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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아니하시면(시127:1-5) 2018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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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8-11-11 16:52 조회 14,152 댓글 0
 
                  그가 아니하시면(시127:1-5)        2018. 11. 11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의 마음 중심은 대개가 자기 자신이다. 자기 스스로가 자신의 주인으로 살아간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즉 세상만사는 내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생각을 갖고 살아간다. 그런 이들은 창조주 하나님과 세상만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반면에 미신과 우상 숭배에 젖어 사는 이들도 의외로 많다. 

점을 치는 이들을 찾아다니며 자신이 세상의 그 어떤 높은 지위에 당선될 지와 등용될지를 물어 보고 다닌다. 박수나 무당에게 맹종한다. 고사도 지내고 굿도 하고 부적도 비싸게 마련해서 몸에 지니고 다닌다. 부적을 마련해서 군대에 가는 아들의 속옷에 넣어 주기도 한다. 대 기업가들 중에도 요즘 같은 컴퓨터 최첨단 시대에도 돼지 머리 놓고 고사를 지낸다. 이사도 아무 날이나 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떠한가. 하나님을 믿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가. 우리가 믿는 믿음이란 어떤 믿음인가. 

시편 127편은 솔로몬의 시편이다. 표제어에 보면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설명이 있다. 무슨 뜻인가. 오늘날로 하면 예배의 입례 찬송과 같은 것이다.  그 내용이 무엇인가. 여호와께서 함께 하지 아니하시면 수고해 봐야 헛되고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자리에 들며 혹은 밤새도록 잠도 않자고 뜬 눈으로 수고하며 지내도 헛되다고 했다. 

주변을 보라. 되는 사람은 아둥바둥거리지 않아도 될 것 다 된다. 누릴 것 다 다 누리며 산다. 할 것 다 하며 산다. 그런데 안 되는 사람은 양 눈에 핏발이 서도록 애쓰고 수고하고 힘쓰고 별의 별 노력을 다 해도 안 되는 것은 안 된다. 

물론 요즘 같은 무한 경쟁 사회에서 그 어떤 분야에서 그 무슨 일을 하며 지내든지 남들보다 훨씬 더 수고하고 노력하고 고군분투 하지 않고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겠나. 요즘처럼 악이 관영하고 비상식이 상식을 누르고 편법과 술수와 거짓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말이다. 더군다나 요즘은 ‘거짓뉴스’라는 것이 세상을 뒤덮고 있다. 무슨 사건의 내용을 들어도 어디까지기 진실인지 알 수가 없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시편 127편은 여호와께서 세우시고 지키시고 잠을 주시고 자식들에게 복을 주시지 않는다면 그 모든 것들이 헛되다고 하였다. 그래서 말씀의 제목을 ‘그가 아니하시면’이라고 정하였다. 말씀을 좀 더 자세히 묵상해 보자. 


 그가 세우지 아니하시면.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말씀하는 집이란 가족들이 살아가는 건물로서의 공간을 의미하도 하지만 그 집 안에서 살아가는 가족들을 말씀하는 것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들딸들인 손자 손녀 이렇게 대를 이어서 살아가는 한 가정의 가족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아브람을 불러내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람과 사래를 통하여 장차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장대한 계획을 갖고 계셨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겠고”라고 언약하셨다. 그러나 세월이 아무리 흘러가도 큰 민족은커녕 사래의 나이만 점점 더 들어 갈 뿐 아들 하나 태어나질 않았다. 마음이 더욱 조급해진 것은 아내 사래였다. 사래는 자신의 몸종인 하갈을 남편 아브람의 침소에 들이도록 하였다. 아들이 태어났고 이스마엘이라고 이름지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마엘을 인정하지 않으셨다. 이스마엘의 탄생은 아내 사래의 요구를 받아들인 아브라함의 결정에 의한 아들의 탄생이었을 뿐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람이 아내 사래를 통하여 장차 태어날 언약의 아들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었다. 세월이 더 흐르고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 아내 사래의 나이 90세에 아들 이삭을 낳았다. 그 이삭이 리브가를 통하여 에서와 야곱을 낳았다. 그런데 하나님은 동생 야곱의 후손을 언약의 자손으로 세워 가셨고 형 에서의 자손을 붙들지 않으셨다. 왜냐고 질문할 수 있다. 에서도 부족하고 야곱도 흠이 적지 않다. 하나님 앞에서는 형제가 다 죄인일 뿐이다. 그러면 야곱이 어떤 면에서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기에 하나님은 쌍둥이 형제 중에서 형 에서를 붙들지 아니하시고 동생 야곱을 붙들어 그의 후손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세워 나가는 언약의 자손들로 삼으셨을까. 

말라기 1장 2-3절에 보면 2절 끝 부분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라는 말씀이 있다. 한 어머니 리브가의 복중에서 쌍둥이로 태어난 형제인데 하나님이 골고루 두 형제에게 복을 주시지 왜 동생 야곱을 사랑하시고 형 에서는 미워하셨을까.

우리가 아는 대로 하나님은 인애와 자비와 긍휼이 많으신 아버지이신데 어찌하여 누구는 사랑하시고 누구는 미워하셨다는 말씀이 무엇일까.

집을 세운다는 의미는 태어나는 자녀들을 통해서 한 가정이 어떻게 세워져 가는가를 말씀하는 것이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장가들었다. 야곱은 첫 눈에 장인의 둘째 딸인 라헬에게 마음이 갔다. 그러나 장인 라반은 장가든 야곱의 첫날 밤 그의 장막에 언니 레아로 하여금 들어가게 하였다. 야곱은 레아에 대한 사랑이 별로 없었다. 그런 레아에게서 여섯 아들이 태어났다. 그러나 그런 세월이 가도록 야곱이 그렇게 사랑하고 위하는 라헬에게서는 아들이 태어나질 않았다. 언니 레아에 대하여 불이 붙는 시기심을 갖고 지내던 동생 라헬은 자신의 여종 빌하를 야곱의 침소에 들여서라도 아들을 낳고 싶어 하였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여종 빌하의 아들들이 단과 납달리이다. ‘단’이란 뜻은 ‘억울함을 풀었다’는 의미이고 ‘납달리’라는 뜻은 ‘경쟁하여 이겼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런가. 전혀 아니다. 단과 납달리의 탄생을 하나님은 인정하지 않으셨다. 세월이 지나고 뒤 늦게 라헬의 태문을 여시고 주신 아들이 요셉이다. 생각하여 보라. 그 요셉이란 아들이 어머니 라헬에게 있어서 어떤 마음고생을 하고 태어난 아들인가. 

요셉이 자라날 때는 어땠는가. 아버지 야곱의 총애를 받고 다른 형제들과 다르게 채색 옷을 귀하게 입혀 키우던 요셉인데 17살에 배 다른 열 명의 형제들에 의해서 애굽의 노예 시장으로 팔려 가고 말았다. 13년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던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 그런 세월 중에 가나안에 큰 흉년이 들었다. 야곱은 아들 며느리 손주들까지 70여명이 애굽으로 내려가서 구걸하는 방법으로 연명해야 하는 길을 택하였다. 극심한 가뭄은 야곱의 일가족을 죽음으로 몰아갈 지경이었다. 살길이 막연하였다. 그렇게 아버지 야곱과 가족 70명을 맞이한 것은 죽은 줄 알았던 요셉이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그의 가족을 세워가는 아들로 택하여 쓰신 인물이었다. 요셉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고 바로 왕의 시위대장인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하며 가정 총무가 되었다. 여주인의 성적 유혹을 뿌린 친 것이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날들을 지내는 요셉에게 하나님은 늘 함께 하셨다. 나중에 요셉은 애굽을 7년 흉년에서 살리고 자기의 늙어 가는 아버지 야곱과 70명의 가족을 살려 내는 시대적인 인물로 쓰임 받았다. 하나님은 요셉으로 하여금 요셉의 집을 세우는 자로 붙들어 쓰신 것이다. 

사무엘 상 1장에 보면 엘리 제사장과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죄악에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그러한 암울하던 사사시대 말기에 하나님은 실로의 성막에서 자라나던 어린 사무엘로 하여금 장차 이스라엘 나라를 세워갈 하나님의 사람으로 주목하고 계셨다. 

사무엘상 2장 3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온다.“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

이는 어린 사무엘의 나중을 통하여 장차 이스라엘 역사에 존귀한 하나님의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사사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붙들어 쓰시겠다는 하나님의 선언이시다. 

이러한 말씀은 다윗의 기도내용 가운데에도 나온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의 종의 귀를 여시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셨으므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주께 간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삼하7:27)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만나서 하나님을 위한 성전을 건축하고 싶어하는 다윗 왕의 소원을 들으시고 다윗을 축복하셨다. 다윗과 그 자손들의 대대로 다윗의 집을 견고하게 세워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다. 

맞다. 개인, 가정, 기업, 산업, 국가에 이르기 까지 그 모든 범사를 여호와께서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고 만다.


그가 지키지 아니하시면.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라고 하였다. 생각하여 보라. 물론 경비를 세우고 파수꾼을 세우고 CCTV를 설치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중요하다. 그래야 맞다. 그러나 어디 그런가. 내 생명, 내 건강, 내 재물, 내 삶의 지위, 내 명예, 내 인기 그 모든 것들을 누가 지켜 나가야 하나. 내가 내 건강 내 생명을 지킬 수 있나. 물론 건강을 관리하여야 하는 것이 맞다. 독한 술을 날마다 퍼마시고 담배를 하루에 2-3갑씩 피고 마약에 손을 대고 세상 온갖 타락한 범죄의 온상에 들락거리며 살아간다면 그 수명이 얼마나 가겠는가. 

최근에 언론에 보도된 모 기업가의 모습을 보라. 설명을 아는 이들은 안다. 웹하드라는 것이 얼마나 이 시대에 요긴한 문명의 이기인가. 그 회사의 창업자는 돈을 너무나 손쉽게 쓸어 담았다. 매년마다 엄청난 부가 늘어만 갔다. 그러나 그의 인격, 그의 됨됨이, 그의 주변에 따라다니는 소문은 너무나도 세간에 파다하였다. 드디어 올 날이 왔다. 

숨어서 행한 악이라도 그 악이 자라나면 나중에는 광풍이 되어 되돌아온다. 

지킨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우리는 자신이 이룩하고 쌓아온 그 모든 것들을 지키고 보존하고 누리고 자손들에게 전하며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생각하여 보라.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이라도 내 삶을 지키는 힘은 내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나를 향한 그 분에게서 임하는 것이다. 

다윗은 훌륭한 왕이었다. 물론 그에게도 부끄러운 죄와 악이 없지 않았다. 그런 다윗이 처절하게 회개의 눈물을 흘렸다. 그는 진심으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회개의 길을 걸었다. 하나님은 그런 다윗의 중심을 주목하셨다. 훗날 하나님은 다윗을 마음에 드는 인생으로 붙들어 쓰셨다. 

사도행전 13장에 보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안식일을 맞아 회당에서 설교한 사도 바울의 설교문이 나온다. 그 내용 중에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행13:22)

는 말씀이 있다. 생각하여 보라. 다윗 왕도 부족함이 참으로 많은 나약한 인물이다. 그런 다윗을 하나님은 점점 마음에 맞아 하셨다. 하나님은 다윗을 통하여 하나님의 하시려는 뜻을 이루셨다. 

한 인생이 태어나서 평생을 살아가는 그 모든 출입에 하나님께서 지켜 주지 아니하시면 스스로 세움 받을 수 있는 인생이 누가 있나.

나의 출입과 범사를 지켜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 가운데서 살아가려면 나 스스로도 선을 터전삼고 공의를 울타리 삼고 진실을 문빗장 삼고 살아가고자 하는 자기 관리가 필요하다. 

지난번에 일어난 쌍둥이 두 딸 여고생과 같은 학교의 교무부장인 아버지가 개입된 시험 문제지 유출 사건의 전모를 보라.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어른이든 어린이이든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지 아니한다면 그 나중이 어떻게 되고 마는가. 

잠언은,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라고 말씀하였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 주시기를 기도하고 의지하여야 하지만 나 스스로도 나를 지켜가는 겸허함이 반드시 필요하다. 악이 악인 줄 알면서 악에 빠지면 되겠나. 불의가 불의인줄 알면서 불의의 편에 서면되겠나. 악과 불의인줄 알면서 악의 편에 서고 불의에 가담하면 대법원장이라고 법의 심판을 피할 수 없고 대 법관이라도 법 앞에서 예외일 수 없을 것이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의 왕권을 모반하였다. 그와 같은 일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일이라면 모를까. 성사될 리가 없다. 압살롬의 나중이 어떻게 되었는가. 

예수께서는 12명의 제자들을 주님께서 택하여 제자로 부르셨다. 한 사람 하 사람 제자 편에서 보면 얼마나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부르심인가. 그런데 가롯 유다의 나중이 어떻게 되었는가. 예수의 제자가 되는 택하심과 부르심은 주님으로부터 주어진 크나큰 선물이며 축복이다. 그런 제자 됨을 가롯 유다는 망각했고 주님을 등지고 은 30에 팔아 버렸다. 붙잡히신 예수께서 겪으시는 고난의 과정을 알게 된 가롯 유다는 더 이상 자신을 지킬 힘이 없었다. 가롯 유다는 그 때에야 스스로 뉘우치며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은 30을 도로 갖다 주었다. 그리고는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고 말았다. 
세상을 살면서 성공하는 것도 좋고 출세하는 것도 좋고 높이 올라가는 것도 좋고 부자 되는 것도 좋고 유명해 지는 것도 좋고 최고 권력자가 되는 것도 좋지만 자기 자신을 지킬 줄 알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날마다 순간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 주시기를 간구하고 의지하여야 한다.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눕는 수고를 계속하는 이유가 뭔가. 그 수고가 헛되지 않는 더 나은 내일을 꿈꾸기 때문이 아닌가. 수고의 떡이란 무엇인가. 서양 사람들은 수고의 떡을 먹기 위해서 종이에 샌드위치를 싸서 들고 다니며 먹고 자동차를 운전하며 햄버거를 한 입씩 먹으며 출근하고는 한다. 우리로 하면 떡 한 조각 혹은 삼각 김밥 한 줄로 끼니를 때운다. 편의점에서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구운 달걀 한두 개를 사서 허기를 해결하며 이리 뛰고 저리 뛴다. 그런데 그 모든 수고와 열심히 세우시고 지키시는 여호와의 도우심 안에서 살아가는 출입이 아니라면 매사가 헛되고 만다. 한 해 동안 땀 흘리고 수고하며 봄과 여름을 지내왔는데 가을에 빈 쭉정이를 거둔다면 그 한해의 농사가 헛수고가 되고 말 것이다. 

예수는 비유에서 농사가 너무 잘 돼서 창고를 늘려 짓고 몇 해 동안 농사 하지 않으면서 쉬고 놀며 지내자고 말하는 어느 농부를 예로 들었다. 그런데 그 밤에 그 농부의 영혼을 하나님께서 불러 가신다면 창고를 늘려 짓고 쌓는 수고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물으셨다. 

오랜 시간 일하고 수고하고 이리 뛰고 저리 뛸지라도 집안이 뒤숭숭하고 인생사가 걱정근심 염려 불안 두려움 초조가 가시 울타리처럼 자신을 휘감아서 도대체 잠자리에 누워도 잠을 청할 수 없는 형편이라면 집이 왕궁과 같고 집안에 금과 은과 보석이 넘쳐난들 그 모든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 

그래서 솔로몬을 고백하였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그가 복(福)을 주지 아니하시면.
3-5절에서 말씀하시는 내용은 자식에 대한 복이다. ‘무자식 상팔자’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어찌 그렇게 말할 수 있겠는가. 가정에 아들딸이 태어나지 않고 마을에 애기 우는 소리가 10년이 지나도 끊기고 국가의 다음 세대인구가 줄어드는 것이 희망적인가. 

이번 목요일에 59만 4000여명의 고등학생과 재수생들이 대학입학수학능력 평가 시험을 본다. 그 60여 만 명의 남녀 학생들이 한 명 한 명 어느 가정인가가 선물로 낳아서 정성으로 키워낸 아들딸들이다. 그 외에도 대학 진학을 포기하거나 미루고 생활 전선에 뛰어드는 10대 후반의 청소년들도 적지 않다. 이 시대의 누구나 다 아는 대로 점점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 태어나는 아기의 숫자가 예전과 같지 않다. 

결혼하지 않으려 하거나 결혼하여도 아기를 낳아 키우는 대신에 개나 고양이와 같은 애완동물을 키우며 외로움을 이기며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늘어  나고 있다. 

성경으로 돌아가자.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라고 했다.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라고 했다. 늙어 낳은 자식 말고 젊어 낳은 자식은 장사의 손 안에 있는 화살과 같은 것이다. 자식이 그의 화살 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다고 했다. 유능한 자식을 둔 부모는 그들이 성문에서 원수를 만나 담판 할 때에라도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다. 

자식의 탄생이 부모의 뜻대로 되나. 아들딸의 탄생이 부모의 선택인가. 그러므로 자식은 여호와의 기업이고 하나님의 상급인 것이다. 

17살에 애굽에 노예로 팔리어 갔던 요셉이 13년 후에 애굽의 총리가 될 줄을 그 누가 알았겠나. 그 요셉이 9년 후에 아버지 야곱을 만나고 형제와 가족들 70명을 만나서 고센 땅에 정착시켜 공양하고 돌볼줄 누가 알았겠나. 

태어난 지 3개월 만에 갈대 상자에 역청을 발라 나일 강에 버렸던 아기 모세가 80년 후에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출애굽 해 내는 민족 지도자가 될 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사사로 쓰임 받은 드보라는 가정 주부였다. 사사 에훗이 죽은 후에 이스라엘은 가나안 왕 야빈의 군대로 인하여 20년 동안 심각하게 학대를 받았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부르짖음은 끝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은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에 사는 랍바돗의 아내 드보라를 사사로 택하여 쓰셨다. 드보라가 사사로 활동한 40년 동안  하나님은 드보라의 지도력을 존귀하게 해 주셨다. 드보라의 통치기간 동안 하나님은 이스라엘 나라를 40년 동안 평온하게 하셨다. 

전쟁에 능하던 임금 사울과 징용된 군대도 어찌하지 못하던 블레셋을 소년 다윗이 물매 돌 한 개로 적장 골리앗을 해결하였다. 그 후 다윗은 사울 왕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얼마 후에 사울의 시기 가운데 적폐청산 제 1호 인물로 주목 받았다. 다윗은 광야와 동굴로 피하고 숨는 우여 곡절 많은 세월을 보내야 했다. 하나님은 그런 다윗을 버리지 않으시고 30살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셨다. 다윗은 나중에 하나님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하신 시대적인 하나님의 사람다운 생을 살다가 주께로 돌아갔다.  
바사의 수산 궁에서 술 맡은 관원으로 지내던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의 무너진 성곽을 중건하는 지도자로 쓰임 받을 줄 누가 알았겠나. 

에스더는 부모가 일찍 돌아가셨다. 사촌 오빠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부모역할을 대신해 주며 키워 냈다. 그런 에스더가 바사의 아하수에로 왕의 왕비로 간택 받았다. 유대인들을 말살하려는 음모가 드러났다. 왕비인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고 기도하였다. 동족들에게 함께 금식하며 함께 기도할 것을 청하였다. 어려서 부모 잃고 연약하게 자라난 에스더가 동족 구원의 중심에 서는 하나님의 딸로 쓰임 받을 줄을 그 누가 알았겠나.

왜 요셉, 모세, 드보라, 다윗, 느헤미야, 에스더를 말하는가. 저들이 누군가에게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상급으로 태어나 양육 받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어느 유치원에 보내느냐, 어떤 학원 교육을 시키느냐, 어떤 옷 입히고 어떤 운동화 신기고, 어떤 패딩 잠바를 입히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인 자신의 인이 “여호와의 기업이요 여호와의 상급”이란 신앙관을 갖게 하는 것이 우선이다. 

어느 전공을 하느냐, 어느 대학을 졸업하느냐, 어떤 직장, 어떤 사업, 어떤 분야에서 사회생활을 하느냐 보다 백배 천배 더 중요한 것은 자식을 대하는 부모의 마음과 자기 자신을 대하는 아들딸의 마음가짐이 달라야 한다. 어느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나 자라느냐 보다 앞서서 “여호와의 기업이요... 여호와의 상급”으로서의 인생관을 갖고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 

작가 김훈에 대한 일화를 접했다. 그는 고려대 영문과에 진학했다. 워즈워드, 라이너 마리아 릴케 등의 작품을 비롯하여 수많은 서구의 문학작품들을 접하기 시작했다. 그런 어느 날 도서관에서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접하게 되었다. 그는 충격에 빠졌다. 이순신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임금마저 북방으로 도망친 나라를 건지기 위해서 동분서주했다. 그의 일기는 화려하지 않았으나 청년 김훈의 가슴을 흔들었다. 

그는 이순신에 대하여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훗날 <칼의 노래>라는 역사의 사실에 근거한 소설을 써 내려 갔다. 두 달 동안 잠도 별로 안자고 별로 먹지고 않고 책 쓰기에 빠져 지냈다. 두 달 동안에 치아가 일곱깨나 술술 빠져 버렸다.

그의 사형제는 6.25 때 1. 4후퇴하는 일행들 틈바구니에 끼어서 부산까지 기차로 피난을 갔다. 가다가 떨어져 죽는 아이들도 하나 둘이 아니었다. 밟혀 죽고 어떤 애들은 터널을 지나다가 삐죽 밀고 나와 있는 철근 끝에 찔려 죽기도 했다. 삶과 죽음이 뒤 엉킨 피난길에 김훈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네 형제를 안고 업고 품고 부산에 가서 피난 시절을 보냈다. 나중에 아버지께 전해 들었다. 고관대작들은 기차 안에 장롱도 싣고 개집까지 싣고 개까지 끌고 가는데 서민들은 기차의 창문에 매달리고 지붕에 매달려 갔다. 설마 그게 사실일까 하고 전쟁 기록물을 그 당시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서 찾아 봤다. 사실이었다. 작가 김훈은 그런 시대적은 아픔을 가슴에 간직하고 <칼의 노래>를 써내려 갔다. 

세월이 많이 흘러 청년 김훈도 머리가 희어지는 나이가 되었다. 연세 들어 가시는 어머니는 큰 아들 곁에 가서 지내고 싶어 하셨다. LA의 노인 요양원에서 지내시는 그의 어머니는 치매 상태이시다. 훈을 보고 싶어 하시는 어머니를 뵈러 갔다. 어머니는 요양 병원의 병실에서 베개의 머리맡에 구멍을 내어 등에 업고 식사가 나오면 잔등에 업은 베게에 음식을 넣어 주며 “우리 훈이 많이 먹고 무럭 무럭 크렴”하며 베개를 어룬다. 아들 김훈은 그런 아머니의 모습을 보며 울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 왔다. 한국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훈아. 보고 싶은데 언제나 엄마를 보려 올꺼니.” 작가 김훈이 그렇게 어머니의 사랑을 먹고 자라나고 아버지의 사랑을 입고 자라났듯이 이 땅의 모든 자식들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다. 여호와께서 주신 상급이다. 그처럼 화살 통에 화살이 가득한 자는 복이 있는 자이다. 

주께서는 그렇게 자라난 자식들을 통하여 가정과 도성과 나라와 민족을 위기에서 건지실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도 마리아의 태에서 잉태되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예수도 어린 시절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무릎 위에서 자라났다. 하나님의 아들도 그렇게 출발해서 인류를 구원하신 것이다. 장사의 화살 통에 그런 아들딸이 가득한 자가 복이 있는 자이다. 여호와의 복이 우리 가정과 민족과 이 땅에 임하길 기도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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