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섬기라(창50:20-21, 엡6:1-3) 2019. 5. 12 어버이주일
사회적으로는 5월 8일이 어버이 날이었다. 그러나 교회는 매년 오월 둘째 주일을 어버이 주일로 지킨다.
어머니 아버지에게 어떻게 해 드리는 것이 효도라고 생각하는가.
아들딸에게 기대하는 부모의 기대는 뭐라고 여기는가.
아들과 딸로서, 사위와 며느리로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부모가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하고 감사해하고 만족스러워하는 자녀의 모습이라고 여기나.
아담과 하와는 저들을 낳은 부모가 없었다. 아담과 하와를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의 아버지이시다. 그러면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아버지께 효도하였나.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였나.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효도의 측면에서 보면 아담과 하와는 불효한 것이다. 패륜하게 산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의 기대와 명령과 뜻을 거역하고 불순종하여 타락했으니 말이다.
가인은 그의 아버지인 아담과 그의 어머니인 하와에게 효자였나. 하나님께 제사 드린 후에 동생 아벨을 쳐 죽인 가인은 부모의 가슴에 피눈물이 흐르게 한 못된 자식이다.
노아의 세 아들들 중에서 함은 아버지의 저주를 받고 샘과 야벳은 아버지의 축복을 받았다. 그 이유가 뭔가. 아버지의 부끄러움과 약점을 덥고 숨기고 가릴 줄 알았던 두 아들 샘과 야벳이 복 받은 아들이요 떠벌인 아들 함은 저주 받은 아들이었다.
이삭의 쌍둥이 아들인 에서와 야곱은 둘 다 효자인가. 아니면 누가 효자인가. 둘 중의 하나는 효자가 아니라면 왜 그런가. 우리가 아는 성경 내용으로 하면 동생 야곱은 효자였으나 장남인 에서는 불효자였다. 창세기 26장 35절에 보면 에서는 아버지 이삭과 어머니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거리였다. 에서는 나이 사십에 결혼하였으나 부모의 뜻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기대에 벗어나는 결혼을 하였다. 에서는 하나님을 모르는 헷 족속의 여성들 중에서 유딧과 바스맛이란 두 여인을 아내로 맞아 들였고 이와 같은 행동들은 아버지 어머니에게 근심이 되었다.
사무엘 상 2장에 등장하는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장차 아버지의 대를 이어야 하는 제사장 후보였다. 그러나 저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하였고 제물을 함부로 대했다. 엘리의 두 아들들의 악한 행실은 그 소문이 파다하였다. 심지어는 회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과 동침하기도 하였다. 무례하고 부끄러운 소문을 전해 들은 늙은 아버지 제사장 엘 리가 두 아들들을 책망하였지만 홉니와 비느하스는 못들은 체 하고 날이면 날마다 못된 짓을 찾아다니며 행했다. 아버지 엘리는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심판히시려니와 만일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그를 위하여 간구하겠느냐”고 책망하였다. 그러나 두 아들들은 도대체가 아버지의 꾸지람과 훈계를 들으려고 하질 않았다.
사무엘 상 2장 12절에 보면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고 하였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패륜아요 불효자였다. 그러나 한나를 통해서 태어난 아들 사무엘은 역사적인 효자요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인물이었다.
초대 임금 사울은 하나님께 불경스럽던 왕이요 하나님이 사울을 왕 삼은 것을 후회스러워하신 자요 다윗은 하나님이 마음에 합당하게 여기고 마음에 쏙 들어 하던 자였다. 사울과 다윗의 그런 모습은 저들의 부모가 살아 있었다면 저들의 부모가 아들을 바라 볼 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자, 그러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부모에게 효도하며 살아가는 것일까. 십계명 중에서 제 오계명인 출애굽기 20장 12절에 보면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하였다.
창세기 50장의 본문의 주인공은 요셉이다. 요셉은 야곱에게서 태어난 열 두 아들들 중에서 열한 번째 아들이다. 야곱이 총애하던 부인 라헬을 통해서 뒤 늦게 태어난 아들이 요셉이다. 요셉은 17살에 애굽으로 팔려 갔다. 노예 신세가 된 것이다. 그것도 남들이 아닌 열 명의 배다른 형들에 의해서 팔려 가게 되었다. 요셉을 애굽에 팔아 버린 열 명의 형제들은 아버지 야곱을 속였다. 요셉이 들짐승에 찢겨 죽었다고 속였다. 야곱은 열 아들들의 보고를 믿었다. 그런 상태로 감쪽같이 속으며 긴긴 세월을 살아갔다. 이 열 명의 아들들은 효도는커녕 아버지 야곱을 속인 못된 아들들이다.
그런 요셉이 노예의 땅 애굽에서 13년 동안이나 노예 생활을 한 후에 바로 왕의 총애를 받는 총리대신으로 출세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 요셉은 노예로 팔려 가기 전에 어머니를 잃었다. 어머니 라헬은 베들레헴의 길가에서 동생 베냐민을 낳다가 숨졌다. 아버지 야곱은 사랑하던 부인 라헬의 시신을 베들레헴의 길가에 장사지냈다. 라헬의 죽음은 요셉의 아버지 야곱과 아들 요셉에게 큰 슬픔을 안겨 주었다. 요셉의 동생 베냐민은 어머니 라헬의 젖을 한 모금도 먹어 보지 못하고 유모의 품에서 자라나야 했다.
그런 환경에서 십대 후반을 보내고 이십대를 다 보낸 노예 신세의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풍년 칠년을 통치하고 난 후에 애굽과 그 주변 국가들마다 혹심한 가뭄과 기근이 덮쳤다. 그 이태 후에 요셉은 늙은 아버지 야곱과 재회할 수 있었다. 그 때 야곱의 연세는 130살이었다. 요셉은 고센 땅에 아버지 야곱과 70여 형제들과 형수들과 조카들을 정착시켰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여생 17년 동안 최선을 다하여 공경하고 효성을 다하였다. 죽은 줄 알았던 아들 요셉을 다시 만난 아버지 야곱은 147살에 눈을 감기까지 꿈과 같은 세월을 지내며 아들의 공경을 받았다.
야곱의 아들 요셉은 효자였다. 아버지 야곱의 장례가 끝 난 후에 보복을 두려워하는 형제들에게 한 말이 창세기의 오늘 본문이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넉넉한 마음을 갖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주변 사람을 품고 용서와 화해의 삶을 가꾸며 살아가던 효자 요셉의 마음을 대하게 된다.
모처럼 시내 광화문 교보빌딩 외벽에 붙은 대형 글판의 시를 보았다.
그래도 살아 봐야지
너도 나도 공이 되어
쓰러지는 법이 없는 둥근 공처럼
이 시의 출처는 정현종(1939-) 시인이 1991년에 발표한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에 나오는 대목이다. 창세기의 요셉이 바로 그런 주인공으로서의 생을 살았다. 효자 요셉 그는 우리에게 어떻게 부모를 대하며 살아가야 효자 효녀 인생이 된다고 교훈하고 있나.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으라.
노예로 팔려간 요셉에게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는 동행의 은총이 아니었다면 형제들에 대한 증오와 분노로 인해서 화병이 나고 말았을 것이다. 긴긴 세월 형제들에 대한 복수의 칼만 갈면서 지냈다면 요셉은 노예 생활 중에 폐인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요셉은 최악의 운명을 최선의 결과로 역전시킨 인생 승리의 주인공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연극의 한 장면처럼 다시 만나게 된 아버지 야곱과의 재회를 통해서 아버지 야곱에게 효도할 기회를 얻고 아버지 야곱에 하나님 품 안으로 돌아가시기 까지 공경을 다하는 효자 요셉으로 살아갔다.
자신의 단을 일어서고 형들의 단은 자기의 단에게 절하던 꿈을 이야기 했던 요셉이다. 해와 달과 열한 별들이 자기의 별에게 절한 꿈을 꾸고 자세하게 이야기하던 순진한 요셉이었다. 두 번의 꿈 이야기 후로 요셉은 형제들에게 미움과 시기를 받아야 했다. 그렇지 않나. 인간관계라는 것이 서로 잘 되면 모르지만 나는 군계일학(群鷄一鶴)처럼 우뚝 솟은 자가 되고 당신들은 나를 우러러 보고 시중드는 자가 될 거 라고 말한다면 그 어느 누가 좋아 하겠는가.
그런데 하나님은 요셉의 그 꿈을 그대로 이루어지도록 함께 하셨고 하나님은 요셉을 이방 땅 애굽에서 존귀하게 높여 주셨다.
요셉의 꿈 이야기가 나오는 곳은 창세기 37장이다. 그 이후로 창세기 마지막 장인 50장까지 긴긴 내용의 주인공은 요셉이다. 요셉의 이야기는 그의 증조부인 아브라함의 이야기보다 더 많은 분량으로 소개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증손자인 요셉의 때에 가셔서 창성하게 이루어 가셨다.
부모에게 공경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길이 무엇인가. 평생을 부모 곁을 떠나지 않고 매끼니 식탁을 차려 드리고 수족이 되어 드리며 그림자처럼 아버지 어머니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효자 효녀의 삶인가. 물론 부모 곁에서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좋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때나 요셉의 때나 오늘 날이나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효자 인생 효녀 인생으로 살아가는 것인가.
요셉은 불운하게 주어진 노예의 땅에서 매 순간마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의 은총 가운데서 살아갔다. 창세기의 요셉의 생애를 다루는 본문에 보면 가장 반복해서 자주 소개되는 표현이 이것이다. 그 중에 한 곳을 보자. 창세기 39장 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라는 말씀이 그것이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는 증거와 열매와 결과는 어떠하였나. 창세기 39장 5절 중간을 보라.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부모의 편에서 보면 효자 효녀로 살아가는 첩경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인생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주께 구해야 한다. 내가 내 힘으로 살려고 발버둥치는 것 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한다. 물론 노력해야 하고 물론 열심히 살아야 하고 물론 전심전력해야 하는 것 맞다. 그러나 내 수고와 노력과 땀과 눈물 외에 그 분이 부어 주시는 전적인 은혜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는 전적은 은혜를 덧입을 수 있었던 주인공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창세기의 주인공인 요셉이 아닌가.
반대로 부모 입장에서 아들딸 사위며느리 손자 손녀를 대하는 바람과 기도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인생,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가문으로 살아가야 효도도 가능하고 공경도 받을 수 있고 자식들로 인하여 웃고 만족해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이 없고 무자식이 상팔자”란 식으로 세상을 살아서야 되겠는가. 시편 127편 3-5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의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그들이 성문에서 그들의 원수와 담판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이런 아들딸로 양육하여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자식들로 인하여 공경 받고 효도 받는 은총을 누릴 수 있기를 축원한다.
위로자의 삶을 살아가라.
자식이란 것이 자기 혼자 성공하고 자기 혼자 출세하고 자기 혼자 잘된 후에 형제자매들 간에 의리 끊고 내왕하려 하지 않고 형제자매 간에 등 돌리고 혼자만 잘 먹고 잘 살고 자기 배 뚜드리며 이기적으로만 살아가려 한다면 그런 아들, 그런 딸, 그런 사위 며느리를 제대로 된 자식들이라 할 수 있을까.
요셉의 심성, 요셉의 됨됨이, 요셉의 마음가짐, 요셉의 너그러움, 요셉의 인생관, 요셉의 하나님 신앙이 돋보이는 장면이 오늘 본문이다.
열일곱 살 때에 도단 성 들판에 형들 면회 갔던 자기를 결박하여 빨가벗기고 애굽에 노예로 팔아 버린 열 명의 형들을 22년 만에 만난 것이다. 그리고 17년 세월이 흘렀다. 아버지 야곱이 살아가신 나머지 17년의 말년 동안 요셉은 70여 가족들을 고센 땅에 장착시켜 거대한 목축 산업을 발전시키도록 배후에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아버지 야곱이 돌아가시고 장례가 끝난 후에 불안과 두려움과 초조한 마음을 갖고 요셉이 보복할까봐 경계하는 마음을 가졌던 형제들에게 한 말이 창세기 50장 20절과 21절이다. 다 같이 한번 소리 내서 읽어 보자.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효자효녀다운 인물이 누구인가. 주변 사람들에게 그가 가족이든 그 어떤 이웃이든 위로자의 삶을 살아가는 이가 진정한 이 땅의 효자효녀가 아닐까. 보복하고 갑질하고 과거청산 운운하며 시시 콜콜 상대편의 먼지까지 탈탈 털다가 끝나는 그런 인생이 아니라 품어주고 안아주고 덮어주고 가리어 주며 격려하고 용납하며 어미 닭이 새끼 병아리를 품듯이 너나 나나 품고 살아가는 것이 위로자의 삶이 아닌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런 위로자의 삶을 사셨고 죄와 사망을 이기신 부활의 첫 열매되신 것처럼 말이다.
우리 모든 요셉과 같은 그런 위로자의 마음으로 그런 가정, 그런 교회, 그런 성도 관계, 그런 일터, 그런 세상을 가꾸어 가자. 그것이 제 부모라도 기뻐할 자녀의 넓은 마음이 아니겠는가.
잘되고 장수하리라.
하나님은 부모에게 공경할 줄 아는 자녀의 후손들이 잘되고 장수하리라고 언약해 주셨다. 십계명에서는 부모에게 공경하면 하나님이 네게 주신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하였다. 에베소서 말씀에서는 “이로써 네가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리라”고 하였다.
잘되고 장수하고 싶어서 제 부모에게 잘하려는 것은 심히 타산적이다. 그러나 여하튼 부모에게 공경하고 순종하며 제 부모를 잘 섬기고 모실 줄 아는 자손들은 이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리라고 하였다.
명심보감에 보면 효에 대한 여러 교훈이 나온다. “효는 백행의 근본이라”고 하였다. 가정에서 제 부모에게 효도할 줄 아는 자녀는 세상에 나가서도 주변 사람들을 대하는 상하좌우 예절에 있어서 복되기 마련이라고 하였다.
효자의 부모 섬기기란 (부모와 같이) 거함에는 자신의 공경함을 다하고,
(부모) 봉양함에는 자신의 즐거움을 다하고,
(부모가) 병이 드시면 자신의 근심을 다하고,
(부모의) 상중에는 자신의 그 슬픔을 다하고,
(부모의) 제사를 지낼 때에는 그 엄숙함을 다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孝子之事親也
居則致其敬
養則致其樂
病則致其憂
喪則致其哀
祭則致其嚴
명심보감에 나오는 태공의 가르침에는
“부모에게 효도하면 자식이 또한 효도하나니,
자신이 이미 효도하지 않았다면 자식이 어찌 효도를 하겠는가”
(太公曰, 孝於親, 子亦孝之, 身旣不孝, 子何孝焉)
라고 하였다.
예수도 효자였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사도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였다. “요한아 네 어머니라”고 말하며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어머니 마리아의 여생을 사도 요한에게 부탁하였다.
그렇다. 성경은 신구약 곳곳(15곳)에서 부모 공경을 강조하고 있다.
출애굽기 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출애굽기 21:15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찌니라.”
출애굽기 21:17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찌니라.”
신명기 5:16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한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신명기 27:16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잠언 1:8-9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사슬이니라.”
잠언 4:1 “아들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명철을 얻기에 주의하라.”
잠언 13:1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의 훈계를 들으나 거만한 자는 꾸지람을 즐겨 듣지 아니하느니라.”
잠언 15:20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즐겁게 하여도 미련한 자는 어미를 업신여기느니라.”
잠언 19:26 “아비를 구박하고 어미를 쫓아내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며 능욕을 부르는 자식이니라”
잠언 23:22 “너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
잠언 23:25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잠언 30:17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
에베소서 6:1-3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골로새서 3:20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윤춘병(1918-2010)작사, 박재훈(朴在勳, 1922-)작곡의 ‘어머님 은혜’라는 노래는 원래 찬송가였다. 올해 98세인 작곡가 박재훈은 캐나타 토론토 큰빛교회 원로 목사이다. 그는 젊어서는 영락교회 장로였다. 한양 음대 교수였다. 1973년에 미국을 거쳐서 캐나다에 정착해서 오늘날까지 100수세를 하며 1942년부터 오르가니스트, 작사, 작곡 등 음악활동을 하고 있는 원로 목사이다. 창작 오페라인 ‘손양원’도 그의 작곡이다. 그의 9남매가 모두 다 예수 잘 믿었다. 세 형은 감리교 목사였다. 자신만 60대에 들어서서 캐나다에서 장로교 목사가 되었다. 고향인 강원도 김화에서 서울에 유학하여 배화여고에 다니던 큰 누나가 집안에서 가장 먼저 복음을 영접하였다. 그 후에 복음을 받아 들인 이름도 없이 살던 어머니에게 여선교사라 루시(Lucy)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룻(Luth)을 그렇게 발음한 것이다. 문성모 목사의 <작곡가 박재훈 이야기>라는 책에 보면 박재훈은 어려서부터 교회에 드나들며 아버지의 명령으로 교회 청소를 하고 학교에 갔다. 그 때 풍금인 오르간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그의 집안은 친인척을 포함해서 50여명 이상의 목사를 배출한 집안이다.
2만 여 점의 기독교 사료를 수집하고 정리하고 편찬한 역사학자이기도 한 윤춘병은 93세를 장수한 존경 받는 감리교 목사로 초대 감독을 지냈다. 윤춘병은 27살 때 해방을 맞았고 평남 중화군에서 공산당을 피해 월남했다. 30살 때 말라리아로 죽을 뻔했다. 그 때에 고향의 어머니를 그리며 쓴 시가 이 찬송의 가사이다. 1953년 어린이 찬송 99장이었다.
윤춘병 목사는 생전에 인터뷰에서 “투병 중 환상 속에 하루에도 수십 번씩 고향길을 오갔다. 고향을 떠나던 날 어머니가 우시면서 ‘이제 가면 언제 오냐’고 하셨던 기억이 아른거렸다”고 했다. 그는 “이런 생각 속에 창밖을 떠가는 구름을 보며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을 하지만 나는 나는 높은 게 또 하나 있지’라는 시를 써 주님께 감사하는 내용을 담았다”고 회상했다.
이 노래가 교과서에 실리면서 기독교 색채가 짙은 3절을 문교부 담당자가 없애 버렸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올해 5월 언론이 그 사실을 발굴하여 사라졌던 3절 가사를 언론에 공개하였다.
넓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
나는 나는 더 높은게 또 하나있지
낳으시고 기르시는 어머님 은혜
푸른 하늘 그보다도 높은 것 같애
넓고 깊은 바다라고 말들 하지만
나는 나는 더 넓은게 또 하나있지
바람 이르시는 어머님 은혜
푸른 바다 그보다도 넓은 것 같애
산이라도 바다라도 따를 수 없는
어머님의 그 사랑 거룩한 사랑
날마다 주님 앞에 감사드리자
사랑의 어머님을 주신 은혜를.
부모 살아 계실 때 공경을 다하고 이 땅에서부터 잘되고 장수하는 복을 자자손손 누리는 복된 은총의 가정들이 모두 다 되길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