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에 공유 트위터에 공유 구글플러스에 공유 카카오스토리에 공유 밴드에 공유
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겉 사람과 속사람(고후4:16-5:1) 20180610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으로 보내기
  • 밴드로 보내기
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8-06-10 15:18 조회 19,056 댓글 0
 
                   겉 사람과 속사람(고후4:16-5:1)        2018. 6. 10
 
사도 바울은 사람을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그 하나는 겉 사람이요 또 다른 하나는 속사람이다. 사도 바울은 선교의 최일선에서 불같은 환난과 끝이 보이지 않는 고난과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려운 역경을 매 순간마다 극복하여야 했다. 그는‘사망선고’를 받은 자와 같은 시련 속에서 생명을 이어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낙심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첫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 언약(言約)을 전하는 고귀한 직분을 받았기 때문이다(1절).
둘째, 죽음에서 부활(復活)하신 그리스도의 승리에 동참하는 소망 때문이다(14절).
셋째,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영혼(靈魂)을 윤택(潤澤)케 하고 하나님께 영광(榮光)을 돌려야 하기 때문이다(15절)이다.
 
겉 사람이란 어머니의 태에서 잉태되어 자라나고 이 세상에 태어나서 평생을 살아가는 육체의 사람을 말한다. 성경이 말씀하는 겉 사람이란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이다. 추우면 추위를 느끼고 더우면 더위를 느끼며 배가 고프면 무엇인가를 먹어야 살고 목이 마르면 갈증을 호소하는 것이 겉 사람의 모습이다. 겉 사람인 사람의 육체는 각양의 충족시켜 가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겉 사람이란 사고를 당하면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기도 하고 실명하여 못 보기도 하고 청각에 이상이 생기면 소리를 전혀 못 듣게 되기도 한다. 오장육부 중에 어느 한 부위라도 몹시 병들어 고침 받지 못하고 회복되지 않으면 그것이 원인이 되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에 대조되는 또 다른 한 사람이 있다. 그는 사도 바울이 말하는‘속사람’이다. ‘신앙생활을 한다.’ 혹은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말은 속사람에 대한 관심을 끊임없이 계속해 나가는 것이다. 속사람이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은 영적 존재를 말한다. 사도 바울은 속사람에 대하여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였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러므로 속사람이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이다. 속사람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 피조물’이다. 속사람이란 ‘이전의 죄와 악에 빠져 살던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자’이다.  에베소서 2장 5절에 보면, 속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은 자’이다. 속사람이란 ‘주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이다. 속사람의 옛 모습은 ‘허물로 죽었던 자’이다. 그러나 주의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로 구원받은 새사람이 속사람이다.
 
골로새서 3장 9-10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겉 사람’을 ‘옛 사람’이라고 하였다. ‘속사람’을 ‘새 사람’이라고 하였다. 옛 사람에서 새 사람에 되려면 엣 사람의 행위를 벗어버려야 한다.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롭게 하심을 입은 속 사람을 말씀한다.
 
베드로도 이 진리를 깨닫고 몸소 체험한 주인공답게 베드로전서 1장 3절에서 그런 내용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겉 사람의 욕망으로부터 벗어나서 속사람이 거듭나게 하시고 산 소망을 갖게 하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부활의 능력이다.
 
육체를 입고 살아가는 겉 사람은 점점 쇠하고 늙고 병들어 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것이다. 겉 사람은 소년소녀의 때와 청년의 때가 지나가면 점점 쇠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듭난 속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점점 새로워지고, 점점 성장하며, 점점 성숙해져 가야만 한다. 그것이 거룩해져 가는 성화의 삶이다.
이걸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 1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였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
 
그렇다.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로 살아간다는 것은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께 까지 계속하여 자라나는 것이다. 겉 사람인 사람의 키는 일정하게 자라나고 나면 더 이상 자라나면 안 되지만 속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계속하여 자라나야만 한다. 이것이 신앙의 성숙이며 믿음의 성화이다. 주 안에서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은 주 안에서 점점 거룩해져 가는 것이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날로 새로워지도다.’라는 것은 속사람에 대한 관심이다. 겉 사람인 인간의 육체는 아무리 잘 가꾸고 보존하고 관리해도 때가 되면 점점 쇠하고 낡고 병들고 늙을 수밖에 없다. 꽤나 나이가 들고 연세가 들어가는데 지나치게 멋을 부리고 지나치게 꾸미고 지나치게 가꾸는 이들을 보면 측은하고 안쓰러운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연세가 들어가는 것이 더 보기에 좋은데도 말이다.
 
교회 맞은편의 인공 폭포 곁의 앞동산을 보라. 봄에는 나무 숲 사이에 진달래꽃이 피는 동산의 풍경이 봄대로 아름답다. 여름에는 울울 창창 녹음방초 우거지는 모습이 보기에 좋다. 가을에는 형형색색의 단풍이 아름답다. 겨울의 동산은 모든 나무들이 잎을 떨어트려서 앙상하지만 겨울나무는 겨울나무대로 아름답다. 흰 눈이라도 소복하게 내리는 날이면 봄, 여름, 가을 그 어느 계절에도 누릴 수 없는 운치와 낭만과 아름다움이 있다.
 
사람도 그렇지 않나. 그리고 칠하지 않아도 아름답고 젊고 씩씩한 소년 소녀의 때와 청년의 때가 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연세가 들어 이마와 얼굴에 주름이 늘어나고 흰 머리카락의 수가 검은 머리카락의 수보다 더 많아진 모습의 연륜과 노련함과 중후함은 그 나름대로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다른 감동이 잔잔하게 전해진다. 가령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1926년생이니 올해 만 92세이다. 그러나 그가 27살에 여왕에 등극할 때의 모습보다 결코 초라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누구나 다 그와 같은 노년기를 맞을 수는 없지 않는가.

그럼에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인간의 수명은 왕이나 평민이나 다 마찬가지다. 사람이 칼과 창의 힘이나 권력의 힘으로 인간의 목숨인 겉 사람을 보존 할 수 있었다면 진시황이나 알렉산더나 징키스칸이나 히틀러가 이 세상을 떠났겠나. 사람이 외모의 아름다움으로 자신의 수명을 지켜 갈 수 있다면 양귀비나 클레오파트라나 마릴린 먼로가 그렇게 눈을 감고 말았겠나. 사람이 재물의 힘으로 자신의 겉 사람의 건강이나 목숨을 보존할 수 있다면 세계적인 기업가들이나 재벌들이 무덤에 눕힐 이유가 있겠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대로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라는 대 명제 앞에 ‘나는 예외다.’ 라고 피할 자란 단 한 사람도 없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고난과 시련 가운데 살아갔던 사도 바울이지만 낙심하지 않을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인가. 겉 사람과 속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잠시(暫時)와 영원(永遠).
사도 바울은 잠시와 영원의 차이를 깨달은 믿음의 사람이었다. 바울은 복은 전파하는 이방의 사도로서의 삶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핍박과 박해와 모욕과 고난을 당하여야만 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처음 보낸 편지인 고린도전서 4장 12-13절에서 그런 자신의 경험을 진솔하게 고백하고 있다.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바울이 겪은 고난은 웬만한 고난이 아니었다.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고후1:8)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그 모든 환난과 핍박과 모욕과 비방을 넉넉하게 이기며 살아간 신앙의 승리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성도가 부를 찬송은 이것이다. <내평생 소원 이것뿐>이란 450장 3절에 보면 이렇게 찬송하고 있다.
 
“불같은 시험 많으나 겁내지 맙시다 구주의 권능 크시니 이기고 남겠네”
 
바울은 잠시 받는 환난으로 인하여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소중한 것을 빼앗기지 않는 삶을 살았다. 우리도 마찬가지여야 하지 않나. 로마서 8장 17절에 보면,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것이니라.”고 하였다.
 
세상에 거저 되는 일이란 없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 젊어 고생은 사서라도 한다.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다. 양약구고라고 했다. 고난은 쓰나 그 열매는 달다. 세계적인 발레리나 강수진(1967-)의 발을 보라. 무대 위의 강수진의 화려한 모습만을 보면 안 된다. 세계적인 축구선수 박지성의 발을 보라. 피겨 여왕 김연아, 스케이트계의 이상화의 발을 보라. 주목 받는 테니스의 신동 정현의 부르튼 발바닥을 보았는가. 올해의 골프 스타로 떠오르는 36살의 알렉스 노렌(Alexander Noren, 1982-)의 손바닥 사진을 보았는가. 이 세상에 거저 쉽게 공짜로 되는 일이 있나. 
 
바울이 사용하는 표현들을 보라. 환난과 영광, 가벼운 것과 중한 것. 그것들 중에 신앙생활은 매 순간마다의 자기 선택이며 자기 신앙고백이다. 성경이나 지난 기독교 이천년 역사에 시간과 물질과 재물과 관심들 중에 세상적으로 자기 필요를 다 채우고 자기만족을 다 즐기고 주를 위하여 충성된 삶을 살았던 신앙의 인물이 있나.
 
올해도 벌써 6월이 이렇게 한 주 한 주 지나가고 나면 올해의 절반을 살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한 해 한 해 세월이 가고 나면 교회의 역사에 십년도 가고 이십년도 갈 것이다. 교회의 역사와 발전의 구경꾼이 되지 말고 주인공이 되자. 내 믿음을 내가 지켜 나가자.
 
정동제일, 상동, 종교, 새문안, 영락교회 등의 역사 속에는 선교와 교육과 봉사의 중심에서 나누고 베풀고 돌보고 섬기며 끊임없이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전도와 선교를 위해서 헌신한 믿음의 사람들의 미담이 끊임이 없다. 그런 교회로 세워가자. 그런 교회를 이룩해 나가자.
 
겉 사람에 갇혀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뒤돌아보면 ‘잠간’(暫間) 이다. 맞다. 나의 죽음의 소식 앞에서 누군가가 이런 찬송을 부를 순간이 누구에게나 다가오고 있다. 492장 찬송, <잠시 세상에 내가 살면서>라는 찬송의 1절은 이렇다.
 
 
“잠시 세상에 내가 살면서 항상 찬송 부르다가
날이 저물어 오라 하시면 영광 중에 나아가리.”
 
그러한 찬송의 후렴이 무엇인가.
 
“열린 천국문 내가 들어가 세상 짐을 내려놓고
빛난 면류관 받아쓰고서 주와 함께 길이 살리.”
 
사도 바울은 이 생의 비밀을 깨달아 알았다. 그래서 주 안에 환난과 고난과 핍박과 모욕과 비난을 굳굳하게 이겨 낼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 나중의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주께서 어떻게 이루실 줄을 알았기 때문이다.

베드로 사도도 이런 믿음의 비밀을 알았다. 그의 첫 편지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벧전1:6)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람은 눈에 보이는 음식을 먹지 않고도 40일을 버티고 산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를 호흡하지 못하면 4분 이내로 죽고 만다. 이 세상에는 보이는 것도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풀처럼 마르고 꽃처럼 시들고 만다. 그러나 오직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언약만이 영원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 겉 사람의 욕망에 끌려가며 살아가지 않고 속사람의 요구를 따라 주 안에서 새 사람으로 살아갔다. 그런 삶을 살 수 있었던 비결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차이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맞다. 보이는 것은 모든 것들이 잠깐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들은 영원한 것이다. 인생만사가 일장춘몽(一場春夢)과 같다. 인생의 모든 영화가 꽃의 아름다움처럼 지고 만다. 이 세상에 영원한 영웅호걸 절세가인(絶世佳人)이란 없다. 힘, 권력, 명예, 인기, 외모의 아름다움, 젊음 등 모든 보이는 것들은 때가 되면 풀이 마르고 꽃이 시들 듯이 지나가고 만다.
 
요즘 걸거리와 빌딩의 벽면을 가리는 현수막들과 거대한 휘장에 실린 얼굴 사진들을 보라. 우리나라에 인물들이 많다. 다 애국자들이고 다 지도자들인 것만 같다. 그러나 누가 느헤미야와 같은 인물인지를 가려내야 한다. 누가 모세와 같고 누가 드보라와 같고 누가 에스더와 같고 누가 다윗과 같은 인물인지를 찾아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딸로 살아가면서 보이는 고난과 환난을 극복하여야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장래의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18절에서 이렇게 편지하였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믿음의 사람은 현재 내 눈 앞에 보이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들을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원하고 지극히 큰 영광과 비교하여 이겨내고 감당하고 극복할 줄 알아야 한다.
 
다니엘에게 있어서 사자 굴에 던져지는 공포와 두려움을 이길 힘이 어디서 왔나.
다니엘의 세 친구인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임금의 때에 평소보다 일곱 배나 더 뜨거운 풀무 불 속에 던져질 죽음의 순간에 어떻게 그렇게 담대할 수 있었나. 유다 사람들을 참소하려는 자들이 느브갓네살 왕의 금신상 앞에 절하지 않는 자는 맹렬히 타는 풀무 불 가운데 던져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다. 임금의 금신상 앞에 절하지 않는 유다의 세 젊은이가 붙잡혀 나왔다. 노하고 분하여 하는 임금 느브갓네살 왕 앞에 끌려 나온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침착하고 담대하였다. 저들은 자신들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라고 담대하게 말하였다. 자신들이 섬기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라면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서 능히 자신들을 건져 내실 것이라고 임금 앞에서 설명하였다. 하나님이 건져 주지 않으실지라도 자신들은 왕이 믿는 우상을 섬기지 않을 것이며 왕의 금신상 앞에 절하지 않을 것이라고 또박 또박 대답하였다.
 
결국 저들은 결박되어 맹렬히 타는 풀무 불 가운데 던져졌다. 그런데 왕이 그 불길 속을 들여 다 보았다. 그 불길 속에는 결박되지 않은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지나다니는데 불길에 한 사람도 상하지 않았다. 왕이 살펴보니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았다.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느브갓네살 왕이 불길 속을 들여다보면서 소리쳤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 .” 그 때에 세 친구는 터럭 하나 상하지 않은 깨끗한 몸으로 불길 속에서 걸어 나왔다. 느브갓네살 왕은 세 친구들을 대하며 하나님을 찬송하였다.“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의 천사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들의 몸을 바쳐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단3:28)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믿지도 않던 바벨론의 왕 느브갓네살은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믿음의 증거를 보며 백성들에게 조서를 내려 공포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니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언어를 말하는 자가 모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경솔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을 거름터로 삼을지니 이는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
 
이 일 후에 느브갓네살 왕은 드디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 지방에서 더욱 높여 존귀한 지위를 부여 하였다. 이 사건 이후에 느브갓네살 임금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점점 더 깊어져만 갔다.
 
자기의 신상을 만들어 놓고 자신을 숭배하게 하던 이방 나라 바벨론의 임금 느브갓네살 왕에게 하나님을 경배하는 믿음이 자리 잡았다. 다니엘 4장 37절에 보면, 그는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은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경배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라.”고 고백하였다. 그는 이 세상의 보이는 왕의 권세의 덧 없음을 깨달아 알고 보이지 아니하시나 영원하신 하늘의 왕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고 칭송하는 예배자로 변화되었다. 

  
장막 집과 영원한 집.
사도 바울은 인간의 육체를 이 세상에 있는 장막집이라고 말했다. 반면에 영원한 집이란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에서 인간이 세상에서 짓는 집은 금, 은, 보석, 나무, 풀, 짚으로 짓는 집이라고 열거하였다. 그러나 불의 공적 앞에 모두 다 불타고 녹고 사라져 버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반문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살아가는 지혜로운 건축자는 불의 공적 앞에 불에 타지 않을 수 있는 집을 지어야 한다. 그것이 구원이다. 이러한 교 훈을 말씀하던 바울이 이어서 교훈한 말씀이 바로 이것이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3:16)
 
<레미제라블>, <노트르담의 곱추> 같은 작품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낭만주의 작가인 빅토르 위고(Victor Marie Hugo, 1802-1885)는
 
“내가 영원을 갈망하는 것은 내가 영원한 생명을 가진 증거이다.”
 
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잠시와 영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처럼 장막 집과 영원한 집으로 말씀하는 사도 바울의 믿음과 교훈은 분명하다.
 
며칠 전인 6월 4일에 약 1억 5000만 년 전의 희귀 공룡 뼈가 파리 경매에서 약 25억 원(200만 유로)에 낙찰됐다. 길이 9m, 키 2.6m의 이 거대한 공룡은 육식 공룡인 ‘알로사우루스(Allosaurus)’와 비슷하지만 아직 한 번도 발굴된 적이 없는 신종이다. 이 공룡 뼈는 지난 2013년 미국 와이오밍에서 70%가량 손상되지 않은 채 발굴된 것이라고 한다.
 
1억 5000만 년 전의 동물의 뼈도 보존되어 전해진다. 인간은 장막집인 육체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영혼을 담고 있는 신묘막측한 존재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사람을 지으셨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담과 하와에게 축복의 말씀을 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8) 이와 같은 문화 명령을 따라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며 땅을 정복하되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개하고 죄 사함 받은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본향집을 사모하는 믿음으로 살아가야만 한다.
 
고난과 환난과 핍박과 박해와 모욕과 수모를 극복하며 감내하며 복음 전파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시련도 묵묵히 이겨 나가야 했던 사도 바울은 고린도 후서 5장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고후5:8-9)

사울왕과 다윗 왕의 차이는 무엇인가. 아버지와 아들이지만 다윗 왕과 솔로몬 왕의 차이는 무엇인가. 왕이 거하는 왕궁이 아무리 크고 화려하고 웅장해도 그 왕궁에 영원히 거할 왕이란 없다. 사울 왕은 40에 왕이 되었다. 40년 동안 왕이었다. 그러나 그의 나중은 불행해 졌다. 왜인가. 사울 왕은 이 세상 장막 집에만 마음을 두고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아니한 영원한 집에 대하여 관심을 두지 못하고 살았다. 그래서 교만에 빠졌고 그래서 불행해 진 것 아닌가.
 
솔로몬에게 지혜가 없었나. 그러나 그는 그에 주신 하나님의 지혜를 무시하였다. 솔로몬이 구한 지혜로운 마음이란 ‘듣는 마음’이었는데 그는 하나님의 음성으로부터 귀를 막았다. 그는 20살 때 왕이 될 때에 아버지 다윗을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솔로몬의 나중은 영원한 집을 마음에 두지 않고 살던 세속적인 왕의 대표였다. 열왕기 상 11장 3절에 보면 솔로몬 왕은 700명의 후궁과 300명의 첩을 두었다. “그의 여인들이 왕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였더라.”고 하였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하고 싶어했던 편지의 핵심이 무엇인가. 당신은 겉 사람의 요구를 따라 살아가고 있는 옛사람 그대로인가 아니면 주 안에 거듭난 속사람의 요구를 따라 살아가는 새 사람인가. 이 질문 앞에 스스로 진솔하게 대답하는 이 시간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아멘
 
<나 주님의 기쁨되기 원하네>라는 복음 성가를 보라.
 
나 주님의 기쁨되기 원하네
내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새 부대가 되게 하여주사
주님의 빛 비추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겸손히 내 마음 드립니다
나의 모든 것 받으소서
나의 맘 깨끗케 씻어주사
주의 길로 향하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한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지성래목사
담임목사소개
칼럼
세미나글
사역일지
출판도서소개
언론관련 글과 영상
활동사진
동영상
상담코너
사역동향

교회소개

교회연혁

주일설교

성가대찬양

교회앨범

이달의행사

행사동영상

선교지현황

섬기는분들
전체 최신글
영원한 왕이신 예수 ..최고관리자
"내 영혼이 은총 입..최고관리자
"에벤에셀 하나님"최고관리자
"영원한 왕이신 예수..최고관리자
"내가 천사의 말을 ..최고관리자
꿈 꾸는 것 같은 날..최고관리자
"너 축복 하시려고"최고관리자
"꿈꾸는 것 같은 날..최고관리자
"내 주 예수 주신 ..최고관리자
"내 주 예수 주신 ..최고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