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에 공유 트위터에 공유 구글플러스에 공유 카카오스토리에 공유 밴드에 공유
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누가 복이 있는 자인가(시84:1-12) 20180826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으로 보내기
  • 밴드로 보내기
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8-08-31 03:31 조회 15,960 댓글 0
 
                  누가 복이 있는 자인가(시84:1-12)    2018. 8. 26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나그네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

인생은 벌거숭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가는가
강물이 흘러가듯 여울져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벌거숭이 강물이 흘러가듯
소리 없이 흘러서 간다

이 노래의 가사는 공주사범대학을 졸업하고 방송작가로 활동하던 김석야 씨의 작품이다. 대중음악가인 김호길씨가 곡을 붙여 가수 최희준씨에 의해 오래도록 불려진 유행가 <하숙생>이다.  

거의 아는 유행가가 없지만 몇 곡 따라 부를 수 있는 곡 중의 하나가 최희준(1936-2018)의 ‘하숙생’이란 노래이다. 최희준은 경복고, 서울대 법대 출신으로 국회의원을 지낸 남다른 경력의 소유자이다. 구수한 목소리, 천진한 표정과 미소, 크지 않은 키, 점잖은 모습의 그가 부른 노래처럼 하숙생과같은 인생길을 마치고 엊그제인 8월 24일에 눈을 감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개의 사람들은 무병장수(無病長壽)를 복이라고 여긴다. 아무리 그래도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아 갈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영웅호걸절세가인 그 누구라도 때가 되면 이 세상을 떠나가야만 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부귀공명(富貴功名)을 원한다. 그러는 중에 세상 사람들은 누군가와 자신을 상대적으로 비교해서 복을 말하고는 한다. “누군 복도 많아.” 혹은“누군 지지리도 복이 없어.”라고 말할 때의 그 바탕은 나와 그의 형편과 처지를 비교하는 말이다. 

우리 각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나에게만 부여된 복이 있다. 천부적(天賦的)인 복이다. 내가 지금 남한 땅에 살고 있으니 이런 복을 누리는 것이다. 물론 북한에도 공산당원들은 잘 먹고 잘 입고 잘 산다. 일반 백성들이 문제이다. 내가 짐바브웨, 에디오피아, 소말리야나 예맨에서 태어났다면 국가적으로나 환경적으로 그 시대의 고난과 고통을 감내하며 생존해 나가야 한다. 짐바브에의 실업률은 80%이다. 에디오피아의 80%는 구호물자에 의지해서 연명해 간다. 지구상에서 26억 명 이상은 하루 2달러 미만의 혜택을 입으며 살아간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반면에 전 세계의 부자 870만 명의 재산은 26억 명이 쓰는 돈의 25배를 갖고 있다. 유엔의 통계로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는 아프리카 콩고이다. 인종 간에 싸우는 내전과 무장폭동, 경제파탄, 유가하락으로 앞이 보이지 않는 나라이다. 

어떤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허약하게 태어나거나 장애를 갖고 태어나기도 한다. 그런 몸으로도 굳굳하게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는 이들을 보면 마음이 숙연해 진다. 엊그제 어느 분이 동영상을 보내 왔다. 중국 농촌의 청년이 양 팔이 없이 농사하며 살림하며 음식도 직접 요리해서 먹고 지내는 씩씩한 장면을 보았다. 내게 남아 있는 것으로 난관을 극복하며 살아가는 것이 맞다. 

오늘 부른 “나의 갈길 다가도록”이란 찬송의 가사는 F. J. 크로스비(Fanny Jane Crosby, 1820-1915) 여사의 작품이다. 그는 생후 6개월 이후로 평생 볼 수 없는 상태로 95년을 살았다. 그는 자신이 공부한 맹학교에서 23년 동안 후배들을 가르쳤다. 그녀의 남편도 앞을 못 보는 음악가였다. 
그런 여건에서 감동적인 찬송시를 2,000여 편이나 썼다. 540장 찬송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라는 찬송시도 그의 작품이다. 우리 찬송가에 21곡이나 들어 있다.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사랑한단 말일세
믿는 맘으로 주께 가오니 나를 영접하소서
내가 매일 십자가 앞에 더 가까이 가오니
구세주의 흘린 보배 피로써 나를 정케 하소서”

“예수로 나의 구주삼고 성령과 피로서 거듭나니”
“예수께로 가면 나는 기뻐요.”
“자비한 주께서 부르시네 부르시네 부르시네”
“오 놀라운 구세주 내주 예수 참 능력의 주시로다.”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

이처럼 우리가 즐겨 부르는 거의 모든 찬송가의 가사가 크로스비 여사의 작품들이다. 그녀가 30살 때 집회에 갔다가 은혜를 받았다. “웬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찬송을 처음으로 듣고 따라 부르던 중에 그의 마음에 성령이 임하였다. 그는 그 날 이후 평생토록 95살 때까지 65년을 찬송시를 고백하는 은혜 가운데 살아갔다. 92살 생일 때에 그는 “나보다 더 복 받은 사람이 어디에 있으면 그와 손을 잡아 보고 싶어요. 나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가장 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에요.”라고 말했다. 

어떤 이들은 선천적으로 그 외모가 화려한 이들이 있다. 반면에 어떤 이들은 뜯어 고치고 또 뜯어 고쳤는데도 원판만도 못한 경우도 있고 부작용이나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이들도 있다. 어떤 이들은 평생 병을 달고 살고 어떤 이들은 돌을 삼켜도 소화될 정도로 건강하게 살아간다. 

무엇이 복이라고 여기며 살아가고 있나. 고라 자손의 시편인 시편 84편에 보면 어떤 사람들이 복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나. 고라 자손의 시는 시편 중에 모두 11편(42, 44-49, 84-85, 87-88)이 담겨 있다. 그 중에 ‘이런 자가 복이 있도다’라고 고백하는 본문 말씀 중에 은혜를 나누자. 


주의 집에 사는 자.
4절에 보니까 주에 집에 살면서 항상 주를 찬송하며 살아가는 자가 복이 있는 자라고 하였다. 이 시편은 솔로몬 성전이 무너진 주전 586년 이전의 것으로 여겨진다. 혹자는 어느 순례자가 성전을 향하여 가면서 쓴 것을 성전 봉사자인 고라 자손이 받아서 보관한 것이 성경에 포함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편하게 고라 자손의 고백으로 대하자. 고라가 누구인가. 민수기 16장에 보면 야곱의 아들 레위의 증손자가 고라이다. 아브라함의 칠대 손이다. 같은 레위 지파 출신이었던 모세와 같은 지파이다. 

고라가 르우벤 지파의 자손들 몇몇과 당을 짓고 모세와 아론에게 반기를 들었다. 하나님이 출애굽 시키신 우리 백성들은 누구나 다 거룩한 백성들인데 “어찌하여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는 것이 당을 짓고 반역한 요지였다. 고라가 르우벤 지파의 다단, 아비람, 온이란 이들과 의합해서 반역하였다. 그 때 모세는 저들과 다투지 않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기 시작하였다.(민16:4) 밤이 새도록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한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과 반역자들 앞에 선포하였다. 고라가 앞장 선 반역 사건으로 땅이 갈라져 고라와 그 일당이 죽임 당한 숫자가 250명이었다. 민수기를 읽어 보면  땅이 갈라진 일은 하나님의 심판 사건이었다고 했다. 그러한 사건 후에 살아남은 고라의 후손들이 후대에 성전의 문지기로 지내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하며 고백한 시편이 시편 84편이다. 

고라와 그 곁에 편들고 당을 지었던 이들이 심판 받는 모습을 보면서 처절하게 회개하고 주를 향하였을 것이다. 그 더러 살아남은 고라 자손들 중에서 여전히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하나님이 세우신 모세의 지도력을 따랐던 후손들 중에서 쓴 시편이 고라 자손의 시이다. 

시편 84편 1-4절을 함께 읽자.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10-11절도 함께 다시 읽자.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 시편 기자인 고라 자손은“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고백하였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나에게 그런 감격과 감사와 만족이 있는가. “모르시는 말씀. 세상에 좋은 것이 얼마나 많고 즐길 곳이 얼마나 많은데 고작 성전 문지기가 뭐람.”이렇게 반응하려 하지 않나. 

고라 자손은 이 시편에서 하나님의 집에 대하여 “주의 장막, 여호와의 궁정, 주의 제단, 주의 집, 주의 궁정, 하나님의 성전”이란 다양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의 집이 자신에게 어떤 곳이라고 말하고 있나.

하나님의 집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사모하여 쇠약합니다.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었습니다.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습니다.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합니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낫습니다.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습니다.

문지기로 있다는 고백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집에 머물면서 쓸고 닦고 고치고 칠하고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서 하나님의 집을 돌보는 모습을 말한다. 

벤살렘교회 목회할 때에 20여년 주일 오후에 예배드리던 미국 교회가 더 이상 한국 회중들에게 교회사용을 허용하지 않게 되었다. 예배당 건축 전이라 오갈 데가 없어서 그 주변의 열 곳이 넘는 교회들마다 편지를 써서 들도 다니며 건축 준비 기간 동안에 주일 예배 드릴 곳을 빌려 달라고 간청하게 되었다. 크고 화려한 시설들이 많았지만 우리에게 예배당을 빌려 준 곳은 150년쯤 된 예배당이었다. 스테인드글라스가 아름답던 그 예배당 건물은 낡기는 했지만 얼마나 성도들이 쓸고 닦던지 감동이 되었다. 왜 그렇게 예배당을 쓸고 닦는 것인가. 그것은 주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 중의 일부일 뿐이다. 

누구든 주중에 교회에 와서 예배 시간이 아닌 시간에 예배당을 쓸고 닦아 보라. 그 감동이 다르게 전해져 온다. 전에 정태기 목사의 부흥회 때에 그가 간증하였다. 어느 미국 장로교회에 주말이면 청바지를 입고 운동화를 신은 수염이 덥수룩한 초로의 남자성도가 사다리를 놓고 오르고 내리며 창문을 반질반질하게 닦는 장면을 보고“저 분은 누군데 저렇게 열심히 예배당의 창문을 닦느냐”고 물었다. 그 때 담임 목사는 “저 분은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유명한 박사입니다. 우리 교회의 장로님입니다. 저 분은 저렇게 주말마다 교회에 와서 주일을 준비하며 예배당을 쓸고 닦는 것일 주말의 일과입니다. 저분은 남들처럼 골프장 가는 대신에 늘 시간을 내서 교회에 와서 삽니다.”하고 설명해 주었다. 

존 맥아더 <참된 예배>라는 책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교회에 싫증이 나면 그것은 그 교회의 설교가 어떠한가를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마음 상태가 어떠한가를 말해 주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교회에 흥미가 없거나 무관심하다면 그것은 설교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신 때문이다. 만일 “내가 예배에 열중할 수 있도록 목사님이 무엇인가를 말해 주었으면 좋겠는데”라고 생각하면서 교회에 간다면 그것인 당신이 잘못 생각한 것이다. 스펄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왜 사람들은 종종 예배장소에 있으면서도 거룩하지 않은가? 그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골방에 들어가는 것을 게을리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밀을 좋아하지만 그 밀을 빻지 않는다. 그들은 옥수수를 얻게 될텐데도 그것을 모으러 들판에 나가지는 않는다. 과일이 나무에 달려 있어도 그들은 그것을 따지는 않을 것이다. 물이 그들의 발밑에 흘러도 그 물을 마시려고 몸을 굽히지는 않을 것이다.”

예배는 수동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수고를 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성가대의 좋은 성가를 듣고 축복을 받고 마음의 안식을 얻기 위해 교회에 간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교회에 가야 한다. 그리고 예배는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여기까지가 존 맥아더 목사의 글이다. 맞다. 교회는 내가 문지기로 있으면서 무엇인가 능동적으로 행할 때에 그 감격의 정도가 달라지는 하나님의 집이다. 고라 자손은 고백한다.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시84:2-3)

가령 시 시편의 고백자가 유대의 어느 시골 마을에 사는 목동이라도 그렇다. 그는 늘 마음 가득하게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집을 사모하며 지낸다. 절기가 되면 모든 가족과 함께 기쁘고 즐겁고 감사한 마음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 나선다. 그런 그의 고백이 이것이다. “사랑스럽습니다.사모하여 쇠약합니다. 부르짖습니다. 항상 주를 찬송합니다. 나의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습니다. 이른 비로 복을 채워 주십니다.”

왕궁에 머무는 신하나 문지기가 왕에 대하여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면 그 왕궁에 머무는 하루하루가 즐겁고 기쁘고 감사할 리가 없다. 그 마음이 평안할 리가 없다. 왕궁에 거하는 내가 왕의 뜻을 거스르거나 왕에게 거역한다면 그 왕궁 생활에 무슨 기쁨과 감사와 감격이 있겠나. 그러면 과연 누가 여호와의 장막에 거하는 만족과 감사와 보람이 있는 것일까. 

여기 살아남은 고라 자손들은 선조 중에 레위의 증손인 고라가 앞장서서 당을 짓고 모세와 하나님을 대적하던 사건을 생생이 기억하고 조상들로부터 전해 들어 왔을 것이다. 그래서 저들은 하나님의 궁정에 문지기로 있는 것 그 자체가 감격스럽고 만족스러운 것이다. 

그러므로 10절의 고백은 진심이 가득 담긴 충성된 고백인 것이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서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지난 날 조상들이 광야의 성막을 섬기는 직임으로 택함을 받았으나 당을 짓고 반역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았나. 그런 기억을 되살려 보면 지금 하나님의 성전의 문지기로 지내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지 모른단 말이다. 

그래서 고백하는 고백이 11절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주께 힘을 얻는 자.
세상 사람들은 서로 세상의 힘을 자랑하며 살아간다. 건강의 힘, 아는 것의 힘, 배운 것의 힘, 돈의 힘, 지위와 권세의 힘, 힘과 권력을 쫓아서 새벽부터 밤늦게 까지 뛰고 달린다. 아침 6시만 되면 길이 막히기 시작한다. 밤 12시에도 길거리마다 차와 사람이 쏟아져 다닌다. 언제 쉬고 언제 자는지 모를 정도이다. 사람들은 그 어디에선가 힘을 더 얻으려고 이 곳 저곳을 기웃거린다. 그러나 성도는 “주께 힘을 얻는 자”답게 살아가야만 한다. 

“딱 좋아”라는 광고를 직접 하는 주식회사 ‘청인’의  박세준 대표는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다. 그는 211종의 발명 특허와 49건의 양생 의학과 공학 서적을 저술했다. 지구의 자연 환경 오폐수 오염처리 기술을 발명하는데 매진해 왔다. 유해균을 항생제보다는 유익 세균으로 잡는 양생의학을 개발하였다. 그런 건강 보조 식품 개발과 판매와 보급에 열을 올리고 있다. 지구 환경과 인체의 순환원리에 따라 인체에 적합한 슈퍼유산균을 발명하였다. 최고 선진국 수준의 국민 건강 시대를 열어가려는 자부심이 대단한 발명가이고 과학자이고 기업인이다. 

당신은 무엇으로부터 힘을 얻으려 하는가. 당신은 누구로부터 힘을 얻으려 하는가. 고라 자손은 5절에서 고백한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어떤가. 주께로부터 힘을 얻는 예배자로 살아가고 있는가. 주의 말씀이 내게 힘이 되고 주를 향한 나의 기도가 내게 끊임이 없는 힘의 원천이 되어 가고 있는가. 아니면 나는 주의 도움이 없이도 언제 어디서나 내가 나의 주인이 되어 나를 다스리며 자기 왕국 속에서 착각 속에 갇혀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다윗도 고라 자손과 같은 고백을 한 적이 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하나이다.”(시18:1)

교회를 중심으로 성도들 간에 예배드리고 봉사하고 만나고 사귀고 교제하고 돌보고 섬기고 나누고 베풀고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복된 것이다. 주 안에서 주께로부터 힘을 얻고 살아가는 언제 어디서나 기쁘고 감사한 것이다. 

오래 전에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지진이 일어났었다. 그곳의 많은 사람들은 모두 겁에 질려 이리 뛰고 저리 피하고 야단법석이었다. 나이 많은 한 부인성도는 자기 집에 조용히 남아있었다. 지진이 끝난 후 사람들은 그 노부인에게 물었다. “아니 어떻게 그런 소동 속에서도 의자에 기쁜 얼굴로 평안하게 앉아 계실 수가 있었습니까”부인은 대답했다. “나는 80년을 이곳에서 태어나고 평생을 살아오도록 하나님을 믿고 살았습니다. 내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그토록 흔드시는 능력의 하나님이라는 생각과 그러는 가운데서도 나를 하나님의 손안에 안전하게 붙들어 주신다는 믿음으로 생각하며 기쁨에 잠겨 무서워 할 겨를이 없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신앙생활이란 무엇인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증거가 무엇인가. 내 학력, 내 경험, 내 지식, 내 여건, 내 사회적 지위, 내 경제력, 내 신분, 내 명예, 내 인기 이런 것으로 힘을 얻어 보려고 혈안이 되어 사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마다 주께 힘을 얻으며 살아가는 자가 진정 믿음으로 사는 자이다. 
바흐의‘요한수난곡’이나 하이든의 오라토리오‘천지 창조’나 헨델의 ‘메시아’같은 곡이 주께 힘을 얻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런 작곡을 할 수 있었겠나.
미켈란젤로의 ‘천지 창조’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이나 라파엘로의 ‘예수의 시체를 십자가에서 내리는 장면’을 주께 힘을 얻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렇게 완성할 수 있었겠나. 미켈란젤로의 조각인 ‘다윗 상’ 이나 ‘모세 상’을 보라.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이나 ‘지옥의 문’같은 작품들이 주께 힘을 얻지 않았다면 세상에 빛을 볼 수 있었겠나. 
존 번연이 주께 힘을 얻지 않았다면 “천로역정”같은 역사적인 작품을 감옥 안에서  쓸 수 있었겠나. 
톨스토이가 주께 힘을 얻지 않았다면 “전쟁과 평화”같은 소설을 어찌 쓸 수 있었겠나. 

부족한 이 사람도 35년을 주중에는 묵상만 하다가 토요일 밤에 원고 써서 하는 설교인데 주께서 힘을 주시지 않고 주께 힘을 얻지 않는다면 어떻게 주일날마다 강단에 서서 말씀을 전하겠나. 

내가 한다고 하면 안 된다. 건강, 지혜, 판단, 능력 그 모든 것이 주께 힘을 얻는 증거이니 말이다. 

눈물 골짜기와 같은 삭막한 광야 길에서 누가 힘이 되어 주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 동안 먹고 마시고 살아가게 하였는가. 6절 끝에 보면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라고 고백하였다. 유대지역에서‘이른 비’는 10-11월에 내리는 비이다. 그 이른 비로 밭의 파종과 경작이 가능해 진다. 이는 하나님의 은택을 상징하는 것이다. 신명기에 보면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나니 너희가 고 ㄱ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또 가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신11:14-15)

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하신 말씀이 “너희는 스스로 삼가라”(신11:16)는 말씀이시다. 무슨 말씀인가. 눈에 보이는 것이 풍성하고 윤택하고  형통하고 잘 되고 잘 나갈 때에 겸손하게 주를 의지하며 주께 힘을 얻는 고백 가운데 거하라는 경고의 말씀이시다. 이런 은혜가 평생 계속되기를 축원한다. 


주께 의지하는 자.
고라 자손의 또 하나의 고백은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라는 고백이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의지할 대상이 무엇인가. 누구인가. 이 세상의 그 모든 것은 지나간다. 재물도 지나가고 의지하던 가족도 지나가고 권력도 젊음도 명예도 인기도 다 지나간다. 아침 안개가 햇볕에 사라지듯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러면 누구를 의지하며 살아야 할까.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야 할까. 

고라 자손을 깨달았다. 모세 때에 반역하고 당을 지었던 조상 고라와 그 곁의 250명이 눈에 보이는 앞에서 땅이 갈라지고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백성들이 무리를 지어 모세를 대적하려 하고 하나님을 거역 하려 할 때에 염병이 돌아서 순식간에 14700명이 죽는 것을 보았다. 민수기 16장에 나오는 사건이다. 고라 자손들 250명이 죽임을 당한 다음 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다.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을 죽였도다”고 말하며 온 회중들의 원망이 온 민족 가운데 들끓었다. 회중이 모세와 아론에게 달려들어 치려했다. 그 순간에 회막을 바라다보니 구름이 회막에 덮였다. 그리고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났다. 모세와 아론이 회막 앞에 도착했을 때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회중에게서 떠나라. 내가 순식간에 그들을 멸하려 하노라.”그 때 모세와 아론이 회막 앞에 엎드렸다. 모세는 급하게 아론에게 부탁하였다. 향로에 제단 불을 가져다가 향을 피워 급히 회중의 죄를 속죄하라고 했다. 급하게 된 아론은 모세의 부탁대로 순종하였다. 

거기 민수기 16장 4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진노하셨으므로 염병이 시작되었음이니라.”고 말씀하였다. 아론이 향로에 제단 불을 담아 향을 피우며 죽은 자와 산 자 사이를 막아섰다. 그 때에 염병이 그쳤다. 그러나 이미 죽임을 당한 자가 14700명이었다. 

왜 주께 의지하며 살아가야 복인가. 이 세상에 든든하게 의지할 대상이 있나. 돈인가. 모아 놓은 재산인가. 마련해 놓은 땅인가. 잘 지어 놓은 건물인가. 적지 않은 주식인가. 노후 보장 보험인가. 뭔가. 무엇이 내가 진정 의지할 대상인가. 고라 자손은 고백한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래서 고라 자손은 8-9절에서 기도하고 또 기도하였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 보옵소서.” 

이처럼 주께 의지하여 날마다 새 힘을 얻는 주인공으로 살아 갈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지성래목사
담임목사소개
칼럼
세미나글
사역일지
출판도서소개
언론관련 글과 영상
활동사진
동영상
상담코너
사역동향

교회소개

교회연혁

주일설교

성가대찬양

교회앨범

이달의행사

행사동영상

선교지현황

섬기는분들
전체 최신글
"영원한 왕이신 예수..최고관리자
"내가 천사의 말을 ..최고관리자
꿈 꾸는 것 같은 날..최고관리자
"너 축복 하시려고"최고관리자
"꿈꾸는 것 같은 날..최고관리자
"내 주 예수 주신 ..최고관리자
"내 주 예수 주신 ..최고관리자
염려와 감사(마6:2..최고관리자
"감사해"최고관리자
"바울의 소식"최고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