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신앙(막16:1-8, 고전15:1-11) 2018. 4. 1 부활주일
인도의 성자 썬다싱에게 영국의 기자들이 물었다. “힌두교인이 어떻게 예수 믿게 되었나”그는 짧고 분명하게 대답하였다. “부활 때문이다.”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대답한 것이다. 그렇다. 기독교는 도덕과 윤리와 수양과 수련을 강조하는데 끝나는 종교가 아니다. 인생의 허무를 깨닫게 하는 것으로 끝나거나 윤회설 정도를 설득하는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의 바탕은 영원하신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신 메시아의 죽음과 부활에 바탕을 두고 있다.
첫째 아담에게서 죽음이 왔다면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생과 구원이 왔다.
고린도 전서 13장을 ‘사랑장’으로 이름 붙이는 것처럼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장’이라고 이름 붙인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이보다 더 명확하고 분명하게 교훈하고 있는 곳은 성경 그 어디에도 없다.
복음서에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사실만을 기록할 뿐이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대답을 찾게 하는 모든 것들이 충분하게 담겨 있다.
죄 사함과 그리스도의 부활.
복음, 구원, 죄 사함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룩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규정하는 단어들이다.
사도 바울이 몰랐을 때에는 몰라서 핍박하고 박해하려 하였다. 그러나 깨달아 알고 난 후에는 부활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사명을 알고 순교자의 길을 가기 까지 처처에 복음을 전파하였다. 고린도전서 15장 1절의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그것이다. 2절의 “내가 전한 그 말”이란 것이 부활 복음이다. 부활 복음을 굳게 지켜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헛되이 믿지 말아야 하는 근거도 부활 복음에 있다. 바울은 분명하게 말한다.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바울은 다메섹 체험 후에 온전히 변화된 새 사람이 되었다. 교회 이름 중에 ‘새사람교회’란 이름을 짓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바울은 더 이상 예수 믿는 이들을 붙잡아 공회에 넘기려고 혈기 등등하게 사방을 헤집고 다니는 유대주의자 사울이 아니다. 사울은 변화 되었고 예수가 누구신지 복음이 무엇인지 깨달아 알게 되었다. 주님은 사울로 하여금 이방과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이름을 전파하게 하시려고 ‘택한 그릇’이 되었다. 사도 바울이 당한 고난은 복음 때문이었다. 자기 잘못으로, 자기 범죄의 죄 값으로 감옥에 갇히고 매 맞고 춥고 배고프고 잠 못 잔 것이 아니었다.
주님은 아나니아를 통해서 다메섹의 직가 거리에 있는 유다라는 사람의 집에 머물고 있는 사울을 찾아가게 하였다. 그리고 그에게“주께서 너에게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고 문안하게 하셨다.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던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져 나갔다. 다시 보게 되었다. 이런 과정이 대단히 상징적이다. 주께서 눈을 가리시니까 사흘 동안 아무것도 볼 수 없던 사울이었다. 그런 그에게 주께서 보내신 주의 제자 아나니아를 통해서 안수 받고 눈을 떠 다시 보게 되었다. 이것이 신앙의 과정이다. 안 보일 때에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 법이다. 그러나 눈이 열려서 보게 되면 사방천지가 환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다시 보이게 된 사울은 사흘 만에 일어나서 세례를 받았다. 음식을 먹고 강건해졌다. 그 즉시로 다메섹의 각 회당에 찾아다니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그 날 그 순간 이후로 사울은 한번도 뒤로 물러 선 적이 없다. 그가 우리가 가는 사도 바울이다. 그의 복음 전파를 듣는 사람들마다 놀라워했다. 핍박자 사울이 변해서 전도자 바울이 되었으니 말이다. 복음의 힘은 그런 것이다. 바울은 점점 힘을 더 얻어 가는 곳마다에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였다. 그의 복음 전파를 듣는 다메섹의 유대인들은 모두가 다 당혹스러워했다. 복음의 힘은 그런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 3-4절을 보라.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하였다.
그렇다.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그를 구주로 믿는 자들이 죄에서 해방을 받게 된 것이다. 인간은 병들어 죽거나 사고로 죽거나 늙어 죽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죄로 인하여 죽는 것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선물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롬6:23)고 하였다.
미국 뉴저지의 술집 골목 어귀에서 남자 대학생 두 명이서 서로 실갱이를 벌이고 있었다. 한 명은 술 마시러 가자고 했고 다른 한 친구는 오늘은 술 마실 기분이 아니라며 뒷걸음을 쳤다. 결국 한 청년은 혼자 술집 골목으로 사라졌다. 다른 한 청년은 술집 골목 건너편 언덕에 있는 작은 예배당 앞의 성경 구절을 한참동안 바라다보고 있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 그는 친구를 보내고 혼자서 예배당을 찾아 갔다. 부흥회의 주제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내용의 반복이었다. 그는 복음이 무엇인지. 죄가 무엇인지. 죄의 용서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정리하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사실 스티븐 그로버 클리블랜드(Stephen Grover Cleveland, 1837-1908)라는 그 청년은 목사의 아들이었다. 클리브랜드는 뉴저지 주 콜드웰 지역에서 목회하는 목사 가정에서 9남매 중 5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장로교의 목사였는데 하도 자주 교회를 옮겨 다니며 사역하는 바람에 그의 가족들도 자주 이사를 가야만 했다. 스티븐 클리브랜드는 목사의 아들로 자라났지만 부활 복음에 대한 믿음이 불분명하였었다. 그런 그가 변화된 것이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뉴욕 주 버펄로에서 그는 정직하고 소신 있는 행동으로 두각을 나타내어 뉴욕 주 이리 카운티의 군 보안관으로 당선되었다. 44살 때에 버펄로 시의 시장에 당선되었다. 다음 해에는 뉴저지 주의 주지사로 당선되었다. 3년 후에는 미국 22대(1885-1889)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종신형을 받은 죄수가 감옥 안에서 스티븐 클래블랜드 대통령 당선을 알리는 신문 기사를 읽고 있었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은 그는 25년 전에 스티븐과 헤어져서 뉴져지 대학가의 술집 골목을 제 집 드나들 듯 하면서 대학 생활을 보내던 바로 그 동료 학생이었다. 스티븐 클리블랜드는 개혁, 정직을 모토로 정치하여 제24대(1893년-1897년)대통령에 재선되었다.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죄 된 생활뿐만 아니라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부활 영생하는 은혜의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은총이다.
부활하신 예수를 목격한 자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게바인 베드로와 12제자들 그리고 500여 형제들에게 동시에 보이신 적도 있으셨다. 나중에는 “만삭되어 나지 못한 자 같은”사도 바울에게도 보이셨다. 5-8절의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나. 예수의 부활의 역사성을 말씀하는 것이다. 우리가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서 다루는 예수 부활 내용이 참으로 간단한 것을 본다. 왜 그런가. 사실이란 장황한 설명이 필요 없다. 육하원칙에 따라서 설명하면 그것으로 끝이지 구차하게 군더더기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에 가 보면 2000년 전의 예수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베들레헴, 나사렛, 갈릴리 해변, 가나의 혼인 잔치 집, 벳세대 광야, 팔복 설교의 말씀을 하셨던 팔복산 언덕 자락 등등 예수 때의 흔적들이 그대로 전해져 내려 온다. 베다니 마을, 벳바게, 감람산, 기드론 골짜기, 예루살렘 성전 터, 예루살렘 성벽, 베데스다 못가, 가야바의 뜰, 빌리도의 법정, 골고다 언덕 길, 예수 수난의 현장, 예수 부활의 현장이 역사이다.
씨앗을 심는 계절이다. 겨울은 죽음과 같다. 그러나 이 봄에 씨앗을 심으면 싹이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복음 12장 24절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 그대로이다.
여러 해 전에 타임(TIME) 지에 기사가 실렸다.
이집트 미라의 관에서 완두콩 씨가 발견 되었다. 3500년 전의 마른 씨앗이다. 그런데 그것을 심었더니 싹이 났다. 왜 그런가. 죽지 않고 그냥 한 알 그대로 3500년을 이어 온 것이다. 그런데 3500년 만에 썩어, 죽어 싹을 내고 자라나게 된 것이다. 한 알이 썩어야 싹이 나고 꽃이 피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 죽은 것 같은데 죽음으로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 이것이 자연의 신비이고 창조의 신비이고 재창조의 신비이다.
다시 고린도 전서 15장을 보자.
16절,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었을 터이요”라고 하였다.
32절,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고 하였다.
우리가 믿는 복음은 가설이 아니다. 역사이다. 바울이 강조하는 바가 그것이다. 예수를 배반하고 도망가고 숨었던 베드로와 제자들이 하나 둘씩 예수께로 돌아 왔다. 가롯 유다만이 불행한 길을 갔을 뿐 모든 제자들이 성령 받고 순교자의 길을 가기 까지 복음을 위해서 살았다. 부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동부서주하였다.
오늘 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누군가를 통해서 나에게 우리에게 부활 복음이 전파된 것이 아닌가.
예수와 함께한 제자들의 3년의 공생애도 역사이고 예수 죽음과 부활 승천 이후의 초대교회와 종교 개혁기를 거치던 중세 교회와 오늘 날의 교회가 모두 다 역사다. 역사를 대신 할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없다. 역사는 역사일 뿐이다.
바울은 그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부활의 영광이 그런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42절 이하에서 이렇게 선포한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전15:42-44)
불순종과 타락의 삶을 살았던 아담과 하와도 역사이고
살려 주는 영으로 이 땅에 육체를 입고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도 역사이다. 그러므로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15:48-49)는 말씀의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의 삶이 또한 역사인 것이다.
은혜 받은 자의 복음 전파.
율법에서 복음으로
핍박자에서 전파자로
무지와 어리석음에서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주의 은혜이다.
사도 바울은 그런 주의 은혜를 덧입은 자였다. 본문 8절 이하가 그런 말씀이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8-10)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자이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이다.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다.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였다.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다.
그러나 내가 한 것이 아니다.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다.
깨닫고 보면 누구나 다 그러하고 모든 일이 다 그러하다. 은혜가 아닌 것이 없다. 그 은혜를 깨달아 알고 은혜를 고백하며 그 은혜를 힘 입어 살아가는 것이 신앙 생활이다.
늘 평양의 숭실학교를 언급했지만 그 숭실학교가 우리가 사는 은평구에 위치한 것은 잊고 지냈다. 해방 이후 서울에 와서 자리 잡았다.
어제 그 가까이 심방하며 보니 수색으로 넘어가는 비단산 자락에 숭실고등학교가 위치해 있었다. 숭실 대학교가 따로 있지만 숭실 학교는 조만식, 이승훈, 한경직, 김재준 등의 인물들이 섬겼고 배출한 역사적인 기독교 사학이 아닌가.
나에게 임한 주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갈 줄 아는 부활의 증인이 모두 다 되어야만 할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