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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하나님의 일(요6:24-35) 2018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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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8-08-05 20:30 조회 14,107 댓글 0
 
                         하나님의 일(요6:24-35)        2018. 8. 5


벳세다 광야에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행하신 예수를 대하는 무리들의 반응은 “임금 삼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혼자 산으로 떠나 가셨다. 제자들은 자기들끼리 호숫가에 내려가서 배를 타고 호수 건너 편 가버나움을 향하였다. 호수를 건너가고 있는 중에 이미 어두워졌다. 그런데 큰 바람이 불고 파도가 높게 일어났다. 십 여리를 그렇게 큰 바람과 높은 파도 가운데서 노를 저어 가 보려고 씨름하고 있는데 예수께서 호수 위로 걸어서 제자들이 탄 배에 가까이 오셨다. 제자들은 어둠 속에 파도 위를 걸어오시는 이를 바라보고 두려워하였다. 그 때에 배에 다가가신 예수께서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이 반갑게 예수를 배 위로 영접하였다. 배는 곧 그들이 향하던 가버나움에 도착하였다.

다음 날에 무리들이 예수를 찾기 위해 이리 저리 수소문하고 있었다. 디베랴의 벳세다 광야 어딘가에 계실 줄로 여겼던 예수께서는 이미 호수 맞은편 마을인 가버나움에 가셔 계셨다. 그 곳, 가버나움에까지 찾아 가서야 예수를 만나게 된 무리가 예수께 문안하였다.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그 때에 예수께서 하신 대답이 이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요6:26-27)

쉽게 말하면 무슨 말인가. “그렇게 떡과 생선만 찾아 나서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살아가라.”는 교훈을 말씀하신 것이다. 어저께 경험한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보여 주신 기적을 체험한 무리들이 예수를 찾아 나섰을 때에 교훈하신 주의 말씀이 이것이다. 그렇지 않나.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밤낮 ‘돈 돈 돈 돈’ 하면서 살아간다. 

어떤가. “공부해라 공부해라”하는 것도 어찌 보면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해서 살아가려면 일정한 분야의 전문성을 가지고 일할 능력을 가져야 하니까 부모가 자녀들을 그렇게 다그치는 것이 아닌가. 갓 태어난 아기는 엄마의 젖을 먹고 잠 잘 자고 잘 싸고 그렇게 하는 것이 일이다. 공부하는 학생들은 공부 열심히 하는 것이 일이다. 회사원이나 공무원이나 직장인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그의 일터에서, 사업가는 사업의 터전에서, 상업하는 이들은 장사하는 일상이 일이다. 주부는 가정 살림을 잘 하는 것이 일이다. 가나안 농군학교의 김용기 장로는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하였다. 이 세상 사람들이 다 나름대로 각자 자기 분야에서 무슨 일이든 일을 하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 일에 대하여 두 가지 견해를 갖고 말씀하셨다. 
그 첫째는,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라.
그 둘째는,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

그 때에 무리들이 예수께 다시 질문하였다.“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이 질문에 대답해 주신 대답을 중심으로 오늘 말씀의 제목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정하였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는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
무리들의 질문에 대답하신 예수의 대답은 이것이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예수를 믿으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셨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를 믿는 일이란 어떤 일인가. 

밤낮 “믿습니다.”그러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란 말인가. 아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한 백부장이 가버나움에 계시던 예수를 찾아 왔다. 중풍병으로 고생하는 자기 부하를 고쳐 달라는 요청을 하기 위해서였다. 예수께서는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고 대답하셨다. 그러자 백부장이 “아닙니다. 주님 말씀만  하셔도 내 하인이 나을 것입니다. 나도 상관이 있고 부하가 있는데 부하에게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올뿐만 아니라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 때에 예수께서 백부장의 반응에 놀라워하시면서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해 주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그리고 몇 말씀을 더 하신 후에 “가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순간에 그 백부장의 하인이 나았다.

자, 여기서 백부장의 믿음이란 무엇인가. 백부장이 중풍병에 든 부하를 고치기 위해서 예수를 찾아 나선 것은 부하에 대한 사랑이다. 뿐만 아니라 부하가 중풍병에서 고침 받고 회복되어 건강한 부하로서 활동할 장래의 모습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갖고 예수를 찾아 나선 것이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을 믿고 예수께 치유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갖고 찾아 나선 백부장이 자신을 통해서 이루어져가는 하나님의 일을 한 것이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를 믿는 믿음과 모든 믿음의 말과 행위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생각보다 우상을 숭배하거나 미신을 믿거나 신앙의 세계에 전혀 관심이 없이 살아가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아니면 사두개파 사람들처럼 영의 세계나 부활이나 천사의 세계에 대하여 전혀 관심을 접고 오직 이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하고 잘 먹고 잘 입고 잘 놀고 세상 열락을 즐기면서 권세와 명예를 누리며 살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여기며 살아가는 이들이 적지 않다. 십계명에서 벗어나는 행동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다.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증거, 탐심 이런 것들이 어찌 하나님의 일일 수 있나.

예수의 눈으로 볼 때에 그런 이들의 삶이란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자들”이다. 그 끝은 부끄러움과 멸망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이 세상의 사람들이 모두 다 한결같이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기를 원하신다. 

구한말 그리고 개화기와 일제 시대를 거치던 격동기에 송재 서재필, 도산 안창호, 월남 이상재, 남강 이승훈, 백범 김구, 고당 조만식, 응칠 안중근 이런 분들은 한결같이 영원하도록 있는 양식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 길을 걸어 간 민족 지도자들이며 하나님을 잘 믿고 따르려 했던 신앙의 선배들이었다. 저들은 자신을 통하여 하여야만 하는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 깨달은 삶을 살다가 간이들이다. 이완용은 지위도 높았었지만 그를 나라를 위해 일한 자로 여기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일과도 거리가 멀다. 왜 그런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누가 보아도 다르다. 주의 말씀첨럼 열매를 보아서 그 나무를 안다. 
애굽의 바로 왕은 모세가 태어날 당시에 애굽의 히브리 사내아이들을 모두 다 죽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모세의 부모는 어린 모세를 석달간 숨겨서 키웠다. 그것이 자신들을 통한 하나님의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아기 모세의 울음소리가 점점 커지자 더 이상 숨겨 키울 수가 없어서 갈대 상자에 역청을 바르고 그 안에 아기 모세를 담아다가 나일강가에 떠내려 가게 하였다. 악어의 밥이 될 운명이 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왕의 딸 공주를 통해서 아기 모세를 건져 내셨다. 아기 모세는 왕궁에 들어가서 자기 엄마의 젖을 먹으며 자라났다. 누이 미리암의 지혜와 용기로 인해서 엄마를 모세의 유모로 소개하였는데 바로의 딸 공주가 받아 들였기 때문이다. 아기 모세가 갈대 상자에 담겨 버려진 나일 강가를 서성거리다가 공주의 눈에 띄어서 공주 품에 안기고 유모를 찾는 그 현장에서 미리암이 자기 엄마를 소개한 것은 용기 있는 행동이요 자신을 통한 하나님의 일을 한 것이다.

왕궁에서 성장한 나이 40의 모세가 왕궁 밖에서 동족과 애굽 사람의 싸우는 것을 보고 애굽 사람을 쳐 죽이고 땅에 숨긴 것은 하나님의 일과는 거리가 먼 자기 혈기를 다스리지 못한 행동이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도망하였다. 거기서 장가들고 장인의 양떼를 치며 40년 세월을 보냈다. 그런 모세를 나이 80에 호렙산의 떨기나무가 불이 붙는 듯한 환상 가운데서 부르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모세가 나이 40부터 나이 80까지 양을 치며 살아온 세월은 모세가 자기의 일을 하며 살아 온 날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잊지 않으셨다. 모세를 통하여 일하시려는 장래의 계획을 포기하신 적이 없으셨다. 그런 어느 날 하나님은 호렙 산허리 떨기나무 앞에서 불이 붙는듯한 환상 가운데서 모세를 만나신 것이다. 그리고 모세로 하여금 앞으로 40년 동안 하나님의 일을 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길 기대하신 것이다.

물론 다 신학교에 가야만 하나님의 일을 하고 모두 다 목사가 되고 선교사가 되어야만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지금 살아가고 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사람답게 사명을 자기고 내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이다.  

우리는 각자가 자기의 자리에서 나를 통해서 하시려는 하나님의 일을 하며 살아 갈 수 있어야만 한다.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복음의 통로가 되게 하는 그런 삶을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우리가 늘 이야기 하던 강영우 박사의 생애를 보라. 장로로 주를 섬기다가 몇 해 전에 하나님 앞으로 돌아간 그의 곁에는 그의 그림자처럼 그의 곁에서 눈이 되어 주었던 아내 석은옥 여사가 있었다. 중학생 시절의 실명당한 사고 이후로 평생을 앞을 못 보고 살았어야 했던 아버지를 늘 자랑스럽게 여기던 두 아들들이 그의 곁에 있었다. 큰 아들은 안과 의사로, 작은 아들은 법학을 공부한 후에 미국 백악관의 요직에서 일하는 법률가요 젊은 정치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저들 가족들은 서로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께 쓰임 받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명감이 분명한 나날을 살아가고 있다. 


영생을 주시는 참 떡.
예수의 대답을 들은 무리들은 다시 예수께 질문하였다. “그러면 하나님의 일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저들 스스로 인용한 말이 이것이다. “모세의 때에 광야에서 지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내려 주시는 만나를 먹으며 지내지 않았습니까”무리들이 왜 이런 말을 했을까. 아마도 저들은 어제의 기적 체험 즉 벳세다 광야에서 예수께서 보여 주신 기적의 보리 떡과 기적의 물고기를 배 불리 먹었던 경험을 다시 언급하려는 것이 분명하였다. “주님 우리가 주님을 찾아 다니는 것이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얘기가 아닙니까. 병 고침도 받고 배도 부르게 먹고 가끔씩 전해 주시는 비유 말씀도 듣고 그러면서 살면 되는 것 아닙니까.”
이런 말을 하고 싶어서 말문을 연 것인데 예수께서는 무리들이 하는 말을 듣자마자 대화를 이어 가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요6:32-33)

예수께서는 무리들의 먼저 언급한 광야의 모세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던 만나 이야기를 다시 언급하셨다. 그리고 그 해석을 분명히 하셨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날마다 먹던 그 만나가 모세가 백성들에게 공급해 준 떡이 아니라고 하셨다. 그렇지 않나. 광야의 만나가 모세가 공급해준 일용할 양식인가. 아니다. 모세도 광야 40년 동안 자기 동족들과 똑 같은 만나를 날마다 공급 받아 먹고 지내야 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날마다 만나를 주신 분은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전능하신 공급자이신 하나님께서 오늘 날 이 땅에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참 떡을 주시고 계시다. 맞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구주로 영접하고 믿고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주시는 영생의 참 떡이시다. 영어 성경 NIV에 보면, ‘true bread'라고 하였다. 맞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그를 구주로 믿는 모든 백성들에게 공급되는 영생의 참 떡이시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축복기도를 하신 후에 나누어 주시며 그렇게 말씀하셨다.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이 말씀 속에 주께서 말씀하신 영생의 참 떡의 교훈이 담겨 있다. 예수는 어미 가시고기가 새끼 가시고기에게 자신의 몸을 다 내어 주듯이 그런 희생으로 자신의 몸을 구원의 도구로 구원의 방편으로 내어 주셨다. 그렇게 내어주신 예수의 몸은 옷을 벗기는 부끄러움을 다 당하셨다. 채찍에 맞고 따귀를 갈기고 주먹으로 치고 얼굴에 침을 뱉고 골고다로 끌려가시며 넘어지고 쓰려지는 과정에 처절한 죽음의 문턱까지 이미 가시는 사경을 헤매셔야만 했다. 예수의 양 발에 양 손에 큰 못이 박혔다. 예수의 옆구리에 창이 깊숙하게 뚫고 들어 왔다. 예수는 심장의 피 한 방울 물 한 방울까지 완전하게 흘리시고 그의 몸을 영생을 위한 구원의 참 떡으로 내어 주셨다. 

가시고기라는 물고기는 지구상에서 가장 부성애가 강하다고 한다. 일본과 우리나라에 있었지만 일본은 멸종하고 우리나라에만 남아 있다. 암컷이 알을 낳고 죽으면 아빠 가시고기는 1,000여개의 알을 지키고 알이 깨어나면 먹이를 물어다주면서 새끼들이 조금 클 때까지 15일 동안 먹지도 자지도 않고 지내다가 결국 둥지 옆에서 죽음을 맞는다. 갓 부화된 어린 물고기들은 자신  들의 곁에 죽어 있는 아직은 신선한 아빠 가시고기의 살을 모조리 뜯어 먹으며 무럭무럭 자라난다. 

우리나라에는 조창인 작가의 소설 <가시고기>가 2000년에 세상에 소개되면서 가시고기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한 그 물고기 말이다. 백혈병에 걸려 죽음의 문턱까지 내몰린 아들을 보살피는 아버지의 사랑을 소재로 한 소설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참 떡의 생을 사신 생명의 구주이시다. 참 떡에 대한 말씀을 듣고 있던 무리들이 주께 요청하였다.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 그 때 예수께서 다시 말씀해 주셨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요6:35) 그렇다. 예수는 그를 영원한 생명의 참 떡으로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영원히 주리지 않는 만족을 주시며 그의 영과 혼과 육을 배부르게 하시는 영생의 참 떡이시다. 

귀신 들린 딸을 고쳐 달라고 예수를 찾아 왔던 수로보니게 여인이 그런 참떡의 만족을 누린 주인공이다. 막달라 마리아나 나사로의 여동생 마리아와 마르다도 그런 은혜를 입은 주인공들이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치던 소경 바디메오도 그런 축복을 입은 주인공이다. 

오늘 이 자리에서 예배하는 우리 각 사람도 그러하지 않나. 나를 향하신 주님의 기여, 주님의 공급, 주님이 자신의 몸을 찢겨서 내어 주신 구원의 참 떡. 그 구원의 진리를 깨닫고 보면 이처럼 귀하고 복되고 감사한 하나님의 일이 이 세상 그 어디에 있단 말인가. 주님을 믿고 주님의 살을 참 떡으로 받아먹는 성찬의 순간이야 말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믿음의 가장 숭고한 순간이다. 그러므로 예배처럼 소중한 하나님의 일이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물.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 그렇다. 예수 만나야 이런 은혜와 이런 복을 누리며 살게 된다. 수가성 여인이 그런 주인공이 아닌가. 다섯 남자와 살았었고 지금 여섯 번째 남자도 자기 남편이 아니다. 오가다 만난 남자와 살고 있었다. 그런 그가 수가성 우물가에서 예수를 만났다. 운명이 바뀌었다. 예수 만나야 달라진다. 정치인도 국회의원도 법조인도 장군도 사장도 교수도 선생도 병원 원장도 의사도 예술가도 체육인도 공장의 기술자도 농부도 어부도 학생도 어른 아이 노인 젋은이 할 것 없이 예수 만나야 변하게 된다. 

310장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 없는 자.....내 모든 형편 잘 아는 주님 늘 보호해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그렇다.
여리고 성 기생 라합이 여호와의 사람을 분별하고 여호와의 편에 서고 여호와를 영접했을 때에 살몬과 만나 보아스를 낳고 다윗의 조상이 되었다. 가정 주부도 예수 만나야 한다. 남편도 아내도 부모도 자녀들도 어른도 아이들도 예수 영접해야 한다.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했다. 

모압 땅의 룻이 이스라엘 베들레헴에 갔다. 시어머니의 시댁 마을에 갔다. 거기서 보아스 만나 가정을 이루었다. 오벳을 낳고 오벳이 이새를 낳았다. 이새가 여덟 아들 중에 다윗을 낳았다. 다윗이 누구인가. 룻과 보아스의 삶에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 후손이 자자 손손 그런 가정이 되었다. 오늘 성찬에 주의 은혜가 풍성하시길 기도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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