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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가르치고 양육하라(잠22:6, 엡6:4) 20180506 어린이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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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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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8-05-13 13:40 조회 14,061 댓글 0
 
                  가르치고 양육하라(잠22:6, 엡6:4)          2018. 5. 6  어린이주일

지난 3월 하순에 목단 한 뿌리를 사다가 교회 옥상의 화단에 심었는데 이틀 쯤 후에 날씨가 영하로 다시 내려가는 일기 예보를 들었다. 밤중에 걱정이 되어 신문지와 큰 쓰레기 봉지를 가지고 가서 신문지로 감싸고 비닐봉지를 씌어 주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옥상에 올라가서 들여다보고 문안하였다. 잘 자라나서 꽃이 피기를 바랐다. 어려서 시골 집 사랑채 앞에는 감자를 심고 완두콩을 심고 고구마를 심고 고추를 심고 토마토, 무, 배추를 심던 넉넉한 텃밭이 몇 군데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아버지는 뜰 안에 있던 두 아람 쯤 되고 사람 키 만 한 풍성한 목단의 뿌리를 나누어서 봄마다 텃밭에 옮겨심기 시작하였다. 몇 해가 지나자 온 텃밭이 목단 꽃밭으로 변하였다. 거기에다가 그보다 더 많은 면적의 작약도 재배하였다. 요즘 철이 되면 해마다 목단과 작약 꽃이 연 이어 피어서 장관을 이루고는 하였다. 몇 해 마다 한약방에 뿌리를 캐서 넘기는 이들이 사랑방에 와서 며칠을 묵으며 그 뿌리를 채취해 가고는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 어렸을 적 추억을 되살리면서 목단 꽃 한 송이라도 직접 가꾸어 피는 것을 보고 싶었다. 열흘 쯤 전에 구슬만한 꽃망울이 맺히더니 전 주일 날 어느 시간에 꽃이 피었다. 월요일 새벽 기도 후에 옥상에 올라갔던 어느 권사님이 보내 준 사진의 꽃을 보고는 그 밤중에 옥상을 찾아 갔다. 핸드폰으로 불을 밝히며 몇 장 야간 촬영을 시도하였다. 

선조들은 자식을 키우는 것을 화초 농사에 비유하였다. “어유 저게 화초 덩어리야”라는 말을 하지 않나. 

화초 한 포기도 마음을 두면 정성이 가고 신경이 쓰이고 관심을 끊임이 없게 쏟게 된다. 화초 한 포기가 그러하거늘 사람이 어린 아기를 키워 훌륭하게 장성한 어른으로 키워 내는 일이랴. 이번에 목단 묘목 한 뿌리를 심어 놓고 기다라는 동안에 자녀를 키우는 부모의 마음, 교회에서 여러 가정의 어린 아이들을 양육하는 교사의 마음과 목회자의 마음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모든 포유동물은 태어나자마자  어미의 젖도 찾아 먹고 잠시 후에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한다. 그러나 아기는 태어나면 젖을 챙겨 먹여야 하고 기고 걷고 뛰고 홀로 생활하기 까지 끝없이 돌보고 챙겨주고 진자리 마른자리를 거두어 주어야 한다. 그야말로 양육해야 한다. 그런 혜택을 입고 자라나는 것은 부모를 일찍이 잃은 고아라도 마찬가지이다. 누군가가 사랑으로 거두로 돌아보지 않고서 스스로 자라날 수 있는 경우란 없다.

우리가 어버이 날 노래하는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라는 그대로이다.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어머니이든 아버지이든 혹은 양부모의 손길이든 아니면 그 누구의 손길이든 이런 끊임  없는 사랑의 손길을 거치지 않고 사람노릇 하는 경우란 없다. 

낳을 때의 고통. 기를 때의 밤과 낮을 구분할 수 없이 애 쓰는 날들. 한 밤 중에라도 애기가 열이 펄펄 나면 안고 업고 응급실로 달려가던 날들. 요즘이야 집집마다 차도 많고 택시 부르기도 쉽지만 옛날에는 그럴 여건이 못 되었다.

어떻게 키운 아들인데, 어떻게 키운 딸인데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 진다. 

그런데 성경은 아들딸을 어떻게 키우라고 말씀하고 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22:6)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께서는 어린아이를 품에 안으시며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교훈해 주셨다. 어린아이들처럼 되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도 해 주셨다. 

오늘 본문은 무슨 교훈을 말씀하고 있나. 


노엽게 하지 말라.
우리가 아는 대로 에녹도 어머니가 낳았고 노아도 어머니가 낳았다. 아브라함도 어머니가 낳았고 이삭도 야곱도 모세도 드보라도 다윗도 에스더도 느헤미야도 어머니가 낳았다. 창세기 5장에 보면 아담 이후의 족보가 나온다. 아담의 아들들 중에서 가인과 아벨 대신에 나중 태어난 셋의 계보로 이어진다. 에녹은 야렛이 낳았고, 무드셀라는 에녹이 낳았다. 성경은 저들의 어머니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다. 부계 중심의 족보를 기록하였다. 그러나 야렛의 부인이 에녹의 어머니이고, 에녹의 부인이 969세를 산 무드셀라의 어머니이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부인 사라를 통해서 아들 이삭을 낳기 까지 늘그막에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를 잘 안다.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의 말을 듣고 사라의 몸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기 까지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나. 이스마엘 태어난 후에는 집안이 행복했나. 세월 지나 사라가 임신하고 사라 할머니의 배가 불러 올 때는 가정이 평안했나. 사라가 이삭을 낳아 키우는 동안에 이삭과 이스마엘과의 사이는 좋았나. 사라와 하갈과의 관계는 어땠나. 

옛날 라디오 아침 드라마의 제목처럼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날 없어도 우리 집은 언제나 웃으며 산다.” 이게 꿈이고 소망이지 않나.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있나. 

“천석 꾼 천 가지 걱정 만석 꾼 만 가지 걱정”이란 말처럼 아들 딸 하나 하나 낳아서 장성 시키고 자식답게 키워 내는 일이 어찌 그리 쉬운 일인가. 

이삭이 40살에 리브가에게 장가들었다. 이삭의 어머니 사라는 아들 이삭이 장가들기 3년 전에 돌아가시고 말았다. 사라 할머니는 아들 이삭이 장가들고 손자 태어나길 얼마나 소원하고 소원했으나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아브라함은 40살에 장가간 이삭이 아들 낳기를 기다리고 기다렸다. 그래야 하늘의 별처럼 많은 후손이 번성할 테니까. 그러나 아들 이삭의 나이 60살이 되어서야 쌍둥이 에서와 야곱이 태어났다. 저들을 쌍둥이로 낳기까지의 이삭과 리브가의 삶도 고달프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쌍둥이로 태어난 에서와 야곱을 부모가 제 각기 편애하였다. 이삭의 집안에는 부부가 서로를 속이는 가정의 기만과 속임수, 형제의 갈등, 형제의 증오, 20여년 세월 동안 살기등등해진 형제의 불화, 피신, 도망, 외유, 사업의 번창, 고향을 향한 귀향길, 형제의 화해 등의 과정이 영화의 장면처럼 펼쳐진다. 

사도 바울이 편지한 에베소서 6장 4절에 보면,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씀이 무엇일까. 어떻게 키우는 것이 노여워 하지 않도록 키우는 것일까.

<공동번역 성경>으로 읽으면 이렇다.“어버이들은 자녀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지 말고 주님의 정신으로 교육하고 훈계하며 잘 기르십시오.” 

<현대인의 번역>으로 읽으면 이런 내용이다.“부모들은 자녀의 감정을 건드려 화나게 하지 말고 주님의 훈계와 가르침으로 잘 기르십시오.” 

영어 표현에 ‘exasperate’은 ‘악화시키다. 몹시 화나게 하다. 분노하게 하다.’란 뜻이다. 무조건 ‘오냐 오냐’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아들딸의 감정을 긁고 몹시 상처받게 해서 억압으로, 혹은 폭력으로 대하면 그 반감이 점점 커지고 오히려 부작용이 더 심각해 질 수도 있다. 사도 바울의 이런 권면은 당시 로마 사회는 부모의 권한으로 자녀를 죽일 수도 있었던 법에 비추어 보면 대단한 권면이 아닐 수 없다. 

엄마 아빠가 5분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서 아들딸을 잘못 섣불리 대하면 그 아들딸의 앞날의 운명을 50년 쯤 꼬여들게 만들 수도 있다. 

자녀를 키우는 엄마 아빠들이 대개 “넌 도대체 생각이 있니 없니, 넌 도대체 생각을 어디에다 두고 다니는 거니”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우린 이걸 알아야 한다. 생각의 문제보다 더 중요하고 더 심각한 것이 마음이다. 즉 감정이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한다. “마음에 상처를 주지 말아라. 감정을 건드려 화나게 하지 말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에 대하여 “‘마음 알아주기’, ‘마음 만져 주기’, 부모 자식 간에 부부 간에 가족 간에 ‘감정 읽기’” 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른다.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 성공을 하고 못하고는 그 다음의 문제이다. 감정과 마음이 병들면 평생 고생이다. 자신도 그러하지만 그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 

요즘 상담실에 비싼 돈을 주고라도 드나드는 이유가 무엇인가. 누가 내 생각을 알아 달라는 게 아니지 않나. 내 마음을 알아달라는 것이다. 내 마음을 만져 달라는 거다. 내 상한 감정을 보듬어 달라는 거다. 내 답답한 마음, 내 억울한 마음, 내 슬픈 마음, 내 곤고한 마음, 내 허전한 마음, 내 가닥이 잡히지 않는 마음, 내 상처 받고 쓰라리고 괴롭고 답답하고 찢어지고 깨어진 감정을 누군가가 좀 제대로 알아 봐 달라는 거다. 누군가나 내 편이 좀 되어 달라는 거다. 

어린이들, 청소년들에게 “엄마 아빠가 너한테 안 해 준 게 뭐 있냐”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 “사 달라는 거 안 사 준 게 뭐 있냐. 해 달라는 거 안 해 준 게 뭐 있냐” 그렇게 말하면 안 되다. 뭐 해 달라는 게 아니다. 뭐 사달라는 게 아니다. 

아들딸들이 자라나다 보면 어느 때가 되면 자기 방문을 꽝하고 닫고 들어가서 자기만의 공간에서 자기만의 생각을 하며 지내기를 원한다. 그게 자라나면서 겪는 과정이다. 양처럼 순하던 아들딸이 어느 날부터 엄마 아빠에게 한숨 덩어리로 변신하고 대들고 큰 소리 치며 덤벼들기도 한다. 그럴 때에 공자님처럼 목소리를 낮추어서 침착하게 아들딸을 대하는 부모가 몇이나 되겠는가. 

2분짜리 단막극 한 장면을 보자. 
왜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인가. 왜 자녀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말라는 것인가. 왜 자녀의 감정을 섣불리 건드려서 화가 나게 하지 말라는 것일까.
주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이는 소극적인 교훈 같지만 얼마나 소중한 가르침인지 모른다. 

우리나라에도 몬테소리 교육이 여기저기서 행해진다. 몬테소리는 마리아 몬테소리(Maria Montessori,1870~1952)의 이름에서 성을 따온 교육 원리, 교육 방식이다. 몬테소리 교육은 이탈리아 최초의 여의사이자 교육학자인 마리아 몬테소리에 의해 창안된 교육 프로그램이다. 1907년, 37살 때에 그녀는 직접 로마의 슬럼가의 어려운 여건의 어린이들을 자신의 교육 신념에 의해 가르쳐서 좋은 결과를 입증하였다. 그 후 그는 유럽, 인도, 미국을 오가며 40년 동안 강연과 저술 활동을 왕성하게 하였다. 

교육용 장난감을 통하여 어린이 자신의 독특한 성장발달 과정을 관찰하여 연구한 방법이다. 또한 어린이 내부에서 일어나는 '흡수하는 마음'이라는 어린이만의 유일한 특성에 바탕을 두고 개발된 몬테소리 교구를 통하여 어린이의 정신적인 싹인 지성을 마음껏 발달시키도록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어린이를 도와주는 훌륭한 교육이다. 어린이의 감춰진 힘을 알아내어 칭찬하고 그 힘의 성장을 돕고 보조하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겸손히 다가가야 한다. 그렇게 하면 어린이의 진정한 품성이 내면의 힘을 가지고 우리 앞에 드러나게 된다. 

올바른 교육을 받는 사람은 학교를 떠난 후에도 자신이 자연적 호기심과 지식에 대한 사랑 안에서 일깨워졌기 때문에 배우기를 계속한다. 그리하여 몬테소리 박사는 조기 아동 교육은 미리 짜인 교과 공부에 아이들을 얽매지 말고 스스로 배우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욕구를 개발시켜주도록 해야 한다고 믿었다.

몬테소리 교육의 목적은 세 가지이다.
첫째, 어린이를 성인의 축소형이 아닌 개별적인 생명을 지닌 존재로서 존중하고 어린이의 작업을 소중하게 여긴다.

둘째, 강요나 지시에 의한 교육보다는 스스로 탐색하고 선택하여 자신이 선택한 작업을 통한 기쁨을 맛봄으로 성취감 있는 자율적인 어린이가 되도록 도와준다.

셋째, 준비된 환경을 갖추어주며 어린이의 지적욕구를 만족시키며 집중력, 독립심, 협동능력을 키워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는 어린이가 되도록 돕는다.

생각해 보라. 세상 교육의 틀에 가두어 두었다면 에디슨이나 아인슈타인 같은 인물이 탄생했겠는가. 스티븐 스필버그의 상상력과 창의력, 스티브 잡스의 연구 실적이 틀에 박힌 학습 환경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지 않나. 
한 아기가 태어나 자라나면서 그 한 인격 속에 담겨진 그 만의 것을 계발하고 발전시키고 행복한 한 인격으로 사회 속에 자리매김 하도록 도우면 누구나 다 훌륭한 인품을 가진 역량 있는 사회의 구성원으로 성장할 수 있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더욱 그러하지 않나.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학교로 학원으로만 내어 몰지 말고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하였다. 그 앞에 ‘오직’이란 말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씀이 소극적인 권면이라면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말씀은 적극적인 권면이다. 
여기 ‘교훈’이란 단어와 ‘훈계’라는 단어를 주목해 보아야 한다. ‘교훈’(敎訓)이란 ‘파이데이아’는 “어린이를 양육하고 교육하고 훈련하고 징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아이’를 뜻하는 ‘파이스’라는 단어에서 생겨났다. 그렇지 않나. 아이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어리고 독립된 한 인격이다. 부모의 종속물이 아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 아직 어리지만 한 어린이는 그 어린 인격 속에 평생을 이 험한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이 담겨 있다. 그런 면에서 자녀들에게 교훈하라는 말씀이다. 이는 노엽게 하는 것과 다른 차원의 훈련과 징계를 뜻한다. 이는 권위 있는 책벌과 훈련을 말한다. 훈련이 강한 군사를 만들어 내지 않나. 훈련이 유능한 운동선수를 발굴하고 배출해 내지 않나.

과거 우리나라 축구 역사에 히딩크 감독을 말하던 것처럼 요즘 베트남 축구계에 박항서 감독의 열풍에 관심을 두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처럼 아들딸을 낳고 기르는 그 배후에 아들딸을 교훈하는 엄마 아빠의 역할이 중요한 것이다.

잠언 13장 24절 후반 절에 보면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고 하였다. 그 말씀의 앞부분에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고도 했다. 어떻게 하라는 말씀인가. 자녀를 사랑하는 진심이 통하는 부모의 권위를 갖고 근실하게 징계하란 말씀이다. 

잠언 29장 15절,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행하게 버려 둔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그 대표적인 가정이 사무엘상에 등장하는 제사장 엘리의 가정이 아닌가. 엘리 제사장은 나이 많아 늙도록 망나니로 자라난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에게 “너 왜 그렇게 하였느냐”고 따끔하게 책망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 제사장의 대를 이을 두 아들들이었지만 이 패역한 청년기를 보내던 두 아들의 나중이 얼마나 불행하게 끝나고 말았나. 그러므로 주의 교훈으로 교훈하여야 한다. 훈련하고 경책하고 때로는 징계하여야만 한다. 

나의 부모님 특히 나의 아버지는 아들 삼형제에게 ‘어른들께 인사 잘 해라.’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 그래서인지 나는 인사 잘 안하는 교인들에게 상처를 쉽게 받는다. 너무 이상하다. 교인이 수천 명, 수 만 명이면 몰라도 서로 인사할 수 있는 정도의 규모의 교회인데도 주일 날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고 여러 시간을 교회 안에 예배당과 친교실과 교육관과 카페 공간 등에서 마주쳐도 못 본 척 하며 지내는 교인들을 대하면 나는 쉽게 상처를 받는다. 너무 사람이 이상하게 보인다. 

누가복음 18장 15절 이하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눅18:15-17)

이게 무슨 내용인가. 제자들은 어린 아기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애들은 저리로 가라”고 거부하였다. 어린 아기의 부모를 제자들을 꾸짖었다. 그런데 예수는 달랐다. 어린 아이들을 불렀다. 가까이 하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여기에 심오한 교훈이 담겨 있다. 어른들이 그러면 안 된다. 어린 아이들처럼 생각하고 판단하고 말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런 이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 주님의 생각과 상관없이 내 감정, 내 판단, 내 고집, 내 소견대로 결정하고 행동하면 필경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고 주님의 마음에 다시 또 못을 박는 잘못을 범하고 말게 된다. 

그 다음에‘훈계’(訓戒)로 ‘양육하라’고 했다. ‘훈계’란 말을 통해서 자녀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교훈’이 행동으로 보이는 책벌이라면 ‘훈계’는 차근차근 말을 통해서 자녀들을 깨우쳐 주고 가르치는 것을 말한다. 

옛날 우리 할머니들과 어머니들은 공부는 많이 못했어도 어린 아들딸에게‘도리 도리’를 가르쳤다. ‘도리’ 가 무엇인가. ‘도리’(道理)는 ‘사람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바른 이치’이다. 그걸 가르쳐야한다. 

세상에는  든 사람, 난 사람 많다. 그러나 갑질하지 않는 된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려면 인간의 도리를 가르쳐야 한다. 그것을 성경은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씀하였다. 성경의 모든 말씀과 가리지 않는 자세한 사건의 기록들을 통해서 교훈을 받고 훈계를 깨달으라는 말씀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기독교인다운 윤리관을 갖고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란 말씀이시다. 성경 안에서 삼강오륜(三綱五倫)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단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십계명(十誡命)을 가르쳐야 한단 말씀이다. 이런 걸 교회에서도 가르쳐야 하지만 부모가 모범을 보이고 부모가 가정에서 가르쳐야 한다. 


가르침을 떠나지 아니하게 하라.
자식은 부모 앞에서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자식이다. 부모와 자식이 함께 늙어 가도 부모 보기에 자식은 여전히 자식이다. 그런데 성경은 무어라고 가르치고 있나.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22:6)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군목도 지내고 목회도 잘하던 젊은 목사가 있었다. 그런데 술을 늘 가까이 했다. 술을 마시고 심방도 다녔다. 술 말고는 흠 잡을 게 없었다. 교인들도 말했다. 우리 목사님은 술 마시는 것 말고는 흠 잡을 것이 없다. 교인들이 술 마시며 목회하는 목사를 묵인하였다. 그런데 결국은 그 목사가 알콜 중독자가 되어 교회를 떠나고 말았다. 지금은 폐인처럼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어제 전도 하는데 구파발 역 3번 출구 에스컬레이터 바깥에 담배 곽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담배 곽 금연 광고 사진에 보니 후두암으로 목에 시뻘건 구멍이 났다. “그래도 피우시겠습니까” 그래도 피운다. “세살 때 배운 버릇 여든 까지 간다”는 속담이 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22:6) 

어려서는 모른다. 젊어서도 표시가 잘 안 난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 들아 갈수록 잘 못 살아 온 표시가 점점 들어나게 되어 있다. 숨길 수가 없다. 늙어서가 문제다. ‘늙어서’가 언제인가. 계절로 하면 늦가을이다. 초겨울이다. 이젠 심고 거름 주고 땀 흘려 가꿀 때가 아니다. 열매로 말할 때이다. 그런데 쭉정이 인생이 되었단 말이다. 

주님이 말씀하셨다. 알곡은 창고에 쌓고  쭉정이는 불에 태워 버리는 법이다.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 심을 때가 있고 거둘 때가 있다. 

높이 올라 간 데서 떨어지면 그 떨어지는 충격이 그만큼 더 크다. 성경의 사울 왕을 보라. 사람이 악해지면 자기 사위인 다윗이라도 창으로 찍어 죽이려고 하지 않나. 아합 왕과 이세벨을 보라. 권력을 옷 입고 악해 지니까 천하에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게 있나. 그 악이 얼마나 심각한 악으로 치닫게 되나. 솔로몬이 은과 금이 없어서 60에 죽었나. 솔로몬이 처첩이 없어서 외롭게 죽었나. 그가 20살 때 젊은 날 지혜의 왕으로 출발한게 무슨 의미가 있나. 솔로몬이 받아 쓴 성경의 잠언과 지혜의 글을 몰라서 타락했나. 나이 들어서가 문제다. 늙어서가 문제다. 어려서는 잘 모른다. 청년의 때에는 별로 표시가 안 난다. 성경 말씀 그대로이다. 왜 주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야 하나. 늙어서 보아야 한다. 나중에 처음보다 천배 만 배 더 중요하다. 

왜 예수인가. 왜 사도 바울을 말하고 왜 디모데나 디도나 바나바나 브리스길라, 아굴라를 말하나. 왜 누가 인가. 왜 오네시모인가. 오네시모는 비록 종이었지만 사도 바울을 만난 이후에 그의 나중의 생이 달라졌다. 나중이 중요하다. 늙어서가 중요하다. 왜 유아교육이 중요하고 왜 어린이 교육, 왜 청소년 교육과 청년 교육이 중요한가. 영원한 어린이가 있나. 영원히 시계가 멈추어 버린 십대나 이십대가 있나.  세월은 가고 인생은 늙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잘 가르쳐야 하고 잘 배워야 한다. 주의 교훈과 훈계로 전신갑주 무장해야 한다. 그리고 나중이 점점 중요하다. 늙어서는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인생은 그 열매로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빌 코스비(Bill Cosby, 1937-)는 미국의 유색 인종의 우상과 같은 인물이었다. 1937년생이니까 81살이다. 빌 코스비의 이름이 사라진다. 미국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는 지난달 성폭행 혐의 재판에서 유죄 평결을 받은 유명 코미디언 빌 코스비를 영구 제명한다고 발표했다. 미국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는 성명에서 “지난달 성폭행 사건 재심에서 유죄가 난 이후 빌 코스비에 대해 몇 가지 조처를 취했다. 회원 명부(로스터)에서 그의 이름을 삭제했다. 노스할리우드 캠퍼스에 옮기기로 했던 코스비의 흉상도 없애기로 했다. 아울러 TV 명예의 전당 온라인 사이트에 있던 코스비의 이름도 지웠다”고 발표하였다. 

성경의 마지막인 요한 계시록 22장에 보면 성 안에 들어가서 생명나무에 나아갈 자와 성 밖에 버림 받을 자를 구분하는 말씀이 나온다. 

하나님 안에서 예수 잘 믿고 예수 말씀 잘 따르며 평생을 살아서 모두 다 하나님의 나라의 영원한 상급을 받는 천국 백성을 키워 내는 가정 그런 삶을 살아가는 신앙의 선배가 되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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