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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사람의 고백(시116:1-9) 2024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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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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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4-09-18 22:28 조회 641 댓글 0
 

                   기도하는 사람의 고백(시116:1-9)          2024. 9. 15   

 

 

기도가 무엇인가. 국어 사전에 보면 “신이나 절대적인 존재에게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기를 비는 행위”라고 정의되어 있다. 그렇다. 인간의 문명 발전 역사가 놀랍지만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다. 질병과 사고와 사건 앞에서 무기력한 존재이다. 질그릇과 같다. 어려운 질병이 찾아 오면 왕이나 재벌이나 군대의 장군이나 젊은이도 미인도 속수무책이다. 현대의학이 아무리 발전했다고 해도 그렇다. 

 

우리는 열왕기 하에 등장하는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의 이야기를 잘 안다. 한센병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다. 전쟁 포로로 붙잡아다가 집안에서 허드렛일을 시키는 여자 아이가 “우리 나라의 엘리사 선지자를 만나면 나을 수 있을 텐데요”라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다. 엘리사가 고친 것은 아니다. 엘리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그를 고쳐 주신 것이다. 

 

기도가 무엇인가. 인간은 임신, 자녀의 출생, 학업, 결혼, 건강, 부와 번영, 명예와 권력, 인기와 형통 등을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한다. 지진, 홍수, 가뭄, 흉년 등 자연 재해로부터 보호 받기 위해서도 기도한다. 해와 달과 별 앞에 빈다. 바다에 용왕신이 있다고 믿고 빈다. 산에는 산신이 있다고 믿고 빈다. 큰 나무 앞에서 빌고 큰 바위 앞에서 빈다. 세상에는 미신이 많다. 우상 숭배도 심각하다. 성경의 역사는 바알 앞에 빌고 아세라 앞에 비는 우상 숭배를 심각하게 다루고 있다. 바알이나 아세라는 풍요와 다산의 복을 가능하게 해 주는 신이라고 믿고 비는 우상이다. 다 인간이 만든 우상이다. 

 

불교인들이 들으면 발끈할 수도 있지만 불상 앞에 합장하고 빌고 절하며 비는 것도 우상 숭배이다. 물론 석가모니의 깨우침이나 그 교훈들을 접해보면 교훈적인 내용이 많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인간이지 신이 아니다. 3,000배를 한다고 하는데 우상 앞에 3,000번의 절을 하는 것이 지성일 수는 있으나 인간이 만든 우상이 인간에게 무슨 대답을 줄 수 있는가. 갈멜산 정상에서 바알 숭배자들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이 한 나절이 다 가고 저녁 소제 시간이 다가 오도록 “바알이여 바알이여”하고 빌어도 대답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바알 숭배자들은 돌제단 위에 송아지를 각을 떠서 얹어 놓고 하루 종일 바알 앞에 빌었으나 아무 징조도 나타나지 않았다. 열왕기상 18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오늘 본문에 와서 보면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나이다.”라는 고백으로 말씀이 시작된다. 그렇다. 여호와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의 음성도 아시고 간구하는 내용도 들으신다. 2절 말씀처럼 하나님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백성들의 간구에 귀를 기울여 주신다. 3절의 말씀처럼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주께 간구하면 그 모든 형편에서 건져 주신다. 7절의 말씀처럼 하나님께 부르짖고 간구하면 하나님은 기도하는 주의 자녀들을 후대하여 주신다. 8절의 고백처럼 하나님은 주를 사랑하고 주를 섬기고 주를 믿고 따르는 주의 자녀들의 영혼을 사망에서 건져 주신다. 그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신다. 그 발을 넘어지지 않도록 보호하고 지켜주신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해를 받지 않도록 보호하시고 지켜 주시고 위험에서 건져 주신다. 16절에 보면,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를 결박으로부터 풀어 내 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를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믿고 경배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기도와 고백 가운데 살아가야 할까. 오늘 본문은 시편 116편의 기록자는 기도를 들어 주시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고백을 하고 있는가.

 


내가 그를 사랑합니다.

1절에 보면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라고 하였다. 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있나.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하고 부르짖는 자녀의 간구를 들어 주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시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신 동안에 교훈해 주신 기도에 관한 여러 가지 비유의 내용들을 우리는 잘 안다. 그 모든 기도를 주제로 한 예수의 비유의 반복되는 요지는 무엇인가.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기도를 들으신다”라고 가르쳐 주셨다. 산상수훈인 마태복음 6장 9절부터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라고 가르쳐 주신 기도의 내용이 담겨 있다. 우리는 그 기도의 내용을 <주기도문> 혹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라고 제목 붙여 말한다. 그 기도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삶을 살게 해 주세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삶을 살게 해 주세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주세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세요.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 준 것처럼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세요.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해 주세요.

우리를 악에서 구해 주세요.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하심을 믿는 믿음으로 살게 해 주세요. 

 

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성경 주석가들은 시편 116편은 아마도 다윗의 시편일것이라고 의견을 모은다. 우리가 아는대로 다윗은 남다른 고난과 시련과 역경을 이기며 하나님께 붙잡혀 쓰임받은 믿음의 사람이었다. 오늘 본문 1절에 담긴 그의 고백은 무엇인가.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이 아닌가.

 

오늘 날 우리는 어떤가. 나는 어떤가 말이다. 오늘 날 우리는 왜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오늘 날 나는 왜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사랑의 이유, 사랑의 원인, 사랑의 근거, 사랑의 원천이 무엇인가. 내가 오늘 날 하나님을 사랑하는 고백 속에 살아가게 하는 바탕이 무엇인가. 사랑이란 사랑을 입은 자가 사랑도 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이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달아 알고 나면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 가운데 살지 않을 자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나. 우리는 우주 삼라만상 가운데 나를 눈동자처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순간을 살고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 내가 잘 나서 이렇게 살아가는 건가. 아니다. 내 건강, 내 환경, 내 여건, 내 주변이 그 모든 것, 내 가족 관계, 나의 역량, 나의 지혜, 나의 지식, 나의 지능, 나의 재능, 나의 의지, 나의 판단 능력, 나의 그 모든 것이 내 스스로에 의한 것이 아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다.

 

장수 사회가 된 우리 나라의 노년기에 치매에 관한 내용이 큰 화두 중의 하나이다. 의학 사전에 찾아 보면 “치매란 후천적으로 기억, 언어, 판단력 등의 여러 영역의 인지 기능이 감소하여 일상생활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임상 증후군을 의미합니다. 치매에는 알츠하이머병이라 불리는 노인성 치매, 중풍 등으로 인해 생기는 혈관성 치매가 있습니다. 이 밖에도 다양한 원인에 의한 치매가 있습니다.”라는 설명을 대하게 된다. 의학적으로는 ‘뇌신경정신질환(dementia)’이라고 한다. 생각해 보라. 누가 그런 질환을 원하겠는가. 그러나 개인적인 차이가 있을 뿐 인간의 생로병사의 과정 중에 누군가는 피할 수 없는 생의 단면이 치매란 것이다. 사랑하는 가족도 알아 보지 못하고 점점 연약해져 가고 쇠약해져 가는 인간의 노화 과정을 지켜 보다가 보면 인간이란 존재가 참으로 연약한 존재구나 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과거에 미국의 제 40대 대통령을 지낸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1911-2004, 재위 1980-1989)도 알츠하이머로 인해서 나중에는 사랑하는 아내 낸시도 못 알아 봤다고 하지 않는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나중 7년간 점점 심해져가는 치매 증상을 겪어야 했다. 마지막까지 남편의 곁을 그림자처럼 지켰던 부인 낸시 레이건은 “치매와의 씨름은 암살보다 더 끔찍한 과정이다”라고 설명하였다. 낸시 자신도 70세에 유방 암으로 한쪽 가슴을 제거해야 했다. 52년간을 부부로 지낸 낸시는 남편 로널드 레이건의 마지막 투병 생활에 안정된 동반자의 길을 걸어 갔다. 낸시 레이건 여사는 남편을 하늘나라로 보낸 후에 이렇게 소회를 밝힌바 있다.

 

“따뜻한 동정심을 보여주신 많은 분들에게 저는 영원히 감사할 것입니다. 그리고 남편이 항상 부드럽고 겸손하며 친절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주신다면 여러분에게도 위로가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러한 축복을 내리셨고 저는 이에 대해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낸시 레이건 여사는 이런 고백도 했다. “어려운 시간을 이겨 내는 힘은 사랑과 감사였습니다.”일본의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 1894-1989)는 마쓰시다 전기의 창업자이다. ‘경영의 신’이란 별칭이 따라다니는 일본의 경제인들에게 특히 존경받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9살 때까지 소학교 다닌 것이 전부인 그는 화로 가게, 자전거 가게의 잔 심부름꾼으로 시작해서 일본 역사의 자랑스런 기업 마쓰시다 전기의 창업자로 우뚝 섰다. “감옥과 수도원의 공통점은 세상과 고립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면 불평을 하느냐, 감사를 하느냐 그 차이뿐이다. 감옥이라도 감사가 넘치면 수도원이 될 수 있다.”라는 마스시타 고노스케의 말이 후대에 전해진다. 맞다. 천국과 지옥의 차이는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로 나뉜다. 그리고 감옥과 수도원의 차이는 감사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다. 죄인들과 수도사들의 차이는 불평하느냐, 감사하느냐의 차이로 구분된다. 

 

이 세상에 사랑의 힘을 대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랑의 힘은 칼과 창의 힘보다 더 강하다. 사랑은 이 세상에서 만날 수 있는 최고의 힘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원천이시다.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다. 사랑이신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의 눈에 보이는 사랑으로 보내 주신 분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고백하지 않나.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입증한 인간으로 오신 현현(顯現)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몸을 입고 이땅에 오신 하나님 곧 그 분이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달아 알게 되면 될수록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는 고백 말고는 더 이상의 다른 고백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아주 많이요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그것뿐에요

 

사랑한다 아들아 

내가 너를 잘 아노라

사랑한다 내 딸아 

네게 축복 더 하노라

 

사랑의 고백을 누가 할 수 있는가. 사랑의 노래, 사랑의 찬송을 누가 부를 수 있는가. 사랑의 편지를 누가 쓸 수 있는가. 오늘 시편 116편의 기록자는 고백한다.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말이다. 날이 더하고 달이 더하고 해가 더할수록 점점 더 주님을 향한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과 깊이를 더해가는 사랑의 화신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내가 평생 기도합니다.

2절에 보면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라고 하였다. 시편 116편의 기록자는 알았다. 하나님은 그가 기도할 때에 귀를 기울여 주셨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 내가 평생 기도해도 하나님이 한 번도 들어 주시지 않는다면 그 누가 기도하겠나. 그러나 하나님은 기도하면 귀 기울여서 들어 주신다. 응답해 주신다. 하나님은 약속하셨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 ‘응답하겠고’란 ‘들어 주겠고’라는 약속이 아니신가. 

애굽에서 고난 당하며 노예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고통을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출애굽기 2장 23절에 보면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라고 하였다. 그 다음 절인 출애굽기 2장  24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라고 하였다. 맞다. 우리가 주께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귀를 기울여 들어 주신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예수의 비유가 있다.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라고 제목 붙여진 비유이다.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장이 있었다. 그 도시에 남편 없이 사는 한 여인이 자주 그 재판장을 찾아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세요”라고 부르짖었다. 날마다 계속 그렇게 하니까 나중에는 “이 여인이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어야 겠다.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이처럼 나를 괴롭게 하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예수는 이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눅18:7)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아버지께 부르짖어 기도하면 사랑의 하나님이 들어 주신다. 귀 기울여 주신다. 응답해 주신다. 우리가 찬양하지 않나 

 

“사랑합니다. 나를 자녀 삼으신 주. 사랑합니다. 나를 자녀 삼으신 주.

내 부르짖음 들으시고 감싸 주시는 영원히 주 찬양합니다. 내 삶을 다해”

 

이 좋은 계절에 걱정 근심 염려 불안 초조 두려움 낙담을 다 떨쳐 버리고 우리의 기도에 귀 기울여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 앞에 엎드려 간구하는 기도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한다. 

 

 

내가 여호와 앞에서 살아갑니다.

하나님 안에서 이러저러한 체험과 은혜를 누려온 시편 기자는 “내가 생명이 있는 땅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9절) 이는 하나님께서 보시는 앞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겠노라는 서원의 고백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서원하고도 잘 지키지 못할 때가 많다. 새해를 맞을 때마다 “송구영신 예배”시간에 얼마나 많은 것들을 하나님 앞에 서원하며 은혜를 구하며 한 해를 맞이하는가. 그러나 하루 하루 살아가다가 보면 그 서원한 마음가짐이 시들해 질 때가 얼마나 많은가. 시편 116편의 기록자는 분명한 믿음이 있었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시116:5) 6절에 보니까 “하나님은 순진한 자를 지키시나니 내가 어려울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라고 하였다. 부목사 시절에 다양한 분들을 만나 보았다. 의외로 잘 살고 많이 배우고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고 경제력을 가진 분들일수록 순진하고 어린이 같고 겸손하고 예의가 분명한 것을 보았다. 거들먹 대거나 교만하거나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깔보지 않고 상대방을 귀하게 여기고 인격적으로 대하고 존중하는 것을 자주 경험하였다. 

 

우리가 어렸을 적에 학교 선생님들이 많이 하신 말씀 중에“잘 익은 곡식이 먼저 고개를 숙인단다. 빈 수레가 요란한 법이란다. 쭉정이는 고개를 바짝 든 단다” 이런 평범한 교훈으로 우리들을 깨우쳐 주셨던 기억이 새롭다. 

 

시편 16편을 끝까지 읽어 보면 시편 기록자의 됨됨이를 면면히 접하게 된다.  8절을 다시 보자. 그는 사망 즉 죽음의 위기를 겪은 적이 있었다. 눈물로 세월을 보내야 했던  때도 있었다. 실패와 실수를 경험한 때도 있었다. 뜻대로 되지 않고 인생의 덫에 걸려서 넘어진 때도 있었다. 그러나 뒤를 돌아다 보니 하나님은 시시 때때로 그를 사망에서 건져 주셨다. 그의 눈의 눈물을 닦어 주셨다. 그를 수렁에서 건지시고 올무에서 벗어나게 해 주셨다. 10절에 보면 그는 크게 고통을 당한 적도 있었다. 11절에 보면 진실하지 못한 거짓말쟁이드롤 인해서 마음이 몹시 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뒤 돌아 보니 하나님은 때마다 일마다 그를 지키고 보호해 주셨던 것이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 제가 평생토록 주께 기도하며 살겠습니다.

주님. 제가 항상 코람 데오(Coram Deo)의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 보시는 앞에서 살아가겠습니다. 

 

라고 말이다. “한 걸음 한 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 걸어가리”(430장,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384장)이런 찬송을 늘 부르며 주님과 동행하고 주님 안에서 주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믿음의 승리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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