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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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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은혜로(고전15:9-10, 엡2:1-10) 2019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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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9-10-25 12:23 조회 10,820 댓글 0
 
                 오직 은혜로(고전15:9-10, 엡2:1-10)   2019. 10. 13


1991년 초부터 1993년 말까지 삼년 동안 강남의 큰 교회에서 부목사 생활을 하였다. 아장거리던 어린 애들이 커서 농구선수처럼 키가 커지고 만사를 분별하고 앞장서는 인물로 자라나듯이 주님의 몸된 교회도 성장하기로 하면 작은 겨자씨가 큰 겨자 나무로 자라듯이 계속하여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부임 첫해에 가정 심방을 주로 맡아 하였다. 33살 때부터 시작한 사역인데 그 나이에 결혼 주례도 자주하고 장례식도 입관부터 발인 하관까지 도맡아 예배하고는 하였다. 암 말기 환자를 비롯한 병원의 환자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도 끊임이 없었다. 병원에서 병상 세례도 베풀었다. 

연합 속회, 속장 세미나, 남녀 선교회 예배와 모임, 개업 예배, 돌 예배, 칠순 팔순 예배 등등 파도처럼 밀려오는 예배를 부목사가 전담하여 섬겼다.  

그 때 기억에 일 년을 지내며 수많은 가정들을 방문하여 심방 예배드린 때에 가장 많이 부른 찬송이“지금까지 지내 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라는 301장 찬송이었다.

사실이 그렇지 않나. 사람이 누구나 다 지내 온 세월을 뒤 돌아 생각하고 기억해 보며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은혜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이 주의 은혜요 구비구비 인도하심을 받은 그 모든 것들이 주님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인가. 사람이 한 평생을 살면서 겪는 희노애락 속에 주님의 섬세하신 은혜가 배어 있다. 

지금 생명 있음이 주의 은혜요 오늘을 살아가고 있음이 주의 은혜이다.
가정, 가족, 직장과 일터, 건강, 재물, 인간관계 그 모든 것들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더군다나 세상에는 미신을 믿는 이들도 많고 이단에 빠진 이들도 적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며 사는 이들도 꽤 된다. 사회적으로 저명하고 지위가 있고 공부도 적지 않게 한 이들 중에서도 하루가 멀다 하고 비싼 돈 주고 점 보러 다니고 굿하고 부적 사서 몸에 지니고 다니기도 한다. 군대 가는 아들 속옷에 부적을 꿰매어 주는 부모들도 있다. 

날을 물어봐야만 이사하는 이들도 있다. 그처럼 세상 풍조를 좇는 세상에서 주 안에 평안한 마음을 갖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 

오늘 읽은 본문 중에 고린도 전서 15장에 보면 바울은 자신이 사도(使徒)가 된 것이 주의 은혜요 다른 그 어떤 사도들보다 더 많이 수고하며 힘써 사역해 온 것이 그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렇지 않나. 살기등등하게 예수 믿는 이들을 박해하는데 앞장섰던 그가 다메섹에서 변화 받은 것이 주의 은혜요 이방의 사도로 쓰임 받은 것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아닌가. 

우리 각 사람은 어떤가. 
부모에게서 받은 은혜가 크다. 우리 각 사람이 누구에게서 비롯되었는가. 
설령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났거나 부모 손길을 거의 못 받고 누군가의 손길에 의해서 버려지듯이 컸을지라도 그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 아닌가. 창세기의 요셉이나 에스더나 다니엘이 그런 환경에서 성장한 것처럼 말이다. 

북한에 고향을 두고 남한에 정착해서 노년기를 살아가시는 분들도 적지 않다. 어린 시절과 젊은 날 일제 식민지 시대를 겪고 6.25 전쟁을 겪으면서도 죽지 않고 살아남아 있는 것이 주님의 은혜요 예수 믿으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아닌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장애를 갖고 살거나 상해를 입고 살아가는 분이 계실지라도 지금 생명 있음이 은혜요 이만큼 기동하며 살아가는 것이 은혜가 아닌가. 

더군다나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과 영생의 소망을 갖고 살아가는 성도들은 “사나 죽으나”이 모든 것이 나를 향하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아닐 수 없다. 주를 믿는 믿음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은혜다. 

“이제 내가 살아도 주 위해 살고 이제 내가 죽어도 주 위해 죽네
그러므로 나는 사나 죽으나 주님 것이요 사나 죽으나 사나 죽으나
날 위해 피 흘리신 내 주님의 것이요”

<이제 내가 살아도>라는 이러한 찬양의 고백처럼 그런 신앙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족하고 영광스러운 일이 아닌가. 지난 주일에 ‘오직 믿음으로’라는 말씀을 묵상했는데 오늘은 ‘오직 은혜로’라는 말씀을 좀 더 묵상하려고 한다. 


하나님의 그 큰 사랑.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그 은혜를 덧입어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된 것은 나를 향하신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이시다. 

사도 바울의 원 이름은 사울이다. 그는 로마의 시민권자로 태어난 유대인으로 베냐민 지파의 바리새인이었다. 가말리엘 아래서 율법 공부를 많이 했다. 젊은 나이에 모세의 율법과 규례와 법도를 실천하는데 철저하려 했던 율법학자였다. 그는 유대 사회에서 장래가 촉망되었다. 그러나 그는 예수를 부인하던 자였다. 하나님을 믿되 예수를 그리스도로 여기지 않던 자였다. 그래서 예수 믿는 이들을 핍박하였다. 

사도행전 8장 1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에 죽어 마땅하다고 여기던 자였다. 예수 믿는 자들은 돌에 맞아 죽어도 좋다고 여길 정도였다. 사도행전 9장 1절에 보면 사울은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던 자였다. 그런 그가 다메섹 성 안에 피신하여 예수 믿던 이들을 색출하여 핍박하려고 가던 중에 예수의 부르심을 체험한 것이다. 

생각하여 보라. 잘 보이던 두 눈이 다메섹에서의 예수 체험 이후로 갑자기 안 보이게 되었다. 사울은 다메섹의 직가라는 거리에 있는 유다의 집에 머물면서 삼 일 동안 먹지도 않고 기도하며 지냈다. 하나님은 삼일 후에 아나니아라는 이름의 선지자를 그에게 보내셨다. 안수하여 눈의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게 하셨다. 성령에 충만해 졌고 다시 보게 해 주셨다. 삼일 동안 보이지 않던 눈이 다시 보이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쁘고 얼마나 놀랍고 얼마나 신비하고 얼마나 감사하였겠나.
오늘 날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그런 크신 사랑을 선물로 덧입고 살아가는 것이다. 아름다운 자연과 북한산의 자태, 둘레길 들어서면 만나는 들국화 향기, 맑고 높은 하늘, 상큼한 가을 공기, 공중에 날아다니는 새와 벌과 나비들과 가을 잠자리들 누가 다 먹이고 입히시는건가. 이 땅에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덧입지 않고 생존하는 것이 단 한가지나 있는가. 이것은 동식물과 우주 만상에 다 마찬가지이다. 그 중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덧입고 생활하는 존재 중에서 으뜸이다. 

어제 저녁 하기비스라는 이름의 강력한 태풍이 일본을 강타했다. 43만 가구가 정전되었다. 일본 당국은 도쿄와 지바, 가나가와 등 11개 도현의 주민 약 1000만 명에 피난 지시·권고를 내렸다. 순식간에 재난 지역이 되고 만 것이다. 생각해 보라. 우리는 매 순간 주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다. 

사람이 육체의 욕망만을 추구하며 살아가면 절대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없다. 인간은 누구나 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존재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덧입고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이전의 상태를 에베소서 2장 1-3절이 말씀하고 있다. <현대인의 성경>으로 읽으면 이렇다.

“여러분은 불순종과 죄 때문에 영적으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전에는 여러분이 세상의 악한 길을 따르고 하늘 아래의 영역을 지배하고 있는 마귀에게 순종하며 살았습니다. 이 마귀는 현재 불순종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활동하는 영입니다. 우리도 전에는 그들과 같이 우리 육체의 욕심대로 살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하여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본래부터 하나님의 노여우심을 살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랬던 우리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으로 인하여 구원 받고 대속 받고 죄 사함 받고 영생하는 하나님의 아들딸이 된 것이다. 304장 찬송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의 가사와 신앙 고백이 무엇인가.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다 형용 못하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 위에 죄 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제물 삼으시고 지 용서하셨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측량 다 못하네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그렇지 않나.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깨달아 알고 믿기 시작하면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라는 찬송이 절로 나오지 않겠나.

우리는 김익두(金益斗, 1874-1950) 목사를 말할 때 ‘깡패 출신 김익두’라고 말한다. 황해도 안악에서 태어났다. 16살 때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이런 저런 장사를 하였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젊은 날 한때 몹시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26살 때인 1900년 봄에 미국인 선교사 스왈렌(Swallen,W.L.)의 ‘영생’이라는 주제의 설교에 감동을 받고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미 결혼했던 그는 그 다음 해인 1901년 1월에 부인과어머니와 함께 신앙을 고백하고 스왈렌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스왈렌 선교사로부터 목회자의 자질과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재령과 신천의 교회 개척 전도사로 파송되었다. 그 곳에서 전도하면서 조롱도 당하고 마을 사람들로부터 돌에 맞기도 하였다. 참고 견디면서 겸손하고 인자하게 기독교복음을 전도하였다. 결국 그 곳에 기도처가 마련되고 예배당도 건축하여 많은 신자를 얻었다.

1910년, 36살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여 목사가 되었다. 졸업 후 신천교회 위임목사가 되어 그 곳에서 오래도록 목회하였다. 한 교회에서 11명의 목사를 배출하였다. 하나님은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의 사경회에서부터 그를 통해서 큰 부흥의 불이 붙게 하셨다. 그의 설교내용은 주로 예수의 십자가와 속죄, 회개에 따른 중생의 체험, 부활과 천국의 영생복락이었다.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신비한 능력과 매력을 갖도록 하셔서 청중들이 크게 은혜를 받았다. 그가 기도하면 병이 나았고 간증이 여기저기서 전해져 왔다. 

1920년 6월 평양의 연합부흥집회에는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3천 명을 수용하는 장대현교회당이 좁을 정도로 평양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그 같은 해 10월 서울의 승동교회에서 주변의 일곱 교회가 연합으로 부흥회를 열었는데 1만여 명이 참석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6.25때 북한에 남아 교회를 지키다가 순교하였다. 

하나님은 이처럼 사람을 통해서 일하신다.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셨다. 모세를 부르셔서 출애굽의 선봉에 서게 하셨고 계명과 율법의 말씀을 받아 전하게 하셨다. 여호수아를 앞장 세우셔서 요단 강을 건너고 여리고성을 점령하고 가나안의 일곱 족속을 물리치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셨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과 같은 갈릴리 호수 주변의 어부들을 일곱명이나 부르셔서 12제자들 중의 한 사람이 되게 하셨다. 주님의 은혜가 아닌가. 

이처럼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긍휼과 그 크신 사랑을 덧입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하시려는 일을 이루어 가신다. 


은혜로 인한 믿음.
은혜가 하나님의 영역이라면 믿음은 인간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겸손하게 응답하는 인간의 영역이다. 물론 인간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깨닫고 반응하는 것 그 자체가 또한 우리 각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은혜’가 아니면 우리 각 사람의 신앙생활을 해석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금주에 오실 강사 목사께서 이번 부흥회의 주제 성구를 ‘은혜 아니면’이라고 알려 왔다. 그래서 기대가 된다. 그렇지 않나. 지내온 세월들을 뒤돌아보면 은혜 아닌 것이 무엇이 있나. 그 어떤 경우에도 자랑으로 여기면 안 된다. 교만하면 안 된다. 내가 했다고, 내가 이루었다고, 내가 잘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하면 어리석고 오만한 것이다. 

물론 인간의 편에서 노력하고 수고하고 애쓰고 땀 흘리고 인내하고 포기 하지 않고 열심을 다해서 무엇을 이루고 성취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을 받고 새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덧입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예배하며 살아가게 된 이 구원의 은총은 전적인 주의 은혜일뿐이다.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나를 향하신 이러한 주의 그 크신 은혜와 사랑을 깨달아 알고 주를 경배하고 섬기며 이 복음을 증거하고 전파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찬송하지 않나.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예수 예수 귀한 예수 믿음 더욱 주소서”(542장 찬송)
“믿으면 되겠네 주 예수만 믿어서 그 은헤를 힘 입고 오직 주께 나가면 영원삶을 얻네 십자가에 달려서 예수 고난 당했네 나를 구원하실이 예수 밖에 없네”(544장 찬송)

맞다. 울어도, 힘써도, 참아도 안 될 일은 안 되고 못할 일은 못한다. 더군다나 우리가 주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이 진리는 그 얼마나 놀랍고 신비한 은혜의 선물인가.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일방적으로 주어진 복이요 선물이 아닌가. 

신앙생활은 믿음 생활이다. 나를 향하신, 우리 가정을 향하신, 우리 교회와 성도들을 향하신, 우리 민족을 향하신, 열방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와 언약과 인도하심을 믿고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고 나아가는 것이다. 그럴 때에 홍해가 갈라지고 요단강이 갈라지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고 심지 않은 포도와 감람과 무화과나무 열매를 풍성히 먹게 하시는 것이다. 파지 않은 우물의 물을 마시게 하시는 것이다. 짓지 않은 집에 살게 하시는 것이다. 4천 년 전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그랬고 3500년 전의 모세와 그 후의 여호수아와 갈렙이 그런 은혜를 의지하는 그런 믿음으로 살았다. 

어제 밤에 갑자기 미국 생활이 생각났다. 우리 가족 네 식구가 25년 전에 이민 가방 같은 것 몇 개 끌고 뉴욕 JFK 공항에 도착하였다. 1월 5일, 엄청나게 춥고 100년 만에 엄청나게 눈이 와서 쌓였다. 쪽지 하나 들고 김항우 집사란 분을 소개 받고 공중전화로 연결해서 필라델피아로 갔다. 그 분이 하얀색 밴에 우리 네 식구를 태우고 낯선 도시 펜실베니아의 벤살렘이란 곳에 자리 잡도록 안내해 주었다. 그렇게 시작해서 공부도 시작하고 일 년 후에는 37살에 벤살렘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다. 거기서 학위 공부도 마쳤고 초등학교 1학년 3학년 어렸던 애들도 나보다 더 큰 키로 컸다. 예배당도 건축하였다. 미국 생활 10년 세월이  강물처럼 흘러갔다. 돌아보면 믿음의 걸음을 내어 딛었던 은혜의 세월, 은혜의 시간들이었다. 

은혜로 인한 구원.
우리 다 같이 에베소서 2장 8절을 읽자.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렇다. 구원이란 나의 노력, 나의 수고, 나의 열심, 나의 열망, 나의 선행이나 공로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구원 받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이 택하신 것이다. 에녹을 택하시고 노아를 택하시고 아브라함과 사라를 택하시고  이삭과 리브가를 택하시고 야곱과 레아와 라헬과 그의 두 몸종들을 하나님이 택하여 쓰신 것이다. 

태어난 지 삼 개월 된 어린 모세를 나일강의 갈대 상자에서 바로 왕의 공주를 통해 건져 내신 것은 공주의 손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로 그렇게 하신 것이다. 나이 40에 애굽 사람을 쳐 죽인 모세지만 40년 후에 호렙산 떨기나무가 불붙는 것 같은 환상을 보게 하시는 그 현장에서 하나님이 은혜로 모세를 택하여 부르시고 쓰신 것이다. 

현재 합참의장인 박한기 장군은 신실한 기독교인이다. 내외가 열심히 주를 섬긴다. 그는 사관학교 출신이 아니다. 서울 시립대학교 건축학과에 다니면서 ROTC 훈련을 받고 임관하였다. 그는 지휘관 생활하며 병사들에게 감사 운동을 벌였다. 부모의 은혜를 수 백가지 수 천가지 적어 오게 하였다. 진심으로 그렇게 한 병사들을 선발하여 외박도 다녀 오게 하고 특별 휴가도 주었다. 병사들의 사기가 진작되고 진심으로 부모와 가정환경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자리 잡았다. 그의 집에는 다 자란 딸이 뇌성마비로 누워 있다. 그런 딸을 데리고 전방으로 30번도 넘게 이사 다니며 부대장으로 군생활을 하였다. 그를 겸손하게 하고 약한데서 강하게 하는 힘은 병약하게 평생 누워 지내는 사랑하는 딸로 인한 숙연함이었다. 

우린 행위로 구원받는 것 아니다. 자랑 할 것이 하나도 없다. 단지 감사할 뿐이다. 주의 자비하심으로, 주의 은혜의 풍성하심으로 구원을 받게 된 것이다. 마틴 루터 한 사람의 수사의 힘으로 어떻게 교황청을 향하여 반기를 들고 종교 개혁에 성공할 수 있었겠나. 하나님이 타락의 물고를 막고 새 일을 행하시려고 그 한 사람을 은혜의 손길로 붙들어 사용하신 것이다. 

구원 받은 자 답게 매사를 은혜로 해석하고 은혜로 받아들이고 은혜로 대하며 서로를 잘 섬기며 살아가는 중에 믿는 자의 수를 점점 더해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길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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