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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을 얻는 구원(요3:14-21) 2018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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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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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8-03-21 23:23 조회 15,669 댓글 0
 
                    영생을 얻는 구원(요3:14-21)         2018. 3. 18

병을 이기고 오래 사는 무병장수에 대한 관심은 동서고금에 언제나 이어져 오는 관심이다. 중국 진나라의 황제였던 시황제(BC259-210)는 불로초를 찾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그런 그도 겨우 50을 넘기고 눈을 감아야 했다. 뿐만 아니라 각 종교에서는 죽음을 이기는 영생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어 왔다. 영생이 무엇인가. 성경은 영생에 대하여 무어라고 말씀하나. 영생은 죽음 후에 이어지는 미래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지극히 현재적이다. 죄로 인하여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이 영생의 시작이다.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공회인 산헤드린의 의원이었다. 그는 모세의 율법을 따르는 자요 그 당시에 예루살렘에서 출세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예수를 찾아 왔다. 그는 예수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는데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런 기적들을 행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예수는“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는 대답을 하셨다. 예수가 행하는 기적에 대하여 묻는 질문에 이런 대답을 하신 것이다. 니고데모가 이런 대답을 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습니까 어머니의 태에 두 번째 들어갔다가 날 수 있습니까.”그 때 예수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대답하셨다. 그리고 설명해 주셨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그 때 니고데모는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하고 재차 물었다.
 
그러한 대화 중에 예수께서 좀 더 예를 들어 해 주신 말씀이 14절이다. 예수께서는 민수기 21장에 나오는 모세의 때에 불평하던 백성들이 불 뱀에 물려 죽어가던 때에 장대 꼭대기에 놋 뱀을 만들어 매어 달게 하셨다. 그리고 모세에게 말씀해 주셨다. 그 놋 뱀을 쳐다보는 자들은 살리라고 전하라고 하셨다. 모세를 통해서 전해진 하나님의 처방을 그대로 믿고 장대 꼭대기에 달린 놋 뱀을 쳐다보는 이들은 살았다. 그게 말도 되지 않는 소리라고 믿지 않은 이들은 불 뱀에 물린 독이 퍼지고 고통 중에 죽어 갔다. 
 
예수께서는 장차 주님 자신이 붙잡혀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매달려 높이 들릴 수난의 사건을 말씀해 주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게 무슨 말씀인가. 인자가 들리면 치유가 임하고 회복이 임하고 평화가 임하고 구원이 임하고 죽음에서 건짐을 받는 새 생명이 임한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모세 때에 장대 꼭대기에 달린 놋 뱀을 믿음으로 바라 본 이들이 산것처럼 인자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신다고 했다.
지난 주일에는 ‘은혜로 받은 구원’이란 제목의 말씀을 나누었다. 오늘은 ‘영생을 얻는 구원’이란 제목으로 본문을 나누도록 하겠다.
 

독생자를 믿는 자.
영생을 얻는 구원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생명의 구주로 믿을 때에 주어지는 선물이다.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독생자’(獨生子)라고 표현하고 있다. 요한 복음 1장 14절에도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다. 본문의 16절과 18절에도 ‘독생자’라고 했다. 독생자가 무엇인가. ‘Only Begotten Son'이다. 하나님의 하나 뿐인 아들이란 말씀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외아들이시다. 그러면 하나님이 하나 뿐인 아들을 왜 이 땅에 보내셨나.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16절의 말씀대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아들을 보내시기 까지 사랑하신 사랑이란 어떤 사랑인가.
 
누구를 진심으로 사랑해 보았나. 아니 여전히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나. 우리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어떤가. 진심으로 사랑하는데 이기적일 수 있나. 진심으로 사랑하는데 비판적이 될 수 있나. 진심으로 사랑하는데 단점과 약점이 크게 보이나. 그런 경우란 없다. 상대방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모든 것이 다 좋고, 모든 것이 다 귀하고, 모든 것이 다 아름답고, 모든 것이 다 숭고하고, 모든 것이 다 흠모할 만 하고, 모든 것이 다 신선하고, 모든 것이 다 기대가 되고, 모든 것이 다 새롭고, 모든 것이 다 기대가 되고, 모든 것이 다 만족스럽게 보인다.
 
이 표현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상대방이 완벽한 사랑의 대상이라서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상대방에게 그런 무한한 사랑, 제한 없는 사랑, 조건 없는 사랑에 빠져서 상대방을 사랑의 눈으로, 사랑의 마음으로, 사랑의 감정으로, 사랑하는 생각으로, 사랑하는 느낌으로,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의지적인 사랑으로 계속하여 사랑해 가고 있다면 그 사랑에 무슨 설명이 필요하고 무슨 해석이 필요하겠는가. 사랑하고 있다는데.......
 
그러나 그 사랑이 자기 욕망이나 자기 욕구나 자기만족을 위한 이기적인 사랑에서 출발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런 이기적인 사랑의 충족을 위해서 상대방을 사랑하고 있는 사랑이라면 그 사랑이 얼마나 오래 가겠나.
그러므로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는 그 사랑은 그런 식의 인간적인 사랑의 차원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아가페’의 사랑이다.
 
창세기 22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는 장면이 자세하고 소개되어 있다. 어떤가. 아브라함의 나이 백세 때에 하나님이 언약의 징표로 주신 아들이 이삭이다. 그런 아들이 늠름하게 잘 자라나고 있던 어느 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 오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출22:2)
 
우리가 아는대로 아브라함은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모리아 산을 향하여 삼일 길을 출발하였다. 그리고 순종하였다. 냉정히 생각하여 보라. 이게 가능한 일인가.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대로 그렇게 하였다.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눕혔다. 그리고 손을 내 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고 했다. 아브라함의 이와 같은 행동의 바탕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는 믿음이다.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섭리를 인간의 지혜로 다 깨달아 알 수 없으니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믿고 순종하며 준행하는 믿음이 성도다운 믿음이 아닌가.
 
제단에 결박해서 눕혀 놓은 아들 이삭을 향해서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아들을 번제물로 잡으려 하는 행위는 정신 나간 노인의 치매쯤으로 보이지 않나. 그런데 그 순간에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렀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그 때에 아브라함은 동작을 멈추고 대답하였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그 때 하나님이 천사를 통하여 말씀하셨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獨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2)
 
여기서 말씀하신 그 아들 ‘독자’가 요한복음 3장 16절에 나오는 ‘독생자’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믿음과 나이 백세에 허락하신 독자 이삭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루어 가실 언약을 믿는 믿음이 동시에 있었다. 이것이 믿음이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한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무엇을 믿었기에 믿음의 조상이라고 까지 불리어지는 것인가. 믿음 장인 히브리서 11장 9절에 보면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이라고 말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은 아브라함의 믿음과 아버지 아브라함과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아들 이삭의 믿음은 같은 믿음이다. 하나님은 우상을 숭배하던 데라의 아들들 중에서 아브람을 부르셨다. 그리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 자자 손손을 통하여 하나님이 계획하신 동일한 약속의 유업인 언약을 성취하는 가문과 민족으로 이끌어 오셨다.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믿음의 바탕에는 주신이도 하나님이시며 취하실 이도 하나님이시란 믿음이 분명하였다. 그런 분명한 믿음이 없었다면 어떻게 모리아 산에까지 사흘 길을 순종하고 나아가서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번제로 드릴 수가 있었겠나.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주신 아들 이삭을 통해서 이루어 가실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믿음은 분명하고 확고한 믿음이었다.
 
다시 요한복음 3장 16절에 와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믿음이란 독생자를 믿는 자의 믿음이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생명의 구주로 믿음 가운데 멸망하지 않고 영생하는 축복이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성도의 모든 믿음의 중심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던 사도들이 붙잡혀 옥에 갇혔다. 다음 날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관리들이 예루살렘에 모여서 옥에서 불러낸 사도들을 심문하기 시작하였다. 그 자리에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본디오 빌로도 앞으로 끌고 갔던 대 제사장 가야바와 장인 안나스와 그 외에 요한, 알렉산더를 비롯한 역대 대 제사장들의 문중이 다 모였다. 저들은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는 복음 증거에 대하여 몹시 싫어하면서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고 심문하였다. 그 때에 배도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렇게 대답하였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4:12)고 했다. 
 
그렇다. 구원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어둠보다 빛을 더 사랑하는 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이 땅에 오신 구세주이시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빛 보다 어둠을 더 사랑함으로 빛을 거부하고 어둠 속에 숨어 버렸다. 그 이유는 세상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기 때문에 그 악한 행위가 빛 앞에서 드러날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어둠 가운데서 악을 짝하며 살아가는 인생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다. 서울과 같은 도시 안에서도 환한 낮에는 숨어 있다가 어두운 밤만 되면 불나비같이 활개를 치며 어둠 속에서 온갖 악과 죄를 짝하고 일삼으며 방탕하게 살고 타락하게 사는 불쌍한 영혼들이 넘쳐 난다. 악을 행하는 자들은 빛을 미워하게 마련이다.
 
요한복음 1장의 앞부분에 보면 이처럼 어둠을 이기는 참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세하게 소개 하고 있다. 영생과 구원이란 어둠 속에서 빛으로 나아오는 것이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오는 것이다.
 
4.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인류의 빛이었다.
5.이 빛이 어두움 속에서 빛나고 있었으나 어두움이 이 빛을 깨닫지 못하였다.
6.하나님이 보내신 요한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7.그는 이 빛에 대해서 증거하여 사람들이 자기를 통해 믿도록 하기 위해서 왔다.
8.그는 빛이 아니었으며 다만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것뿐이었다.
9.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있었다.
10.그분이 세상에 계셨고 세상은 그분을 통해서 만들어졌는데도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했으며
11.자기 땅에 오셨으나 자기 백성들까지도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다.
12.그러나 그분은 자기를 영접하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13.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핏줄이나 육체적 욕망이나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된 것이다.
 
요즘 미국에서 시작하여 우리나라의 각계 각 분야에 숨겨지고 감추어졌던 민낯이 드러나는 소식을 보라. 각 분야에 꽤나 이름 있던 저명인사들이 여성을 순리로 대하지 않고 역리로 대하며 함부로 대하며 쉬쉬하던 부끄러운 일들이 속속히 세상에 드러나고 있다. 이런 때에 어둠을 사랑하며 살아 왔던 이들은 세상에 강하게 비치는 빛을 두려워하고 미워하여 점점 가슴을 조이며 어둠 속으로 숨어 들어가려고 할 것이다. 19절의 말씀처럼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며 지내는 인생들은 죄와 악이 가득한 세상에서 노아 때의 세상 사람들처럼 점점 악하게 살아가고 점점 빛보다 어둠을 더욱 더 사랑하며 살아가게 된다.
 
그러면 죄와 악에서 건짐을 받고 거듭나서 영생을 얻게 하는 구원을 어떻게 임하는가. 내 몸 안에 어느 구석에 있는 암 덩어리를 발견해 내는 종합 검사가 두려워서 차일피일하고 지내면 내 몸 안에 있는 암 덩어리는 점점 커져 갈 것이다. 암이 어둠이라면 암을 발견하고 치료하는 것은 빛이다. 강한 빛, 참 빛이 와서 내 몸 안에 감추어져 있던 오장 육부와 혈관과 신경 조직과 세포 한 개 속에라도 구석구석 치료하는 빛으로 비칠 때에 치료가 일어나고 회복이 일어나고 다시 강건해 질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의 장 안에는 100조개의 박테리아가 번식하고 있다. 장 안에 있는 그 많은 박테리아는 뇌의 기능에도 상호 영향을 미친다. 사람의 피 속에는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 세 종류의 세포가 순환한다. 건강한 성인은 1초에 240만개의 적혈구를 생산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건강한 백혈구는 120일, 4개월쯤 산다. 성인의 피에는 35조개의 적혈구가 있다. 적혈구와 백혈구의 건강한 비율은 700대 1이다. 혈소판은 혈액이 응고되는 것을 돕는다. 동맥과 정맥에 혈관이 손상되면 혈액 응고를 통해서 출혈을 막는다. 삼라만상이 다 그러하듯이 인체 창조의 신비가 있다.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 호흡하며 살고, 맥박이 멈추지 않는 동안 주어진 수명을 사는 것이다. 육체의 생명이 그러하듯이 인간에게 주어지는 영생과 구원은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오는 영적 경험이다. 성경이 말씀하는 어둠이란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이다. 영적 죽음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고 하셨다. 요한복음 12장 36절에 보면,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그 앞 절에 보면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고 하셨다. 이런 말씀도 하셨다.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요12:46)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에 들린 어둠에서 예수를 만나 고침 받고 빛의 자녀의 삶을 살았다. 요한복음 4장의 수가 성 우물가에서 예수를 만났던 남편 다섯과 살았고 지금 사는 남자도 자기 남편이 아닌 남자와 살아가던 기구한 운명의 여인이었다. 평생 어둠에 갇혀 지내던 수가 성 여인이 예수를 만나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아이신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자기 마을 사람들에게 예수를 소개하고 전도한 전도 부인이 되었다. 어둠 속에 살아가던 여인에서 빛의 자녀로 구원 받게 되었다.
예수가 어둠을 이기는 빛의 주인이신 것을 깨달아 알고 나면 누구나 어둠에서 벗어나서 빛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가게 마련이다.
 
김동길(1928-) 박사의 <나이듦이 고맘다>라는 책이 있다. 2015년에 쓴 책이다. 올해 91세이니 그의 미수(米壽)인 88세에 쓴 책이다. 그는 책에서 과거에 읽었던 영등포 교도소에 갇혀 지내던 전과 11범의 수기를 소개하고 있다. 생을 포기하려고 감방 동료들을 시켜서 면도날 12개를 모았다. 그걸 질근 질금 씹어 먹고 자살 기도를 했다. 감방 안에서 떼굴떼굴 구르며 고통을 호소했다. 엑스레이를 찍었고 의사는 수술을 권했다. 그러나 그는 완강히 거부했다. 어차피 죽을 몸이니 내버려 두라고 발광했다. 다시 감방 안으로 돌아온 그는 단 1초도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호소하며 비명을 질러댔다. 그렇게 뜬 눈으로 맞은 새벽녘에 교도소 밖에서 들려 오는 새벽 종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그 교회당 종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신비를 체험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고통스럽던 고통이 사라졌다. 일순간에 분노와 저주가 사라지고 온 몸과 마음에 평안이 찾아 왔다. 감방 한 구석에 굴려 다니던 성경을 펼쳐서 요한복음을 읽기 시작했다. 그날 아침부터 단숨에 요한복음을 다 읽었다. 20여 일 동안 성경 신구약을 빨려 들어가듯이 모두 다 읽었다. 그러는 동안에 그의 몸 안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12개의 씹어 삼킨 면도날이 배설물에 섞여서 모두 다 배설되었다. 다시는 복통이 일어나지 않았다. 의사들의 견해로는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바늘을 삼켜도 바늘이 위장과 내장의 구석구석을 찌를 것 같은데 슬슬 피하여 배설물에 섞여 빠져 나오는 경우가 없지 않다는 것이다.
 
전과 11범이 절망과 자포자기와 생을 저주하면서 씹어 삼킨 면도날들이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중에 희망과 소망을 갖게 되면서 몸도 절망에서 희망으로 반응하였고 기적을 체험하는 주인공이 되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구원이란 무엇인가. 어둠에서 빛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나아오는 것이다. 주께서 말씀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어둠을 벗어나 빛의 자녀가 되는 순간 쉼과 안식과 영생하게 하는 구원이 선물로 주어진다.

진리를 따르는 자.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온다고 하였다. 진리를 따르는 자는 더 이상 어둠 가운데 머물지 않는다. 진리는 진리가 아닌 것과 타협하지 않는다. 진리는 진리 일뿐이다. 진리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깨달아 알게 하는 것이 진리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
 
고 말씀하였다.
 
4세기의 성자 성 어거스틴(354-430)은 오늘 날 아프리카 북부의 알제리 지역인 타가스테라는 소도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이단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신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그러나 아들 어거스틴은 어머니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철학에 관심이 많던 그는 이단이었던 마니교에 심취해서 빠져 지냈다. 마니는 조로아스교,불교, 기독교의 계시의 진리를 부분적으로 섞어서 만든 그 당시의 영향력이 큰 이단이었다. 마니교도들은 진리란 단순한 종교 혼합주의를 넘어서 다양한 문화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해석될 수 있다는 주장을 하였다. 마니교의 핵심은 진리에 대한 영적인 지식을 통해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었다. 중세 시대까지 번성하던 마니교는 오늘 날은 거의 사라지고 20세기에 들어서서 이집트 등지에서 저들의 신봉하던 글들이 일부 발견되기도 하였다. 어거스틴은 17살에 어느 여성과 동거를 시작해서 14년을 지냈다. 아들도 낳았다. 그런 그에게 변화의 순간이 찾아 왔다. 밀로나의 한 정원에서 어린이들이 놀이터에서 노래하며 뛰어노는 노래 가사가 선명하게 들려 왔다. “집어 읽으라.”집안으로 들어 간 그는 평소에 멀리하던 성경책을 펼쳐 읽었다.
 
“11.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救援)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12.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4.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1-14)
 
말씀 안에서 변화가 시작된 어거스틴은 탕자에서 성자의 삶으로 역사적인 인물이 되었다.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을 읽지만 말고 성경 말씀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생명의 구주로 영접하고 그분 안에서 그 분과 더불어 그 분의 말씀이신 진리를 따라 살아갈 때에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의 권세를 누리며 증거하며 살아가게 된다. 영원한 구원에 이르는 영생의 축복이 주어지는 것이다. 이런 은혜가 누구에게나 늘 함께 하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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