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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말씀으로 오신 아기(요1:1-13) 2018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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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8-12-10 13:56 조회 12,709 댓글 0
 
                   말씀으로 오신 아기(요1:1-13)       2018. 12. 9 성서주일



이 땅의 70억이 넘는 인류 가운데 우리들처럼 손에 성경이 펼쳐져 있고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이들은 아직도 그렇게 많지 못하다. 오늘은 성서주일이며 강림절 둘째 주일이다.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오고 우리  말로 성경이 번역되어 보급된 것은 주님의 크나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오늘 날도 지구상에는 자기 언어로 된 성경을 아직 갖지 못한 부족들이 적지 않다. 사도행전 1장 8절의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 되는 일은 성경 번역과 보급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 땅을 다녀가신지 200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예수의 복음을 제대로 접해 보지 못한 이들이 수도 없이 많다. 자기 말 성경이 없이 지내는 부족도 적지 않다. 성경 말씀을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이들도 엄청나게 많다. 성경책을 손으로 단 한번이라도 만져 보지도 못한 이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통계로는 70억이 넘는 인구 중에서 기독교 복음화 비율은 15%정도 밖에는 안 된다. 이 세상에는 아직도 불교, 힌두교, 이슬람 등을 신봉하며 그것에 갇혀 사는 인구가 막대하다. 

우리나라에 기독교의 복음이 들어오고 우리말 성경이 주어진 것은 기독교 이천년 역사 가운데 기적이며 은총이 아닐 수 없다. 당신은 언제 처음으로 성경을 접하게 되었나. 언제 성경 말씀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나. 교회 안에 들어 와서 예배를 처음으로 드려 본 경험은 언제가 처음인가. 누군가를 통해서 설교 말씀을 처음으로 접한 것은 언제인가. 

우리가 어려서는 성탄절이 되면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 보따리에 사과를 갖다 주었다. 물론 그 산타가 교회 학교 선생님들 중의 누구인지를 우리는 다 알고 있었다. 그래도 재미가 있었다. 사탕도 귀하고 과자도 귀하고 사과 한 개도 귀하던 시절이 있었다. 언제 교회에 다녀 보았느냐고 물으면 “친구 따라서 사탕이나 과자나 사과 얻어먹기 위해서 성탄절에 교회에 가 본 적이 있다”고 대답하는 이들도 있다. 군대로 말하면 주일에 교회에 가면 초코파이와 우유를 받아먹을 수 있다. 주일에 잔업이나 노역 봉사 하지 않고 교회에 가서 예배 시간에 편히 앉아서 예배드릴 수 있다. 찬송, 기도, 설교, 교제가 다 믿음의 사람이 되어 가는 접촉점이다. 

그래도 군대 생활 중에 성경을 접하고 설교 말씀을 접하고 예배를 경험한 것이 인연이 되어서 기독교인이 되는 경우도 없지 않다. 마리아나 요셉은 하나님을 믿는 유대의 청년들이었다. 그런 마리아에게 천사가 찾아오고 하나님의 아들이 잉태된 것이 마리아의 운명의 변화의 시작이었다. 남편될 요셉도 꿈에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서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준 것이 운명의 변화의 새 출발이었다. 이처럼 주의 말씀은 인생을 붙잡고 변화 시키는 능력이 있다. 

강림절 둘째 주일인 오늘은 “말씀으로 오신 아기”라는 제목의 말씀을 나누기를 원한다. 


생명의 말씀이신 아기.
지난주에 나눈 말씀처럼 예수는 청년으로 오시거나 백마를 탄 용사로 위엄있게 등장한 분이 아니셨다. 예수는 유대 땅 갈릴리의 작은 마을 나사렛의 동정녀 마리아의 태에 잉태되었다. 마리아의 남편될 요셉이 조상들의 마을인 베들레헴에 호적하려고 갔다가 거기서 아들 예수를 낳았다. 

예수의 탄생은 이 땅의 모든 생명이 어머니를 통해서 아기로 태어나듯이 인간의 아들인 아기로 탄생되었다. 그러나 그 아기는 그냥 평범한 아기가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아기이며 생명의 말씀이신 아기이시다. 

요한복음 1장 1절은 신약의 창세기 1장 1절이라고 말한다. 창세기 1장 1절의“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처럼 요한복음의 시작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는 위대한 선포로 시작된다. 

그렇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이시고 동시에 하나님이시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계셨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곧 하나님이시다. 2절과 3절은 예수가 하나님 안에서 어떤 분이신가를 설명하는 대단히 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다. 지은 것이 하나도 예수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 

이 얼마나 놀랍고 장엄하고 위대한 선언인가. 우리가 아는 예수. 우리가 믿는 예수. 십자가에 죽임 당하신 예수. 장사 지낸지 사흘 만에 다시 사신 예수, 부활 후에 승천하신 예수.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예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는 세상 창조 이전인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이셨다. 예수는 하나님의 천지창조에도 함께 하신 분이셨다. 예수는 하나님 안에서 창조의 근본이신 분이시다. 예수 안에 생명이 있다. 이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다.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다.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시다. 처음과 나중이시며 시작과 끝이시다. 창조 이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우리 가운데 계시며 장래에도 영원히 그를 믿는 자들 가운데 임재하시는 예수는 영원한 생명의 원천이시며 생명의 말씀이시다. 

“빛이 있으라”말씀하시자 빛이 창조되었다. “빛이 있으라”는 것은 말씀인데 그 말씀으로 흑암과 혼돈과 공허 가운데 있던 창조 이전의 상태에서 어둠을 삼키는 빛이 창조 되었다. 이것이 생명이신 말씀의 힘이다. 빛의 창조는 이 세상 우주 삼라만상 가운데 생명을 공급하는 시작이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는 생명의 능력이 담겨 있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이 생명의 말씀이신데 인간의 눈에 보이는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께서 갈릴리를 중심으로 이 마을, 저 마을, 이 회당 저 회당, 이 도성과 저 도성에 드나드실 때마다 생명의 말씀의 기사와 이적과 표적들이 넘쳐났다. 

각색 병자들이 고침을 받았다. 일어나 걸으라 말씀하시자 못 걷던 이들이 일어나 걷고 뛰었다. 못 보던 이가 보고 못 듣던 이가 듣고 말 못하던 이가 말하고 나병이 사라지고 귀신이 떠나갔다. 거품을 물고 물과 불에 뛰어 들던 불쌍한 인생이 귀신이 떠나가자 새 사람이 되었다. 죽은 자가 살아났다. 바람과 파도라도 잔잔해졌다. 이것은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임재를 드러내는 사건들이었다. 

이는 과거나 오늘 날이나 다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믿는 믿음 즉 우리의 신앙생활은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4절 말씀처럼 예수 안에 생명이 있다. 그러므로 예수를 구주로 믿고 영접하면 예수의 생명이 내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의 말씀이 내 안에서 역사하는 것이다. 이것이 말씀의 힘이며 생명의 능력인 것이다.

기독교 이천년의 역사를 보라.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한 사람의 삶에 받아들여지면 그 말씀의 생명력이 한 사람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킨다.

4세기의  성 어거스틴이 그러하지 않나. 그가 태어난 곳은 아프리카 알제리 지역이었다. 중산층 가정이던 그의 아버지는 평생 이교도였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어머니는 열성적이고 경건한 그리스도인이었다. 지적 능력이 뛰어났던 그는 19살에 카르타고로 유학하게 되었다. 그 후에 그는 결혼하지 않고 아들을 낳았다. 마니교라는 기독교 이단에 빠져서 지냈다. 마니교는 육체의 금욕과 독신 생활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는 마니교에 머물면서도 천민 출신인 여성과 사귀어서 아들을 낳았다. 그는 그 아들을 끔찍이 사랑하였다. 
어거스틴은 청년기에 기독교의 복음에 대하여 회의적이었다. 명석하고 철학적이며 뛰어난 사색가였던 어거스틴의 영적 궁금증을 채워 줄 만한 이들을 만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런 그가 변화되고 생명의 말씀이신 주님께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어머니의 기도를 주께서 들으셨다. 인물백과 사전에는 그의 이름이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노’(Aurelius Augustinus, 354-430)라고 되어있다. 그 당시의 주교였던 암브로스의 설교를 접한 어거스틴은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변화된 후에 쓴 그의 〈고백록〉 제8권에 그의 회심 경험이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어떻게 그가 동서의 그리스도교 금욕주의를 시행했는지. 어느 정도 그가 자기의 육체적 연약함 때문에 스스로를 경멸했는지 보여주고 있다. 어느 날 어거스틴은 밀라노의 정원에서 뛰어노는 어린아이들의 말을 통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체험하였다. '집어 읽으라'(tolle, lege)는 어린아이들의 소리에 그는 성경을 펼쳐 바울의 로마서를 읽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4) 그의 나이 32살이던 386년 늦여름의 일이었다.

이러한 영적 체험은 우리가 아는 4세기의 성자 어거스틴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예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다. 생명의 말씀이 내 안에 들어오면 그 말씀의 생명력이 한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미국 역사의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이나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 1703-1758) 부부와 그의 후손들의 위대한 가문의 역사는 생명의 말씀을 받아 드린 개인과 가정과 가족과 자손들이 주님 안에서 누리는 생명의 말씀의 은혜를 증거하는 생생한 사례와 간증들이다. 


참 빛으로 오신 아기.
예수 안에 임재된 생명의 말씀은 사람들을 비추는 빛이다. 안타까운 것은 그 빛이 세상에 비추어도 세상의 어둠 속에 있는 백성들이 그 빛을 깨닫지 못한다는 점이다. 세례 요한은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았던 선지자이다. 9절 말씀에 보면 예수는 ‘참 빛’이시라고 했다. 맞다. 예수는 참 빛 즉 빛의 근원이시다. 이 세상에는 반사되는 빛이 많다. 태양의 빛이 얼마나 강한가. 지구에 생명체가 살 수 있는 것은 태양의 힘이다. 그런데 더 큰 우주적인 차원에서 보면 빛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빛을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인간의 몸을 입고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서 이 땅에 보냄을 받은 아기 예수. 그는 아기로 머무는 아기가 아니었다. 누가복음 2장 52절에 보면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가시더라”고 하였다. 

그렇다. 예수는 아기로 태어나셔서 소년으로 청년으로 성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예수는 지혜의 충만함을 당할 자들이 없었다. 그러한 사건이 12살 때의 예수의 모습이 아닌가. 유월절에 고향으로 돌아가던 요셉과 마리아가 아들 예수를 잃어 버렸다. 사흘 길을 거슬러 올라가서 예루살렘 성전에 남아 있던 12살 된 아들 예수를 만났다. 예수는 성전에서 율법교사들과 함께 앉아서 대화하고 있었다. 듣기도 하며 묻기도 하는데 그 지혜와 대답으로 인해서 율법 교사들이 모두 다 놀라워하고 있었다. 생명의 말씀으로 오시고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지혜와 명철이 가득한 충만 그 자체였다. 
역사와 문명을 단순히 비교하는 일은 위험한 일이기는 하지만 역사 가운데 기독교의 복음이 들어간 나라들을 보라. 유럽의 역사란 기독교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이나 캐나다의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유럽의 그 여러 나라들과 동남아의 몹시 가난한 나라들이나 인도나 파키스탄이나 방글라데시와 같은 나라들이 비교되는 점은 무엇인가. 소를 신으로 섬기고 원숭이나 코끼리를 신으로 섬기는 나라들 중에서 문명국가를 이룬 나라들이 있는가.

가령 인도가 대단한 나라이긴 하지만 인도의 계급 사회에서 천민으로 살거나 우상 숭배에 젖어 사는 모습들을 보라. 최근의 사건 소식을 보라. 인도의 한 지역에서 소의 사체로 구분되는 짐승의 사체를 발견한 시민들이 자신들이 신으로 섬기는 소가 죽임 당한 것에 격분해서 차량 수 십대를 불태우고 경찰 한 명을 포함해서 사람 두 명을 죽이는 등 폭동을 일으킨 사건 소식이 알려졌다. 13억 인구인 인도 사람들 중에서 80%의 사람들은 소를 성스러운 신적 존재를 인정하고 숭배하고 있다. 

과연 그런가. 사람은 종교의 지배를 받는다. 사람은 누구든지 신앙의 조종을 받으며 살아간다. 우리들 중에도 과거에 우상 숭배하거나 불교 등 타 종교에 심취했던 이들이 없지 않다. 

우리가 참 빛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은혜 중의 은혜요 복 중의 복이 아닐 수 없다. 

1949년도에 독일의 동서독을 분리하는 분립 장벽이 세워졌다. 동독에서 360여만 명이 서독으로 피난했다. 동독의 많은 목사들도 서독으로 피난했다. 그런데 그 몇 해 후인 1954년에 서독의 루터교에 속한 젊은 목사 부부가 동독으로 향했다. 그는 동독의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며 저들을 향한 선교적인 마음을 품고 동독으로 향하였던 것이다. 그의 이름은 호르스트 카스너이다.  그는 소련 공산당의 영향을 받아서 닫은 교회 문을 열겠다는 뜨거운 마음을 갖고 동독 땅을 밟은 것이다. 카스너 목사 부부는 생후 6주 된 딸을 데리고 동독으로 가서 브란덴브르크에서 목회하였다. 긴긴 세월 감시와 탄압 가운데서도 독일 통일을 위해서 사역하였다. 1990년 10월 3일에 동독 6개 주가 국민 의사를 물었고 서독 연방 정부에 가입되길 원했다. 동서독이 하나 되는 통일의 날이 찾아 온 것이다. 사람들은 카스너 목사의 가정을 잊고 지냈으나 빛의 근원이신 하나님, 참 빛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동독에 머물러 복음을 전파하던 호레스트 카스너 목사의 가정을 주목하고 계셨다. 그 당시 태어난 지 6개월 되었던 어렸던 호레스트 카스너 목사의 딸이 오늘 날 우리가 아는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Angela Merkel, 1954-) 총리이다. 

하나님은 참 빛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영접한 인생을 주목하신다. 역사는 독일의 변증법 철학자였던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의 말처럼 마음에 열정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기독교적으로 표현하면 역사는 하나님에 의해서 그의 마음이 뜨거워진 사람들에 의해서 변화되고 발전되어 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참 빛의 가치와 능력을 믿고 따르며 인정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끌어 가시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빛보다 더 강한 것이란 없다. 이 세상에 빛을 이길 수 있는 힘이란 없다. 그러므로 복음의 능력,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힘을 대신 할 수 있는 것이란 그 어디에도 없는 법이다. 강림절과 성탄절은 참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삶의 주인으로 영접하고 모셔 들이는 때이다.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주시는 아기.
왕의 아들 즉 왕의 양자로 받아 들여져서 왕자로 입적되면 평민이 왕족이 되는 것이다. 모세가 그런 인물이었다. 모세는 히브리 노예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그 당시 애굽와 왕 바로는 태어나는 히브리 사내 아기들을 모두 다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모세는 살아남았고 왕의 딸 공주를 통해서 왕자로 받아 들여졌다. 모세가 왕궁에서 40년을 살면서 그 당시 최고의 교육을 왕궁 안에서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다. 살인을 범한 모세는 광야로 도망하였다. 그는 40년 동안 미다안 광야에서 숨어 지냈다. 거기서 장가들고 아들들을 낳고 거기서 늙어 가고 있었다. 그런 모세를 하나님은 그의 나이 80살에 부르셨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잊혀진 자처럼 지내던 모세를 찾아 가셨다. 모세를 만나 주셨다. 그의 발의 신을 벗게 하셨다. 모세로 하여금 민족을 구원하는 지도자로 쓰임 받도록 사명을 부여하셨다. 모세는 80살 이후 120살에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기 까지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만천하에 드러낸 이스라엘 민족의 중심에 세움 받은 지도자가 되었다.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영접하면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게 된다. 이는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여호수아, 갈렙, 기드온, 드보라, 사무엘, 다윗 등 다 마찬가지였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라고 하였다.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는 형제들이다. 저들은 갈릴리의 어부였다. 그런 저들을 예수께서 부르셔서 제자로 삼아 주셨다. 생각하여 보라. 예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지 못하고 평생을 살았다면 저들은 갈릴리 해변의 고향 마을에서 날마다 갈릴리 호수에 배를 띄우고 그물을 내리고 물고기를 잡아 시장에 내다 팔며 생계를 유지하는 소박한 갈릴리의 어부로 늙어 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 저들을 예수께서 택하여 지명하여 불러 내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신 것이다. 저들은 나중에 성령 받은 훌륭한 사도의 길을 걸어 갔다. 순교도 불사하는 주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갔다. 제자 요한은 요한 복음과 요한 1, 2, 3서와 요한 계시록을 쓰는 영광스러운 성경 기록자가 되었다. 베드로도 그의 편지인 베드로 전서와 후서를 통해서 그의 노년기의 분명한 신앙고백을 그 당시의 성도들과 후대의 성도들에게 증언하였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는 것이 얼마나 복되고 영광스러운 일인가 말이다.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예수 예수 귀한 예수 믿음 더욱 주소서.”

라고 찬송하지 않나. 엄마 아빠를 통해서 한 아기가 태어나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거듭나야 한다. 다시 나야 한다. 니고데모가 그러했고 다섯 남자와 헤어지고 여섯 번째 남자를 만나서 살아가던 수가 성 여인이 예수 만나니 인생이 변했다. 예수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누리며 증거하며 살아가는 주인공이 모두 다 되어야 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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