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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를 송축하라(시111:1-10) 2019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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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9-07-27 17:32 조회 10,369 댓글 0
 
                  여호와를 송축하라(시111:1-10)          2019. 7. 21


우리 말 성경의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라는 원어 표현은 “여호와께 찬양하리로다”이다. 시편 기자는 정직한 사람들의 모임과 회중 가운데서 “전심으로 여호와께 찬양하리로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께 찬송하게 되지 않나. 인생은 누구나 다 질그릇과 같다. 그러므로 고린도 후서 4장 7절에 고백한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다” 여기서 말씀하는 보배란 사망을 이기는 예수의 생명을 말씀하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들을 계획하고 시행하시는 분이시다. 열왕기상 18장 27절 이하에 보면 갈멜산 정상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하던 엘리야가 바알 숭배자들을 조롱하였다. 아침부터 정오가 되도록 한 나절을 ‘바알이여. 바알이여.’ 불러도 응답이 없자 엘리야가 저들을 조롱한 것이다. “ 큰 소리로 불러 봐라. 너희가 믿는 바알이 신이라면 묵상하고 있는지 잠깐 어디를 나갔는지 혹은 어느 길을 가고 있는지 혹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하는지 더 큰 소리로 불러 봐라” 바알 숭배자들은 거 큰 소리로 바알을 부르며 칼과 창으로 몸을 해하면서까지 미친 듯이 떠들었으나 아무 응답이 없었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송축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은 언제까지나 침묵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2, 3, 6, 7절 말씀처럼 언제나 “행하시는 일들”이 있으시다. 여호와 하나님의 행하시는 그 일들은 크고 존귀하고 엄위가 있고 능력이 있으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진실과 정의로 행하신다. 여호와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들은 기적들이며 은혜롭고 자비롭게 행하신다. 여호와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들은 영원히 찬양 받으실 이유가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가 언제 하나님의 감동으로 지었는지 알 수 없는 이 시편 111편을 유월절이나 칠칠절이나 장막절과 같은 절기의 예배 때에 주로 고백하고는 하였다. 

시편 기자는 스스로 정직한 자들의 모임 가운데 있을 때에나 많은 회중들 가운데 있을 때에나 언제나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송축하리로다.” 라고 고백하고 있다. 여기 ‘정직한 자들의 모임’이란 두 셋이 모인 적은 모임 중에서라도 여호와를 높이고 여호와께 감사하며 여호와를 송축하는 것을 말한다. 뿐만 아니라 많은 회중들 가운데서도 늘 하나님을 송축하며 살겠다는 다짐이며 고백이며 선언인 것이다. 

이는 언제 어디서나 여호와께 감사하고 여호와께 송축하며 살겠다는 신앙의 고백이다. 이런 말씀들을 대할 때면 나는 어떤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날 지라도 전천후 감사와 전천후 찬송이 가능한 믿음 생활을 할 수 있겠는가.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을 다하여 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송축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전심’으로 라는 말은 ‘심장’을 다하여 라는 의미이다.


큰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송축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들이 크시기 때문이다. 생각하여 보라.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 가운데서 노아와 그의 여덟 가족들을 방주 속에 들어가게 하셔서 구원하신 일이 크신 일이 아닌가. 그 방주 안에 각종 새와 동물들과 기어 다니는 것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땅과 하늘에 살아 있는 것들을 구별하여 쌍쌍이 방주 안에 들어가게 하셨다. 홍수 후에 저들을 방주 밖으로 나오게 하셔서 다시 홍수 심판 후에 이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이 모든 일들이 여호와께서 행하신 크고 놀라운 일이 아닌가.

여호와께서 행하신 크신 일들이란 출애굽이 그러하고 광야 사십년이 그러하고 가나안을 정복하여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섬긴 모든 날들이 그러하다. 광야 생활 사십년 내내 성막을 건축하게 하셔서 성막 중심, 법궤 중심의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신 그 모든 일들이 여호와께서 행하신 크신 일들이다. 

하나님이 행하신 크신 일이 아니었다면 감히 어떻게 바로 임금의 학대로부터 출애굽이 가능하였겠는가. 어떻게 홍해를 육지처럼 건널 수 있었겠는가. 어떻게 광야 사십년 동안 마실 물과 먹을 만나를 해결할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이 행하신 크신 일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메추라기로 배 불리고 어떻게 사십년 동안 신발이 해지지 않는 기적 가운데 살아갈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이 행하신 크신 일들로 하면 성경의 크고 작은 모든 일들과 사건들이 하나님 안에서의 기적이요 간증이요 은혜와 도우심이 아닐 수 없다. 지난 이천년 교회의 역사 속에 행하신 여호와의 모든 일들이 크고 놀라운 일들이 아닐 수 없다. 

우상 숭배와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바벨론에 끌려갔던 예루살렘 성민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칠십년 후에 그 참담하고 암담한 바벨론의 포로 생활에서 다시 선조의 땅으로, 예루살렘 성으로 되돌아 갈 수 있었겠는가. 어떻게 무너져 폐허가 되었던 솔로몬의 성전 터에 스룹바벨 성전을 재건 할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의 도우심과 크신 일들이 아니면 어떻게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를 믿는 주의 백성들을 죄와 악에서 구원하실 수 있었겠는가. 

이번 목요일이 6월 25일이다. 1950년에 우리나라에 6. 25 전쟁이 일어난 지 69년 세월이 흘러갔다. 요즘도 어느 산중에서는 6.25 전쟁 중에 전사한 국군과 유엔군의 시체를 발굴해 내고 있다. 전쟁은 두렵고 비참한 것이다. 6.25때 죽은 우리 국군과 유엔군과 경찰의 수가 226,000명이 넘는다. 북한군 60만 명 이상이 죽었다. 중공군도 174,000명 이상이 죽었다. 중공군의 인해 전술 때에 모택동의 아들도 죽었고 시체도 못 찾아 갔다. 민간인 373,000명 이상이 죽거나 학살당하였다. 민간인 303,212명은 행방불명 상태로 생사를 알지 못하고 69년 세월이 흘러갔다. 

생각하여 보라. 그 참담한 전쟁을 겪으며 죽은 자와 산 자들 가운데 내가 살아남아 죽은 부모형제자매로 인한 슬픔을 가슴에 묻고 폐허의 땅에서 여기까지 나라를 발전시키며 살아 온 것이 내가 한 일인가. 누가 한 일인가.

여호와께서 이 민족을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 가운데 행하신 크신 일들이 아닌가. 우리가 북녘의 불쌍한 형제자매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내용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저들 가운데서 큰일을 행하지 아니하신다면 TV의 화면 앞에서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고모부라도 죽이고 친형이라도 독살해 죽이는 무시무시한 김일성 삼대 세습체제의 살벌한 통치를 감히 그 어떤 누가 맞서서 이겨 낼 수가 있단 말인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이 아니라면 그 일이 큰일이든 적은 일이든 내가 내 삶을 스스로 어떻게 해 갈 수 있는가. 내가 내 건강, 내 생명, 나의 죽고 사는 그 모든 범사를 내가 주인 되어 나를 어떻게 할 수 있는가. 물론 내가 나를 삼가고 절제하고 조심하며 겸손하고 신중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 맞다. 그러나 생각하여 보라. 우리의 생각과 앉고 서고 들고 나는 그 모든 범사에 하나님의 돌보심과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들이” 아니라면 내가 스스로 나의 주인이 되어 살 수 있는가. 내가 잠자리에 들었다고 아침에 스스로 깨어 일어 날 수 있는가. 하루의 내 생명, 한 순간의 내 생명이 나의 것인가. 

욥은 욥기 42장 2절 이하에 보면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42:2-5)라고 고백하였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서 한 평생을 살아가면서 겪는 희노애락(喜怒哀樂)의 그 모든 일들 가운데 하나님이 내 안에서 하시는 일이 아닌 일이 그 어느 것 한 가지라도 있단 말인가.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교 문리과 대학 건물 정면에 시편 111편 2절 말씀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우리가 읽던 예전 성경인 ‘개역 한글’에서는 

“여호와의 행사가 크시니 
이를 즐거워하는 자가 다 연구하는도다.”

라고 번역하였다. NIV에 보니까

“Great are the works of the LORD; 
they are pondered by all who delight in them.”

라고 하였다. ‘ponder’라는 말은 ‘깊이 생각한다. 심사숙고한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가만히 생각하고 심사숙고 하며 연구하고 뒤돌아보면 내 안에, 그리고 우리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그 모든 일들이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크신 일이 아닌 것이 무엇이 있는가. 

하나님 안에서는 참새 한 마리의 목숨도 귀하고, 하나님 안에서는 들에 피고 지는 들풀과 백합화 한 송이도 모두 다 귀한 것들이니 말이다. 

3절부터 이어지는 감사와 송축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은 존귀(尊貴)하고 엄위(嚴威)하시다.
하나님의 의(義)는 영원히 서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기적(奇蹟)을 사람들이 기억하게 하셨다. 
여호와는 은혜(恩惠)로우시고 자비(慈悲)로우시다.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敬畏)하는 자들에게 양식(糧食)을 주신다.
여호와는 그의 언약(言約)을 영원히 기억하신다.
여호와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뭇 나라의 기업(基業)을 주신다.
여호와는 여호와가 행하시는 일의 능력(能力)을 그들에게 알리신다.
여호와께서 하시는 그의 손의 일들은 진실(眞實)하고 정의(正義)롭다.
여호와의 법도(法道)는 다 확실(確實)하다.
여호와는 여호와의 일을 영원무궁토록 정하셔서 진실(眞實)과 정의(正義)로 행하신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백성을 속량(贖良)하신다.
여호와는 그의 언약(言約)을 영원(永遠)히 세우신다.
여호와의 이름은 거룩하고 지존(至尊)하시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知慧)의 근본이다.
여호와의 계명(誡命)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知覺)을 가진 자이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찬양(讚揚)하는 일은 영원히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생각하여 보라. 하나님은 시편 기자를 통해서 시편 111편의 10절로 되어 있는 길지 않은 고백과 감사와 송축할 내용 중에 이처럼 다양한 주제들을 언급하고 고백하게 하셨다. 

우리의 찬송 중에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라는 표현이 있다. 생각하여 보라. 그렇지 않나. 여기 시편 111편에서 고백하는 시편 기자가 하나님을 높이고 송축하는 그 모든 내용 중에 우리가 못마땅하게 여기며 거부할 내용이 단 한 가지라도 있는가.


진실과 정의로 행하시는 여호와.
그 중에서 7절과 8절에 반복되어 고백된 주제를 보자. “그의 손의 하는 일은 진실과 정의이다.”, 여호와의 법도는 다 확실할 뿐만 아니라 영원무궁토록 정하신 바이다. 그러므로 여호와는 여호와의 법도를 “진실과 정의로 행하신다."

이 반복되는 내용의 강조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시라고 고백하고 있는가. 여호와 하나님은 진실하신 분이시며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정의롭고 공의롭게 행하신다. 우리가 요즘 읽는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정의’라고 번역하였는데 이전에 보던 성경인 ‘개역한글’성경에서는 ‘공의’라고 번역하였다. 맞다. 하나님은 진실하시며 공의와 정의로 행하시는 전능자이시다. 

사탄은 거짓되고 불의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진실하고 정의로우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노아 시대의 백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얼마나 진실하고 얼마나 정의로운 여호와이신가를 홍수 심판으로 보여 주셨다. 

하나님은 애굽의 바로 왕의 학정으로부터 고통 가운데 부르짖으며 여호와의 도우심과 구원을 간청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진실하심과 의로우심을 보여 주셨다.

하나님은 아무리 택한 주의 백성들이실지라도 여호와의 진실과 정의에서 멀어진 백성들에게는 바벨론의 포로 생활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징계의 막대기와 심판의 가시 채가 얼마나 무섭고 두렵고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절절이 체험하며 회개하고 돌이키게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하나님을 떠날 때의 하나님의 징계와 고통을 기억하는 민족으로 돌이켜 진심으로 회개한 백성들로 살아가길 기대하신다. 

하나님께로 돌아 올 때의 은혜와 감격을 체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처럼 시편 111편과 같은 내용의 고백을 통해서 유월절과 칠칠절과 장막절과 같은 절기를 맞을 때마다 여호와를 높이고 송축하는 고백하였다. 

하나님은 이처럼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 것인가를 시인하고 여호와께 감사하고 여호와를 송축하는 일이 계속되길 기대하신 것이다.


그의 백성을 속량(贖良)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행하신 크신 일들 중에 가장 크신 일은 그의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신 일이다. 이것을 9절에서는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속량하시며”라고 선언하였다. 

여호와의 언약의 극치는 예수 그리스도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언약을 영원히 세우신다.
왜 여호와를 경외하며 살아가야 하는가.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다.

9절의 ‘속량’이란 ‘페두트’(פדות/peduth)인데 이는 ‘구별, 구출, 구원, 속전, 구속’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구출하였는가. 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벨론의 포로 생활에서 건저 주셨는가. 누가 이 땅의 죄와 악에 빠진 백성들 가운데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과 구원의 감격을 누리게 하셨는가. 

맞다. 여호와 하나님은 속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

여호와의 계명(誡命)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知覺)을 가진 자이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찬양(讚揚)하는 일은 영원히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죄 사함 받고, 구원 받은 천국 백성이 되게 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픔과 눈물과 슬픔과 사망의 그늘에 앉은 천하 만민들 중에서 우리 각 사람을 택하여 지명해 불러 내셔서 영원히 여호와 하나님을 송축하게 하셨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이며 감격인가.

시편 111편의 3, 5, 8, 9, 10절에 보면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하여,

‘영원히
영원히
영원무궁토록
영원히
영원히’ 

라고 반복해서 송축하고 있다. 맞다. 이 유한(有限)한 세상 중에 우리에게 영원(永遠)을 깨닫게 해 주시고 영원을 선물해 주시며 영원히 찬양 받으실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뿐이시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고백한 것이다. 
“할렐루야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여호와를 찬양하는 일을 멈추지 않고 영원히 계속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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