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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자 바울(행18:18-23) 2018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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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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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8-07-22 22:47 조회 13,885 댓글 0
 
                       전도자 바울(행18:18-23)          2018. 7. 22


사도 바울이 고린도 도시에 일 년 반을 머무는 동안에 얻은 큰 열매 중의 하나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난 것이다. 아굴라는 바울처럼 가죽으로 장막을 만드는 기술자였다. 업이 같았던 사도 바울과 아굴라는 금방 가까워졌다. 저들은 고린도에서 함께 살면서 일하였다. 

로마서 16장 3-5절에 보면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바울은 저들 부부를 동역자라고, 바울의 목숨을 구하려고 자신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던 이들이라고 극찬하고 있다.

고린도전서16장 19절에도 보면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라는 말씀을 통해서 그들 부부는 자기들의 집을 교회로 제공하고 예배 중심의 삶을 살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고린도에 머무는 동안에 바울은 안식일을 중심으로 열심을 다하여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러나 동족인 유대인들이 대적하고 비방하는 일은 점점 더 거세어져만 갔다. 그런 어느 날 주께서 환상 중에 바울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셨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마라. 침묵하지 말고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할게.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하지 못하도록 내가 막아 줄게. 고린도 성 안에 나를 믿을 내 백성들이 많다.”

이에 힘을 입은 사도 바울인 일 년 육 개월을 고린도에 머물면서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쳤다. 그러는 가운데 바울 곁에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함께 한 것은 언제나 큰 격려와 힘이 되고는 하였다. 언제나 바울을 대적하던 유대인들의 모함과 시기로 바울이 로마의 법정에 고발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총독 갈리오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총독 자신이 종교적인 일에 관여하여 재판관 되기를 원치 않았다. 사도 바울은 총독 갈리오의 배려로 법정에서 풀려 난적도 있었다. 그런 사건 후에도 바울은 여러 날을 고린도에 더 머물면서 복음을 전파하던 중에 고린도의 정든 형제들과 작별하고 그 곳을 떠났다. 바울은 뱃길로 수리아를 향하여 떠났다. 그 때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도 바울 사도와 함께 동행하였다. 저들 부부는 언제나 바울의 선교 사역에 헌식적인 도움을 꾸준히 주던 선교의 동역자들이었다. 바울은 그 후에 겐그레아, 에베소, 가이사랴, 안디옥, 갈라디아, 브루기아 땅을 거쳐 가면서 만나는 모든 제자들의 믿음을 굳건하게 하였다. 

바울은 지칠 줄 모르는 열정적인 복음 전도자였다. 전도자 바울. 그에게서 몇 가지 교훈을 더 얻도록 하자. 


서원(誓願)을 행함.
바울은 고린도를 출발해서 배를 타고 수리아로 향하던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다. 겐그레아는 고린도와 주변의 여러 도시를 잇는 교통의 요지인 외항(外港)의 이름이다. 로마서 16장 1절에 보면 뵈뵈라는 이름의 여 집사가 소개된다. 그는 그 곳,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이었다. 바울은 로마 교회에 편지하면서 뵈뵈는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아마도 집사 뵈뵈는 바울 사도를 비롯한 주변의 그를 만나는 수많은 성도들에게 늘 물심양면으로 넉넉하고 풍성하게 힘과 도움이 되어 주었던 후원자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바울이 그 곳, 겐그레아에서 삭발을 하였다. 이 일은 바울이 일찍이 주께 서원한 바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민수기 6장 1-21절까지 보면 서원을 자발적으로 한 사람을 나실인라고 하였다. 나실인이란 히브리어 ‘나지르’(נזיר)를 말하는데 그 의미는 ‘거룩하게되는, 분리된’이란 뜻이다. 나실인의 서원을 한 경우에는 세 가지를 지켜야 한다. 그 첫째는, 포도주나 술이나 독주를 마시면 안 된다. 둘째는, 머리를 자르지 말아야 한다. 또 하나는, 시체나 무덤 등에 의해서 부정해 지면 안 된다. 사사 삼손이 대표적인 나실인이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일 년 반을 머물면서 선교하는 동안에 그의 선교 사역과 관련하여 어떤 목적을 두고 하나님께 일정한 기간 동안에 나실인의 서원을 하였던 것 같다. 머리를 깎는 행위는 민수기 6장에 나오는 나실인에 관한 법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구별하려는 나실인은 회막 문 앞에서 자기의 머리카락을 밀어다가 화목제물 밑에 있는 불에 두게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성별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고백이며 선언이다. 

사도 바울은 이처럼 자신을 늘 유대인이면서 개종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늘 자랑스럽게 여기며 지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이 히브리인이며 이스라엘 사람이며 아브라함의 후손인 것을 늘 자랑스럽게 여기며 지내고 있었다.(고후11:22) 뿐만 아니라 그는 바리새인이었으며 바리새인의 아들로 자라난 것에 대하여 늘 긍지를 갖고 있었다.(행23:6)

성경에서 서원(誓願)이란 하나님이 나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총을 기대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삶을 살아가겠다는 결단과 맹서를 말한다. 적극적인 면에서의 서원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 모든 삶 전체를 말한다. 그러나 소극적인 면에서의 서원은 스스로 육체적인 쾌락을 자제하거나 금하는 자발적인 서약을 말한다. 

사무엘상 1장에 보면 엘가나의 부인 한나가 실로의 성막에 올라가서 서원하는 기도를 드렸다. 한나는 서원 기도하여 낳게 된 아들 사무엘을 어린 시절부터 실로의 성막에서 자라나게 하였다. 사무엘이 태어나자 한나는 남편 엘가나에게 아들 사무엘을 평생토록 하나님의 집에서 주를 섬기는 인생으로 드리기를 원하였다. 남편 엘가나도 아내 한나의 요구에 순순하게 응하였다. 한나는 아들 사무엘이 젖을 떼길 기다렸다. 그리고는 젖은 뗀 어린 사무엘을 데리고 실로의 성막에 서원제를 드리려고 올라갔다. 한나는 어린 아들과 함께 수소 세 마리와 밀가루 한 에바와 포도주 한 가죽 부대를 가지고 갔다. 한나는 엘리 제사장을 만나서 말하였다. “사무엘을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삼상1:28) 이것은 어린 사무엘의 평생을 향한 어머니 한나의 서원이었고 아들 사무엘은 어머니의 서원을 따라서 평생 성막 중심의 민족적인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사사의 길을 걸어갔다. 

성경의 역사와 기독교 이천년 역사에 하나님께 존귀하게 쓰임 받은 적지 않는 신앙의 선조들은 대개가 서원하는 신앙인의 삶을 살아간 이들이다. 서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

그렇다. 서원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은 이를 미워하든지 저를 사랑하든지 하여야 한다. 이를 중하게 여기든지 저를 경하게 여기든지 하여야 한다. 믿음으로 살아간다고 하면서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겸하여 섬길 수는 없는 법이다. 재물이 없이 이 세상을 살아 갈 수는 없지만 재물을 신처럼 섬기면 그 말로가 불행해 지고 만다.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고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며 서원한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성도라면 그 날마다의 일상이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야 한다. 

어떤가. 오늘 날 나의 신앙의 현주소는 어떤가. 마치도 우상에게 빌고 이방 신에게 비는 자들처럼 ‘비나이다 비나이다.’그런 태도로 늘 “하나님 떡 좀 더 주세요. 하나님 국도 좀 더 주세요.”그런식의 기도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않될 것이다. 

서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라면 믿음의 사람답게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는 주님의 말씀에 합당한 생각과 입의 말과 일상의 판단과 결정을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신앙생활은 서원 할 줄을 알아야 그 믿음이 발전하고 향상된다. 항상 물에 술 탄 듯이 술에 물탄 듯이 그렇게 신앙생활 해서는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바뀌어도 그 날이 그날이다. 그러나 서원하고 결단하는 기도를 드리고 그런 삶을 실천해 갈 때에 나의 한 생애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창세기 28장에 보면 루스 광야에서 노숙하던 야곱이 하나님 앞에 서원하는 기도를 드리는 장면이 상세하게 나온다. 어제 밤까지도 아버지의 집에서 양털을 깔고 덮고 포근한 잠자리에서 잠을 자던 야곱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와 합작하고 아버지 이삭의 축복 기도를 형 에서보다 먼저 받은 사실이 알려지자 형이 동생 야곱을 죽이겠다고 찾아 나섰다. 결국은 급하게 어머니 리브가가 꾸려준 비상식량 보따리 하나를 어깨에 메고는 브엘세바를 떠나 외삼촌의 집인 밧단아람을 향하여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런 야곱이 들판에서 밤을 맞았다. 밤 기온이 떨어지는 추운 들판에서 맨 바닥에 드러누워 돌을 베개 삼고 있었다. 잠자리를 불편했지만 하루 종일 걸었던 야곱은 고단하게 잠시 잠이 들고 말았다. 그러는 중에 꿈을 꾸었다. 꿈에 보니 하늘 꼭대기에서 땅에 까지 사닥다리가 닿았고 하나님의 사자가 그 사닥다리에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다. 야곱이 보니 하늘 꼭대기에는 하나님이 서 계셨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야곱이 잠에서 깨어 나 고백하였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다.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였다. 야곱이 그 곳에서 서원하였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이 때에 야곱이 한 서원의 내용이 무엇인가.

여호와를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섬기겠습니다.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 즉 성전이 되게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즉, 하나님만 섬기는 유일신 신앙과 성전 건축의 꿈과 평생 십일조 신앙의 서원을 한 것이다. 

야곱은 이와 같은 서원 기도를 드리기 전에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서원하는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하나님이 항상 나와 함께 동행하여 주십시요
하나님!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항상 지켜 주십시요
하나님! 지금은 비상식량 보따리 하나 메고 있지만 앞으로 평생토록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십시오. 
하나님! 내가 앞으로 장차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되돌아 가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돌보아 주신다면 하나님만을 섬기고 성전을 건축하고 십일조 신앙으로 평생을 살아가겠습니다.” 하는 서원을 한 것이다. 

일제 치하 때 한 젊은이가 의대 입학시험을 보면서 하나님께 서원을 했다. 1932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의학전문학교 외과학 교실에서 백인제 박사 밑에서 수련을 받았다.“이 학교에 입학시켜주시면 평생 불우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몸을 바치겠습니다”던 서원을 따라서 그는 6. 25 전쟁 중이던 1950년 12월에 유엔군의 안내를 받아 피난 간 피난 지인 부산에서 1951년 7월에 가난하고 병든 이웃을 위해 무료 진료소인 복음병원을 개설하였다. 그 후로 영세민 의료구호사업에 전 생애를 바쳤다. 그는 29세의 나이에 박사학위를 받은 수재이기도 했다. 34살에 평양 도립병원 원장을 지냈다. 북한이 공산당의 지배를 받게 되자 남쪽으로 피신하였다. 그는 함께 월남할 기회를 놓친 북한에 남아 있던  아내를 생각하며 여생을 혼자서 지냈다. 병원 옥상의 옥탑 방에서 지내며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의 삶을 살았다. 이 사람이 바로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다가 성탄절 새벽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장기려(1911-1995)장로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름.
사도 바울은 철저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는 나날을 살아갔다. 그는 어느 도시에 가서 복음을 전할 것인지 그 도시에 얼마나 머물러 있게 될 것인지 등에 대하여 자신이 스스로 한계를 정하지 않았다. 그는 매사에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물었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찾아 나섰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 갔을 때에도 그러하였다. 에베소의 여러 사람들이 더 오래도록 에베소에 머물러 있으면서 복음을 전파해 주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저들을 작별하고 배를 타고 가이사랴를 향하였다. 그 때 에베소 사람들에게 남긴 말이 이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뜻이며 너희에게 돌아 오리라.”(행18:21)

맞다. 우리는 범사에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시간 사용, 우리의 가는 길과 안고 일어서는 자리, 우리의 재물 사용, 우리의 매사에 있어서 크고 작은 모든 결정을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나. 어떠한가. 요즘 아니 지금 내가 신앙으로 살아간다고 말하면서 내가 살아가는 내 모습이 어떤가. 과연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묻고 나를 향하신 주님의 뜻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하나님 제발 가만히 좀 계세요. 제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하나님 모르시는 척하시고 눈 꼭 감고 계세요.” 이렇게 하나님을 포로처럼 결박하고 내 생활의 크고 작은 모든 결정을 내 기분 내키는 대로 내 마음, 내 감정, 내 생각이 흘러가는 대로 하며 지내지는 않는가. 내 할 것 다하고 내 쓸 것 다 쓰고 내 가고 싶은 곳 다 가고 내 취미 생활, 내 여가 활동 마음 가는대로 기분 내키는 대로 다하면서 주를 위하여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아간 경우가 있는가. 그러다가 갑자가 당혹스러운 일을 만나거나 다급한 일이 생기면 “하나님 좀 도와주세요.” 하고 발을 동동 구르며 살아가고 있지는 아니한가. 

영락교회 정이숙 권사는 부자 집의 딸로 컸다. 출가 후에 남편의 사업도 번창하였다. 주일이면 교회에 가기는 했지만 은혜를 모르는 형식적으로 왔다 갔다 하는 그야말로 교인이었다. 주중에는 친구들과 하루가 멀다 하고 골프만 치며 지냈다. 1970년대 때의 일이다. 그런 그녀가 1972년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였다. 병원에서 진단을 받아 보니 담석증과 황달 증세였다. 치료를 받아 보았지만 그의 몸은 점점 허약해져만 갔다. 일본에 살던 친정 여동생이 일본에서 조제한 18가지 약을 보내와서 먹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는 “아이쿠 돈이면 다 되는 줄 알았는데 내 병을 고칠 수가 없구나.”하면서 늘 허약하게 병을 달고 살았다. 그런데 딸을 안타깝게 여긴 친정어머니가 병들어 고생하는 딸에게 기도할 것을 권면했고 모녀간에 간절히 주께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주여 살려만 주신다면 주를 위해 충성하며 살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는 병에서 놓여 건강을 되찾게 되었다. 그 동안 수 십 년을 교회의 마당만 밟고 교회를 헛되게 다닌 지난날이 후회가 되었다. 한경직 목사님이 살아 계실 때에 그는 1986년에 용인시 추계리에 있는 땅 10만평을 선교 사역을 위해서 헌납하였다. 한국 교회 선교 100주년 기념 사업회는 그곳에다가 한국 선교 100주년 기념 순교자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였다. 1989년에는 이 사업을 위하여 재미실업가인 한규빈씨가 1백만 달러(당시 7억여 원)를 헌금하였다. 이 자금이 기념관 건립의 초석이 되었다. 더 필요한 자금은 국내 많은 교회와 신도들의 헌금으로 채워지고도 남았다. 순교자기념관은 1988년에 진입로 공사를 끝내고 기념관 기공식을 가진 뒤, 1989년에 준공기념 예배를 드리고 문을 열었다. 이제는 기독교인들이 가보고 싶어 하는 국내의 기독교의 성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한국 개신교의 주기철, 손양원, 김익두 목사 등을 포함한 2,600여명이 넘는 순교자들 중에서 600여 순교자의 사료가 기념관 안과 밖에 헌정되어 있다. 

케네스 헤긴 목사의 책 중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법>이란 책이 있다. 케네스 E. 해긴 목사는 17살 때에 불치의 혈액병과 기형심장병에서 기적적으로 치유 받았다. 그 후 거의 70년 동안 하나님을 섬겼다. 2003년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세운 사역은 온 세계 수많은 사람들에게 계속 복이 되고 있다. 케네스 해긴 선교재단의 라디오 프로그램 ‘오늘을 위한 레마’(Rhema for Today)는 미국 전역의 150개 이상 방송국과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에 방송되고 있다. 그 외에 1974년에 설립된 레마 바이블신학교는 3만 명 이상의 졸업생 배출하였다. 케네스 헤긴 목사는 이 책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우리의 내면의 속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법을 배우고 개발해야 한다. 우리가 영적 존재로서 몸과 혼보다는 영을 개발하고 속사람의 인도하심을 배워나갈 때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나님은 내 삶의 모든 방면에서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고 동행하기를 원하신다.”고 설명해 주고 있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기대를 모르기 때문에 행하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개의 경우는 내게 이것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판단이 서는데도 불구하고 나를 향한 주의 음성을 묵살해버리고 내 방식대로 내 좋은 대로 생활해 가기 때문에 우리의 일상생활은 나를 향하신 주님의 기대에서 점점 멀어지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성경의 요나가 아닌가. 요나는 선지자였지만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분부대로 행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풍랑 이는 바다의 배 안에서 제비 뽑혀 바다에 던져졌다. 요나는 큰 물고기의 뱃속에서 삼일을 지내며 거기서 회개하고 거기서 하나님의 뜻을 찾기 시작하였다. 요나에게 있어서 큰 물고기의 뱃속은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가까이 되 돌아 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오늘 날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오늘 날도 우리 각 사람에게 주변 사람과 상황을 통하여 깨달음을 주시고 우리 각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 나가기를 원하고 계신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였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라는 425장의 찬송의 가사가 그러하지 않나.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고요한 중에 기다리니 
진흙과 같은 날 빚으사 주님의 형상 만드소서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주님 발앞에 엎드리니 
나의 맘속을 살피시사 눈보다 희게 하옵소서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병들어 몸이 피곤할 때 
권능의 손을 내게 펴사 강건케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온전히 나를 주장하사 
주님과 함께 동행함을 만민이 알게 하옵소서 아멘   

사도 바울은 그의 선교 현장과 다가오는 순교의 순간까지의 그 모든 걸음과 시간을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에 맡겨 드리고 온전히 순종하는 헌신의 삶을 살아가고자 씨름하였다.


모든 제자를 굳건하게 함.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가이사랴로, 가이사랴에서 안디옥으로, 안디옥에서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으로 계속하여 나아갔다. 쉼이 없이 앞만 바라보고 나아가던 사도 바울은 만나는 성도들에게 마다 안부를 묻고 또 새로운 곳을 향하고 또 다시 새로운 곳을 향하고는 하였다. 사도 바울은 가는 곳마다 차례차례 성도들을 만나 보면서 모든 제자들의 믿음을 굳건하게 하기 위해 온갖 정열을 다 쏟아 부었다. 

믿음이 굳건해 진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믿음을 굳건하게 한다는 것은 무슨 말씀일까. 공동 번역은 “모든 신도들을 격려하였다.”고 하였다. 현대인의 번역은 “모든 신자들의 믿음을 굳게하였다.”고 하였다. 새 번역은 “모든 신도를 굳세게 하였다.”고 하였다. NIV 성경에 보니까 “strengthening all the disciples.”라고 하였다. 그렇다. 바울 사도는 만나는 모든 성도들이 제자다운 믿음을 갖고 굳건한 믿음 생활을 계속해 갈 것을 격려하고 힘을 북돋우어 준 것이다. 

다이돌핀은 엔돌핀보다 4000배나 강한 호르몬이다. 엔돌핀이 건강한 생활에 크게 도움이 된다지만 다이돌핀의 효과는 엔돌핀의 4,000배라고 한다. 그러면 언제 다이돌핀이 몸 안에서 많이 생성되느냐하면 감사하고 기뻐하고 감격해고 감동 받고 은혜 받을 때이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설교 말씀을 듣고 하는 예배의 경험 가운데 울고 웃고 때로 가슴이 뭉클하고 눈물이 핑 돌고 내 온 몸에 주의 은혜의 열기가 모세 혈관 깊숙이까지 꿈틀대는 그런 은혜의 경험을 하는 그 순간에 우리 몸 안에서는 다이돌핀이 넘쳐흐르게 된다. 

그러므로 굳은 믿음을 갖고 살아가고 서로의 믿음을 굳건하게 돕는 신앙생활은 서로에게 얼마나 소중하고 반드시 필요한 일인지 모른다. 

교회 생활이 그러하여야 하지 않나. 일주일 동안의 세상살이에서는 전혀 그 어디에서도 맛 볼 수 없고 누릴 수 없는 힘과 용기와 격려가 예배를 통하여 경험되어야 하지 않나. 목회자를 만났을 때에, 성도들 간에, 속도원들 간에, 교사와 학생들 간에, 성가대원들 간에 서로에게서 그런 거룩한 에너지가 공급되고 나누어져야 하지 않나. 주일 하루 교회에 머물고 성도들을 만나고 목회자를 대하고 예배드리고 성도들이 함께 음식을 먹고 차를 마시고 커피를 한잔 함께 나누고 이런 저런 대화를 하는 중에 내 몸과 마음과 영혼에 엔돌핀이 넘쳐나고 다이돌핀이 충만해 지는 그런 은혜의 경험을 계속해 갈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요한복음 7장에 보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붙잡아 오라고 아랫사람들에게 명령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얼마 시간이 지난 후에 아랫 사람들이 돌아 왔는데 예수를 잡아 오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 왔다. 그 때에 대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물었다. “어찌하여 잡아 오지 아니하였느냐” 그 때에 아랫사람들이 대답하였다.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그 때에 바리새인들이 되 물었다.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이렇게 말할 때에 바리새 파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인 니고데모가 나서서 한 마디 하였다. 그는 요한복음 3장에 소개 된 전에 예수를 찾아 가서 개인적으로 관심을 보이며 대화를 시도하던 산헤드린 공회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 니고데모가 대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한 마디 하였다.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 니고데모의 그 말을 들은 바리새인들은“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고 예수를 무시하고 깔보는 말을 하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이같은 사건 현장에 돋 보이는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니고데모이다. 그 니고데모가 나중에 베드로 조차도 주님을 부인하고 배반하고 저주하고 도망가 숨어 버린 순간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함께 등장하지 않았나. 그리고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신 예수의 시체를 받아 내려서 몇 시간 후면 시작될 안식일 이전에 정성을 다하여 장사하였다.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떤가. 내가 믿는 하나님 신앙, 내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은 어떠한가. 나는 진정으로 매사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려 하고 있는가. 내 믿음은 보여지는 세상 중심, 물질 중심인가. 아니면 복음 중심, 말씀 중심인가. 

출애굽기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나이 80의 모세를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시는 출애굽 기적 사건의 중심인물로 쓰실 계획을 갖고 계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계속하여 뒷 걸음질 치면서 자신은 말도 어눌하고 애굽의 바로 왕 앞에 설 자신이 없다고 주저주저하며 망설이고 있었다. 그 때에 하나님은 모세의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를 던지니 뱀이 되고 그 뱀의 꼬리를 잡으니 다시 지팡이가 되는 표적을 보여 주셨다. 그리고 그 똑 같은 표적을 반복해서 보여 주셨다. 손을 품에 넣으니 나병이 생기고 다시 품에 넣으니 깨끗해지는 표적도 보여 주셨다. 왜 그런 표적을 보여 주신 것일까.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하나님이 진행하시고 하나님이 이룩하시고 하나님이 완성하신다는 것을 철저하게 모세에게 보여 주신 교훈의 표적이 아닌가. 

출애굽기 3장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12절 말씀에서 시선이 멈추게 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이것이 무슨 말씀인가. 못하겠다고 자신이 없다고 나약하게 반응하는 모세에게 하나님이 해 주신 언약의 말씀이시다. 그 언약의 내용이 무엇인가.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라.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라.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무슨 일을 어떻게 이룩하실 것인가에 대한 마스터플랜이 이미 완벽하게 되어 있으셨다. 그리고 모세에게 순종을 요구하신 것이다. 오늘 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에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을 통하여 새롭고 놀라운 일들을 계속하여 이룩해 나가실 것이다. 

하나님이 아들 예수께서 이 땅에 보냄을 받고 오셔서 겪으시는 우여곡절을 예수의 어머니나 예수의 동생들이나 예수의 제자들은 다 몰랐다.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 안에서 인류를 구워하시기 위한 대속자의 영광의 순간을 향하여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순종하며 나아가셨다. 마지막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십자가의 쓴 잔의 문제를 갖고 이마에 땀방울이 핏 방울이 되어 흐르도록 기도하셨다.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죽음의 순간을 기다리며 드린 기도 내용이 길게 소개 되어 있다. 나중에 주께서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 약속하신 성령을 받고 보니 평소에 주께서 들려주시던 그 모든 비유의 말씀들 한 말씀 한 말씀이 모두 다 제자들의 믿음을 굳건하게 해 주시려고 하신 말씀들이었다. 깨닫고 보면 그러하지 않나. 유약한 믿음이 아니라 불같은 환란과 시험 앞에서도 정금보다 더 굳건한 믿음의 주인공들로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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