살에 복음을 받아들이고 22살에 침례를 받은 그는 평생 동안 인도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고 가까이 하길 원하는 친구로 살았다. 사람들은 40년 간 인도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간 그의 삶을 칭송하면서 그를 ‘제2의 종교개혁의 아버지’로 불렀다. 특히 인도 사람들은 ‘가장 위대한 성자’라는 의미의 ‘마하트마’라는 칭호를 그에게 붙여줄 정도로 그를 진심으로 존경했다. 그는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그리스도의 제자였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따르고 그분의 대위임령에 순종하는 자가 되기 위해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은 바로 이것이었다. ‘나는 과연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인가?’
세례를 베풀라.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세례는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 들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증표 중의 하나이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다. 예수는 니고데모에게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나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3:6-7)고 하셨다. 세례라는 ‘밥티조’(βαπτίζω)의 뜻은 ‘잠근다.’는 의미이다. 사람이 물속에 잠겨서 계속 살아남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세례는 내 속의 나와 죄성과 육성이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심을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삶의 주인으로 영접한 것을 공개적으로 시인하고 공포의 의식인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고도 세상 연락을 즐기며 죄악을 짝하며 살아가는 것은 세례 받은 신자의 모습일 수 없다. 세례를 받은 성도는 항상 죄와 악을 멀리하고 주의 말씀을 가까이 하며 살아가야 한다.
강화도 성공회 한옥 예배당 안에는 돌 세수대에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
作去洗修
善惡心己
회개 하고 죄 사함 받아 세례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삶의 구체적인 증거가 무엇인가. 세례를 받고 예수의 제자답게 살아가는 증거가 무엇인가. 몸을 수양하고 마음을 정결하게 하며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가르쳐 지키게 하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세 틀은 선포하고 가르치고 병을 고치시는 것이었다. 마태복음 4장 23절이 그 내용이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이 세가지 사역을 늘 골고루 하시던 예수께서 부활 후 승천하시기 전에 강조하신 내용 중의 하나가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명령이셨다. 이것은 지난 2천년 동안 계속하여 준행해 온 주의 명령이시다. 디모데에게 전한 사도 바울의 편지인 디모데 후서 2장 2절에 보면 이런 내용이 담겨 있다.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여기 보면 도표가 가능하다.
사도 바울-디모데- 충성된 사람들- 또 다른 사람들
이처럼 가르치고 지키게 하는 복음 전파의 원리는 주님께서 이 땅에 재림 주로 오시는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가라, 제자를 삼으라, 세례를 주라, 가르쳐 지키게 하라. 이 명령은 주님께 부름 받은 사명자들을 통하여 오늘 날도 열방 가운데 쉬임이 없는 역동적인 사역으로 불붙여져 나갈 것이다.
가르치고 지키게 하는 것은 동시적인 동작이며 행동 강령이다. 많이 배워 알고 누군가를 가르치지만 스스로 주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요한 계시록 1장 3절에 보면,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고 하였다. 이 같은 복음의 능력이 부활 신앙으로 불붙여 지는 열정의 사람으로 살아가길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