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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입은 자가 낳은 아기(눅1:26-38) 2018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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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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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8-12-16 22:54 조회 12,656 댓글 0
 
            은혜를 입은 자가 낳은 아기(눅1:26-38)   2018. 12. 16



아브라함이 나이 100세에 아들 이삭을 낳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한나가 아들 사무엘을 낳을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연세 많던 제사장 사가랴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세례 요한을 낳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동서고금에 자녀가 태어나는 일은 인간의 몫이 아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생명의 공급자이신 하나님의 섭리이다. 

유대 땅 갈릴리의 한 변방에 있는 작은 시골 마을인 나사렛의 요셉과 마리아는 서로 결혼하기로 약속한 사이였다. 그런데 정혼 기간 중에 있던 마리아의 태에 하나님의 아들이 수태되었다. 천사 가브리엘은 이러한 사실을 마리아에게 전하여 주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 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이 말을 들은 마리아는 놀라워하고 무서워하였다.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하고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그 때 천사 가브리엘이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는 말을 반복하여 해 주었다. 생각하여 보라. 마리아가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한 이 역사적인 사건은 마리아 자신의 결정이 아니다. 그의 소원도 아니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마리아를 선택하여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할 여인으로 정하신 것뿐이다. 이것은 ‘은혜’라는 단어로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역사적인 일이 시작된 것이다. 

나사렛의 마리아가 요셉과 결혼하여 평생을 살았다면 이천년이 지난 오늘 날 우리가 유대 땅 갈릴리 시골 마을인 나사렛에서 살아가 이 세상을 떠난 평범한 시골 부부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마리아가 우리에게 있어서 마리아인 이유는 그는 하나님의 아들을 낳은 역사적인 여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자였다. “은혜를 입은 자가 낳은 아기”라는 제목으로 본문을 좀 더 자세히 묵상하자.

 예수라고 이름 지어진 아기.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마리아가 낳은 아기의 이름은 남편될 요셉이나 어머니가 될 마리아가 지은 이름이 아니다. 예수의 이름은 하나님이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서 이 땅에 태어나기 전에 지어 주신 이름이시다. 예수가 마리아의 태에 잉태되는 일을 알리면서 곧 태어날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서 지어 주셨다. 예수란 이름의 뜻은 “자기 백성을 자기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이다. 즉 구세주라는 뜻이다. 그렇다. 예수는 그 이름처럼 이 세상의 백성들을 저들의 죄에서 구원하여 영생하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누리게 해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이름을 갖고 살아간다. 이는 사물도 마찬가지이다.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은 각종 가축들과 들짐승들과 공중에 날아다니는 새들의 이름을 아담이 짓도록 하셨다. 아담이 이름을 지어 부르자 그 것들이 이름이 되었다. 

이름은 그 대상을 분명하게 상징화 하고 특징짓는 역할을 한다. 시인 김춘수의 시 중에 ‘꽃’이란 시가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시인 김춘수(金春洙, 1922-2004)는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다.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던 중에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다가 붙잡혀서 7개월 동안 감옥 생활도 하였다. 귀국 후에는 중고등학교 교사와 경북대 교수, 영남대 학장을 지냈다. 

그가 시에서 표현하는 ‘그’라는 상대방의 존재에 대하여 그의 이름을 불러 줄 때에 그가 나에게 있어서 꽃이 되어 주었다는 의미가 무엇일까. 이름을 불러준 다는 것은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누가 나를 보고 ‘아저씨’혹은 ‘아줌마’라고 부를 때 내 기분이 어떤가. 그러나 반면에 상대방이 나의 이름을 분명하게 불러 주고 사회적인 신분도 분명하게 호칭해서 불러 줄 때의 기분은 어떤가.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은 하나님을 수도 없이 부리고 예수의 이름을 천번 만번 부르면 살아간다. 예수라는 이름은 ‘구주’라는 뜻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여호와가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예수’즉 ‘예수스’(ιησουs ) 라는 구약의 ‘여호수아’와 같은 이름이다. 유대사회에서는 흔한 이름들 중의 하나이다. 모세의 시종이었던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와 같고 모형과 같은 생을 산 이스라엘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였다.  

모세가 위대하지만 여호수아가 뛰어난 지도자였다. 하나님은 모세가 세상을 떠난 후에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앞장 세우셔서 요단 강 건너 가나안을 점령하는 일에 선봉장으로 삼아 쓰셨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쓰임 받은 존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 이름 여호수아가 그러하듯 유대인들은 마리아를 통해서 이 땅에 보냄을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예수’라고 부르며 뒤 따랐다. 예수는 그 이름의 뜻대로 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여호와의 구원을 넉넉하고 완전하게 이룩하신 구세주이시다. 

그렇지 않나. 나에게 있어서 예수의 이름은 어떤 의미인가. “예수님!” 하고 부르면 나의 마음이 어떠한가. 왜 우리는 기도를 마칠 때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하고 기도하나. 

91장 찬송 후렴에 보면 “예수의 이름은 세상의 소망이요 예수의 이름은 천국의 기쁨일세.”라고 찬송한다. 93장 찬송은 매 구절마다 “예수는 나의 힘이요 내 생명 되시니/ 예수는 나희 힘이요 내 친구 되시니/ 예수는 나의 힘이요 내 기쁨 되시니/ 예수는 나의 힘이요 내 소망되시니”라고 찬송한다. 93장 찬송의 매 구절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다. “위로하고 힘주실 이 주 예수/ 귀한 열매 주시는 이 주 예수/ 의지하고 따라갈 이 주 예수/ 나의 생명 나의 기쁨 주 예수”

맞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가는 것은 이런 것이다. 예수는 나의 삶의 이유 나의 삶의 대답 나의 삶의 전부 라는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 안에 소망있네>라는 찬양이 있다.
 
예수안에 소망있네 내 빛과 힘 나의 노래
환란중에 도우시는 주 나의 견고한 반석
크신 사랑 크신 평화 두렴에서 날 건지네
내 위로자 내 모든 것 주 사랑안에 서리라

완전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되셨네
주 사랑과 그 공의로 세상을 구원하셨네
십자가에 주달리사 그 진노를 거두셨네
내 모든 죄 담당하신 주 은혜안에 살리라

죽임당한 세상의 빛 어둠속에 누위셨네
영광스런 그의 날에 무덤에서 부활했네
승리하신 우리 주님 원수들을 물리쳤네
나 주의 것 주 나의 것 주 보혈안에 살리라

주 예수의 능력으로 내 속에 두려움 없네
나의 사는 모든 순간 주께서 다스리시네
어느 것도 주 손에서 날 빼앗지 못하리라
주 오실 날 기다리며 주 능력 안에 서리라


Stuart Townend 의 가사에 Keith Getty이 곡을 붙인 “In Christ Alone”이란 제목의 이 찬양은 지난 2001년에 세상에 알려진 후에 영어 예배 찬양에 가장 자주 불리어지는 찬양 중의 한 곡이다. 왜냐하면 그 가사가 예수 이름의 권세와 능력을 찬양하는 복음적인 내용이기 때문이다.  
  

큰 자가 될 아기.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이렇게 전해 주었다. “그는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 질 것이요” 장차 네 몸에서 태어날 아기는 평범한 아기가 아니라 큰 자가 될 아기라고 예언해 주었다. 큰 자란 의미가 무엇인가. 이 세상에 누가 큰 자인가. 

넓은 땅을 통치하는 왕이 큰 자인가. 수 백 만 아니 수천만의 군대를 거느린 통치자가 큰 자인가. 아니면 세계에서 제일가는 부자이면 큰 자인가. 세계적인 명문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면 큰 자인가. 수 백 가지의 발명품을 연구해낸 과학자이면 큰 자인가. 달나라에 다녀왔으면 큰 자인가. 인물이 뛰어나면 큰 자인가. 유튜브에 조회수 수억 명을 팔로어로 하는 인기 연예인이면 큰 자인가.  

왜 천사 가브리엘은 예수를 큰 자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는가. 그렇지 않나. 이 세상에 인류 역사에 예수보다 큰 자가 누가 또 있는가. 예수의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을 인간에게 준 이가 있는가. 예수의 십자가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을 준 역사적인 인물이 있는가. 공자 맹자 노자 석가모니 그 누구를 말한들 어떻게 감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자의 죽음과 그 대속의 사랑을 대신 할 자가 있는가.

“하나님의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한국 교회 역사에 주기철, 손양원, 신홍식 목사 등을 귀히 여기는 이유가 무엇인가. 저들은 그들의 삶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크나 큰 사람을 몸소 실천한 생을 살다가 주님 앞으로 돌아갔기 때문이 아닌가.

우리나라사람들은 일본 사람들을 별로 좋아 하지 않는가. 아니 싫어하고 늘 못마땅하게 여긴다. 우리는 일본과 지난 긴긴 세월 동안 그런 복잡한 관계 가운데 이웃 나라로 살아 왔고 앞으로도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이웃나라로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그런 일본인들이지만 일본인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그를 미워할 수만은 없는 한 사람이 역사에 있었다. 그는 전쟁이 한창이던 1920년대에 일본의 전쟁에 반대하다가 감옥에 갇혀 모진 고초를 겪었던 사람이다. 한번은 천황 앞에 끌려 나갔다. 천황이 물었다. “네가 나를 숭배하는 대신에 예수를 믿고 예수게 충성을 맹세한다는데 사실이냐”그는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감히 그렇게 대답하는 이유를 묻자 그는 천황 앞에서 똑똑한 음성으로 말했다. “난 조상 대대로 천한 기생의 피가 흐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나와 같은 더럽고 추한 자의 죄를 예수의 보혈 피로 깨끗하게 용서해 주셨습니다. 나를 구원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 어찌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충성을 맹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소신이 분명한 청년 가가와 도요히코의 대답에 감동을 입은 천황은 그 청년을 풀어 놓아 주게 하였다. 

그는 1940년대에는 개인 자격으로 일본의 중국 침략을 중국에 사죄하였다.  그 사실이 알려 지자 그는 일본 정부로부터 모진 탄압과 고초를 다시 또 겪었던 사람이다. 그도 모자라 우리나라의 자유당 정권시절,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와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일본이 저지른 과거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던 사람이다. 

그는 태평양 전쟁이 끝난 뒤에는 일본 정부의 무서운 탄압 속에서도 인권 운동을 전개했던 사람이다. 여성 운동에도 최 일선에서 앞장섰던 사람이기도 하다. 그의 이름은 하천풍언(賀川豊彦) 즉‘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 1888-1960)이다. 

100여 년 전에 일본에서 갓 안수를 받은 ‘나가노’라는 젊은 목사가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 일본에는 어딜 가도 교회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런 여건임에도 그는 사방 100km 안에 기독교인이 단 한 사람도 없는 지역에 가서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서 낯 선 지역을 찾아 나섰다. 그 곳이 
일본 북부의 ‘가나사와'라는 지역이었다. 

이 젊은 목사는 천막을 치고 개척교회를 시작했다. 자신의 아내와 아이 둘을 앉혀 놓고 창립예배를 드렸다. 5년 동안 단 한 사람도 교인 삼지 못하였다. 그런데도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며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 곳에서 믿는 자가 생기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다.

5년이 지난 어느 수요일 저녁에 천막의 커튼을 젖히고 드디어 첫 번째 교인이 들어왔다. 깡마른 외모의 남자 청년이었다. 나가노 목사는 열정을 다하여 설교하였다. 예베 후에 그 청년과 함께 식탁에 마주 앉았다. 

그런데 식사 도중에 이 청년이 욱하며 피를 토했다. 그는 폐병환자였다. 나가노 목사가 순간적으로 당황하였다. 갈등이 생겼다. “이 청년과 함께 계속 식사를 해야 하는가.” 나가노 목사는 자기 손으로 식탁에 쏟아진 핏덩이를 깨끗하게 치웠다. 그리고 음식을 더 가져다가 그 청년과 함께 먹었다. 

그 청년은 일본의 내무 대신을 지낸 유명 정치인이 기생을 통해서 낳아 놓은 사생아였다. 그의 친 아버지와 그를 낳아 준 어머니는 그가 네 살 때 모두 세상을 떠났다. 4살 이후로는 고아원에서 온갖 천대를 받으며 자라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외롭고 고독하고 우울한 날들을 지냈다. 죽으려고 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기생이었고 외할머니도 기생이었다. 

그런 그가 우연히 복음을 접하게 되어 큰 은혜를 깨닫고 신학교에 들어갔다. 신학교를 다니는 도중에 폐병환자가 되었다. 신학교도 그만 두어야 했고 다니던 교회도 멀리하게 되었다. 그는 늘 심하게 기침하고 가끔 씩 피도 토할 정도로 결핵의 병세가 깊어만 갔다. 

그는 “성경은 거짓말이고 예수는 거짓말쟁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누구에게 돈을 요구하지 않았다. 누구에게 치료비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의 가깝던 사람들은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점점 그를 멀리하였다. 그의 곁을 떠나갔다. 그는  늘 기침을 하였고 점점 더 자주 피를 토했다. 

단 한 사람이도 폐병 환자인 그를 따뜻하게 대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그는 자살을 결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일본 북쪽 가나사와 지방에 가면 나가노라는 목사가 있다. 그를 한번 찾아가 보라고 했다. 이 청년은 나가노 목사를 찾아갔다. 그날 수요일 예배를 드리고 그의 집에서 저녁밥을 먹다가 또 다시 피를 토한 것이다. 나가노 목사가 그 청년의 피를 닦아 내고 다시 밥을 차려 주었다. 

그 날 그 밤에 그 청년은 다시 주님을 체험하였다. 주님은 살아 계셨다. 그가 부인하려던 예수는 거짓말쟁이가 아니라 큰 사랑의 주님이셨다. 예수는 큰 분이셨다. 그 후 그 청년은 꿈처럼 예수의 은혜를 덧입고 건강해졌다. 피를 쏟던 폐병에서 고침을 받았다. 그는 다시 신학교에 복학해서 남은 신학 공부를 마치고 목사가 되었다. 그가 일본 교회 역사에 그 유명한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이다. 

그는 고베와 도쿄에서 수없이 많은 빈민들을 돌보며 살았다. 그 당시 가난한 사람들의 가장 큰 고민은 먹을거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 변비였다고 한다. 용서하고 들어 보라. 많은 빈민들이 항문에 변이 돌처럼 굳어서 나오질 않았다. 그러면 손가락으로 항문 속의 변을 후벼 냈다. 그래도 변비는 쉽게 해결 되질 않았다. 그러면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는 그 길거리의 빈민들의 항문에 입을 대고 혀로 핥아 침으로 녹여 빨아냈다. 이건 아기를 키우는 엄마 아빠기 자기 자식에게도 그렇게 하기 힘든 행동이 아닌가. 

이런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의 일상이 세상에 소문이 났다. 한번은 신문사의 기자가 찾아가서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가”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가 대답했다. "나는 내 스승에서서 배운 대로 하는 것입니다. 제 선생님인 나가노 목사님은 제가 식탁에 토한 핏덩이를 깨끗하게 닦아 주셨습니다. 그분이 하신 것에 비하면 이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는 나중에 중국으로 건너갔다. 중국의 빈민들을 위해서도 똑같은 나날을 살았다. 장개석 총통의 부인인 송미령 여사는 목사의 딸로 그리스도인이었다. 송미령 여사는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의 이야기를 듣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를 모셔서 성경공부도 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했다. 일본군대와 함께 일본인들도 철수가 시작되었다. 일본패망 당시에 중국 땅에 있던 일본인의 숫자는 200여만 명에 달했다. 그런데 그 중에 거의 단 한 사람도 테러를 당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일본의 천황의 항복 성명과 동시에 장개석 총통이 포고령 1호를 내렸다. 철수하는 일본 사람들에게 해를 가하는 자는 중형에 처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결정이 내려지게 된 배후에는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의 사역에 감동을 입은 송미령 여사와 그의 남편 장개석 총통의 결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가노 목사는 큰 교회를 일군 유명한 스타 목사가 아니었다. 그는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에게 예수의 크신 사랑을 보여 주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가가와 도요히코는 평생 그의 마음속에 그에게 보여준 나가노 목사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크나 큰 사랑을 잊을 수가 없었다.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가 빈민들의 항문을 빨아줄 때마다 그의 마음에는 나가노 목사의 집에서 그를 처음 만난 수요일 밤에 그가 토한 핏덩어리를 깨끗이 닦아 내던 장면이 잊혀 지질 않았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전날 밤에 대야에 물을 떠다가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겨 주셨다.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13:15)


무궁한 나라를 다스리실 아기.
33절의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는 뜻은 멈추지 아니하리라 끝이 없으리라는 뜻이다.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의 다스리심은 영원무궁한 다스리심이다. 세상의 왕과 권세자의 다스림은 한정적이다. 동서고금에 그 어떤 통치자의 인기도 영원하지 못했다. 백성들의 지지율이 하늘로 치솟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곤두박질치고 만다. 임기 말기가 되면 지지율이 하락하고 레임 덕 현상을 겪지 않는 통치지란 동서고금에 없다. 칼 막스나 스탈린이나 레닌 같은 인물들의 동상이 땅에 내 동댕이쳐지는 날이 올 줄로 그 누가 상상이나 하였겠는가.  

요즘 새벽마다 역대기의 말씀을 차례대로 묵상하고 있다. 이스라엘과 유다로 분단된 이스라엘 남북 왕조의 왕은 39명이었다. 그들 왕 한 사람 한 사람의 생애를 구구절절이 대하고 있다. 그들 중에 완전한 왕이 있는가. 온전한 왕이 있는가. 하나님 보시기에 완벽한 왕이 있는가. 단 한 사람도 없다. 이 세상에 영원무궁한 평화로 인생들을 다스리실 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다. 

아시야 선지자는 예언하였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9:6)

맞다. 예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시며 평강의 왕이시다. 그의 나라와 그의 다스리심은 영원무궁할 것이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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