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로 돌아오라(렘4:1-6) 2019. 5. 19
우리 가운데 일제 시대를 겪은 분들은 나라의 주권을 잃어 버린 슬픔과 수난의 아픈 역사를 생생하게 기억할 것이다. 6.25의 전쟁을 겪은 분들은 전쟁의 참상을 뼈에 저리도록 알 것이다. 이스라엘의 남북 왕조 중에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망한 것과 남 왕국 유다가 바벨론에 망한 이유가 무엇인가. 군대가 없어서인가. 칼과 창과 방패가 부족해서인가. 아니다. 성경은 우상 숭배에 빠져 살면서 하나님을 떠난 죄에 대한 심판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당장 담배를 끊지 않으면 6개월 이상 살기 어려울 것이다. 호흡기 질환 전문의사로부터 이런 경고의 말을 듣고도 여전히 하루에 담배를 두 갑씩 피울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혹은 당장 술을 끊지 않으면 3개월 내로 간의 기능이 마비되고 죽을 수도 있다. 이런 경고의 진단을 받고도 날마다 소주 몇 병씩을 퍼 마실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담배 중독, 알코올 중독 상태에 빠지면 별 분별력이 없이 습관적으로 줄담배를 피우게 되고 술독에 빠져서 살아가듯이 지내고 만다. 악의 악순환이란 것이 그런 것이다.
잘못 살아가고 있는 것을 알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숨어 살 듯이 숨을 조이며 살아가는 누군가가 있다고 상상해 보자. 지금의 자신의 실상이 가족들이나 세상에 알려질까 봐 불안해하며 전전긍긍하며 살아가는 어떤 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세상에 자기 자신의 숨겨진 불의한 사생활이 알려지면 사람들이 자신을 비난하며 돌을 들고 죽일 듯이 달려들어 지탄할 것이 분명하다. 만약에 범죄 사실이 들어나 법정에 서는 날에는 최소한 10년 형 이상의 형을 받고 죄수옷을 입고 교도소에 갇혀 지낼 것이다. 그런데도 설마 하는 심정으로 악을 반복하며 지내고 있다면 그 사람은 얼마나 어리석은 자인가.
예레미야(Jeremiah, BC650-570, 활동 627-586)는 “여호와께서 높이신다.”는 뜻이다. 예레미야 4장의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나뉜 후에 북 왕국 이스라엘이 이미 앗수르의 침략을 받아 주전 722년에 망했다. 세계 역사란 것이 나라마다 민족마다 흥망성쇠가 있지만 북 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의 원인은 우상 숭배였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바위 아래서 빌고 나무 밑에서 빌면서 풍요의 신인 바알과 앗세라를 신이라고 여기며 섬긴 죄 값으로 망한 것이다. 하나님 이외에 더 가치 있게 여기며 더 사랑하고 더 아끼고 더 소중하게 여기며 더 섬기는 그 모든 것이 우상숭배이다.
앗수르가 이스라엘보다 강해서 이스라엘이 망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북 왕국 이스라엘을 앗수르의 손에 맡겨서 징벌하신 결과로 망한 것이다. 그런 역사적인 교훈을 잘 알고 있는 남 왕국 유다 백성들인데도 북 왕국이 망한 길을 그대로 따라 답습하듯이 우상 숭배에 젖어 살고 있었다.
세월은 한 해 한 해 흘러가고 남 유다의 백성들조차도 정신을 못 차리고 회개하지 못하고 여전히 하나님을 버리고 떠난 상태로 지내고 있었다. 왕이든 방백이든 심지어는 제사장들이나 선지자들 중에도 적지 않은 이들이 하나님을 떠나가고 멀리하고 등지고 지냈다. 그런 시대 상황에서 하나님의 보냄을 받고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선포한 선지지가 예레미야이다.
족장 아브라함으로 시작된 부르심을 따라서 언약 민족으로 자라난 것이 이스라엘이다. 적지 않은 세월이 흘러갔고 아브라함의 7대 손인 모세 때에 430년의 애굽 종살이에서 벗어나서 출애굽한 민족이 이스라엘이 아닌가. 40년 광야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에 입성하는데 성공한 것은 지도자 여호수아를 앞 장 세우신 하나님의 작품이셨다. 홍해를 육지처럼 건넌 것이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이듯이 요단강을 다시 육지 건너듯이 건너서 가나안의 일곱 족속을 쳐서 이기고 가나안 시대가 전개되고 사사 시대를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 돌아보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
하나님은 사사 중에 기드온과 같은 인물을 돋보이게 붙들어 사용하셨다. 사사 시대 말기에 사무엘을 사사요 선지자로 택하여 쓰신 분도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하여 사울 왕을 기름 부어 세우시고 다윗 왕을 기름 부어 쓰셨다. 다윗의 그 많은 아들들인 왕자들 중에서 솔로몬을 대를 잇는 왕으로 택하신 분도 하나님이셨다.
지난 5월 11일부터 예레미야서를 날마다 일정하게 묵상하고 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오늘 분량의 묵상 내용이다. 예레미야는 이미 북 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의 침략을 받아 망한 후에 불안정하던 국제 정세 가운데서 사면초가와 같은 형편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발버둥 치던 남 왕국 유다에서 활동을 시작한 선지자이다. 남 왕국 유다의 20명의 왕들 중에서 19명은 다윗의 직계 후손들이다. 7대 왕으로 6년간 남 왕국을 통치한 유일한 여왕 아달랴를 빼고는 모두가 다 다윗의 직계 후손들이다.
예레미야는 남 왕국이 시드기야 왕의 통치 11년차인 주전 586년에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의 군대에 의해서 멸망하기 까지 40여 년 동안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받아서 증거한 선지자이다.
우상 숭배에 젖어 살던 당시의 유다 백성들의 실상은 왕으로부터 제사장과 선지자들까지 모두 다 영적으로 타락하고 변질되어 있었다.
성경을 찾아보자. 예레미야 2장 8절에 보면, 제사장들은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하고 패역한 말을 할 정도였다. 율법을 다루는 율법학자들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어떤 분이신지 알지도 못하는 영적 무지의 상태였다. 나라를 통치하는 관리들은 하나님께 반역하였다.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무익한 것들을 따르고 있었다.
하나님이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되나. 예레미야 선지자 당시에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 정의와 공의로 띠 띠고 살아가는 백성들을 찾아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온 유대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하나님을 등지고 멀리 떠난 상태였다. 다윗의 직계 손들로 왕의 권력을 이어가던 남 왕국이 유다인데 그런 지경이 되고 만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던 다윗, 그 많은 시편의 기록을 통해서 구구 절절이 하나님을 높이고 송축하고 경배하고 따르길 원했던 다윗의 신앙이 자손들을 통해서 왕위는 계승되었으나 하나님을 등지고 멀리하고 타락한 왕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남 유다는 솔로몬의 통치 40년을 끝으로 남북으로 분단된 북 왕국 이스라엘과 더불어 예루살렘 주변의 적은 면적의 땅에서 왕국의 명맥을 유지하던 상태였다. 주전 931년에 시작해서 주전 586년에 남 왕국의 역사가 바벨론의 침략 앞에 사라지지까지 345년 동안 왕국의 명맥을 유지하다가 끝났다.
우리가 기억하는 바벨론 포로 70년 생활을 마친 유다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돌아가서 울며 감격하며 무너진 솔로몬의 성전을 다시 쌓을 수 있었던 것은 꿈과 같은 역사의 장면들이었다. 그 유명한 시편 126편은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벗어나서 예루살렘에 다시 돌아 갈 수 있었던 유다 백성들이 감격하여 부른 노래이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유다 백성들의 삶의 중심이었던 예루살렘에 바벨론의 군대가 쳐들어가고 솔로몬의 성전이 무너지고 불타고 유능한 젊은이들이 쇠사슬에 묶여서 바벨론으로 포로 신세가 되어 끌려가고 하던 때를 생각하면 빼앗겼던 땅에 다시 되 돌아오고 무너진 솔로몬 성전 터에 스룹바벨 성전을 다시 재건 할 수 있었던 것은 감격스러운 순간들이었다.
오늘 묵상하는 예레미야 4장의 배경은 나라가 점점 쇠약해져 가고 멸망의 조짐이 깊어 가던 때에 우상 숭배를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안타깝게 경고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시다. 1절에
“이스라엘아 너희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
하고 말씀하셨다. 우상 앞으로 돌아가지 말고 살아계신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라는 초청이시다.
그처럼 하나님을 떠나 우상 숭배에 깊이 빠져 살던 유다 백성들을 향하여 심판을 경고하신 말씀이 본문으로 읽은 예레미야 4장 7절 이하에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7절에 “사자가 그 수풀에서 올라 왔으니 나라들을 멸하는 자가 나아 왔으며 네 땅을 황폐하게 하려고 이미 그의 처소를 떠났은즉”이 말씀에 무슨 해석이 더 필요한가. 여기서 말씀하는 수풀에서 올라온 사자란 훗날 유다를 침략해서 멸망시킨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을 비유로 예언한 말씀이시다.
우리가 아는 대로 남 유다는 주전 586년에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의 군대의 침략을 받고 완전히 멸망하였다. 8절에 보면, “이로 말미암아 너희는 굵은 베를 두르고 애곡하라.”고 회개를 촉구하셨다. 9절에 보면, 전쟁과 침략으로 인한 재앙의 날이 다가 오면 왕과 지도자들이 낙심하게 될 것이며 제사장들은 놀라 것이고 선지자들은 깜짝 놀라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생각하여 보라. 이 말씀의 내용을 2600년 전에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유다 백성들의 멸망을 예언한 것일 뿐이지 오늘 날 나와 혹은 나의 가정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말씀이라고 여기면 안 된다.
하나님은 장차 더 이상 참아 주실 수 없는 진노와 재앙으로 인한 심판을 경고하시면서 예레미야 4장 1절에서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고 촉구하고 계시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을 ‘내게로 돌아오라.’고 정한 것이다.
자, 그러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이란 무엇일까.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일까.
우선,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 가증한 것을 버려야 한다.
그 후에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이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다시는 우상 숭배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또한, 진실과 정의와 공의로 여호와의 삶을 두고 맹세하여야 한다.
여기서 말씀하는 ‘진실’, ‘정의’, ‘공의’라는 말씀은 하나님 앞에서 거리낌이나 거짓이 없이 전심으로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하는 마음의 상태를 말씀하는 것이다. ‘진실’과 ‘정의’와 ‘공의’에 바탕을 둔 맹세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 앞에서 겉과 속이 달라서는 안 된다.
십계명의 1-4 계명이 무엇인가.
첫째,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둘째,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셋째,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넷째,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그런데 예레미야 선지자 당시의 유다 백성들이 이 모든 계명들 중에서 그 어느 하나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상태로 하나님을 등지고 멀리 떠난 상태였다.
여러분은 어떤가.
혹시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고 말은 하면서 다른 신들을 섬기고 있지는 않은가. 우상 숭배하고 있는 구체적인 증거는 없는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고 있지는 않은가. 안식일 즉 오늘 날 주일을 잘 지키고 있는가.
주일 날 애들 데리고 놀러 다니지는 않는가.
주일 날 가족 여행 다니고 있진 않는가.
주일 날 결혼식에 찾아다니고 칠순 팔순 잔치 집에 찾아다니느라 주일 지키는 일을 별로 소중하게 여기지 않은 적은 없는가. 장사한다고, 사업 한다고, 사업차 손님 맞는다고 주일을 빼 먹고 세상에서 분주하게 다니고 있지는 않는가. 시간, 재물, 인간관계, 사업, 상업, 직장에 별의 별 것에 다 매여서 우상 숭배하듯이 점점 하나님을 멀리 하고 있지는 않은가. 안식일 신앙, 주일 신앙이 무엇인가. 있어야 할 시간에 있어야할 장소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예배자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어쩌다 교회에 와서 그럴싸하게 회개 기도하는 척하고 다시 세상으로 분주하게 쏘다니지는 않는가.
모세 때에 하나님은 모세와 그 형 아론을 애굽 왕 바로에게 보내셨다. 종살이하던 모세의 동족들을 풀어 놓아 달라고 요청하게 하실 때에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하게 하신 말씀의 내용이 무엇인가. 출애굽기 4장 22-23절에 보면 하나님은 모세의 손에 지팡이 하나만 잡게 하고 나귀에 아내와 두 아들들을 태우고 애굽을 향하게 하셨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 이것이다.
“이스라엘은 내 아들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보내 주어 나를 섬기게 하라.”
이것이 무슨 말씀인가.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이끌어 내려 하신다고 말씀하셨나.
출애굽기 5장 1절에 보면 애굽에 도착해서 바로 왕을 만난 모세가 이렇게 말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리하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알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맞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장자처럼 여기신 이유는 저들로 가나안에 들어가서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라고 보내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민족, 하나님 앞에 절기를 잘 지키는 예배 민족으로 삼으시려는 목적이었다. 그렇다. 예배가 기본이다. 예배가 무너지고 예배가 사라지고 예배 생활이 게을러지고 예배드리는 일이 등한해지고 예배드리는 일이 귀찮아지거나 지루해 지는 것은 내 신앙생활이 병들어 가는 증거이다.
내 몸 안에 오장 육부 중에서 어느 부위가 병들고 나면 날마다 달게 먹고 마시던 음식들이 메스껍고 토할 것 같아서 먹을 수 없는 것과 똑 같은 원리이다. 음식이 문제가 아니가 내가 병들면 그 어떤 산해진미의 맛있고 귀한 음식이라고 입에 받질 않고 식도로 넘길 수가 없게 되고 만다.
예레미야 선지자 당시에 왕과 방백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조차 모두 다 한 결 같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었다. 예레미야서의 내용을 통해서 오늘 날을 살아가는 나 자신을 진단 할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열왕기 하 23장 후반부에 보면 요시야 왕이 죽은 후에 여호아하스가 23살에 왕이 되었다. 그런데 여호아하스는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왕이었다. 애굽의 바로 느고 왕이 쳐들어 와서 여호아하스 왕을 하맛 땅 립나에 가두었다. 애굽왕 바로 느고는 죽은 요시아 왕을 대신하여 왕자들 중에서 엘리야김을 여호야김이라고 이름을 고쳐서 왕위에 앉게 하였다. 그리고는 립나에 가두어 두었던 여호아하스 왕을 애굽으로 잡아 가 버렸다. 이는 여호아하스 왕이 왕위에 오른 지 석 달 만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25살에 왕이된 여호야김은 11년 동안 예루살렘에서 유다를 다스렸다. 그러나 그의 통치와 행실 또한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다. 그렇게 시작해서 여호야긴 3개월, 시드기야 11년의 남 유다 마지막 통치 기간 내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이 계속되었다. 성경을 한 번 찾아보자. 열왕기 하 23장 32절, “여호아하스가 그의 조상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니”라고 하였다. 열왕기하 23장 37절에, “여호야김이 그의 조상들이 행한 모든 일을 따라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고 하였다. 열왕기하 24장 9절에 “여호야긴이 그의 아버지의 모든 행위를 따라서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고 하였다. 마지막 왕인 스드기야는 어땠나. 열왕기하 24장 19절에 “그(시드기야)가 여호야김의 모든 행위를 따라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지라.”
남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21살에 왕위에 올랐으나 11년간 통치하고 바벨론에 끌려갔다. 일년 반 가까이 예루살렘 성 밖에 토성을 쌓은 바벨론 군대로 인해서 성 안에 큰 기근이 계속되었다. 성 안에서 먹을 양식이 다 떨어졌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성벽이 파괴되기 시작하였다. 예루살렘 성을 지키던 남 유다의 군대가 한 밤중에 성벽 사이의 왕의 동산 곁문 길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시드기야 왕이 예루살렘 성을 빠져 나와 밤 중에 여리고 평지로 도망하다가 바벨론의 군대에 붙잡히고 말았다.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가야가 립나 지역에 주둔하던 바베론의 왕 느브갓네살 앞으로 끌려 갔다.
33살이던 시드기야 왕이 보는 앞에서 바벨론의 군사들이 왕자들을 죽였다. 시드기야 왕의 두 눈을 빼고 놋사슬로 결박해서 바벨론으로 끌고 갔다.(왕하 25:7) 예루살렘 성전은 불탔고 귀한 것들을 바벨론의 군대가 모조리 휩쓸어서 자기들의 나라로 집어 가 버렸다. 대제사장, 부제사장, 성전 문지기를 비롯하여 백성들이 수 없이 붙잡혀 결박된 채로 바벨론으로 끌려가기 시작하였다. 예루살렘과 유다는 초토화가 되고 말았다.
예레미야 4장의 본문은 그런 두렵고 떨리는 역사적인 패망을 겪기 40년 전부터 회개를 촉구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백성, 돌아오는 민족이 되라고 말씀하시던 하나님의 말씀이시다.
개인이든, 가정이든, 기업이든, 국가이든 누가 망하는 걸 원하겠나. 살다 보면 망하기도 하고 죽기도 하고 그게 아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바는 생사화복과 흥망성쇠의 배후에는 살고 죽고 화와 복을 받고 쇠하고 망하거나 흥하고 번성하게 되는 그 배후에 하나님의 섭리과 간섭이 분명하게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는 말씀들로 가득하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로 돌아간 인생답게 살 수 있는 것일까. 3-6절까지에 보면 크게 세 가지를 강조하셨다.
너희 묵은땅을 갈라.
묵은 땅을 갈라는 말씀이 무엇인가. 아무리 좋은 토양의 기름진 땅이라도 방치하고 내 버려두면 가시덤불이 뒤 덥게 마련이다. 3절에서 말씀하시는 가시덤불이란 우상 숭배를 상징하는 표현이다. 그 가시덤불을 거두어 내고 돌 짝밭을 개간해서 묵은 땅을 좋은 땅으로 갈아 업고 개간하지 않으면 풍성한 결실을 맺을 수가 없는 법이다. 내 묵은 땅을 갈아 업고 걸음을 골고루 주고 좋은 씨앗을 심어 가꿀 때에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햇볕을 받아서 풍성한 오곡백과를 농사하게 되는 법이다.
“농자천하지대본”이란 말이 있지 않나. 농사란 것이 논밭에서 일하는 농부의 농사이든 바다에서 일하는 어부의 일이든 수고하고 애쓰지 않고 저절로 열매를 거두는 법이 있나. 묵은 땅이 되지 않도록 갈아 업고 땀 흘려 수고하고 심고 가꾸지 않았는데 저절로 풍성한 열매를 거두는 경우가 있나.
3절에서 말씀하는 ‘묵은 땅’이란 우상 숭배하는 상태를 말씀한다. ‘가시덤불’이란 우상숭배로 인한 온갖 종류의 죄악들을 말씀하는 것이다.
올 한해, 앞으로 평생토록 부지런히 내 안에 일어나는 우상 숭배로 치달으려하는 묵은 땅을 갈아엎고 새 땅, 좋은 땅 심령으로 가꾸어 나아가야 할 것이다. 내 마음의 밭에서 가시덤불이 자리 잡지 못하도록 하는 부지런하고 지혜로운 농부의 삶을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그래야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와 같은 풍성한 은혜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부지런히 갈아 업고 가꾸지 않으면 잡초가 무성하고 가시덤불이 덮치는 폐허가 되고 만다.
인구 60만명의 룩셈브르크는 개인 소득이 11만 불이 넘는다. 세계 최고이다. 스위스는 8만 4천불이다. 그 뒤를 잇는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아일랜드, 덴마크 같은 나라도 6만 불 이상의 국민 소득을 자랑한다. 저들은 모두가 다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을 파헤치듯이 살아서 국가를 부강하게 건설한 나라들이다.
한 국가가 그러하듯이 개인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하고 삶의 구체적인 원리로 적용해서 내 마음의 묵은 땅을 갈아 업고 우상숭배로 인한 죄와 악의 가시덤불의 뿌리를 뽑아내는 영적 노력을 계속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도우시는 주의 은혜를 겸손하게 의지할 줄 알아야 한다. 내가 하려 하면 않된다. 내가 스스로 서려 하면 넘어지고 만다. 주께서 나를 붙들어 주셔야 한다. 주께서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야 한다.
어제 이른 아침부터 몇몇 교우들과 함께 고추와 오이와 가지와 상추 모를 잔뜩 심었다. 그 동안 얼마나 가물었었는데 때를 맞추어 지난밤부터 단비가 내리기 시작하니 얼마나 좋고 기쁜지 모른다. 농사는 이 맛에 하는 것이다. 자식 농사, 인생 농사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농부이시다. 예수님은 포도나무 줄기이시다. 우리는 포도나무 줄기에 붙어사는 가지일 뿐이다. 가지는 줄기에 꼭 붙어서 살아가면 풍성한 극상품 포도 열매를 맺게 마련이다. 올해도 각 사람이 내 마음 밭의 가시덤불을 제거하고 묵은 땅을 부지런히 갈아 업고 좋은 씨앗을 심고 가꾸어서 풍성한 열매를 맺는 한해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너희 마음가죽을 베라.
할례는 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대인의 특징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육체의 할례만 자랑하지 말고 마음의 가죽을 베라고 촉구하셨다. 마음 가죽을 베란 말씀이 무엇일까.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는 말씀은 우상숭배를 계속하는 죄와 악으로부터 자신을 베어 내라는 결단과 변화의 촉구가 아닌가. 늘 망설이며 주저 주저 하며 우상 숭배와 세상 낙에 젖어 살고 빠져 살지 말고 칼로 생식기의 표피를 베어 내듯이 피를 보는 결단을 하고 돌이켜 마음 가죽을 베어 내고 심령으로 변화를 받아 새로운 삶을 살아가라는 변화의 촉구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2장 29절에서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라고 말하였다. 맞다. 할례라는 것이 마음의 할례가 되지 않으면 마치 몸에 문신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대하시는 것은 마음의 할례이지 몸의 할례가 아니시다. 4절에 보면 “마음 가죽을 베고 여호와께 속하라.”고 하였다. 그렇지 않나. 이렇게 주일 예배 드리고 세상에 나아가서 일주일 내내 세상에 속하다가 잠시 교회에 찾아 와서 잠시‘주여 주여’ 하다가 다시 세상에 나가서 세상을 짝하며 온갖 눈에 보이는 현란한 유혹 앞에서 별의 별 우상 숭배에 마음을 빼앗기고 사는 일상을 반복한다면 어찌 그 생활이 마음가죽을 베어 내고 여호와 하나님께 속한 믿음 생활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이런 신앙 태도로 살아가야만 마음 가죽을 베는 나날의 신앙이 될 것이다. 할렐루야
모여서 견고한 성 시온으로 들어가라.
5절에 ‘선포’하고 ‘공포’한다는 표현은 대단히 긴박한 상황을 느끼게 한다. 맞다. 불자동차가 달려 갈 때에나 앰뷸런스가 달려 갈 때에 큰 경적 소리를 내지 않나. “이 땅에서 나팔을 불라”, “크게 외치라”는 말씀은 시대의 상황이 매우 급한 것을 알게 해 준다.
만약 내 집에 불이 나고 내 가족이 앰뷸런스에 실려 병원을 향하는 처지가되었다고 가정해 보라. 긴급해지고 다급해지지 않나. 지금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유다에 선포하고 예루살렘에 공포하라고 하셨다. 그 내용이 무엇인가. 나팔을 불고 크게 외쳐서 “너희는 모이라. 우리가 견고한 성으로 들어가자고 하라. 시온인 예루살렘을 향하여 깃발을 세우라. 그 곳으로 도피하라. 지체하지 말고 급하게 도피하라.”왜냐하면 남 유대와 예루살렘을 심판하실 하나님께서 “북방에서 재난과 큰 멸망을 가져오리라”고 경고하고 계시다.
마치 우리나라가 처한 북한의 핵 문제와 같다. 북한 정권이 미국을 상대로 하며 남한을 우습게 대하며 세계 열방 앞에서 대단히 호전적인 태도를 갖고 강대국들을 위협하려 하고 강대국들을 상대하여 무력에 의한 힘을 과시하려는 것과 같다. 그 배후에 이 시대에 우리에게 경고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오늘 밤에 내게 죽음이 찾아온다면 나의 남은 하루를 어떻게 살아갈까.
예수의 비유 말씀이 그렇지 않나. 농사 잘 된 부자가 여러 해 먹고 마실 것을 창고를 늘려 쌓아 놓고 먹고 마시고 즐기자고 하였다. 주님은“그런데 오늘 밤 하나님께서 네 영혼을 부르시면 네 가진 그 모든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물으셨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 보면,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살전5:3-7)고 하였다. 이 좋은 계절, 예레미야의 말씀과 함께 승리하는 신앙생활의 나날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