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살아가라(약4:7-17) 2019. 4. 28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시고 부활 승천 하신 이후에 20여년 세월이 흘러갔다. 성령 강림으로 시작된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성도들 중에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임 당하는 핍박을 기점으로 적지 않은 기독교 유대인 신자들이 이스라엘의 국경을 넘어서서 처처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미 그 이전부터 여러 나라, 여러 도시,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 중에서 뒤 늦게 예수 부활의 복음을 받아 들이기 시작하는 이들도 있었다. 로마 지역 처처에 흩어져 살던 성도들은 그 당시 예수를 믿으며 살아가기 위해서 온갖 시험과 시련을 극복해야만 했다. 그래서 1장에서 언급한 것이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한 것이다.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지혜가 부족하면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 그 당시 유대인들 중의 개종자인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이 도시 저 도시를 찾아 다니며 돈을 버는데 열심이었다. 교회에 모여서는 서로 덕을 세우기는커녕 싸우고 다투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너무 세속화 되어서 세상 정욕으로 싸우고 다투고 심지어는 살인하기도 하였다. 서로 시기하고 다투고 싸우며 지냈다. 세상과 벗하고 하나님을 믿기는커녕 하나님을 멀리하며 하나님이 원수시 하실 일만 골라 하듯이 교회와 성도들이 신앙상태가 병들어 가고 있었다.
그러한 때에 예루살렘교회들의 감독이며 예루살렘교회의 담임 목사이며 마리아가 요셉을 통하여 낳은 예수의 친 동생들 중의 한 사람인 야고보가 열방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생활의 변화와 성숙을 촉구하는 공개서한을 보낸 것이 야고보서이다.
야고보는 하나님을 믿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령의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어떻게 받아 누리며 살아갈까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다. 야고보서 4장 5절에 보면 “하나님은 믿는 자들의 마음 속에 성령이 거하게 하신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더욱 큰 은혜”를 주신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 반면에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신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풍성하게 덧입고 누리며 살려면 어떤 신앙 태도로 살아야 할까.
평소에는 작게 3가지 대지로 본문을 대하고는 하는데 오늘은 무려 10가지 대지를 묵상할 것이다. 그래서 인쇄물을 준비한 것이다. “이렇게 살아가라.”는 제목으로 묵상하겠다.
1. 하나님께 복종하라.
여기서 복종하라는 말은 ‘순복하라’는 말이다. 자신을 겸손하게 하여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순종하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을 자신의 위에 모시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복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이는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전적으로 온전하게 자신을 맡기고 위탁하는 삶의 태도를 말한다. “하나님께 복종하라”고 말씀한 후에 곧 이어서 “마귀를 대적하라”는 이유가 있다. 그 당시에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정욕에 따라 살아가는 이들이 교인들 중에 적지 않았다. 하나님께 복종하며 살아가는 구체적인 증거로 “마귀를 대적하라”는 말씀이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하루를 살아가면서 별의 별 마귀의 유혹과 시험에 노출된 일상을 살아간다. 보는 것, 듣는 것,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그 모든 것이 마귀의 시험 앞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기도하는 태도로 긴장되게 살지 않으면 “섰다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말씀 그대로 직격탄을 맞아 죽을 수도 있다. 그 내용은 야고보서 4장 1절에서 4절까지에 나와 있다. 사람은 자기 자신 안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말미암아 끊임없는 싸움과 다툼이 마음속에서 일어난다. 이런 심각한 신앙 생활의 괴리 현상을 야고보는 “간음한 여인들아”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이것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세상을 벗하며 살아가는 세속화의 실상을 고발한 말씀이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이렇게 주일 날 차려 입고 예배드리지만 교회 문 밖에 나서면 얼마나 많은 유혹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영혼이 우리 중에 단 한 사람이라도 있나. 여기서 말씀하는 ‘마귀’즉 ‘디아볼로스’(διάβολος)는 ‘고소자’ 혹은 ‘중상자’를 말한다. 중상 모략하는 모습이 내 속에 있으면 솔직히 시인해야 한다. “아 내 속에 남을 중상 모략하는 마귀가 자리 잡고 있구나.”하고 자신의 영적 실상을 적나라하게 내어 놓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매 순간마다 마귀를 대적하는 영적 전쟁의 승리자들이 되어야만 한다. 신자는 매 순간 하나님께 복종하는 신앙 자세를 지켜 나가지 않으면 어느 순간에 마귀가 와서 나를 넘어트릴지 모른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벤전5:8-9)고 하였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길은 매 순간마다 마귀를 대적하는 길이다.
2.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마귀를 대적하는 길은 곧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길이다. 생각하여 보라. 하나님을 멀리 할 때에 마귀가 그 영혼을 가만히 두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하셨다. 40일째 되는 날 마귀가 나타나서 예수를 시험하였다. 40일을 금식하며 기도하였는데도 마귀가 곁에 붙어서 시험하려 하였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시험하려고 하였다. 하물며 우리 같은 인간들이야 마귀가 가만히 두겠나. 끊임없는 불같은 시험 앞에서 마귀를 대적하는 길은 매 순간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길 밖에는 없다. 숨을 멈추면 죽듯이 매 순간 호흡하듯이, 맥박이 뛰듯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여야 한다. 4절에 보면 “세상과 벗된 것은 하나님과 원수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렇지 않나. 세상과 친구 되어 세상과 짝꿍이 되어 살면서 하나님을 가까이 한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다.
이스라엘 초대 임금 사울이 말년에 그렇게 하나님을 속이고 선지자 사무엘을 우습게 여기다가 불행하게 생을 마치지 않았나.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는 법이다. 하나님은 나의 생각과 느낌과 판단과 의지와 계획과 의도와 범사를 낱낱하게 아신다. 여기 9절의 ‘가까이 하라’는 ‘엥기사테’라는 단어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상태에서 지금의 세속적인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하는 삶을 살아가라”는 명령이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은 “더욱 큰 은혜를 주신다.”(6절) 하나님을 멀리하면 멀리할수록 교만해 지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가까이 할수록 겸손해지는 것이 신앙이다.
아삽의 시편인 시편 73편 28절에 보면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고 하였다. 내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도 나를 가까이 해 주신다.
3. 손을 깨끗이 하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고 세상을 벗하며 살아가는 이들을 '죄인들아'라고 하였다. 그러면 죄인인 상태에서 그 죄를 해결 받는 길이란 무엇인가. 손을 깨끗이 하여야 한다. 살인, 간음, 도둑질 하던 이들은 그 죄악으로부터 손을 씻고 깨끗하게 하여야 한다. 이것이 회개이다. 가령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기 원하는 것이 귀한 소원이요 바람일지라도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손을 깨끗이 하듯이 버려야 할 것들이 있다. 갈라디아서 5장 19절에 보면 그러한 것들을 ‘육체의 일’이라고 하였다.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갈5:19-21)고 하였다.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5:21하)라고 경고하였다.
지금 죄악에 빠져 사는 것이 분명한데 그 죄와 악으로부터 손을 깨끗이 하는 구체적인 회개를 하지 않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위선이요 거짓인 것이다.
4.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야고보서의 말씀은 명확하다.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그리고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씀하는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이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척 하면서 세상을 가까이하고 ‘세상과 벗’(약4:4)이 되어 사는 이중 생활을 말한다.
그렇지 않나. 만약에 여러분의 남편이나 아내가 자기 아내를 사랑하고 자기 남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 몰래 혹은 아내 몰래 외갓 여자와 딴 살림을 차리고 살고 딴 남자와 몰래 만나면서 산다면 그런 것이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의 상태이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4절에서 ‘간음한 여인들아’라고 심한 표현을 써가면서 이런 경고의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간음한 여인들’이란 말은 그런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제 맘대로 세상을 짝하며 살아가는 자유 분망한 상태’를 고발하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영적 신부로 맞이하셨다. 이사야 54장 5절에 보면 “너를 지으신 이가 너의 남편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그들이 여호와께 정조를 지키지 아니하고 사생아를 낳았으니”(호5:7)라고 고발하셨다. 하나님을 떠난 상태가 음행이라고 하셨다. “네가 음행하여 네 하나님을 떠나고”(호9:1)라고 지적하셨다. 그러므로 두 마음을 품은 영적 간음 상태에서 회개하고 손을 깨끗이 하고 돌이켜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는 명령이시다.
5.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라.
9절에 보면, ‘슬픔, 애통, 울음, 근심’ 그리고 반대로 ‘웃음, 즐거움’이란 다양한 감정들을 묘사하는 표현들이 나온다. 우리가 자칫 잘못 생각하면 아니 웃고 즐거워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 왜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라고 말씀하실까 라고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야고보가 이렇게 교훈하는 이유가 있다. 그 당시에 이미 초대 교회의 열방에 흩어져서 살아가던 신자들이 겉으로는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척하면서 너무나도 세상과 벗하고 살아가는 정욕과 욕심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야고보서 4장 1-3절에서 “싸우는 정욕, 구하여도 받지 못하는 정욕”의 실상을 고발하면서 죄인의 상태에서 회개하여 손을 깨끗이 하고 두 마음을 품은 영적 간음으로부터 벗어나서 ‘마음을 성결’하게 하는 새사람의 삶을 살아가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세상과 벗하고 살면서 세상의 죄악을 즐겨 하면서 시시덕거리는 그 헤픈 웃음과 정욕의 즐거움으로부터 벗어 나기 위하여 슬퍼하고 애통하고 울라는 회개의 촉구이다.
‘슬퍼하라’는 말씀은 “매우 비참하게 슬퍼하라”는 회개의 촉구이다.
‘애통하라’는 말씀은 “회개의 슬픔을 억누를 수 없어 격앙된 상태”를 말한다.
‘울지어다’라는 말씀은 “복 바쳐 오르는 회개의 슬픔을 억누를 수가 없어서 큰 소리로 우는 그런 계속되는 울음”을 말씀하는 것이다.
웃음이 좋고 즐거워하는 것이 좋은 것이로되 “왜 내가 지금 슬퍼하고 애통해하고 울어야 하나” 하고 질문해야 한다. 슬퍼하고 애통해하고 우는 마음과 표정과 행동이 하나로 엮어진 상태의 진실한 회개를 일컫는 말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라는 초청은 자신이 빠져 있는 죄와 악으로부터 벗어 나기 위하여 진실한 마음으로 회개하라는 촉구이다.
한번은 예수께서 자신은 의롭다고 여기고 남들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18:10-14)
6. 주 앞에서 낮추라.
10절의 ‘주 앞에서 낮추라’는 ‘낮추라’는 의미는 6절의 ‘겸손한 자’와 같은 어원이다. 야고보는 6절부터 긴 교훈의 말씀을 10절에서 매듭짓고 있는 것이다. 늘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는 삶을 살아갈 때에 오히려 주께서 그를 높이시리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교훈은 신구약 성경 전체에 흐르는 중요한 사상이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을 붙들어 쓰신다. 겸손한 사람에게 큰 은혜를 부어 주신다. 예수께서는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 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라라.”(눅14:11)고 하셨다.
고린도후서 11장 7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한 없이 낮아지는 길을 선택했던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삶을 간증하고 있다. “내가 너희를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고후11:7)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상대방에게 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스스로 조심하고 또 조심하리라.”(고후11:9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인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임 당하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겨 주시면서 섬기는 자의 생활을 교훈하셨다. 제자들의 발을 다 씻기신 후에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13:15),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요13:17)고 말씀하셨다.
7. 남을 비방하거나 판단하지 말라.
다른 사람을 비방하거나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야고보서 4장 1-2절의 말씀처럼 이에서 싸움과 다툼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남을 비방하는 것은 곧 율법을 비방하는 죄된 행위라는 것이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는 것이 레위기 19장 18절에 나오는 계명의 말씀이다. 신약의 교훈이 아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의 그 어떤 모습이든지 사랑하고 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 함부로 비방하는 것은 자칫 율법을 범하는 죄를 짓게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남을 비방하는 것은 율법을 비방하는 것이고 남을 판단하는 것은 율법을 판단하는 잘못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또 하나 12절에 보시면 형제자매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심각한 죄악이라고 했다. 12절 말씀을 보라.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다. 하나님 만에 능히 인간을 구원하시기도 하고 멸하시기도 하신다. 그러므로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는 말씀에 귀 기울여야만 한다. 특히나 교회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된 성도들 간에 서로를 비방하거나 함부로 판단하는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심각한 죄란 말씀이다. 서로의 부족이나 아쉬움이나 못 마땅한 면이 있으면 잘 참고 용납하며 상대방을 위하여 진심으로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 내가 그 누구이든지 함부로 비방하거나 판단하는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다.
8. 유한한 존재임을 알라.
13절에 ‘들으라’는 표현은 심각한 도전의 말이다. 야고보가 오죽 답답했으면 이런 표현을 썼겠는가. 양심이 화인 맞아서 회개하지도 않고 너무나도 세상을 짝하며 하나님을 멀리하고 세속화 되어서 세상적인 죄와 악에 빠져서 웃고 즐거워하는 그 웃음과 즐거움은 마치도 아버지의 유산을 서둘러 받아가지고 남의 나라에게 가서 주색잡기 즐기며 허랑 방탕하는 둘째 아들의 일상과 같은 모습을 말한다. 그런 세상과 벗하고 하나님과 원수 되어 사는 생활에서 벗어나란 말씀이다. “어떤 도시에 가서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고 말하는 상업 행위를 예로 들었지만 세상에는 그 외에도 수 만 가지 아니 수 십 만 가지의 별의별 직업이 다 많다. 그 바탕은 경제 행위가 목적이다. 쉽게 말하면 돈 벌려고 별의 별 직업을 다 택한다. 별의 별 일을 다 한다.
이것은 그 당시의 심각한 교회의 타락 현상이요 성도들의 변질되어 가는 모습이었다. 교회 안에서는 서로 비방하고 판단하며 세상에 나가서는 마냥 돈돈돈돈 하며 살아가는 세속화를 경계하고 경고한 말씀이다. 경제 활동, 경제 생활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경제 활동해야 한다. 돈 벌어야 한다. 그러나 이걸 반드시 기억하라는 말씀이다. 14절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며칠 전에 이런 내용의 간증을 접했다. 200억을 5만 원 권으로 묶어서 지하실에 차곡차곡 쌓아 두었다. 그런데 관리를 잘못해서 다 썩었다. 그 상태가 심각해서 은행에서 신권으로 바꾸어 줄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이것이 인간의 탐욕이다.
또 어떤 이는 400억 부자인데 어느 날 건강 검진을 했더니 폐암 말기라고 했다. 폐에 직경 7CM 암 덩어리가 발견되었다. 급해진 마음에 어느 큰 교회의 목사를 찾아가서 200억을 헌금 할테니 내 병 좀 고쳐 달라고 애원하였다고 한다. 병이란 것이 그렇게 흥정해서 고쳐지고 14절의 ‘생명’이란 것이 그렇게 돈을 주고 사고 팔수 있는 것인가. 인생은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은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원한 것이다.
주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9. 허탄한 자랑을 하지 말라.
그러므로 주의 뜻을 구하고 허탄한 자랑을 하지 말아야 한다. 자랑이란 것이 다 악한 것이기 때문이다. 15절의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는 말씀은 하나님을 떠나서 스스로 자기의 계획과 욕망을 따라서 살아가려는 교만한 태도를 말한다. 그러나 15절이 말씀하는 것은 “주의 뜻이면”하고 삶의 우선순위와 태도가 온전히 변화된 믿음의 사람다운 삶의 모습을 권면하고 촉구하는 것이다.
16절을 보라. ‘허탄한 자랑’이란 인생이 자기의 뜻대로 다 되는 것처럼 형통하고 잘 되고 잘 나가고 자랑할만하고 남들에게 으스대고 싶고 떵떵거리고 싶고 그래서 “난 말야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이렇게 잘 나가고 있잖아”이렇게 교만이 싹트고 어리석은 교만이 고개를 들 때에 야고보는 그런 인생들을 향해서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맞다. 그렇지 않나. 자랑이란 것이 모두 다 ‘허탄’한 것이다. 이 세상에 허탄하지 않은 것이 어디에 있나. 허탄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주를 찬송하고 주를 높이고 주 앞에 겸손하게 살아가야 한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 그대로이다.
486장 찬송 “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의 가사를 보라.
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참 평안을 몰랐구나
이 세상에 곤고한 일이 많고 참 쉬는 날 없었구나
이 세상에 죄악된 일이 많고 참 죽을 일 쌓였구나
내 주 예수
/날 오라 부르시니
/ 날 사랑하시오니
/ 날 건져 주시오니 곧 평안히 쉬리로다
주 예수의 구원의 은혜로다 참 기쁘고 즐겁구나
그 은혜를 영원히 누리겠네 곧 평안히 쉬리로다.
주께서 말씀하셨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10. 선을 행하며 살아가라.
하나님의 기대와 뜻을 벗어나 생각하고 말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추진하며 살아가는 그 모든 것이 악이다. 그러므로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살아가야만 한다. 17절 말씀을 잘 보라. 선이 무엇인지 악이 무엇인지 알고 구별하면서 선을 행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지도 알지만 그 알고 있는 것을 행하려 하지 않고 아는 상태로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죄라고 지적하였다. 선이 무엇인지. 선행이란 어떻게 하는 것인지 알면서도 그냥 그렇게 세월에 마음을 묻어 놓고 여전히 세상을 벗하면서 하나님을 멀리하고 오늘이나 내일이나 이 도시나 저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머물면서 장사해서 돈 좀 벌어야지 이익 좀 내야지 그런 모습으로 살다 보니 세월이 가고 늙고 내 배만 겨우 채우다가 눈을 감고 말 그런 인생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남대문 시장에서 자수성가하였고 지금은 큰 아들과 함께 안경 도매점을 운영하는 73세 이남림 씨는 2002년부터 남몰래 65억 원을 기부해왔다. 17년간 선행을 한 이 할아버지에게도 첫 기부는 쉽지 않았다고 한다. 인터뷰를 사양한 그는 "날마다 허리 구부리고 폐지 주워 1만원, 5000원 모아 기부하는 분들도 있다. 그분들이 나눔을 아는 사람들이고 진짜 훌륭한 분들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2002년 한반도를 강타한 태풍 루사를 보며 첫 기부를 결심했다. 과거에 자신의 지지리도 가난했던 기억이 도움의 손길로 이어진 것이다. 이남림씨는 1972년도에 살던 뚝방촌이 물에 잠겼다. 친척집에 잠시 하룻밤 새우고 그 다음날 나오니 다 잠기고 아무 것도 없었다. 숟가락 하나도 없었다. 진짜 몸뚱이 밖에는 남은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배고프고 슬펐다. 그런 그가 열심히 벌어서 지난 17년 동안 62억을 기부해 왔다.
물론 그분이 기부한 수 십 억 원은 마련했던 땅이 신도시 개발되면서 받은 토지보상금이다. 그는 "땀 흘린 돈이 아니고 쉽게 번 돈이기 때문에 내 돈이 아니다. 그래서 기부한 것이다. 욕심이 있었다면 다른 데 투자했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수 십 억 원을 기부할 때 가족과 자식들도 “아버지가 번 돈이니 아버지가 마음대로 하시라”고 하였다고 한다. “도움을 받은 그 누구이든지 다시 재난을 딛고 일어나서 열심히 살기를 바란다.”고 말하며 인터뷰를 마쳤다.
설교대지 뒷면에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1790)의 좌우명 13가지를 실었다. 그는 18세기 미국의 정치가·사상가·발명가. 미국 독립선언서 작성에 참여해 건국의 아버지로 일컬어진다. 전기에 관한 실험보고서와 이론은 유럽 과학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한 번도 과학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1757년에 정계에 발을 디딘 뒤 30여 년 동안 큰 족적을 남겼다. 정치가로서 프랭클린은 영국의 관리들과 토론을 벌일 때 미국 식민지의 대변인으로 활약했다. 독립선언서 작성에 참여했다. 미국 독립전쟁 때 프랑스의 경제적·군사적 원조를 얻어냈다. 2세기 동안 미국의 기본법이 된 미국 헌법의 뼈대를 만들었다. 미국 100불 지폐에 그의 초상화가 실려 있다.
그의 아버지는 비누와 양초를 만들어서 12명의 가족의 생계를 이어 갔다. 그는 초등학교를 1년 밖에 못 다녔다. 나중 개인 교습을 포함하면 2년의 교육이 전부였다. 그런 그는 미국 역사의 가장 위대한 인물 중에서 빼어 놓을 수 없는 인물이 되었다. 13가지 중에 맨 마지막 “예수와 소크라테스”를 본받으라고 하였다. 예수는 그 누구와 비교 할 수 없는 우리의 믿음의 주님이시다. 소크라테스는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 답을 찾게 하는 철학의 인물이다. “절제, 침묵, 질서, 결단, 절약, 근면, 진실, 정의, 중용, 청결, 침착, 순결”그리고 마지막 강조가 “겸손”이다.
야고보서 4장 6절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야고보서 4장 8절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도 나를 가까이 해 주실 것이다.”풍성한 은혜의 삶을 가꾸어 가는 아름다운 봄철, 부활 이후의 신앙이 되길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