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가 온 것은(막10:35-45) 2018. 10. 21
힘과 권력을 추구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남들보다 높은 지위를 차지하려는 마음도 누구나 다 마찬가지이다. 성공하고 출세하고 싶어 하고 누군가의 주목을 받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의지는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다 있다. 심지어는 초등학교 반장이나 회장 선거만 해도 그 경쟁이 치열하다. 시골마을에서는 이장도 아무나 못한다. 시골의 면장이나 도시의 동장이나 구청장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군수나 시장이나 도지사나 장차관이나 대통령을 아무나 하나. 독재자로 나서는 것도 쉽지 않고 더군다나 민주적인 방법에 의해서 국민들의 절대 지지를 받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과거로 하면 임금도 아무나 못하지만 그 곁의 좌의정 우의정의 자리에 세움 받는 것도 누구나 가능한 일이 아니다.
세베대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의 이종 사촌들이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의 이모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저들 형제가 12제자들 중의 두 사람으로 선택되었다. 예수께서 그 많은 인물들 중에서 왜 이종 사촌인 야고보와 요한을 12제자들 중에 포함시켰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그 요한이 나중에 요한복음을 기록하고 요한 1, 2, 3서를 쓰고 요한 계시록을 쓴 것을 보면 예수께서는 요한이 혈육관계로는 이종 사촌이지만 제자로서의 요한이 존귀하게 쓰임 받을 나중을 예건하셨던 것이 분명하다.
그 요한과 그의 형제인 야고보 두 사람이 하루는 예수께 특별한 요구를 한적이 있었다.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같은 본문을 다루는 마태복음 20장의 말씀에 보면 이는 야고보와 요한이 요구한 것이 아니었다. 저들의 어머니가 나서서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좌우편에 가까이 앉혀달라고 부탁한 것으로 되어 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께 두 아들들을 데리고 와서 절하며 그런 요청을 하였다. 상상하여 보라.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혈육관계로 하면 예수의 이모인데 조카인 예수께 절하면서까지 그런 요청을 한 것이다. 얼마나 간절한 마음이었으면 그렇게 까지 하면서 두 아들의 앞날을 부탁했을까.
예수께서는 잔과 세례를 비유로 들어 말씀하셨다. 이는 괴로움과 고난을 의미하는 것이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의 좌우편의 자리를 요구한 이 사건은 예수께서 장차 당하실 고난과 십자가 죽음을 세 번째로 예고하신 직후에 벌어진 일이어서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본문으로 읽은 마가복음 10장 35절의 그 바로 앞부분은 33-34절을 보라.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능욕을 받고 침 뱉음과 채찍질을 당하고 죽임을 당할 것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는 부활에 대하여 까지 말씀하셨다. 그런데 야고보와 요한이 나서서 ‘주의 영광’을 운운하면서 자기 형제들을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하고 요청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대답은 분명하였다. 잔을 마시고 세례를 받듯이 장차 주어질 괴로움과 고난을 감당하여야 할 것을 분명하게 강조하셨다. 그리고 그 엄청난 고난을 감당한 후에 누군가에게 주어질 예수의 좌우편의 자리는 예수께서 주시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실 일임을 분명하게 하셨다.
41절에 보시면 이런 사실이 알려 지자 나머지 열 명의 제자들이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냈다. 12제자들 간에 불화가 일어난 것이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12제자들을 모두 한 자리에 불러 모으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하신 교훈의 말씀이 42- 45절까지의 말씀이다.
섬기는 자.
세상 사람들은 자리가 주어지고 권세가 주어지면 임의로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고 고관이 되고 나면 권세를 부린다. 이는 과거나 오늘 날이나 별 차이가 없다. 예수께서는 그런 언급을 먼저하셨다. 그리고는 “....너희도 알거니와”라고 말씀하셨다. 이어서 교훈하신 말씀은 “너희는 세상사람들과 달라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현대인의 성경으로 읽으면 이렇다. 다 같이 함께 읽도록 하자.
“예수님이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는 대로 세상의 통치자들은 백성을 권력으로 지배하고 고관들은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럴 수 없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게 되고 싶은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 싶은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내 생명마저 주려고 왔다.’”(막10:43-45)
맞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살아간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세상에서 권력과 명예를 누리고 부자로 살고 무병장수하는 것인가. 물론 다 좋다. 그러나 예수께서 기대하시는 제자의 삶이란 어떠해야 할까. 복음을 알고 거듭난 성도의 삶이란 어떠해야 할까.
자신을 위하고 자신을 돌보듯이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섬기는 자가 큰 자란 말이다. 그렇지 않나. 가정에서도 보라. 정상적인 가정이라면 가정에서 누가 가족들을 섬기나. 젖먹이 아기가 어른들을 섬기나. 병든 가족이 건강한 가족을 섬기나. 뭔가 부족한 가족이 역량 있는 가족을 섬기나. 그렇지 않다. 어른이 아기를 돌보고 섬기는 것이다. 건강한 가족이 병약한 가족을 돌보고 섬기는 것이다. 힘 있고 역량 있는 가족이 그렇지 못한 가족을 위하고 돌보고 섬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그런데 예수께서 지적하셨듯이 세상이 그렇지 못하단 말이다. “너희가 아는 대로 세상의 통치자들은 백성을 권력으로 지배하고 고관들은 세도를 부린다.”독재 국가나 공산 국가는 물론이고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갑과 을의 불균형과 불평등이 넘쳐난다. 힘과 권력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들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다. 이는 마치도 다수 층을 차지한 경우의 여당과 그렇지 못한 경우의 야당의 차이와도 같다. 그런 세상에서 살아가는 백성들 중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달라야 한다는 강조이시다. 45절을 보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그렇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섬김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섬기려고 오신 것이다. 맞다. 예수께서는 평생토록 그런 나날을 사시다가 붙잡혀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 처형을 받아 죽으셨다. 그러나 죽음을 이기는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지 사흘 만에 무덤에서 살려 내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승천하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섬기는 자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기독교 역사를 보라. 예수 안에서 섬기는 자의 삶을 산 이들의 이야기가 후대에 두고두고 전해지는 것이 아닌가.
엘리자베스 요한나 셰핑(Elisabeth Johanna Shepping, 1880-1934)선교사는 독일 출신의 미국인 여선교사이다. 한국 이름은 서서평(徐舒平)이다.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기 시작한 1912년에 32살 나이에 미국 남장로회 파송 선교 간호사로 한국에 도착하였다. 54살에 눈을 감기까지 22년 동안 한국에서 선교하였다. 국가적으로 소록도에 나환자 요양시설을 만들게 한 장본인이다. 그는 이 땅에서 생을 마칠 때까지 각종 병자와 여성들을 돌보았다. 자기 이름이 없이 살던 조선의 여성들에게 자기 이름을 지어 주었다. 열악한 교육환경과 인권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였다. 간호학교 설립, 육아사업, 윤락여성 구조, 빈민구제 등에 헌신했다.
그녀는 1880년 9월 26일 독일 남부의 휴양도시 비스바덴에서 미혼모 안나 셰핑의 딸로 태어났다. 당시 숙박업소에서 청소부로 일하던 안나가 독일인 남성과 관계를 맺은 후에 원치 않았던 상태에서 태어났다. 3살 때 엄마는 그녀를 친정 부모에게 맡기고 미국으로 이민을 가버렸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9살 때에 외할아버지의 도움으로 미국에 가서 엄마를 만났으나 환영 받지 못했다. 다시 버림받은 상처를 안고 어렵게 기회를 얻어 가톨릭 미션스쿨에 들어갔다.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간호사가 되기 위해 성 마가병원 간호전문학교에 입학했다.
간호전문학교 졸업반이 되자 엘리자베스는 뉴욕시립병원에서 실습을 받았다. 그때 동료 간호사를 따라 장로교회의 예배에 늘 참석하였다. 예배 시간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감명을 받은 그녀는 전통적인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개종했다. 간호전문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뉴욕 브루클린에 있는 이시병원에 근무하기 시작하였다. 근처에 있는 유대인 요양소, 이탈리아 이민자 수용소 등지에서 봉사활동을 계속하였다.
31살이 된 1911년, 엘리자베스는 동료 선교사 포사이더(Forsythe)로부터 태평양 건너 조선이란 나라에 대하여 자세히 들을 기회가 있었다. 32세 때인 1912년 2월 20일, 엘리자베스는 조선으로 향하는 여객선 코리아호(S.S.Korea)를 타고 20여 일 동안의 기나긴 항해 끝에 조선에 도착했다.
그때부터 엘리자베스는 사람들과의 자유로운 소통을 위해 열심히 한국어를 배웠다. 자기 이름도 본명과 발음이 비슷하게 서서평(徐舒平)이라는 한국식 이름까지 지었다. 입국 초기에 서서평은 선교회의 지시에 따라 서울에 있는 세브란스병원에서 간호사 양성과 기독교 선교 활동에 열심을 다하였다.
한국에 온지 7년 후인 1919년에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서서평은 일제의 만행으로 부상당한 조선인들을 치료하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다녔다. 투옥된 독립 운동가들의 옥바라지를 정성을 다해 감당하였다. 이를 안 일본 경찰은 서서평 선교사의 서울에서의 선교 활동을 금지시켰다.
결국은 전남 광주에 내려가 선교부에서 운영하는 제중원의 간호사로 일했다. 그때부터 서서평은 전주와 군산과 광주 등지를 오가며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는 여성들에게 성경과 서양의 문물을 가르쳤다. 군산의 ‘구암예수병원’에 근무하면서 수 많은 환자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돌보았다.
그녀가 활동하던 광주와 전남 지역은 1930년대 때에 220만 인구 가운데 빈곤층이 88만 명이었고, 걸인이 11만 명에 달했다. 당시 서서평은 남존여비(男尊女卑)의 그릇된 풍습으로 인해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고 있던 조선 여성들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녀가 만난 많은 여성들이 질병에 시달리거나 굶주리고 있었다. 소박맞아 쫓겨나 오갈 데 없는 처지에 놓인 여성들도 부지기수였다. 서서평은 그녀들을 구제하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교육과 신앙이라고 판단하였다. 1년 중 100여 일 동안 말을 타고 전라남북도는 물론 배를 타고 제주도까지 건너가 병자들을 돌보고 핍박 받는 여성들을 가르쳤다.
당시 서서평은 이름조차 없는 여성들에게 일일이 이름을 지어주고 한글을 가르치면서 인간으로서의 존재감을 일깨워 주었다. 1922년 서서평은 미국인 친구 로이스 닐(Lois Neel)의 후원을 받아 한국 최초의 여성 신학교인 ‘이일학교’(Neel Bible college)를 설립했다. 이 학교는 현재 전라북도 완주에 있는 ‘한일장신대학교’의 전신이다. 새에덴교회 소강석 목사가 그 학교 출신이다. 그 후 서서평은 이일학교 학생들과 함께 농촌 봉사활동에 나서 매년 3~4만 명의 여성들을 교육시켰다.
그녀는 또 부인조력회와 조선여성절제회, 조선간호부회, 여전도회연합회 등을 창설하여 여성의 권리와 보호에 진력함으로써 조선의 여성운동과 간호계, 개신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923년 조선간호부협회를 세웠다.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직시한 그녀는 조선 여성들에게 성경의 〈출애굽기〉를 가르치며 독립(獨立)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려 애썼다. 서서평은 당시 동양인을 미개인 취급 했던 다른 선교사들과 달리 한국의 자연과 문화를 진정으로 사랑했다. 평소에 그녀는 옥양목 저고리와 검정색 통치마를 입고 다녔다. 남성용 검정고무신을 신었고 음식도 된장국을 좋아했다.
자신의 출생의 비천함과 소외감을 긍정적인 삶의 태도로 변화시킨 서서평은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그녀의 손길은 미혼모, 고아, 나환자, 노숙인 등을 가리지 않았다. 그녀는 평생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면서 수양딸 13명과 나환자의 아들 1명을 비롯하여 14명을 입양하여 훌륭하게 키워냈다. 그 시대가 외면하던 과부 38명을 자립시켜 새 삶을 살도록 해 주었다.
1933년 그녀는 나환자 530명을 이끌고 서울에서 행진을 벌였다. 일제 총독부의 나환자 정관수술 정책에 반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일제 총독부는 정관수술 정책을 폐기하고 소록도에 갱생원을 지어주기로 약속했다. 그때부터 서서평은 ‘나환자들의 어머니’로 살아갔다.
1934년 6월 26일, 서서평은 전남 광주에서 만성풍토병과 과로와 영양실조로 인해 54살에 눈을 감고 주님의 품에 안겼다. 동아일보는 1934년 6월 28일자 기사에는 ‘이국분투 25년 자선, 교육 사업에 일생 바친 빈민의 자모 서서평 양 장서’란 제목을 글을 실어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
“광주읍 양림정에 있는 이일학교의 설립자이며 교장인 서서평 선교사는 지금으로부터 22년 전에 조선에 들어온 이후 선교 사업은 물론 많은 사람을 구제하는 사회사업과 교육 사업에 노력하여 오던 중 1922년에는 이일학교를 창립하야 우금 13년 동안에 성경과 36명, 과학과 37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방금 66명의 재적생이 있었다 한다. 이 학교는 이혼 당한 여자, 남편이 죽고 없는 여자, 학령이 초과한 여자 등을 교양하여 왔었는데 동 서서평은 학교 창설 이래 자기의 생활비 일체까지 학교 유지비에 바치었으므로 사생활은 극도로 곤란하였다 하며 무너진 주택을 수선할 여유조차 없었다 한다. 그러던 중 지난 26일 오전 4시에 드디어 이 세상을 떠났다는 바 그 장의(葬儀)는 전 광주기독교단체 연합장으로 성대히 거행하리라 한다. 22년 동안의 헌신적인 삶을 접은 서서평의 유산은 담요 반 장, 동전 7전, 강냉이가루 2홉뿐이었다. 그녀는 임종에 앞서 자신의 시신을 의학용으로 기부하기까지 했다. 텅 빈 그녀의 침대 머리맡에는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
(Not Success But Service)
라는 좌우명이 걸려 있었다. 동료 선교사들은 ‘한국의 메리 슬레서’를 잃었다며 몹시 슬퍼했다. 메리 슬레서는 나이지리아에서 고아들을 돌보다 숨져 ‘아프리카 어린이들의 어머니’로 추앙받은 선교사이다.”
광주 최초의 시민사회장으로 치러진 서서평의 장례식에는 수천 명의 광주 시민과 나환자들이 참석하여 ‘어머니!’를 외치며 오열했다. 이일학교 여학생들이 운구행렬을 시작하자 수많은 여성들이 소복을 입고 뒤따랐다. 그렇듯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았던 엘리자베스 셰핑은 조선 땅에서 모든 버림받은 자들의 어머니가 되었다.
그 당시 동아일보에서 언급한 메리 슬레서(Mary Slessor, 1848-1915)가 누구인가. 그녀는 1848년 스코틀랜드에 자리 잡은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물도 나오지 않고 불도 들어오지 않으며, 하수구도 없는 단칸방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알콜 중독자였던 아버지는 술을 마시고 들어온 날이면 그녀를 쫓아내고는 밤새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가족의 생계를 돕기 위해 11세 때부터 공장에서 일을 했다. 14세부터는 온종일 일하며 가족을 부양하다시피 했다.
그녀는 어린 시절 이웃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하고 가까운 장로교회에 출석했다. 20대 초반이 된 그녀는 교회에서 몇 년간 섬긴 후 던디에서 빈민가 사역을 시작했다. 사역을 방해하는 폭력배들을 제압하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 미래에 맡을 사역을 준비했다. 데이비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 1813-1873)의 삶과 죽음에 큰 감명을 받고 칼라바르선교회에 들어가 아프리카로 떠났다. 노예제도가 빚어낸 참상은 1876년에 그녀가 서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Nigeria) 연안에 도착했을 때도 여전했다. 그녀는 현지어를 배우고 사람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당시 아프리카는 위험천만한 곳이어서 남자 선교사들도 대부분 안전한 백인지구 내에서만 사역을 했다. 하지만 메리 슬레서는 내륙으로 들어가 선교 사역을 개척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3년 후 말라리아에 걸려 병가를 내고 스코틀랜드로 돌아갔다. 이후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간 메리 슬레서는 내륙으로 들어가 유럽의 음식과 옷, 모든 풍습을 버리고 현지인들처럼 진흙집에서 살았다. 부족 주술사들과 맞서면서 현지인들을 교육하는 데 힘썼다. 분쟁을 해결하고, 버려진 아이들을 입양했으며, 마을을 복음화했다. 하지만 병세가 깊어져 다시 치료를 받기 위해 스코틀랜드로 돌아가야 했다. 병세가 호전되자 아프리카로 다시 돌아간 슬레서는 내륙 더 깊숙이 들어갔다. 남자들마저 자살행위라고 여길만한 곳이었다. 슬레서는 어머니와 두 여동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주님의 품에 그들을 맡기고, 자신을 걱정할 가족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정글에서도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가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25년간 쥐와 벌레가 들끓는 진흙집에서 살면서 얼굴과 머리에 온통 종기가 나는 끔찍한 상황까지도 견뎌냈다. 55세에 메리 슬레서는 자신이 입양한 아이들 7명과 함께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기 위해 더 외진 곳으로 갔다. 메리 슬레서는 전통적인 복음 사역을 감당하면서도, 남자가 여자를 마음대로 죽일 수 있었던 아프리카의 잔인한 관습을 없애고자 했다. 1915년 아프리카에서 40년간 주님을 섬긴 메리 슬레서는 스코틀랜드로 가지 않고 진흙집에서 67살에 숨을 거뒀다. 그녀가 입양한 7명의 자녀들이 그녀의 선교 사역을 이어갔다. 영국인들은 그녀를 진심으로 존경했다. 아프리카인들은 지극할 정도로 그녀를 사랑했다. 아프리카인들은 그녀를 ‘모든 민족의 어머니’(Mother of all nations)라고 불렀다. 50년간 어떤 백인도 살아남지 못했던 오지 오코용 부족들 사이에 살면서 그들을 가르치고 치료하였으며 부족간의 분쟁을 해결해 주었다. 1892년 그녀는 오코용의 첫 부영사로 임명되어 대영제국 최초로 여성 부영사가 되는 영예를 누렸다.
모든 사람의 종.
섬기는 자와 종의 차이가 무엇인가. 섬기는 자란 돕고 봉사하고 시중드는 자이다. 그러나 종이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오직 주인의 뜻을 따라 행동하며 살아가야 하는 자”이다. 하나님은 호렙 산의 모세를 출애굽을 감당할 하나님의 종으로 택하셨다. 그래서 발의 신을 벗게 하셨다. 하나님이 가라 하시니 순종하고 애굽에 내려갔다. 하나님이 만나라 하시니 바로 임금을 만났다. 하나님이 바로 임금 앞에서 모세의 지팡이를 땅에 던져 뱀이 되게 하셨다. 던지면 뱀이 되고 꼬리를 잡으면 다시 지팡이가 되었다. 두 번을 반복하게 하였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에 대하여 종으로 순종하니까 기적을 계속하여 나타내 보여 주셨다. 10가지 재앙 앞에 바로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육지처럼 건넌 것은 모세가 종으로 앞장서고 백성들이 종으로 순종하여 따랐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종으로 겸손하게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였다. 그것이 빌립보서 2장의 유명한 말씀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8)
8세기에 스페인과 이탈리아 일부를 제외한 서 유럽을 통합했던 샤를마뉴(Charlemagne, 742-814)대제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인물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후대의 통치자들은 샤를마뉴 대제가 통치하던 시대의 평화와 안정과 통일성과 국제적인 안정을 유지하지 못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후대의 사람들은 샤를마뉴 대제 시대의 영광을 그리워했다. 궁정시인 중의 한 사람은 그를 “유럽의 아버지 왕”이라고 지칭했다. 그가 죽은 후 수 백년이 흐르도록 그와 비슷한 발자취를 남긴 지도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죽을 때에 유언했다. “왕좌에 앉은 모습으로 왕관을 머리에 쓰고 손에 홀을 들고 무릎 위에 성경책을 펼친 모습으로 땅 속에 묻어 달라”200년이 지난 후 오세르 대제가 소문에 전해진 샤를마뉴 대제의 죽음의 모습을 확인하려고 무덤을 열어 보았다. 뼈가 썩고 일부가 남아 있었다. 왕관과 홀을 뼈들 옆에 떨어져 있고 기울어져 있었다. 그런데 손가락뼈가 무릎 뼈 위의 성경을 가리키고 있었다. 마태복음 16장 26절이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맞다. 사람은 왕이든 평민이든 누구나 다 각 사람이 십자가 복음과 구원의 가치를 깨달은 은혜의 종으로 살아야 한다. 그리고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누군가를 돌보고 섬기는 종으로서의 사명을 갖고 살아야 한다. 욕하면 욕먹고 손가락질하면 손가락질 당하고 조롱하면 조롱당하고 무시하면 무시당하고 때리면 맞고 침 뱉고 따귀를 때리고 옷을 다 벗겨 부끄럼을 주어도 꼼짝 없이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이 종의 일상이다. 살리면 살고 죽이면 죽임 당하는 것이 노예의 운명이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서 노예와 같은 생을 마치셨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은 예수를 가야바의 뜰에 세웠다. 본디오 빌리도의 법정으로 끌고 갔다. 사형 언도를 받은 예수는 옷 벗겨진 채 채찍에 맞았다. 거반 죽은 자가 된 상태에서 십자가를 어깨에 메고 골고다 언덕까지 끌려가야 했다.
정도는 다르지만 오늘 날 하나님의 종, 예수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이란 그런 것이다. 우리는 지난 주 중에 삼일 밤 동안 미얀마에서 선교하는 40대 후반의 부부 선교사를 만났다. 누가 가라 했는가. 누가 가려고 했는가. 왜 그 곳인가. 어떻게 해서 그 멀리까지 찾아 나섰는가.
1984년 4월에 대전시 자양동 동아 공고 입구 대로변에 40평 상가 2층에서 400만원 보증금에 월세 10만원으로 개척교회를 시작했다. 7월 여름 성경학교에 60-70여명의 어린이들이 모였다. 신학생 5명이 와서 교회학교 사역을 돌봤다. 그 이후 태어난 아기들이 커서 민원경 집사, 지영환 청년으로 자라났다. 주일 이른 아침이면 건물 밖 1층 화장실 청소하는 것이 주일을 맞이하는 필수 일과 중 하나였다. 1층 식당 손님들이 밤새 화장실 쓰고 어떤 때는 토해 놓기도 했다. 물로 청소하고 마른 걸래질하고 소독하고 깨끗하게 청소하고 주일 예배드리러 오는 어른 아이 교인들을 맞이하였다.
서서평 선교사가 1912년에 낯설은 조선 땅을 찾아 온 것처럼 우리도 이 곳에서 종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꼭 물 건너 먼 나라에 가야만 종으로서의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내 가정에서, 내 직장에서, 내 일상생활 중에서 우리는 복음의 종이요 은혜의 종이요 사명의 종이요 십자가의 진리를 가슴에 간직한 종의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종은 주인의 마음에 흡족하게 살아가야 종이다. 내 맘대로 사는 것은 종의 삶이 아니다.
자기 목숨을 대속물(代贖物)로 주는 자.
두 어 달 전에 가시고기의 교훈을 나눈 적이 있다. 알에서 부화한 새끼들을 위하여 아비 물고기가 죽어 자기 살까지 모두 다 먹잇감으로 내어 주는 감동적인 생태계의 일화이다.
예수께서는 한 알의 밀알을 통해서 교훈하신 바 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이 말씀에 이어서 하신 말씀이 이것이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요12:25-26)
이웃을 섬기고 인류를 섬기는 예수의 섬김의 극치는 자신을 십자가 위에서 대속물(代贖物)로 내어 주신 일이다. 십자가 죽음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죽은지 사흘 만에 무덤에서 살려 내셨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부화시키신 것이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다. 생명은 죽음을 이기는 능력이다. 하나님은 빛이시다. 빛은 어둠은 이긴다. 하나님은 의와 선과 진리이시다. 하나님의 의는 이 땅의 불의를 이기신다. 하나님의 선은 이 땅의 악을 점령하신다. 하나님의 진리는 이 땅에 난무하는 거짓을 이기시는 능력이 있으시다.
45절의 대속물이란 노예의 값을 치루고 자유자가 되게 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 “다 이루었다”는 십자가상에서의 일곱 번째 말씀의 뜻이 바로 그런 뜻이다. 예수는 완전한 대속물이 되셨다. 이 땅의 죄와 악을 완전히 해결하는 대속물이 되셨다. 그러므로 주를 믿는 성도들에게는 완전한 대속의 은총이 주어지는 것이다.
존 뉴턴(John Newton, 1725–1807)은 영국 런던에서 선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독실한 신앙인이었다. 그녀는 아들이 어렸을 때부터 교육을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사용했고 그 덕분에 뉴턴은 세 살이 못 되어서 영어를 읽을 수 있었다. 기억력이 좋았던 뉴턴은 많은 성경구절과 찬송가들을 줄줄 외웠다. 어머니를 사랑했던 그는 어머니와 함께 있는 것을 기뻐하며 즐겁게 어머니의 가르침을 따랐다. 하지만 아들을 위해서 늘 기도하던 어머니는 존 뉴턴이 일곱 살이 되던 해에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 이후 뉴턴의 삶은 암흑으로 변하게 되었다. 뉴턴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열 살까지만 학교에 다녔다. 그 이후엔 아버지를 따라 선원생활을 시작하면서 방탕하고 거친 생활을 했다. 그리고 해군에 입대했지만 탈영과 사고를 일삼았다. 그는 아프리카로 가는 노예상선에 팔리게 되어 격심한 노예생활을 하기도 했다.
아들을 위해 기도하는 어머니를 가진 뉴턴이었지만 그는 무신론자가 되어서 누구를 만나든지 하나님을 모독하며 저주했다. 그런데 그가 배를 타고 나간 어느 날 큰 폭풍우를 만났다. 거센 바람에 배의 돛은 떨어져나갔고 뱃전은 함몰되었으며 바닷물이 갑판 위로 덮쳐들었다. 선원들은 모두 익사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뉴턴은 그렇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 앞에서 하나님을 부인했던 과거의 죄를 뉘우치면서 그가 그토록 외면했던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다.
요나의 기도처럼 기도하고 나자 폭풍우가 잠잠해졌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셨을 지도 모른다고 믿기 시작했다. 존 뉴턴은 그가 죽음의 위기를 면했던 그 날, 1748년 3월 10일을 가리켜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놀라운 은혜를 주신 날, 내가 처음 하나님을 믿은 날’이라고 기억하며 죽을 때까지 평생을 기념했다.
이런 체험 후에 그는 토마스 아 켐피스 (Thomas à Kempis, 1380-1471)의 책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게 되었다. 그 책을 통해서 드디어 거듭나게 되었고 헌신의 삶을 살게 되었다.
나중에 노예선 선장으로 지내면서 마음에 신앙적 갈등을 수 없이 겪었다. 그는 자신이 삶을 청산하고 은혜를 사모하였다. 30대 후반의 젊은 선장이 그에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대하여 열심히 권면하였다. 그는 노예선 선장직을 그만두고 리버풀의 세관에서 일하면서 은혜를 사모하였다. 존 웨슬리 때의 인물인 대설교가 죠지 휘필드 목사의 설교에 큰 감동을 받았다.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1759-1833)가 앞장서서 노예 해방을 주창할 때에 그는 의회에 증언자로 나섰다. 결국 노예무역금지법이 통과되는 일에 크게 일조하였다. 10년 후에 목사가 되었다. 305장 찬송‘나 같은 죄인 살리신’의 가사는 그의 나이 54살 때에 쓴 신앙 고백시이다.
존 뉴톤은 자신의 죄를 대속하신 예수의 은혜에 절절히 감동된 나중 생을 살았다. 성도의 삶을 나의 죄를 대속하신 주의 은혜에 빚진 자의 삶을 이어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은혜가 우리 가운데 충만하길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