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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사람들(히11:17-31) 2019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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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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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9-03-25 22:02 조회 11,800 댓글 0
 
                   믿음의 사람들(히11:17-31)            2019. 3. 24


성경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말씀 앞에서 믿음으로 살았던 위대한 신앙의 선조들의 일화로 가득하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으나 불신앙으로 살았던 아쉬운 인물들의 이야기도 적지 않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으로 살았던 신앙의 선조들의 믿음을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아담과 하와에게서 태어난 가인과 아벨 두 형제는 어느 해, 어느 날 하나님께 제사하였다. 하나님은 아벨과 그의 제사는 받으셨으나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다. 그 후에 형 가인은 동생 아벨을 쳐 죽였다. 히브리서 11장 4절은 “아벨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고 하였다. 이처럼 아벨이 믿음의 사람이라면, 가인은 하나님 앞에서 불신앙의 사람이었음이 분명하다.

에녹의 같은 시대에 살았던 인물들이 얼마나 많았겠나. 그러나 성경은 에녹의 믿음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간 신앙의 사람이었다. 성경은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히11:5)고 하였다. 맞다. 창세기 5장 21절과 22절에 보면, 에녹은 아들 무드셀라를 낳은 후에 300년 동안을 늘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서의 생을 살았다. 

믿음으로 살았던 또 한 사람이 노아였다. 노아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순종하며 방주를 준비한 주인공이다. 노아는 하나님을 향한 분명한 믿음으로 살아서 자신과 가족 모두 여덟 식구를 다 구원하였다. 노아의 생애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 앞에서 짓는 죄가 무엇인지를 자신의 순종의 생애를 통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교훈한 인물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노아의 믿음에 대하여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고 칭찬하였다.

히브리서 8장 8절부터 18절까지 긴 분량 가운데 소개된 믿음의 인물이 아브라함이다.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에게서부터 시작해서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의 믿음 까지를 소개하고 있다.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갈 바를 알지 못하였으나 순종함으로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언약을 믿고 따랐던 믿음의 사람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니님의 언약의 선물로 아들 이삭을 낳아 키웠다. 아브라함 100세, 아내 사라 90세에 아들 이삭을 낳은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복이 아닐 수 없다.

본문은 그렇게 하나님이 베푸신 기적의 은혜로 낳아 양육한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린 믿음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연세 많아 가던 아브라함과 아내 사라에게 있어서 아들 이삭은 저들의 목숨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이삭을 모리아 산 꼭대기에 데려다가 번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하셨다. 그 때 그 일을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試驗)하신 경우라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시험이란 유혹(誘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시험(試驗)하신 것이다. 영어 성경에 보면 ‘test'하셨다고 했다. 학생은 그 때 그 때마다 주어지는 시험을 잘 치러야 우등생도 될 수 있고 장학생도 될 수 있고 점점 그 장래가 밝아질 수 있다.

학생이 어려서 부터 그 때 그 때 주어지는 과목마다의 시험을 잘 준비하고 잘 치루고 좋은 성적을 관리하면 좋은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고 유능한 장래가 준비될 수 있다. 시험이란 그런 것이다. 시험이란 것이 학교 교실의 책상 앞에 앉아서 시험 문제 하나 하나를 풀어 가는 시험도 있고 평생을 살아가면서 주어지는 별의 별 인생의 시험들이 수 없이 많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받은 시험은 무엇이었나.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물로 바치라는 시험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사흘 길을 걸어 간 아브라함은 “불과 나무는 여기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창22:7)하고 묻는 아들 이삭의 질문 앞에서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창22:8)고 대답해 주었다.

모리아 산의 하나님이 정하신 곳에 도착한 아브라함은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손을 내밀이 칼을 잡고 그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잡으려고 하였다. 상식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 벌어진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대로 순종하였다. 아브라함이 칼을 치키어 들고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잡으려 하는 그 순간에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서 아브라함의 이름을 두 번 반복하여 부르셨다. 다급하신 하나님의 개입 장면이다. 그 때 천사가 아들을 향하여 칼을 치켜 든 아브라함에게 한 말이 이것이다.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라도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2)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던 아브라함의 믿음은 한 마디로 하면 순종하는 믿음이다. 순종이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가. 나는 어떤가. 내 시간, 내 재물, 내가 귀하게 여기는 그 어떤 그 무엇을 어느 정도 드리는 것이 순종의 전부인가. 아브라함은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귀한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시험 앞에 담담한 믿음의 증거를 보였다. 

아브라함이 칼을 치켜 든 손을 멈추고 주변을 돌아보니 수풀에 걸려 있는 숫양을 발견하였다. 하나님은 수풀에 걸려 있는 숫양을 아들 이삭 대신에 번제물로 바치도록 예비 해 주셨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아들 대신에 그 숫양으로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렸다. 그리고 그 곳 이름을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는 뜻인‘여호와 이레’라고 하였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이란 무엇인가. 나이 많던 아브라함이 그 동안 없던 아들을 낳게 된 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듯이 아들 이삭이 죽고 사는 문제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아들 이삭을 통하여 후손을 하늘의 별처럼, 해변의 무수한 모래처럼 많게 번성하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 이루실 줄을 믿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당신의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하나님이 하시면 능히 나를 통하여 이런 일도 하실 수 있으시고 저런 일도 하실 수 있으시다는 분명한 믿음이 있는가. 
히브리서 11장 1절이 무슨 말씀인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하였다. 맞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증거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실상처럼 마음에 믿고 그림 그리고 바라며 소망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삭과 야곱과 요셉의 믿음에 대하여 다른 여러 가지를 언급하지 않았다. 단지 이삭이 연세 많을 때에 아들 야곱에 대하여 축복하던 축복(창28:3-4), 창세기 48장에서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 즉 손자들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머리에 손을 어긋나게 얹고 축복하던 그 축복에 대하여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창세기 50장 마지막 부분에 보면 요셉이 110세에 애굽에서 눈을 감을 때에 장차 자신의 뼈를 가나안에 옮겨 장례할 것을 명하였다. 이것은 요셉의 동족인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애굽에서의 종살이가 끝내고 출애굽하여 가나안을 향할 날이 후손의 때에 어느 날 분명히 있을 것을 믿는 믿음이 담긴 예언이 아닌가. 에서, 야곱, 요셉에 이어지는 믿음의 바탕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언약의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며 자손이 번성하리라는 언약에 대한 분명한 믿음을 의미한다.

  
믿음의 사람 모세와 여호수아.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사람들에 대한 말씀 중에 아브라함 이상으로 비중있게 다룬 인물이 모세이다. 23절은 모세의 부모의 믿음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히브리 사내 아기들을 죽이라는 애굽의 바로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고 석 달 동안이나 모세를 숨겨 키울 수 있었던 것은 모세의 부모에게 그런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들키는 날에는 가족이 모두 몰살당할 것이 뻔한 대도 두려움을 이기고 석 달 동안이나 아들 모세를 숨겨 키우던 모세의 부모의 믿음은 장차 이 아들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이 있으시다는 믿음이 아니었다면 감히 그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나일 강에 갈대 상자에 담아 떠내려가게 버려진 모세를 건져 낸 것은 바로 왕의 딸 공주였다.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가 분명한 일이었다. 모세는 누이 미리암에 의해서 어머니 요게벳의 품에 안겨 왕궁 안으로 들어갔다. 왕궁 안에서 친 어머니의 젖을 먹으며 클 수 있었다. 이 얼마나 소설 같은 이야기인가.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면 무슨 일이든 하실 수 있으시다. 

히브리서 기자가 강조하는 모세의 믿음이 무엇인가.

거절(拒絶)하는 믿음
고난(苦難)을 극복하는 믿음
그리스도를 위하여 수모(受侮)를 감내하던 믿음
상(賞) 주심을 바라보는 믿음
하나님 안에서 인내(忍耐)하는 믿음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한 믿음
홍해를 육지처럼 건넌 믿음
추격하던 애굽의 군대가 수장(水葬)되는 것을 목격한 믿음이다.

믿음이 믿음다워지려면 거절 할 때 거절 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은 믿음의 분별력이며 영적 성숙함의 반증이다. 창세기 39장 8절에 보면 요셉은 여주인의 성적 유혹을 거절하였다. 그 결과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불행이었다. 그러나 요셉은 떳떳하게 감옥에 갇히는 답답한 날들이 인연이 되어서 바로 왕 앞에 불려 나가 왕 바로의 꿈을 해석하는 자리에 세움 받았다. 요셉은 그 날로 왕의 인정을 받고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다. 왕은 어인을 요셉의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왕이 타는 수레에 버금가는 화려한 수레에 타게 하고 전국에 다니며 요셉의 명령에 순종할 것을 명하였다. 요셉은 애굽의 칠년 흉년 후에 닥치는 칠년 흉년을 넉넉히 극복하게 한 명석한 총리 역할을 잘 감당하였다. 여 주인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거절’한 요셉의 믿음을 하나님은 주목하셨다. 하나님은 그를 하나님의 존귀하게 쓰임 받는 애굽의 총리의 삶으로 평생을 이끄셨다. 30살에 총리가 된 요셉은 110살에 하나님 앞으로 돌아갈 때까지 총리였다. 요셉은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을 가까이하던 거절할 줄 알던 분별력이 있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모세가 바로 그러한 거절하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모세는 40살에 왕궁 밖에 나갔다가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과 애굽 사람에게 괴롭힘을 받는 현장을 목격하였다. 모세는 애굽 사람을 쳐 죽여 모래 속에 시신을 감추었다. 다음 날 모세의 범죄 사실이 소문 난 것을 알았다. 모세는 황급하게 애굽을 떠나서 미디안 광야로 피신하였다. 그 당시 바로 왕의 딸 공주의 총애를 받던 모세가 세상에 나가서 사람 한명 죽인 것은 별로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던 때였다. 그러나 모세는 왕족에게 주어진 특권을 포기하고, 거절하고 미디안 광야로 피신하였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의 그런 행동을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한 경우라고 해석하고 있다. 

믿음 생활다운 믿음생활이 무엇인가. 거절 할 때 거절 할 수 있는 분별력과 용기와 결단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지 않나.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돌아  보라. 거절해야 할 때 거절하지 못해서 스스로 실망스러운 모습으로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은가. 술 주면 술 마시고 떡 주면 떡 먹고 그런 식으로 거절을 모르며 세상을 살다가는 큰 코를 다치고 마는 것이 세상살이의 교훈이 아닌가.

미디안으로 피신한 모세는 그 곳에서 장가들고 두 아들 낳아 키우며 나이 80세가 되도록 장인 이드로의 양떼를 치던 목자 생활을 이어 갔다. 그런 그에게 호렙산의 떨기나무가 불에 붙는 환상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다. 동족을 출애굽 시킬 지도자로 부르신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발의 신을 벗고 애굽의 바로 왕 앞에 나설 수 있었던 믿음을 성경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긴 믿음”이라고 평가하였다. 히브리서 기자가 모세의 생애의 흔적을 ‘그리스도의 예표’적인 삶의 모습으로 해석한 것이 흥미롭다. 

모세는 애굽의 왕실에 머물러 있었다면 바로 왕의 대를 이을 제 1순위였다. 그런 그가 고난을 자초하여 미디안 광야로 나섰고 온갖 고생을 사서 하였다. 그러나 지내 놓고 보니 하나님은 광야 길을 손금 보듯 익숙하게 알던 모세를 통하여 동족을 출애굽 시키고 광야의 고난을 함께 짊어지게 하는데 앞장  서게 하셨다. 

생각하여 보라. “갈대 상자에 담겨 죽을 뻔한 이스라엘 아기가 왕의 공주에게 발견되었다. 그 아기는 애굽 왕실에서 자라나고 나중에 하나님을 모르는 나라 애굽의 왕으로 출세하였다. 그는 우상숭배의 나라 애굽에서 권력을 누리며 호의호식하며 떵떵거리며 잘 살았다. ”이런 내용이 모세의 생애의 전부라면 오늘 날 우리가 성경에서 모세에 대한 내용을 대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러나 히브리서 11장의 믿음 장에서 모세의 믿음을 자세하게 다루는 이유는 그런 우여곡절과 비운과 고난의 시대에 노예의 땅 애굽에서 태어나서 살던 이스라엘사람 모세의 믿음으로 통하여 하나님이 이룩하신 일들이 은혜가 되고 교훈이 되고 감동이 되기 때문에 ‘모세, 모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여 보라. 우리가 ‘새로운 꿈의 공동체’라는 거룩한 부르심을 갖고 지난 10여년을 여기까지 왔다. 올 해 사순절에도 적지 않은 성도들이 새벽마다 고단하지만 모여 날마다 일정한 히브리서의 말씀을 대하며 부르짖어 기도하며 하루 하루를 생활하고 있다.

우리가 왜 기도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기도하는가. 우리는 무엇 때문에 기도하며 살아가야 하는가. 어디서나 기도할 수 있고 언제나 기도할 수 있지만 이른 새벽 가깝지도 않은 먼 거리를 새벽 4시면 일어나서 달려 와 하나님의 집에서 더불어 통성으로 기도하고 말씀을 붙드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가 바라고 소망하는 믿음의 현주소가 어디인가. 히브리서 11장 6절은 말씀한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란 어떤 믿음인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가 반드시 가져야 하는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나에게 하나님이 영원히 살아계시되 오늘 날, 지금 나의 삶의 현장에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는 분명한 믿음이 있는가.
하나님은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고 부르짖고 구하고 두드리며 마음의 소원을 아뢰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고난을 극복하고 환난을 이기며 핍박과 시련과 도전과 유혹과 곤고함 중에서라도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면 반드시 상 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이 나에게 있는가. 

나의 믿음이 히브리서 기자이 이미 말한 대로 겨우 젖을 먹을 정도의 어린 아이의 믿음 상태에 머물러 있지는 않은가. “단단한 음식도 받아먹을 만한 장성한 어른의 믿음의 분량이 내게 있는가” 스스로 물어 보고 스스로 대답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이 어린 아이의 믿음에서 성숙하고 온전한 믿음이 되기를 원하신다.

주를 위해 헌신할 시간이 없는 게 아니라 그럴 만한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닌가.

주를 위해 드린 재물이나 십일조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런 만한 믿음이 내게 없는 게 아닌가.

주를 위해 드릴 재주나 경험이나 은사가 없는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해 섬길만한 믿음이 지금 내게 아직 없는 게 아닌가 말이다. 
모세은 죽기를 각오하고 바로 왕 앞에 나갔다. 모세는 형 아론과 함께 하나님이 바로 왕의 때에 내리시는 열 가지 재앙을 보았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모세의 힘으로 동족들에게 유월절을 행하게 할 수 있었겠나. 하나님은 유월절 그 밤에 양을 잡아먹고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게 하셨다. 이를 행하지 않은 애굽의 집집마다 왕으로부터 온 백성들의 장자를 그 밤에 치셨다. 유월이란‘넘었다’는 뜻이다. 그 밤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음을 넘어,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 광야로 나섰다. 하나님이 모세의 때에 모세를 통하여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여 그렇게 하게 하신 것이다. 순종하면 살고 순종하며 기적이 일어나고 순종하면 하나님 안에서 별의 별 기사와 이적을 날마다 대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증거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히11:1)라는 말씀은 영원한 진리요 언약의 말씀임이 분명하다. 30절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여리고 성이 무너진 역사의 현장에 앞장 섰던 여호수아의 믿음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29절에 보면 ‘믿음으로 그들은’이라고 하였다. 여호수아는 그들 믿음으로 홍해가 육지처럼 열리는 기적을 체험한 주인공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 여호수아는 모세도 못 경험한 여리고 성 함락의 현장에 있었다. 모세도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여호수아는 위대한 믿음의 선봉장이었다. 모세와 같은, 여호수아와 같은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길 소망하자. 할렐루야


믿음의 사람 기생 라합.
기생 라합이 누구인가. 여호수아 2장에 보면 라합은 여호수아가 보냈던 두 정탐꾼들을 숨겨 주었던 여리고 성에 살던 원주민이다. 몸을 팔던 창기이고 기생이었다. 그런 저가 구원 받았고 정탐꾼 중의 한 사람이었던 살몬의 아내가 되었다. 기생 라합에게서 태어난 아들이 룻기에서 만나는 베들레헴의 대 지주 보아스이다. 그러하니 기생 라합은 다윗 왕의 고조할머니이다. 놀랍지 않나. 기생 라합은 광야에서 들려온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소문을 믿었다. 기생 라합은 혈육으로 여리고 성민들과 한 편이 되어 사는 길에 연연하지 않고 장차 임할 하나님의 새로운 날을 마음에 품고 살았다. 

맞다. 구원이란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다. 구원 받는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에 주어지는 복이다. 라합이 창기였다. 기생이었다. 그런 그가 여리고 성이 무너지고 함락될 때에 보호 받았다. 기생 라합의 믿음이 무엇인가. 본문 31절에 보면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는 믿음”을 소유한 믿음의 여인이었다. 여호수아 6장 17절에 보면 여리고 성이 무너지던 날 여호수아가 특별히 명령하였다. “이 성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되 기생 라합과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모두 살려 주라 이는 우리가 보낸 사자들을 그가 숨겨 주었음이니라.”

할렐루야. 여리고 성민들이 멸족당할 때에 기생 라합과 그의 가족들만 구원 받았다. 야고보서 2장 25절에 보면 기생 라합의 믿음은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믿음’이라고 칭찬하고 있다. 

믿음으로 승리하는 개인과 가정과 가족과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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