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들레헴에서 나실 아기(미5:2-6) 2018. 12. 2 강림절 제 1주
예수께서 태어나신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10km 정도 떨어져 있다. 인구 3만 명 정도가 살아가고 있는 별로 크지 않은 도시이다. 요즘이야 그래도 그 정도의 인구가 모여 사는 작지도 크지도 않은 도시이지만 예수께서 태어날 당시의 인구는 500여명 정도가 살던 지극히 작은 마을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미가서 5장은 예수께서 태어나실 장소를 예언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미가 는 남왕국 유다에서 주전 735-690년경에 선지자로 활동하였다. ‘미카’란‘누가 여호와와 같으리요’라는 ‘미카야후’란 이름을 줄인 이름이다.
‘에브라다’라는 또 다른 지명을 베들레헴에 덧붙인 이유는 스블론 땅에 베들레헴이란 같인 지명이 있었기 때문에 혼동을 막기 위한 표현이었을 것이다. ‘베들레헴’이란 ‘떡 집’이란 뜻이고 ‘에브라다’란 ‘풍성한 열매’라는 의미이다. 창세기 35장 19절에 보면 야곱이 사랑하던 요셉의 어머니 라헬이 요셉의 동생인 베냐민을 길가에서 낳아 놓고 죽었다. 야곱은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에브랏 베들레헴 길가에 장사지내야 했다. 그 장면에 ‘에브랏’이란 지명이 베들레헴이란 지명 앞에 나온다. 그 ‘에브랏’이‘에브라다’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나셨다. 그런데 그는 왕족이나 귀족이나 그 시대에 성공하고 출세하고 권력을 갖고 큰소리치는 가정에서 금수저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에브라다 베들레헴이란 지극히 평범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는 방법도 청년으로 임하거나 백마를 탄 장수로 임한 것이 아니라 나사렛이란 한 마을에 살면서 같은 마을의 노총각과 약혼하고 결혼할 날을 기다리고 준비하던 마리아의 태를 빌려서 잉태되고 태어나셨다. 마침 로마 황제인 가이사 아구스도가 명을 내려서 모든 사람들은 자기 고향에 찾아 가서 호적하라고 하던 때였다. 마리아의 남편될 요셉은 날짜를 지키기 위해서 만삭이 된 아내 될 마리아와 함께 베들레헴을 방문하던 일정 중에 마리아가 아기를 낳게 되었다.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의 거리는 직선 거리로만도 120km정도이다. 자동차로 가도 가까운 거리가 아니다. 예수를 잉태하고 만삭이던 마리아는 남편 될 요셉과 함께 무거운 몸으로 힘겨운 여정을 이동하여 베들레헴에 도착하였고 그 곳에 머물던 중에 예수를 낳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처럼 인간의 몸을 빌려서 아기로 탄생하신 것이다.
서독의 총리였는데 1990년 10월 3일, 통일 독일의 첫 총리를 또 지낸 헬무트 콜 총리는 유머를 잘 하기로 유명하였다. 한번은 그에게 기자들이 물었다. “총리님의 고향에서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이 몇 분이나 탄생하였습니까.”그 때 총리가 대답하기를 “한명도 없었어. 다 빨가벗은 아기들만 태어났지.”
맞다. 이 세상에 아기로 태어나지 않은 인생은 단 한명도 없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조차도 인간의 몸을 입고 마리아의 태에서 자라난 아기로 태어났다. 아브라함, 모세, 여호수아, 다윗, 솔로몬, 이사야, 엘리야, 엘리사, 다니엘, 예레미야, 느헤미야 저들 모두 아기로 태어났고 자라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명자의 삶을 살아간 것이다.
세례 요한도 그의 어머니 엘리자벳이 연세 많아 늙은 나이에 연세 많던 남편 사가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 태어난 구약시대 마지막 선지자였다.
예수는 유다의 크고 작은 도ㅅ와 크고 작은 마을들 중에서도 가장 작은 시골 마을들 중에 한 곳인 베들레헴 에브라다에서 태어나셨다. 성탄절이 다가 오고 있다. 강림절을 네 주 동안 지낼 것이다. 오늘 묵상하는 미가서에 소개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는 나에게 있어서 누구신가. 그는 나에게 있어서 어떤 분이신가.
다스릴 자.
예수는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요 이 세상을 다스릴 자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는 말씀은 예수는 하나님 안에서 영원 전부터 계신 분이시란 설명이다. 그렇다. 예수는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2000년전에 오셨다. 엄밀하게 표현하면 보냄을 받으셨다. 그러나 그는 2,000년 전의 분이 아니라 태초부터 계시고 창조 이전부터 하나님 안에 계시던 분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는 ‘상고(上古)에, 영원(永遠)에’계신 분이시다. 그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 땅을 다스리신다. 예수의 다스림은 정의의 다스림, 공의의 다스림, 사랑의 다스림, 평화의 다스림, 은혜의 다스림이시다. 예수의 다스림을 받는 인생, 예수의 다스림을 받는 가정, 예수의 다스림을 받는 나라, 예수의 다스림을 받는 민족에게는 구원의 은총이 강이 되고 바다가 되었다.
예수가 누구이신지 깨달아 알고 영접하고 나면 그 인생은 주님의 다스림을 통해서 변화되고 달라졌다. 이것은 누구나의 간증이요 이것은 누구나의 삶의 변화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라고 하였다.
인류의 역사는 오래도록 지배계층과 그 지배를 받는 피지배계층으로 나뉘어져 왔다. 요즘처럼 빈부귀천이 없다. 남녀가 평등하다고 말하는 세상에도 여전히 불균형과 불평등과 부조화와 불합리가 존재한다.
영국과 같은 신사들의 나라도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아프리카 노예들을 끌어다가 인간 이하의 취급을 하며 함부로 짐승처럼 다루었던 때가 있었다. 미국이란 나라는 어떤가. 1863년 1월 1일에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 당시에 미국은 노예 해방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백인과 흑인 그리고 백인과 유색 인종들 간의 갈등과 차별은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1929-1968)목사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고 시작되는 그 유명한 연설을 하던 때가 1963년이었던 것을 상기해 보라. 그 당시만 해도 미국 안에서 흑백차별이 여전하였다. 흑인들이 인권을 보장 받는 다는 일은 요원한 일이었다. 1920년에 여성의 선거참정권이 주어지기 이전에는 미국이란 나라에서 여성이 정치에 나서서 선거권이나 피선거권을 행사한다는 것은 꿈만 같은 이야기였다. 그 역사가 불과 아직 채 100년도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도 조선 500년 동안 반상제도가 지배하였다. 양반은 양반 노비는 노비였다. 세종 때에는 백성들 10명 중에서 4명이 노비였다. 조선 시대 말 고종 때에도 10명 중의 1명은 노비였다. 우리 고향 집에도 증조부모 사시던 때만 해도 남종 여종이 집안에 있었다고 들었다. 물론 현대판 노예 제도가 없지 않다. 요즘 쏟아져 나오는 사내 폭력이나 노사 갈등의 소식을 접하면 믿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기업의 회장이나 사장이 직원들을 종 부리듯하고 비인격적으로 대하는 소식이 쏟아져 나온다. 왜 그런가. 그 마음을 누가 다스리기 때문에 그러한가. 사장이든 종업원이든 그 마음을 다스리는 분이 주님이시라면 그럴 수 있겠는가.
2000년 전에 이 땅에 보냄을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공의와 평화와 진리와 선으로 다스려지는 세상을 선포하신 것은 놀라운 구원의 은총이며 구원의 시작이 아닐 수 없다.
이사야는 이사야 11장 6절 이하에서 메시야가 오시면 그런 세상이 시작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곡을 붙여 찬양하지 않나.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리라>라는 복음성가가 있다.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리라 사막에 꽃이 피어 향내 내리라
주님이 다스릴 그 나라가 되면은 사막이 꽃동산 되리
사자들이 어린양과 뛰놀고 어린이들 함께 뒹구는
참사랑과 기쁨의 그 나라가 이제 속히 오리라
사막에 숲이 우거지리라 사막에 예쁜 새들 노래하리라
주님이 다스릴 그 나라가 되면은 사막이 낙원 되리라
독사 굴에 어린이가손 넣고 장난 쳐도 물지 않는
참사랑과 기쁨의 그 나라가 이제 속히 오리라
예수님 제대로 모시고 살면 내 마음이 그런 천국 된다. 예수님 제대로 모시고 살면 가정이 그런 천국 된다. 예수님 제대로 모시고 살면 남이 나에게 어떻게 대하든지 천국 백성다운 그런 삶을 이 땅에서부터 이미 누리며 살 수 있게 된다. 예수가 다스리시면 북한도 달라 질 수 있고 예수가 다스리시면 이 세상 그 어느 나라, 어느 민족, 그 어느 누구의 삶이라도 달라질 수 있다.
목축할 자.
미가 선지자는 메시아로 오실 하나님의 아들을 양과 염소를 목양하는 목축에 비유하였다. 양은 목자 없이 살아갈 수 없는 동물이다. 이 세상에 목자가 반드시 필요한 동물이 양이다. 구원 받을 백성들을 목양하실 목자는 여호와의 능력과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목축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가 목축할 대상은 ‘남은 자’이다. 미가서 5장에 보면 3절, 7절, 8절에 세 번이나 반복해서 ‘남은 자’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시다. 물론 여기서 말씀하시는 ‘남은 자’란 우선은 바벨론 포로의 땅에 끌려가서 고난을 당한 유대 민족들 가운데서 살아남아 다시 유대 땅으로 돌아오고, 예루살렘성으로 돌아 올 자들을 말씀하신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그 시대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수 많은 지구촌의 인생들 가운데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그분의 다스림을 받고 그분을 내 인생의 목자로 모시고 살아가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은총을 말씀하신 것이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다윗의 시편 23편의 고백이 무엇인가. 어린 소년 다윗을 사울 왕이 사위 삼았다. 군대의 주요 보직을 맡겼다. 그러나 사울 왕이 나중에 다윗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대적하였다. 사울 왕은 다윗을 죽여 없애려고 하였다. 그런 다윗의 목숨을 누가 건져 주었나. 세월이 흐르고 다윗이 왕이 되었다. 다윗의 곁에 그를 돕고 보좌하는 문무 대관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아들 압살롬이 반역하였다. 왕이었던 다윗인데 군대를 동원하여 압살롬의 반역 세력을 척결하려 하지 않고 왕궁을 비워 놓고 기드론 시내를 건너서 피신하였다. 왕 다윗이 그처럼 초라해 보였던 적이 없었다. 그 때에 적지 않은 다윗을 쫓던 고관대작들이 다윗에게 등 돌리고 압살롬의 반역 세력에 합류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압살롬과 그를 쫓던 자들은 어떻게 되었고 다윗과 그를 보호하며 울며 다윗을 따르던 자들의 나중은 어떻게 되었는가.
다윗은 시시 때때로 경험하여 알고 있었다. 자신의 목자는 사울 왕도 아니고 왕자 요나단도 아니고 그의 곁을 지켜 주던 요압 장군도 아니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그의 영원한 목자이시라는 것을 다윗은 절절이 깨닫고 체험하였다.
당신은 어떤가. 누가 당신의 목자인가. 누가 당신의 삶을 목축하는 분이신가. 생명보험인가. 적금인가. 노후 자금인가. 건강 보험인가. 착실히 늘리어 온 주식 투자인가. 몇 채의 아파트와 상가와 빌딩과 부동산과 땅 문서들인가. 이제는 땀을 흘려 일하지 않아도 매월 소득으로 수입되는 그 어떤 수입원인가. 다 좋다. 잘 투자하고 잘 관리하고 잘 운용하여야 한다.
최근(2018. 11. 16)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자기 집이 없이 사는 무주택 세대가 전체의 44%라고 한다. 자기 집을 한 채 혹은 그 이상 갖고 살아가는 상위 10% 세대의 재산은 자기 집이 없이 살아가는 하위 10% 세대가 가지고 살아가는 재산의 32배라는 통계 발표가 있었다.
언제나 세상은 비교 할 밖에 없고 비교 될 수밖에 없다. 예수 때에도 가난한 자는 여전히 가난했고 병든 자는 여전히 병으로 고생하며 지냈다. 예수께서 베데스다 못가에 가셨다고 해서 그 곳의 모든 병자들이 모두 다 고침 받은 것은 아니었다. 예수께서 더러 죽은 자를 살리신 적이 몇 번 있었지만 그렇다고 예수 때에 무덤 속에 있던 이들이 모두 다 되 살아 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인생을 어린 양처럼 돌보시고 목축하신다는 미가의 예언은 과연 무슨 의미이며 어디까지의 보살핌과 돌보심을 뜻하는 것일까.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금식하셨다. 마귀의 유혹을 차례차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기셨다. 그 후에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며 마을과 회당과 처처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공생애를 시작하셨다. 그런데 예수가 자라난 나사렛 마을 사람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예수를 마을 어귀에 있는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죽여 버리려고 하였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를 그냥 목수 요셉의 아들 정도로 밖에는 알아보질 못했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신 인생들의 영원한 목자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반면에 예수가 누구이신지를 깨닫고 영접한 이들은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든지 예수 안에서 창대하고 땅 끝까지 미치는 복음의 은총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되었다. 이것이 미가서 5장 4절이 말씀하시는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는 예언의 말씀이시다.
생각하여 보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가는 땅과 그 복음을 받아 들인 백성들은 영국의 죄수들을 배에 실어다가 태평양 남단 먼 대륙 호주에 살게 한 그들의 후손들이라도 창대해졌고 창성해졌다.
아프리카 남단의 남아공에 백인들이 지배하던 식민지의 땅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내 인생의 참 목자로 영접한 이들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 안에서 이루어질 정의와 공의의 세상을 꿈꾸었던 이들이 있었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이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 1918-2013)이다. 그는 남아공의 원주민들 중의 한 종족인 템프 족 추장의 후손이다. 그의 원 이름은 ‘롤리흘라흘라’이다. 그가 속한 코사족 구어체의 이름 뜻은‘개구쟁이’란 뜻이다. 그 개구쟁이가 커 가면서 복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평생 감리교도였다. 그는 커서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였다. 식민 시대를 살아가면서 수많은 불의와 불평등을 목격하게 되었다. 나중에 변호사가 되었다. 43살 때 ‘민족의 창’이란 군사 조직을 하고 사령관에 취임하였다. 다음 해에 체포되었고 1964년에 국가 반역죄로 종신형을 받아 감옥에 갇혔다. 27년을 감옥에 갇혀 지냈다. 1990년 2월 2일, 72살에야 출소되었다. 아프리카, 인도, 유럽을 순방하고 그해 6월 26일, 미국 의회에서 아프리카 국민회의의 입장을 천명하는 의회 연설을 하였다. 그 다음해인 1991년에 30년 만에 열린 아프리카 국민회의 전체회의에서 의장에 당선되었다. 1948년에 정해졌던 흑인 탄압 법안인‘아파르트헤이트’라는 흑백인종 분리 법안을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1993년, 남아공 역사상 최초로 1인 1표제로 투표하는 민주적인 선거제도를 확정하였다. 그 결과로‘아파르트헤이트’를 철폐한 공로가 인정되어 노벨 평화상을 타게 되었다. 1994년, 65%의 절대 지지를 받고 76살에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7년을 감옥에서 지낸 그는 노년기에 모세처럼 타는 불꽃을 활활 지피어 올리며 영향력 있는 생을 20여년 더 살다가 95세에 하나님 앞으로 돌아갔다.
5절에 “이 사람은 평강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미가는 장차 이 땅에 탄생하실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아를 평강과 동격화 하였다. 평강이란 상태를 의인화 하였다. 맞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평강을 주시는 분이실 뿐만 아니라 그는 곧 평강 그 자체이시다. 예수는 그를 믿고 따르는 백성들을 평강으로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이시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사야 9장 6절에서 예언한 그 말씀 그대로이시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라고 하였다.
건져낼 자.
6절 끝에 보면 “그가 우리를 그에게서 건져 내리라.”고 하였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앗수르의 침략에서 건져 내실 뿐만 아니라 사단과 마귀와 원수의 세력으로부터 영원히 건져 내 주실 구원주이시다. 맞다. 예수 그리스도는 미가의 예언대로 이 땅에 오신 구세주이시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죄와 사망에서 구원 받아 진리의 말씀 안에서 영생하게 하시는 영원한 복락을 선물해 주실 것이다. 이것이 성도가 누리는 영원한 은총이다.
그 어떤 평민의 딸이라도 왕자의 눈에 들고 왕자의 마음에 들어 왕자와 결혼하는 순간에 그 평민의 딸의 신분은 일순간에 왕족으로 변하는 것이다.
노르웨이의 왕세자비인 메테 마리트는 평범한 중산층 가정의 아이로 자랐다.어린 시절 부모가 이혼해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메테 마리트는 고등학생 때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교환학생을 지냈고 오슬로대학교에 진학했다. 결혼 전에 아들 마리우스를 낳았다. 혼자 아이를 기르면서 일을 하여 생계를 유지했다.
그런 그녀가 노르웨이의 왕세자 호콘을 친구들을 통해서 만났다. 두 사람은 연인이 되었고 결혼하지 않고 동거를 시작했다. 호콘은 다음 해에 그들의 관계를 시인했고 언론 앞에 약혼을 선언했다. 노르웨이 국민들은 왕자의 예비신부가 평민일 뿐만 아니라 4살 짜리 아들을 키우고 있는 미혼모라는 사실에 우려의 시선을 보냈다. 그녀의 전 애인이자 아이의 생부는 폭행 및 마약 소지죄로 징역형을 받고 있는 상태였다.
결국 결혼을 1주일도 안 남기고 호콘 왕세자와 메테 마리트는 기자회견을 열어 그녀의 과거에 대해 국민들 앞에 사죄했다. 호콘의 부모인 하랄 5세 왕과 소냐 왕비는 그녀를 지지했다. 하랄 5세가 결혼을 반대하지 않은 이유는그 자신이 과거에 평민이었던 소냐와 결혼하였기 때문이었다. 하랄 5세 왕은 자신의 부친이었던 울라프 5세와 노르웨이 국회가 허락하기까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독신으로 살겠다”고 버티며 9년간을 소냐를 기다렸다가 결혼한 경우였다. 호콘과 메테 마리트는 2001년 8월 25일에 결혼했다. 메테 마리트는 결혼 후에도 공부를 계속했다. 2006년, 그녀는 UN 에이즈 대책 공동 프로그램의 특별대표가 되었다. 또한 그녀는 노르웨이 적십자와 노르웨이 정신건강협의회 같은 조직의 후원자이기도 하다. 왕세자와 왕세자비 사이에는 왕자와 공주가 한명씩 태어났다.
우리는 다 양과 같아서 그릇된 길을 가던 자들이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감람산에서 밤을 지내신 예수께서 아침이 다시 예루살렘 성전에 가셨다. 예수는 그의 곁에 모여드는 백성들을 가르치고 계셨다. 그 때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웠다. 그리고는 "모세의 율법에 이런 여자는 돌로 치라 했는데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는가”하고 물었다. 저들이 예수께 이렇게 질문한 이유는 예수를 고발할 조건을 찾고 예수를 시험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예수는 몸을 굽혀 땅에 글씨를 쓰고 계셨다. 얼마 후에 땅에 엎드렸다가 일어나신 예수께서 손에 돌을 들고 있는 유대 남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그리고 다시 땅을 향해 몸을 굽혀서 손가락으로 땅에 글씨를 쓰고 계셨다. 그 때 양심에 가책을 느낀 어른들로부터 시작해서 젊은이까지 한 사람씩 한 사람씩 그 자리를 비우고 떠나갔다. 예수께서는 자기 앞에 홀로 남은 여인을 향하여 말씀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선포하였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6)
강림절은 우리의 지난날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금 기다리는 절기이다. 강림절은 우리의 크고 작은 모든 죄를 깨끗하게 씻김 받고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해 주시기를 소망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생명의 구주로 영접하는 절기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건져 내 주시는 구원의 넉넉한 은총이 충만하길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