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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2:37-42) 2019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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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9-06-12 17:20 조회 11,504 댓글 0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2:37-42)         2019. 6. 9   성령강림주일

성령 강림을 위하여 기도하던 120여 성도들에게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과 같은 성령, 불의 혀가 갈라지는 것과 같은 성령이 임하였다. 저들은 각기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방언을 한 것이다. 오순절의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유대와 각국에서 예루살렘을 방문 중이던 경건한 유대인들이 이러한 현장을 보고 서로 다 놀라워하고 신기해하고 당황해 하였다. 또 어떤 이들은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하고 조롱하기도 하였다. 

그 때에 베드로 사도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큰 소리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그 시간은 성령이 강림한 오순절 날 오후 3시 경이었다. 베드로는 말하였다. 

“지금 시간이 오후 3시인데 너희가 생각하는 것 같이 이 사람들이 술에 취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선지자 요엘이 전한 요엘서의 말씀을 인용하여 증거하였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사도 베드로는 요엘 선지자를 통한 요엘서 2장의“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2:21)는 말씀까지를 인용하였다. 

그리고는 시편 16편의 다윗의 시편을 인용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언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메시야 예언의 내용을 조목조목 증거하였다. 예수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은 어느 날 우연히 되어 진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찍부터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미리 말씀하신 예언의 성취라는 것이다. 

사도행전 2장 30절에 보면, “그는 선지지라.”는 말씀이 나온다. 맞다. 하나님은 임금 다윗을 시편의 기록자일 뿐만 아니라 선지자로 쓰셨다. 
베드로는 성령 충만하여 담대하게 주의 복음을 증거하였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성령 충만한 베드로는 계속하여 큰 목소리로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증거하였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여러분이 보고 듣는 이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 승천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게 하셨습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도 베드로의 이와 같은 복음적인 설교 말씀을 듣고 있던 무리들이 마음에 찔림이 왔다. 그래서 저들은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질문하기 시작하였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그 때 다시 사도 베드로가 나서서 성령을 선물로 받는 길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다. 성령 강림 주일인 오늘 그 말씀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어떻게 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수 있는가”


말씀을 듣고 회개(悔改)할 때.
회개하라는 말은 이전에 몰라서 하나님의 아들을 핍박하고 사형 언도를 받게 해서 십자가 처형을 받도록 한 그 죄를 회개 하라는 말이다. 그 당시 대 제사장 가야바와 장인 안나스를 비롯한 대 제사장의 문중들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서서 예수를 죽이기로 결의 하였다. 유대의 법으로는 사람을 죽일 수 없자. 보디오 빌라도에게 예수를 넘겨서 사형 언도를 받게 하였다. 그리고는 로마의 군대를 동원하여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를 처참하게 십자가에 처형 시켰다. 

그날 골고다 언덕에는 세 개의 십자가가 있었다. 예수의 좌우편의 죄수들은 강도였다. 강도로 처형당하는 자들이었다. 예수를 그들 두 강도와 동일시 하여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극악한 십자가 처형으로 죽임 당하게 한 것이다. 

그 악한 죄를 인정하고 시인하고 회개하라는 것이다. 누가복음 23장 21절에 보면 유대인의 무리들이 소리 질렀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사실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를 죽일 죄목을 찾지 못하여 고심하고 있었다. 차라리 때려서 풀어 놓으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서 더 큰 소리를 재촉하였다. 누가복음  23장 23절에 보면 “그들이 큰 소리를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결국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함성과 고함과 집단적인 요구에 밀려서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언도하였다. 

지금 베드로가 회개하라고 말하는 것은 그런 내용이다. 유대인들이 무리지어서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라고 집단적으로 결의하고 행동하던 그 죄를 회개하란 말이다. 

그리고 예수를 자신을 구원할 주님으로, 그리스도로 영접하라고 촉구한 것이다. 맞다. 회개란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 사람이 가족 간에라도 서먹한 일이 있으면 눈 마주치는 일이 불편해 진다. 부부 간에라도 그렇고 형제자매 간에라도 그렇다. 부모 자식간에라도 마찬가지다. 더군다나 사회 생활하면서 직장이나 사업장이나 그 어떤 인간 관계  가운데서든 서로 서먹한 일이 있으면 서로 말하지 않아도 불편한 것을 서로가 안다. 서로가 느낀다.

생각하여 보라. 지금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후이다. 승천하신지 열흘이 되었다. 승천하실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인 성령을 기다리고 사모하던 120여 성도들에게 성령이 임하였다.

성령 충만을 받은 베드로가 지금 자기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촉구하는 회개가 무엇인가.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가 앞장서고 대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 백성의 장로들이 떼로 몰려다니면서 예수를 협박하고 위협하였다.

누가복음 22장 63절 이하에 보면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 뜰에 끌려간 예수를 지키는 자들이 몹시 심하게 함부로 대하던 장면이 나온다. 63절부터 보면 이랬다.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렸다.
그의 눈을 가리고 물었다.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였다.
 
날이 새자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여서 예수를 그 공회로 끌어들였다.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
예수가 대답하였다.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고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게 될 것이다.”

그 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다 같이 달려 들어서 물었다.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 때 예수께서 짧게 대답하였다.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더불어 웅성거리며 말했다.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겠는가.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 들었다”

그리고는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끌고 빌라도의 법정으로 가서 고발하였다.

죄와 흠과 티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이처럼 집단행동을 통해서 십자가 처형으로 몰아갔던 유대인 지도자들과 유대 백성들의 죄를 회개하라고 촉구한 것이다. 
맞다. 회개(悔改)란 무엇인가. 인간의 제일가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우상을 숭배하며 하나님을 멀리하고 배역하였다 요즘 예레미야서에서 반복하여 대하는 내용이 그것이다. 우리를 지으시고 이끄시고 돌보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을 숭배하고 인간이 만든 우상을 신처럼 섬기는 것이 죄이다. 그런 죄의 상태에서 돌이키는 것이 회개이다.

메타노이아(μετανόια) 즉 회개(悔改)란 그러므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회개란 단순히 몇 가지 잘못된 생활 태도나 잘못된 생활 습관을 고치는 정도가 아니다. 하나님 안에서 삶의 목적을 바꾸고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 회개이다. 

삶의 방향이 잘못된 상태에서 열심을 내는 것은 도로에서 역주행하는 광란극과 같다. 등산객이 산 속에서 방향을 잃은 상태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이동하고 숲 속을 오르고 내려도 소용없다. 방향과 목적지를 분명하게 한 후에 열심을 내야지 그렇지 않으면 목적지에서 점점 멀어지게 되고 낙오하거나 영영 실종될 수도 있다. 최악의 결과가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회개가 시작이고 출발점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나의 삶의 태도와 방향을 분명하게 하는 것이 회개이다. 

교회에 다니는 것 혹은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과 회개는 그 차원이 다른 것이다. 회개를 경험하지 않고도 자기 열심을 갖고 그냥 교회가 좋고 교인들과 교제하는 것이 좋으니까 교회에 다닐 수 있다. 그런 것을 가지고 신앙생활 한다고 할 수는 없다. 

회개한 성도의 삶이란 어떠하여야 하나.
예레미야 애가 3장 40절과 41절을 찾아보자.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우리의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

이것이 회개이다. 그렇지 않나. 베드로를 보라. 예수께서 보실 때에 제자 베드로는 얼마나 비겁하고 얼마냐 유악하고 얼마나 소심하고 얼마나 실망스러운 존재였나. 그런 베드로가 어떻게 해서 성령 충만을 받고 지금 이처럼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복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인가. 베드로는 처절한 회개의 과정을 거쳤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는 고백을 하던 당시의 그 본래 진실한 신앙 고백자의 상태를 되찾은 것이다. 그렇다. 성령 충만을 받는 시작은  주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던 자신, 하나님을 등 돌리고 세상을 가까이 하던 자신, 예수로부터 멀어지고, 복음으로부터 멀어지고, 은혜로부터 멀어져 있던 자신의 상태를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다. 예수께로 향하는 것이다. 그럴 때에 성령이 충만해 지게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罪) 사(赦)함을 받을 때.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 예수는 니고데모에서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고 하였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는 말씀도 해 주셨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가 전하는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는 말씀은 옳은 말이다. 맞다. 회개 하고 세례 받는 것은 죄사함을 받는 길이다. 죄 사함은 회개의 결과이다.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회개가 필수이다. 세례를 받되 진정한 회개가 없이 물 세례를 받는 것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일이다. 하나님을 속이는 일이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물로 세례를 받을 때에 성령 세례로 받게 되고 불 세례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래야 죄 사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에 283장 찬송 “나 속죄 함을 받은 후”라는 찬송을 부를 때에 감격이 있고, 기쁨이 있고, 마음이 새롭고, 성령의 임재를 확신하게 되고, 보혈의 공로가 은혜로 여겨지게 되고 마음에 한없는 평안이 임하게 되는 것이다. 

1.나 속죄함을 받은 후 한 없는 기쁨을
다 헤아릴 수 없어서 늘 찬송합니다
[후렴]나 속죄 받은 후 나 속죄 받은 후 주를 찬미하겠네
나 속죄 받은 후 주의 이름 찬미하겠네

2.나 속죄함을 받은 후 내 맘이 새로워
주 뜻을 준행하면서 죄 길을 버리네

3.나 속죄함을 받은 후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 자녀된 것을 곧 증언합니다

4.나 속죄함을 받은 후 보혈의 공로로
내 주의 은혜 입으니 늘 평안합니다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성도답게 사는 길은 죄사함의 기쁨을 누리며 증거하며 사는 일상이어야 한다.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는 대상은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의 구분이 없다. 천하만국의 모든 백성들에게 주시는 구원의 초청인 것이다.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救援) 받기를 원할 때.
40절의 ‘패역한 세대’라는 표현은 회개하지 않고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마땅한 일로 여기며 지내고 있는 유대인들의 파렴치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에 대한 지적이다.

예수께서도 당시의 세상을 패역한 세대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누가복음 9장에 보면 변화산에서 내려오신 예수께서 귀신들려 부르짖고 경련하고 거품을 흘리고 몹시 상하게 하는 상태의 외아들을 데리고 온 아버지와 아들을 만나셨다. 산 아래서 예수를 기다리던 아홉 명의 제자들이 해결하지 못한 귀신이었다. 그 때 예수께서는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에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에게 참으리요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눅9:41)고 말씀하셨다. 예수는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자 그 아이가 깨끗하게 나았다. 건강해진 외아들을 그의 아버지에게 돌려주었다. 그 현장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에 놀라워하였다. 

그렇다. 그 당시나 오늘 날이나 세상이 패역하다. 우리는 이 패역한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 받은 세대다운 삶을 살아가야 한다. 구원을 받는 다는 것은 내 스스로의 의지나 선택으로 가능한 것이 절대 아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너희는 그 은혜(恩惠)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救援)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膳物)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2:8-9)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救援)을 받으리라.”(행16:31)

“다른 이로써는 구원(救援)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4:12)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救援)에 이르느니라”(롬10:10)

그 앞 절인 로마서 10장 9절에 보면,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是認)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救援)을 받으리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獨生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永生)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審判)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救援)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3:17)

할렐루야.
우리 각 사람 모두가 어른 아이 젊은이 노인 할 것 없이 
누구나 다 회개하고 세례 받고 죄 사함을 받아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수를 점점 더해가는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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