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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시66:8-20) 2020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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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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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5-22 23:54 조회 9,716 댓글 0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시66:8-20)      2020. 5. 17


시편 150편 중에 23편이 ‘찬양시’이다. 그 23편의 찬양시 중의 한 편이 시편 66편이다. 누가 언제 쓴 시편인지는 알 수 없다. 혹자들은 다윗, 아사, 여호사밧, 히스기야 등을 언급하지만 분명하지는 않다. 시편 66편은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고 경배하며 찬양하는 내용들로 가득하다.

흔히 찬송은 마음이 평안하고 행복할 때에만 부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늘 경험하는 대로 그렇지 않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된 우리들은 이러 저러한 별의 별 형편을 따라 늘 찬송하며 살아간다. 심지어 성도들은 가족이나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앞에서도 찬송한다. 돌아보면 그 어떤 형편과 어떤 처지와 어떤 여건과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믿음의 사람은 개인적으로 늘 찬송하며 살아간다. 뿐만 아니라 모일 때마다 다 같이 한목소리로 찬송하고는 한다. 맞다. 그래야 한다. 

사도 바울은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라”(엡5:19)고 했다. 술취하거나 방탕하지 말고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말씀에 이어서 이와 같은 구체적인 찬송 생활에 대하여 교훈하였다.

생각하여 보라. 요즘 수도권에서는 이태원의 나이트 클럽에서 시작된 코로나 19 확진자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그곳에 출입했던 이들의 동선을 일일이 추적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쉬쉬하고 있지만 그곳의 나이트 클럽은 주로 남성 동성애자들이 드나드는 게이 클럽이라고 한다.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그들 명단 중에는 의료인도 있고 간호사도 있다. 교사들도 있고 학원 강사도 있고 교육 공무원들도 있다. 휴가 나오거나 외박 나온 군인들도 있다. 만약에 그 명단 중에 어느 교회 목사, 어느 교회 장로, 어느 교회 권사나 집사가 그날 밤 거기 나이트 클럽에 있었다고 가정해 보라. 

사람이 복된 삶을 살려면 가는 길과 서는 곳과 앉는 자리가 중요하다. 시편 1편의 말씀처럼 “복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해야 한다.” 그 반면에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여야 한다. 악인들은 그렇지 않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 악인은 심판을 견디지 못한다. 죄인들은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한다.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지만 악인들의 길은 망하고 만다. 

의인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다. 그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게 된다.”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이 항상 하나님께 찬송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편 66편의 기록자는 민족적인 찬양을 제안하고 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에 대하여 선포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도 찬양할 수 있겠지만 온 민족이 더불어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1절에 보면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낼지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온 땅이여’라는 표현은 오대양 육대주에 흩어져 사는 모든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을 찬양하자고 초정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끼리만 찬양하자는 제안이 아니다. 2절에 보면 “그의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찬송할지어다”라고 천하 만민들이 더불어 다 같이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찬송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오늘 8절부터 본문을 읽었다. 8절의 시작은 ‘만민들아’하는 초청으로 시작된다. 1절의 ‘온 땅이여’, 4절의 ‘온 땅이’ 하는 표현과 8절의 ‘만민들아’하는 표현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열방의 모든 백성들이 다 같이 하나님을 송축하고 찬양하기를 초대하고 있다.

20절로 되어 있는 시편 66편은 크게 12절까지와 13절 이후로 나눌 수 있다. 앞 부분에서는 8-12절 사에서 ‘우리’라는 표현을 수 없이 사용하고 있다. ‘우리 하나님’께 ‘우리 영혼이’ 찬양하자고 제안하고 있다. 또한 13절부터는 개인적인 찬양의 이유에 대하여 고백하고 있다. 그래서 13절부터는 ‘나’라는 일인칭 대명사를 계속하여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내가’ 혹은 ‘나의’ 이런 표현들이 반복된다.

그러면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무엇을 찬송하면서 온 땅이 함께 찬양하고 만민들이 더불어 찬양하기를 원하고 있는가. 6절에 보니까 하나님이 행하신 역사적인 두 가지 큰 기적 사건을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이 바다를 변하여 육지가 되게 하셨다.
무리가 걸어서 강을 건넜다.
거기서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였다.

이러한 고백 속에 담긴 역사의 두 가지 기적 사건이 무엇인가. 출애굽할 당시에 홍해를 육지처럼 건넌 일과 광야 생활 사십년을 마치고 요단 강을 육지처럼 건넌 기적 사건이다. 그 모든 기적 사건은 주께서 이룩하신 일들이다. 그러므로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찬양하고 여호와를 경배하는 것이다.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시편 66편 기록자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그 무엇에 대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나. 


영혼을 살려 두시는 주.
9절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신다고 했다. 이 표현은 “하나님은 우리를 생명 가운데 두신다.” 혹은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보전하신다”는 뜻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생명을 보전하시고 지키시되 실족하지 않도록 보호하신다. 설령 범죄하고 타락하여 죄의 수렁에 빠졌을지라도 하나님은 길 잃은 어린 양을 찾아 어깨에 메고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 오는 목자처럼 한 영혼 한 영혼을 실족하지 아니하도록 지키고 보존하기를 원하신다. 

요나서에 보면 선지자인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다시스로 가는 패를 태고 도망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의 동선을 끝까지 추적하신다. 배 가장 낮은 층에 내려가서 잠들어 있던 요나는 풍랑이 심한 배 위에서 제비 뽑혔다. 바다에 던져진 요나를 하나님은 큰 물고기를 예비하셔서 삼키움 당하게 하셨다. 요나는 삼일 밤낮을 그 큰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하는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은 큰 물고기로 하여금 요나를 육지에 토해내도록 하셨다.

오늘날의 우리도 살아가면서 요나와 같은 체험을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아무리 하나님의 손길을 피하고 숨으려고 발버둥질 쳐봐야 결국은 하나님의 손길을 벗어날 수가 없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들의 영혼을 죽음으로 몰고 가시는 주가 아니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딸이 실족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혼을 죄와 사망이 가득한 땅에서 보존하시고 각 사람의 생명을 지키시길 원하신다. 

우리교회는 큰 교회가 아닌데도 가정마다 별의 별 일들이 다 많다. 이런 일 저런 일이 파도처럼 밀려 온다. 집집마다 들여 다 보면 걱정. 근심. 염려. 불안. 초조. 두려움. 질병. 사고 없이 사는 가정이 거의 없다. 이 집이 조용해지는 것 같으면 저 집에서 문제가 생긴다. 저 집이 조용해졌나 싶으면 이 집에 먹구름이 덮친다. 이 가정이 평안해졌나 싶으면 저 가정이 시끌시끌해진다. 이 집 아이 소식 듣고 기뻐하다 보면 저 집 아이 소식에 가슴이 먹먹해지고 마음이 우울해진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이 없듯이 우리는 하루만 살아도 별의별 일들을 다 겪으며 살아간다. 바다 물은 날마다 하루도 쉬지 않고 밀물과 썰물이 계속되듯이 인생살이가 고요하고 평안 한 날보다는 이런 파도 저런 파도가 잔잔할 날이 없다. 딸네가 평안해 지면 아들네가 뒤숭숭해지고, 아들네가 살만해 지면 딸네 집에서 속상한 소식이 들려 온다. 

그러나 성도된 우리,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은 믿음으로 여전히 이런 찬송을 부르며 살아간다. 

“나 어느 곳에 있든지”라는 408장 말이다.

나 어느곳에 있든지 늘 맘이 편하다 주 예수 주신 평안함 늘 충만하도다
나의 맘 속이 늘 평안해 나의 맘 속이 늘 평안해
악한 죄 파도가 많으나 맘이 늘 평안해

내 맘에 솟는 영생수 한없이 흐르니 목마름 다시 없으며 늘 평안하도다
나의 맘 속이 늘 평안해 나의 맘 속이 늘 평안해
악한 죄 파도가 많으나 맘이 늘 평안해

참되신 주의 사랑을 형언치 못하네 그 사랑 내 맘 여시고 소망을 주셨네
나의 맘 속이 늘 평안해 나의 맘 속이 늘 평안해
악한 죄 파도가 많으나 맘이 늘 평안해

주 예수 온갖 고난을 왜 몸소 당했나 주 함께 고난 받으면 면류관 얻겠네 
나의 맘속이 늘 평안해 나의 맘 속이 늘 평안해
악한 죄 파도가 많으나 맘이 늘 평안해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는 성도된 우리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되 더 풍성하게 얻기를 원하신다. 할렐루야 아멘
 

시험하고 단련하시는 주.
성경이 말씀하는 시험은 항상 두 가지다. 하나는 하나님이 시험하시는 시험이다. 영어로 ‘TEST’이다. 그러나 사탄 마귀가 성도를 시험하는 시험도 있다. 이것은 영어로 ‘TEMPTATION’이다. 즉 ‘유혹’이다. 예수께서 사십일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마귀가 나타나서 세 번이나 예수를 시험하였다. 예수는 그 시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적하여 이기셨다. 시험은 지혜롭게 잘 극복하면 오히려 복이 된다. 득이 되고 유익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시험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사탄 마귀가 나를 유혹하고 미혹하는 것인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마귀의 시험을 차례대로 말씀으로 이기시고 물리치셨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네게 주겠다.” 이런 사탄 마귀의 유혹과 시험 앞에서 예수께서는 신명기의 말씀을 유창하게 인용하며 마귀를 대적하고 물리치셨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사탄아 물러 가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왜 쉬지 말고 기도하여야 하고, 왜 말씀을 밤낮으로 묵상하여야 하는가. 예수께서는 사십일 밤낮을 주리고 굶주리는 금식 가운데 어서 사십일이 끝나면 뭘 먼저 먹을까만 궁리하신 주가 아니셨다. 성령의 이끌림을 받으며 사십일간 기도하신 예수는 성령에 충만한 가운데 마구의 시험과 유혹을 물리치셨다. 그 때에 마귀는 예수의 곁을 떠나고 찬사들이 나와서 수종들었다.
예수의 이와 같은 모습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나. 우리가 세상을 어떤 믿음, 어떤 신앙의 자세로 살아갈 것을 교훈하나. 

불같은 시험과 환난 가운데서 굳굳하게 믿음을 지켜낸 대표적인 성경의 인물은 단연 욥이다. 성경을 읽는 독자들은 욥이 역사 중에 실재했던 인물이냐고 질문하고는 한다. 왜냐하면 그처럼 감당하기 어려운 극심한 슬픔과 재난과 질병과 오해와 고독을 그처럼 담대하게 극복한 역사적인 인물이 그리 쉽지 않기 때문이다. 

루드비히 판 베토벤(Ludwing van Beethoven, 1770-1827)은 1770년에 독일의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독일의 도시인 본(Bonn)의 지방 통치자인 선제후 궁정 합창단의 음악 감독이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주변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진심으로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본 궁정 합창단에서 노래를 맡아 부르던 그의 아버지는 술을 너무 즐겨 마셨다. 알콜 중독 증세 때문에 궁정에서 자주 문제가 되고는 하였다. 10대부터 베토벤은 가족의 경제적인 부분을 책임지면서 궁정에서 음악 사역을 시작했다. 그는 오르간 연주와 작곡을 공부했다. 틈틈이 악기들을 관리하는 일도 도왔다. 동시에 그는 노래와 실내악을 작곡하기 시작하였다. 베토벤의 나중 교향곡들은 베토벤만이 가능한 작품들이다. 

베토벤의 성격은 종종 거칠고 공격적이었다. 극도로 참을성이 없고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는 난폭해지도 했다. 게다가 30살을 넘기기 전부터 점점 안들리기 시작하던 귀가 전혀 소리를 못 듣게 되자 자연스럽게 그는 더욱 내성적이고 사람들을 만나기를 꺼려하였다. 베토벤의 성격에는 여러 모순된 부분들이 있었다. 때때로 그는 온화하고 친절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냉정하고 적대적이었다. 

그가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가슴속에 있는 창작의 요구를 다 채우지 못하고서는 세상을 떠날 수 없다”는 그의 작곡열 때문이었다. 그는 친구인 프란츠 베겔러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운명의 끈을 붙잡겠다”라고 적었다. 이게 무슨 뜻인가. 그는 자신이 전혀 들을 수 없게 되었다는 그 운명을 번뇌하며 그대로 숙명으로 받아 들이고 그 상태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이루어 나간 것이다. 그가 남긴 다른 기록 중에는 “내가 못듣게 된 이 병에서 치유만 된다면 나는 온 세계를 음악으로 담아낼 것이다”라는 내용도 있다. 그는 못듣게 된 병세는 악화되었으나 음악의 창작을 향한 그의 소원들은 끊임이 없이 이루어졌다. 39살 때인 1819년경이 되면서부터는 완전히 귀가 먹어 의사소통을 위해 늘 노트를 손에 들고 다녀야 했다. 이 노트에 상대방이 질문을 적으면 베토벤은 말로 대답하곤 했다. 소리가 점점 안 들리게 됨에 따라 그의 피아노 연주 수준도 점점 떨어졌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는 작곡에 온 힘을 쏟아부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베토벤의 교향곡들은 베토벤이 소리를 못 듣게 되었기 때문에 가능해진 역사적인 작품으로 남게 된 것이다. 

미술로 하면 우리나라의 운보 김기창(金基昶, 1913-2001) 화백을 보라. 그는 어려서 고열로 일곱 살때에 완전히 청각을 잃었다. 거의 말도 못했다. 그런 그에게 천재적인 미술 세계가 펼쳐졌다. 천주교 신자로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갖고 있던 그의 작품들 중에는 한국화로 그린 예수의 생애의 작품들이 돋보인다. 그의 섬세한 그림 중에 일만원 권의 세종대왕 초상화가 있다. 2013년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한국근현대 회화 100선 전에서 운보 김기창의 ‘군작도’라는 참새 떼를 그린 그림을 보고 전율을 느꼈던 적이 있다. 마치도 자신의 듣지 못하고 말을 더듬어야 하는 운명을 지저귀는 참새 떼의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는 듯 그려낸 작품의 세밀성이나 규모가 압도적이었다. 

시편기자는 하나님은 은을 단련함같이 자신을 단련하신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그물에 걸리게도 하시고 허리에 무거운 짐을 지고 다니게도 하셨다. 남들이 자신들의 머리 위를 타고 다니게도 하셨다.  자존심이 짓밟히게 하셨단 말이다. 불과 물 가운데를 통과하게도 하셨다. 그러나 그 모든 곤혹스러운 날들을 견디고 버티고 이기고 지내고 보내 “주께서 우리를 끌어 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도다”는 고백과 찬양을 받으시려는 연단과 단련의 기회였다. 

어찌하여 수소와 숫양과 염소를 가지고 번제단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왜 향기로운 번제물로 하나님께 제사하고 싶어하는 것인가. 뒤 돌아 보니 모든 것이 은혜와 모든 것이 축복이요 모든 것이 주님의 공급이요 모든 것이 주님의 인도하심이요 모든 것이 주님의 섭리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16절에 보니까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너희들아 다 와서 들으라 하나님이 나의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내가 선포하리로다.”라고 외치고 있다. 그렇다. 숨어서 작은 소리로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크게 찬송하고 외쳐 찬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이 큰 권능으로 행하신 일들이 놀랍고 엄위롭고 위대하시기 때문이다. 


기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는 주.
하나님은 기도하면 그 기도소리를 들으신다. 신음소리라도 들으신다. 눈물 방울을 눈물병에 담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사랑하는 내 어린 아기가 칭얼대면 그 소리에 엄마 아빠의 잠이 깨어나지 않나. 배가 고픈지 어디가 아픈지 기저귀를 갈아 주어야 하는지 어린 아기의 형편을 돌아 보지 않나.

하나님은 아버지이셔서 자녀들의 형편을 돌아 보신다. 

 17절에 보니까 부르짖고 찬송한다고 하였다. 부르짖는 것은 간절한 기도이다. 왜 부르짖어 기도하고 때로는 높이 찬송하는가. 18절에 왜 죄악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며 기도하는가. 죄악을 품고 기도한다면 어찌 하나님이 그런 기도를 들이시겠는가. 19절에 보니까 하나님이 나의 기도 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셨고 실로 들으셨다. 응답하셨다. 그래서 찬송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도의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인자와 사랑을 거두어 가지 않으신다. 

“내 부르짖음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영원히 주 찬양합니다. 내 삶을 다해”

기도해야 하겠다는 생각만 갖고 하루 하루 허송하지 말고 기도하며 살아가는 기도 승리와 기도 응답의 나날이 되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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