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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여인의 고백(룻1:15-18) 2018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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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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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8-11-04 23:04 조회 13,790 댓글 0
 
                      어느 여인의 고백(룻1:15-18)       2018. 11. 4


요즘은 남녀평등은 물론 남성이냐 여성이냐를 넘어서서 사회적으로 뛰어난 역량과 실력을 발휘하는 여성들이 적지 않다. 혹은 자녀를 훌륭하게 낳아 양육하여 사회에 배출하는 어머니의 역할 또한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이 소중한다. 

그러나 결혼 생활 초기에 남편이나 혹은 아내의 사망으로 생의 큰 충격과 위기를 겪는 이들도 있다. 룻기의 주인공인 룻이 그런 여인이었다. 룻은 모압 여인이다. 그녀는 이스라엘 베들레헴에서 모압 땅에 이주해서 살아가던 엘리멜렉의 아들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그 가정은 시아버지가 모압 땅에서 돌아가신 가정이었다. 두 아들이 모압 여성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두 아들들이 차례로 다 죽고 시어머니 나오미와 두 며느리만 남게 된 불운한 가정이었다. 시어머니 나오미의 입장에서  가정사를 들여다보면 남편 죽고 두 아들이 차례대로 다 죽은 비운의 여인이 되고 말았다. 

사람이 너무 기가 막힌 슬픔을 겪게 되면 시시 때때로 눈물이 나고 시도 때도 없이 그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오게 된다. 생각하여 보라. 남편 잃은 룻이나 오르바의 슬픔도 슬픔이지만 시어머니 나오미의 입장에서 보면 남편과 두 아들을 차례대로 다 잃었으니 그 슬픔이 오죽하였겠는가. 룻기 1장을 읽어 보면 그래서 남아 있는 세 고부는 수시로 소리 높여 울고 통곡하며 지냈다. 1장 9절 끝에 보면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라고 하였다. 그런데 1장 14절에 보면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라고 하였다. 저들 세 고부는 울고 또 울고 통곡하고 또 통곡하며 하루하루 당한 슬픔을 가슴 깊게 삭히며 지내고 있었다. 

나오미는 흉년을 이겨 보려고 남편 따라 갔던 모압 땅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후에 이스라엘 땅에도 다시 양식을 거둘만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래서는 두 며느리를 데리고 모압을 떠나서 베들레헴으로 되 돌아 가고 있었다. 그러던 노상에서 시어머니 나오미는 두 며느리들에게 말하였다. 이제라도 너희 동족들에게로 돌아가서 맘에 맞는 새 남편을 만나 새 출발을 하라고 권하면서 두 며느리들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참고 누르고 지내던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저들은 서로 크게 소리 내서 울고 또 울며 베들레헴을 향하여 가고 있었다. 먼 길을 가던 중간에 시어머니 나오미는 두 며느리들에게 이제라고 생각을 바꾸고 네 동족들에게로 돌아가라고 권하고 또 권하였다. 그러자 둘째 며느리 오르바는 마음을 고쳐먹고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입을 맞추고 모압 땅으로 되돌아갔다. 시어머니와 단 둘이 남게 된 큰 며느리 룻이 나오미에게 한 말이 오늘 읽은 본문이다. 

성경은 동족에게로 돌아간 오르바의 운명에 대하여 더 이상 언급하기 않고 있다. 단지 시어머니 나오미와 운명을 같이하기로 결심한 큰 며느리 룻의 생애를 자세하고 다루고 있다. 오늘 분문을 통해서‘어느 여인의 고백’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좀 더 자세히 나누도록 하자.


어머니와 함께 가서 머물다 죽을 곳.
둘째 며느리 오르바가 동족들에게로 돌아간 후에 시어머니 나오미가 룻에게 말하였다.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그러자 룻이 대답하였다.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그리고 이어서 말한 며느리 룻의 고백이 이것이다.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룻은 이렇게 출발해서 베들레헴에 도작한 후에 이삭을 주어다가 시어머니와 매 끼니를 겨우 겨우 해결하며 지냈다. 그런 룻을 눈여겨 본 베들레헴의 대 지주 노총각 보아스는 룻을 사랑하게 되었고 룻과의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다. 룻은 보아스를 통해서 오벳이란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 오벳이 나중에 다윗 왕의 아버지인 이새를 낳았다. 그러므로 보아스는 다윗의 증조할아버지이고 룻은 다윗 왕의 증조할머니이다. 

어머니가 가시는 곳이면 어디라고 함께 가고 어머니가 머무시는 곳이면 그 어떤 형편의 자리에라도 함께 갈 것이며 장차 어머니와 죽음이라도 같이하겠다고 고백하던 룻의 나중 생을 통하여 하나님은 룻이 다윗 왕의 증조할머니가 되게 하시는 영광의 주인공이 되게 하셨다.

룻이 왕의 조상이 된 것이 귀한 것이 아니다. 동서고금에 왕이나 그 어떤 절대 권력자일지라도 차라리 권력의 정상에 앉지 말았어야 할 불행한 인물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다윗은 달랐다. 아브라함 이후 4천년 역사에 다윗이 위대하다. 모세나 여호수아가 대단하고 사무엘이나 이사야나 엘리야나 엘리사가 위대하지만 하나님은 다윗은 남다른 인물로 붙들어 사용하셨다. 하나님은 다윗을 너무나 마음에 들어 하셨다.(행13:22)

다시 이야기 하지만 다윗의 탄생 배경이 만만치 않다. 다윗의 증조할아버지인 보아스가 누구인가. 보아스의 어머니 라합은 여리고 성에서 살던 원주민 기생이었다. 광야의 정탐꾼들이 여리고 성을 정탐하기 위해서 왔을 때에 저들을 선대한 여인이 라합이었다. 그 라합이 나중에 여리고 성을 함락하고 쳐들어 온 이스라엘의 정탐꾼 출신 살몬과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 보아스이다. 보아스는 자기의 어머니의 결혼도 평범하지 않았듯이 자신도 베들레헴의 처녀들 중에서 결혼하지 않고 외모가 다르고 언어가 다른 모압에서 베들레헴에서 정을 붙이고 살아 보려고 찾아 온 룻을 아내로 맞아 가정을 이루었다. 룻이 누구인가. 남편을 잃은 슬픔을 가슴에 간직하고 살아가던 여인이 아닌가. 그런데 보아스는 그런 것 아랑곳하지 않고 룻을 아내로 맞았다. 저들 부부에게서 태어난 아들이 오벳이고 오벳이 나중에 커서 장가들어 낳은 아들이 다윗 왕의 아버지인 이새이다. 그러니까 다윗으로부터 보면 고조할머니니 라합은 여리고 성 원주민이었고 증조할머니 룻은 모압 여성이었다. 

룻은 우상 숭배의 땅 모압에서 여호와를 섬기는 이스라엘 가정의 아들을 만나 결혼했었다. 그러나 남편 말론이 죽고 나중에 시댁 마을인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에서 만난 보아스의 눈에 맞아서 그의 신부가 되었다. 

룻은 자신이 처한 형편과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적응하며 살아간 여인이었다. 남편이 죽은 후에도 어쩌면 자신보다 열배 백배 더욱 더 큰 슬픔과 충격에 빠져 있던 시어머니 나오미를 돌보며 그와 운명을 같이하는 길을 선택하였다. 언어와 지형과 문화가 낯선 베들레헴에서도 날마다 들판에 나가서 농사가 끝난 남의 밭에 떨어져 있는 이삭을 주어다가 시어머니와 연명하며 살아가는 생활을 책임감있게 감당해 나갔다. 그러던 저의 출입을 눈여겨 보던 베들레헴의 대 지주 총각 보아스는 베들레헴 마을의 그 많은 다른 신부감을 뒤로 하고 모압 여인인 룻을 아내로 맞이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 

룻이 보아스의 아내가 되자 룻의 운명은 일순간에 바뀌었다. 룻과 함께 지내던 시어머니 나오미의 운명도 하루아침에 바뀌었다. 보아스는 나오미를 마치도 룻의 친정어머니 대하듯 정성스럽게 대하였다. 보아스와 룻을 통해 태어난 아기 오벳을 나오미가 품에 안고 키어 낸 것을 보면 평소에 보아스가 나오미를 어떻게 대했나를 알 수 있다. 베들레헴에 살던 이웃 여인들은 아기 오벳을 품에 안고 키우는 나오미를 향하여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룻4:17)고 축복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베들레헴의 여인들은 나오미에게 이런 칭찬과 덕담도 하였다. 현대인의 성경으로 룻기 4장 14-15절을 읽자. 

“여호와를 찬양합니다! 여호와께서 오늘 당신에게 유산을 이어받을 손자를 주셨으니 이 아이가 이스라엘에서 유명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며느리는 당신을 사랑하여 일곱 아들보다 더 많은 정성을 당신에게 쏟았습니다. 이제 이런 며느리가 당신에게 손자를 낳아 주었으므로 이 아이는 당신에게 새로운 삶을 안겨다 줄 것이며 나이 많은 당신을 잘 보살펴 줄 것입니다..” 

클린턴의 부인이었던 힐러리 클린턴(Hillary Rodham Clinton, 1947-) 은 어린 시절에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에게서 좋은 가정교육 영향을 받으며 자라났다. 그녀의 어머니 도로시는 어린 딸 힐러리에게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보다는 매사에 호기심과 자신감을 갖고 자라나도록 늘 격려하였다. 어떤 결정을 내릴 때에도 자신이 여자라는 생각을 뛰어 넘어서서 판단하고 결정하도록 가르쳤다. 힐러리의 아버지는 딸이 어려서부터 크고 작은 주제를 갖고 논쟁하기를 즐겨하도록 기회를 만들었다. 어려서부터 주식 시세표를 보고 그 상황을 분석하도록 가르쳤다. 기회만 있으면 폭 넓은 사고와 식견을 갖도록 가르치고 그런 장을 마련해 주려고 하였다. 어려서부터 남자 아이들 틈에 끼어서 야구도 하고 풋볼 경기도 하도록 하였다. 힐러리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딸이 남자 혹은 남편에게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 독립된 한 인격으로 자신이 여성이란 틀에 갇혀 지내지 않도록 사고의 틀을 형성해 나가도록 도왔다. 
그렇게 자라난 힐러리는 여성 명문 대학인 웨슬리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하였다. 웨슬리 여자대학은 대만의 장개석 총통의 부인 송미령 여사가 졸업한 학교이기도 하다. 힐러리 클린턴은 나중에 남편이 대통령이 되므로 대통령의 부인으로 알려졌지만 올해 71살인 그녀는 백악관에서 물러난 후에도 상원의원도 지냈고 미국무장관도 역임하였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서서 현재의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와 경쟁하기도 하였다. 힐러리의 외동딸 결혼식에서 찍은 3대의 사진을 보자. 

가족이 그러하든 우리는 세상을 그렇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 여기 기웃 저기 기웃하며 남에게 기대고 의지하며 세상 탓하고 남 탓하고 생을 저주하는 인생이 아니라 불행과 불운과 시련과 역경과 슬픔과 위기 앞에서 주저 않지 않고 여전히 앞을 바라보고 새 길을 가는 그런 모습 말이다. 

룻은 젊은 날 겪게 된 사별의 아픔과 슬픔을 딛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자신도 슬프지만 늙고 약해지고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충격과 슬픔 가운데 빠진 이스라엘의 시어머니 나오미와 운명을 같이하였다. 하나님은 그런 선한 양심의 젊은 여인 룻을 주목하셨고 그의 나중 생을 존귀한 믿음의 가정의 안주인이 되게 해 주셨다. 

유럽이나 북미주의 교회들은 교회 곁의 잔디밭에 무덤이 있다. 심지어는 교회의 지하실에 묘실을 마련한 경우도 있다. 존 웨슬리 목사의 무덤은 그가 평생 섬기던 런던의 예배당 뒤뜰에 있다. 교회 앞 길 건너편에는 묘지의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의 수 천기의 묘석이 세워진 거대한 공동묘지가 바로 교회 정문 앞에 펼쳐져 있다. 존 웨슬리 목사는 예배당 곁 사택의 3층 서재에서 창문 밖 길 건너편에 바라다 보이는 어머니 수산나의 묘를 바라다 보며 성경을 읽고 말씀을 묵상하고는 하였다고 전해진다. 그 묘지 중에는 <천로역정>의 작가인 존 번연의 묘도 자리하고 있다. 

어느 정도 규모 있는 교회들 중에는 성도들의 묘역이 대개 교회 바로 곁에 한 곳에 나란히 마련되어 있다. 벤살렘 교회가 예배당을 건축하기 이전의 미국 교회의 경우도 그러하였다. 요즘은 한국 교회 중에는 화장과 납골 문화가 자리 잡으면서 한 곳의 납골실을 미리 확보해서 한 방의 납골실에 차례차례 앞서서 천국을 향하는 성도들이 모셔 지는 것도 볼수 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From the Cradle to the Grave)

라는 표현이 있지 않나. 우리가 한 교회에서 태어나서 영유아 세례 혹은 소년기나 청년기에 아니면 장년기의 어느 날 세례교인이 되고 그 교회의 직분자로 충성되이 주를 섬기다가 때가 되어 주께서 부르시면 한 교회에서 한 솥밥을 함께 먹던 성도들이 앞서거나 뒤서거니 한 곳의 묘실에 모셔지는 것은 신앙 공동체로서 의미가 크다고 본다. 

아브라함도 그랬다. 그가 값을 주고 마련한 막벨라 굴이 아내 사라가 앞서 장레되고 나중에 자손대대로 이삭과 야곱과 요셉의 가족묘로 사용되었다. 야곱과 요셉은 애굽에서 눈을 감았으나 저들의 시신을 막벨라 굴에까지 가져다가 장례하였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고 신앙생활도 그러하여야 하지 않나. 요람부터 무덤까지 생의 우여곡절과 희로애락을 더불어 같이 함께 누리고 나누고 위로하며 돌보며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주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된 우리의 생이 아니겠는가. 


어머니와 나의 백성.
시어머니 나오미를 위로하던 젊은 자부 룻의 고백 중의 하나가 이것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Your people will be my people) 이 말은 대단히 예언적인 고백이 되었다. 지금 남편이 죽고 홀로 된 룻의 입에서 이런 고백이 나온 것이다. 룻의 이러한 고백 속에는 이젠 더 이상 조상들이 섬기던 모압의 우상을 섬기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 중의 한 사람으로 살아가겠다는 선언인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룻을 평생 홀로 살아가는 운명으로 남겨 두지 않으셨다. 모압 사람인 룻은 이스라엘 남자인 베들레헴의 대 지주 총각 보아스를 만나 그의 총애를 입고 가정을 이루었다. 하나님은 룻의 태에 아들을 주셨다. 

베들레헴의 여인들은 룻과 그의 시어머니를 축복하는 말을 하였다. 
태어날 아들은 이스라엘 중에서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기업 무를자요 생명의 회복자요 노년의 봉양자가 되리라고 축복하였다. 

룻과 시어머니 나오미는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그런 축복을 점점 더 누리게 되었다. 룻의 남편 보아스는 베들레헴 뿐만 아니라 주변에 영향력이 있는 대 지주였다. 성문 앞에 둘러 앉아 대소사를 의논하고 결정할 만한 인물이었다. 들판에서 이삭 줍던 모압 출신의 젊은 과부 룻이 이제는 아들 오벳을 낳은 보아스의 아내의 풍성한 축복의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하나님은 자식 없이 남편 잃었던 불운한 모압 여인 룻을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되게 하는 존귀한 반열에 구별시켜 주셨다. 하나님은 불행했던 현장에서 고백했던 룻의 고백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라는 고백을 들으셨고 룻의 나중을 존귀하고 복된 여인의 삶으로 위로하고 축복해 주셨다.  


어머니와 나의 하나님.
룻의 고백의 백미는 이것이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your God my God.

하나님은 모압의 우상 숭배자들 틈바구니에서 나서 자라난 젊은 며느리 룻의 마음속에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 섬길만한 믿음을 선물해 주셨다. 시어머니 나오미가 들을 때에 이런 고백은 감격스럽고 엄청난 고백이 아닐 수 없다. 

나오미는 남편 엘리멜렉과 함께 흉년을 피해 모압 땅에 가서 머물던 사사 시대 말기에 10여년 사는 동안에 남편과 두 아들을 다 잃었다. 그런데 그의 곁에는 여호와 하나님 신앙을 고백하는 예쁜 며느리 룻이 있었다. 이 고백은 평범한 고백이 아니다.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고백이 아니다. 룻은 모압의 어리석은 우상인 여신 그모스를 더 이상 믿고 섬기는 자가 아니었다. 

“모압이여 네게 화가 있도다 그모스의 백성이 망하였도다 네 아들들은 사로잡혀 갔고 네 딸들은 포로가 되었도다.” (렘48:46) 

룻이 자기 백성인 우상 숭배하던 모압의 동족을 등지고 시댁이 믿고 죽은 남편이 믿고 지금 남아 있는 시어머니 나오미가 믿고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 신앙을 고백하고 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고”

그런데 하나님도 룻의 이런 아름다운 고백을 들으셨다. 그리고 그녀의 이런 귀하고 아름다운 신앙고백을 존귀하게 붙들어 보존하고 축복해 주셨다. 룻은 베들레험에서 중년 부인이 되고 노년기를 맞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기까지 주변의 그 수많은 이웃의 여인들로부터 칭찬과 격려와 축복의 말을 늘 들으며 살다가 갔다. 

베들레헴의 여인들은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

이보다 더한 칭찬이 있을 수 있을까. 이보다 더한 덕담을 들어 볼 수 있을까. 룻은 그런 여인이었다. 나오미에게 있어서 룻은 일곱 아들이 부럽지 않은 며느리였다. 보아스는 그런 룻과 특별한 관계인 나오미를 장모 대하듯이 정성스럽게 모셨다. 룻의 행복은 곧 나오미의 행복이요 룻이 받던 칭찬은 곧 나오미에게 더불어 임하는 칭찬이었다.

룻은 어머니 나오미가 믿고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 신앙을 갖고 살아가면서 설명으로 다 할 수 없는 엄청난 복을 받아 누린 하나님의 딸다운 삶을 살았다. 룻의 위대함은 믿음의 후손 오벳과 이새와 다윗의 조상으로 자리매김하는 생을 살았다는 점이다. 

엘리스 샤프(Alice Hammond Sharp, 1871-1972) 선교사는 캐나다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미국으로 이주한 후에 오하이오 주에서 교역자로 일하다가 미국 북감리회 여선교회 해외선교부에서 설립한 뉴욕 브룩클린의 ‘선교훈련센터 뉴욕지회’에 들어가 선교사 훈련을 받았다. 1900년 미국 ‘북감리회 해외여선교회’ 소속으로 조선에 파송을 받았다. 1903년, 32살 때에 서울에 와서 메리 스크랜튼 선교사를 도와 이화학당에서 교사로, 상동교회에서 주일학교와 순회 전도자로 사역을 했다. 그의 한국이름은 사애리시(史愛理施)이다. 38년 동안 조선에서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1940년에 일제에 의해 미국으로 강제 추방되었다. 

남편 로버트 샤프 선교사(Robert Arthur Sharp,1872-1906)는 서울에서 황성기독청년회(YMCA)에서 기독교 청년운동을 활발히 펼치면서 정동제일교회와 배재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04년에 공주선교부 책임자로 임명되고 이듬해 앨리스 샤프와 결혼하여 공주에 최초의 서양식 벽돌 양옥집을 짓고 지내면서 충청권 선교에 매진했다. 그러나 2년 후인 1906년에 장티프스로 34살에 숨지고 말았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비통한 날들을 지내던 부인 엘리스 샤프 선교사는 공주시 영명학교를 설립하였다. 천안과 논산을 거점으로 20여 곳에 교회, 영아육아원, 여학교를 세워서 선교활동과 교육사업을 하였다. 

남편과 사이에서 자녀를 얻지 못한 그는 어렵게 지내는 조선의 딸들을 데려다가 가르쳤다.  이들 중에 유관순과 인덕대학의 설립자 박인덕, 중앙대학교의 임영신 총장, 노마리아, 전밀라 여사 등이 있다. 샤프 부인은 논산읍내에 1909년 영화여학교와 진광남학교를 설립하였다. 진광남학교는 일제의 강압에 의해서 1913년에 폐교되었다. 1928년에도 예배당을 세워 강경, 연산, 은진, 노성 지방을 순회하면서 사회복지활동, 유치원 설립했다. 수 많은 여성 지도자와 남녀 목회자들을 배출했다. LA 파사데나 은퇴 선교사 양로원에서 노년을 지내고 101살에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내 가슴에 있는 하나님 신앙을 누군가에게 계승하자. 저들이 또한 누군가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의 구원의 복음과 사랑을 전하게 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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